사변록(思辨錄)
육경(六經)의 글은 모두 요·순 이래 성현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서 조리가 매우 정밀하고 자세하며, 뜻이 깊고도 멀다. 정밀한 것으로 말하자면 털끌만큼도 어지럽힐 수 없고, 자세한 것으로 말하자면 미세한 것도 빠뜨린 적인 없다.
깊이를
헤아리고자 하나 그 밑바닥을 찾을 수 없고, 멀리 추구하고자 해도 끝간 데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진·한 시대로부터 수·당
시대에 이르기까지 갈래를 나누어 쪼개며 잘라내고 찢어발겨 마침내 대체(大體)를 훼절(毁節)한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이단에 빠진 자는 근사한 것을 끌어다가 간사한 말을 꾸며 대고, 옛 전적(典籍)만을 굳게 지키는 자는 고집스럽고 편벽(偏僻)되어
평탄한 길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어찌 부지런하고 간절하게 육경을 지어 말씀을 남긴 성현들이 천하 후세에 기대한 뜻이겠는가.
'중용'에
이르기를 "먼 곳을 가려거든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른바 깊은 곳은 얕은 데서부터 들어가고,
자세한 부분 역시 간략한 데서부터 미루어가며, 정밀한 경지 또한 거친 데서부터 차츰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육경을 탐구하는 자들은 대부분 얕고 가까운 것을 뛰어 넘어서 깊고 먼 데로만 치달리며, 거칠고 간략한 것은 소홀히 하고서 정밀하고
자세한 것만을 엿보고 있으니, 어둡거나 어지럽고 빠져 헤어나지 못하거나 넘어지고 말아 끝내 아무 소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저들은 비단 깊고 멀고 정밀하고 자세한 것을 잃을 뿐만 아니라, 얕고 가까우며 거칠고 간략한 것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니,
슬프다, 얼마나 미혹된 일인가. 무릇 가까운 것은 미치기 쉽고 얕은 것은 헤아리기 쉬우며 간략한 것은 알� 쉽고 거친 것은
터득하기 쉽다. 그 도달한 바를 딛고 한 발 멀리 가고 또 한 발 멀리 간다면 먼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며, 그 헤아린 바를
연유하여 차츰 깊게 들어가다 보면 마침내 깊은 끝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대저
귀먹은 이는 천둥과 벼락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눈먼 이는 해와 달의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자신의 신체적
장애로 인한 것일 뿐, 천둥과 벼락, 또는 해와 달은 의연히 그대로인 것이다. 천둥과 벼락은 천지에 굴러다녀 소리가 진동하고 해와
달은 고금에 비추어 빛이 찬연하니, 일찍이 귀먹은 이가 듣지 못하고 눈먼 이가 보지 못했다 하여 그 소리나 빛이 혹여 작아지거나
흐려진 적이 없다. 그러므로 송나라 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와서 마침내 해와 달같은 거울을 닦아내고 천둥과 벼락같은
북을 울리어 소리가 멀리 미치고 빛이 넓게 퍼지게 되자 육경의 뜻이 다시 세상에 환히 밝혀졌으니, 이제 지난 날의 편벽된 것들이
사람의 사려를 막을 수 없으며 근사한 것들이 명분을 빌 수 없게 되어 간사한 선동과 유혹이 마침내 끊어지고 평탄한 표준이
뚜렷해졌다.
