駱賓王 낙빈왕
觀國之光,利用賓於王
고구려 멸망 원흉 당나라 고종때 인물이라 깨름직 하지만 그래도 시를 쓴다면 이 정도 기개는 있어야 무슨 시인이라 하지. 노상 징징 짜는 두보, 허세만 부리는 비현실 오렌지족 이태백 등.. 그래도 詩는 두보를 깃대로 하고 이백을 깃발로 하여 흔들어야 지만..
역시 초당의 담백함에서.. 만당의 그 서민적인 백락천으로.. 우선은 시대로 보나 미스테리로 보나 낙빈왕 이름도 또 왕이랴? 알면서도 王으로 착각? 아.. 미남은 난릉왕이 생각.. 이 주권 왕도 생각.. 일단.. 풀어보자. 2부에는 그의 시로..가즈아!!!!!!!
그 시인옥설은 그냥 글자만 번역하면 무의미.. 아.. 중국 조장시장 올때 [시인옥설 해설] 책 사오라 했으니.. 그걸 슬슬 보면서.. 세월을 낚아보자!! ㅎ
낙빈왕(駱賓王, 약 619년~약 687년) 자는 관광, 한족(漢族), 무주 이우(절강,義烏) 사람이다.당나라 초의 시인은 왕발, 양형, 노조린(王勃、楊炯、盧照鄰)와 함께 '초당의 4걸'이라고 불렸다.富嘉謨와 함께 '富駱'라고도 한다.고종의 영휘는 도왕 이원경(李元慶)의 부속으로 무공, 장안주부(長安主簿), 의봉(儀鳳) 3년을 거쳐 시어사(御御史)에 들어갔다가 사형에 처해졌다가 이듬해 사면을 받고 조로(調露) 2년에 임해승(臨海丞)을 제하고 뜻을 얻지 못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유집. 낙빈왕 무측천광택 원년(武則天光宅元年), 양주반무측천을 기병한 서경업(徐敬業)을 위해 《대이경업전격천문문(代李敬業傳檄天下文)》을 짓고 경업이 패하니 망명,피살,자살,승려을 모르고 죽거나 구름이 승려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인물 생애
그의 이름과 표자는 《역경》의 관괘(觀)에서 유래하였다.”
“觀國之光,利用賓於王" 나라의 빛남을 봄이니 왕의 빈객됨이 이롭다. 이라는 것으로 '관광'도 여기서 나온 말같다.
왕의 빈객이 아니라 반대파가 되어 죽거나 도망자 신세이니 이름과는 정반대 인생?
낙빈왕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일곱 살에 시를 잘 지어 '신동'이라 불렸다.'거위 읊조리기(詠鵝)'가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낙빈왕은 7언가행(七言歌行)에 능했는데, 명작 '제경편(帝京篇)'은 초당(初唐)에서 보기 드문 장편이라 당시에는 절창(唱绝)으로 여겼다.
변방을 지키는 데에도 변방의 시를 많이 썼지.예를 들어 '늦은 봉황은 삭기를 잃고 새 참외는 가을을 비춘다(晚鳳迷朔氣,新瓜照邊秋).아궁이에 불이 군벽을 뚫고, 봉화가 누각으로 올라가다.(灶火通軍壁,烽煙上戍樓)" 호방하고 웅대한 포부와 견문이 친절하다.
당 중종이 복위된 후 낙문(낙빈왕의 글)을 구하니 수백 편이 되었다.
《당시 300수 신주(唐詩三百首新注)》에 따르면 낙빈왕은 무주의 이우 출신이다.일찍이 초라하고 무행하여 박도와 놀기 좋아하다.뒤에 도왕 이원경(李元慶)의 부하가 되었다.일찍이 서역에 종군하여 벼슬아치에서 촉지벙(사천)을 여행하였다.어리(御吏.어사)의 시중을 들다가 도둑의 죄로 투옥되자, 그는 시문에서 그 억울함을 힘껏 감별하였다.감옥에서 나온 후, 린하이 현(臨海縣)의 승려가 되어 만족하지 못했다.예종 문명(睿宗文明,684) 때 서경업이 군사를 일으켜 무즉천을 토벌하였는데, 그는 일찍이 그의 요속과 군중의 서격(書檄,격문)을 위하여 모두 손을 썼다.경업이 실패하고 낙빈왕이 행방불명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망명을 하거나, 심지어 영은사(靈隱寺)에서 승려가 되었다고도