그러나
경전에 실린 말은 그 근본은 비록 하나지만 그 가닥은 천 갈래 만 갈래이니, 이것이 이른바 "한 가지 이치인데도 백 가지 생각이
나오고, 귀결은 같을지라도 이르는 길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뛰어난 지식과 깊은 조예를 가졌다 해도 그 뜻을
완전히 알아서 세밀한 것까지 잃지 않기는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여러 사람의 장점을 널리 모으고 보잘것없는 성과도 버리지 않은
다음에야 거칠고 간략하다.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實學者)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책으로 사변록(思辨錄)은 일명 '통설(通說)'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민족적 수난을 겪고 난 뒤 종래의 학풍을 일신하여 보다 넓은 시야와 자유로운 입장과 실제적인 태도에서 고전을
재검토하려던 이른바 탈주자주의(脫朱子主義)의 학풍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니, 저자는 백호(白湖) 윤휴와 함께 그 대표적 인물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그러나 경전에 실린 말은 그 근본이 비록 하나이지만 그 가닥은 천 갈래 만 갈래이니, 이것은 이른바 '한 가지
이치인데도 백 가지 생각이 나오고 귀결은 같으면서도 길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독 지쉼 깊은 조예로서도
오히려 그 뜻을 전부 알아서 세밀한 것까지 틀리지 않기는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여러 사람의 장점을 널리 모으고 조그마한 선도
버리지 않은 다음에야 거칠고 간략한 것이 유실되지 않고 얕고 가까운 것이 누락되지 않아, 깊고 멀고 정밀하고 자세한 체제가
비로소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문득 참람한 짓임을 잊고 좁은 소견으로 터득한 것을 대강 기록한 다음 이것을
모아 책을 만들고는 <사변록>이라 명명하였는데, 진실로 선유들이 세상을 깨우치고 백성을 도와주신 본의에 티끌 만한
도움이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이설을 하기 좋아하여 하나의 학설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나의 이 경솔하고 망녕되어
소략하고 좁은 것을 헤아리지 못한 죄로 말하면 회피할 수 없지만, 뒷날 이 책을 보는 자들이 혹시 딴 뜻이 없음을 생각하여 특별히
용서해 준다면 이 또한 다행이겠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설명되어 있는 사변록은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의 학자 박세당 ( 朴世堂 )이 ≪ 대학 ≫ · ≪ 중용 ≫ · ≪ 논어 ≫ · ≪ 맹자 ≫ · ≪ 상서 ≫ · ≪ 시경 ≫ 을 주해한 책. 14책. ≪ 통설 通說 ≫ 이라고도 한다.
편차를
보면, 1책에 ≪ 대학 ≫ , 2책에 ≪ 중용 ≫ , 3책에 ≪ 논어 ≫ , 4 · 5책에 ≪ 맹자 ≫ , 6 ∼ 9책에 ≪
상서 ≫ , 10 ∼ 14책에 ≪ 시경 ≫ 등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력한 것은 사서에 관한 주석이다.
특히, ≪ 대학 ≫ 과 ≪ 중용 ≫ 에 더욱 역점을 두었다. 그는 당시 사서의 주석으로 종래의 권위를 가지고 정통으로 여겼던
주자의 설을 비판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주석을 통해 해석을 가한 것이 많다.
이렇듯 주자의 경의(經義)에 반기를 들고 자기 식의 해석을 했기 때문에 당시 정계 · 학계에 큰 물의를 일으켜 ‘ 사문난적(斯文亂賊) ’ 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 대학 ≫ 은 3강령 8조목이 아니고 2강령 8조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자는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 지극한 선에 그치는 것(止於至善)을 3강령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박세당은 명덕을 밝히는 조목이 다섯이
있고(격물 · 치지 · 성의 · 정심 · 수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조목이 셋이 있는데(제가 · 치국 · 평천하), 지극한 선에
그치는 조목은 보이지 않으므로 이로써 ≪ 대학 ≫ 의 강령이 두개뿐인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지극한 선에 그치는 것은 곧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공효(功效)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나누어서 별도로 하나의 강령으로 만들어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物有本末), 일에는 시초와 종말이 있다(事有終始)는 구절에 대해서도 주자와 견해가 다르다. 주자는
명덕을 밝히는 것이 근본이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말단이며, 그칠 데를 아는 것(知止)이 시초이고, 얻을 수 있는
것(能得)이 종말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박세당은 물(物)이라는 것은 8조목의 천하(天下) · 나라 〔 國 〕 · 가정 〔 家 〕
· 몸 〔 身 〕 · 마음 〔 心 〕 · 뜻 〔 意 〕 · 앎 〔 知 〕 · 물(物)을 가리키고, 일 〔 事 〕 이라는 것은
평(平) · 치(治) · 제(齊) · 수(修) · 정(正) · 성(誠) · 치(致) · 격(格)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셋째로,
격물(格物)의 주석에 대해서도 주자와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다. 주자는 ≪ 대학장구 ≫ 의 격물에 대한 주석에서 격(格)은
이르는 것이요(至也), 물(物)은 일 〔 事 〕 과 같으므로 사물의 이(理)를 궁지(窮至)하는 것이 격물(格物)이라 하였다.
반면에
박세당은 주자의 격물에 대한 주석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격(格)을 지(至)로 해석하고 물(物)을
사(事)로 해석한다면, 격물은 결국 지물(至物)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말이 안 된다. 만약 이것을 고쳐 지사(至事)라고 해도
이치가 또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맞는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주자는 궁(窮)자 하나를 더 보태어 그 말을 끌어 붙였으나, 격(格)자에는 궁구해 이른다(窮至)는 뜻이 있다고 볼 수 없으며, 물과 일은 당연히 분별해야 할 것이요, 서로 혼돈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컨대,
천하와 국가는 물이므로 일이 될 수 없으며, 평(平) · 치(治) · 제(齊)는 일이기 때문에 물이 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격(格)은 법칙 〔 則 〕 이며 바로잡는 것 〔 正 〕 이라 해석하였다. 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는 것인데, 물의
격이 있다는 것은 그 법칙을 구하여 바른 것을 얻도록 하는 것이라 하였다.
넷째로,
박세당은 주자의 물격(物格)과 지지(知至)의 주석이 부당하다고 지적하였다. 주자는 ≪ 대학장구 ≫ 의 물격에 대한 주석에서
물격이란 물리(物理)의 극처(極處)가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라 했고, 또한 같은 곳의 지지에 대한 주석에서 지지란 내 마음의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라 하고, 앎을 이미 다하면 뜻이 성실해질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 점에 대해 박세당은 ≪
대학 ≫ 에서 말하는 물격 · 지지의 뜻을, 주자의 해석대로 생각한다면, 성(誠)이라는 것은 사람의 성(性)을 다하고 물(物)의
성(性)을 다해 조화를 도와 천지와 같은 위치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성인의 지극한 공과(功果)요, 학문의 할 일을 다 마친
것인데, 어찌 처음 덕에 들어가는 초학자에게 성인의 지극한 공과를 갑자기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다시 말해 처음 배우는 이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처음부터 친극하고 자리에 꼭 들어맞아 이해하기 쉽도록 해야 할 터인데, 천하의 만물을 다 궁구한 연후에 뜻이 성실해진다는 이치는 온당하지 못한 주석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
중용 ≫ 의 주석에서도 첫 장의 “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 ” 는 부분에서 주자는 명(命)을 영(令)이라고
풀이한 반면, 박세당은 ‘ 주는 것(授與) ’ 이라고 해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영(令)은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주자는 성(性)을 이(理)라고 했는데(性卽理), 박세당은 성과 이를 다르다고 하였다. 이(理)가 마음에 밝은 것이 성(性)이
되므로, 하늘에서는 이(理)라 하고, 사람에서는 성(性)이라는 것은 명칭을 문란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주자는 주(註)에서 “ 사람과 물이 각각 그 자연스러운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道)가 된다. ” 고 보았다.
하지만
박세당은 사람만을 말하고 물은 언급하지 않았다. ≪ 중용 ≫ 의 글은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요, 물을 가르치기 위한 것은
아니므로, 사람은 가르칠 수 있으나 물은 가르칠 수 없고, 사람은 도(道)를 알 수 있으나 물은 도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 비은(費隱) · 격치(格致) · 인물성(人物性) 등에 대해서도 주자의 주석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비판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박세당은 비판형식이 귀납적이고 고증학적이며, 당시 성리학적 분위기에서 탈출해 실사구시 ( 實事求是 )의 학문에로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휴(尹 頊 )와 같이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독창적으로 경의(經義)를 해석하려 했던 박세당의 의지는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이 책이 경서의 주석을 객관적으로 정당하게 했는가는 재평가할 여지가 있다.
≪ 참고문헌 ≫ 朴西溪와 反朱子學的思想(李丙燾, 大東文化硏究 3, 成均館大學校出版部, 1966). (자료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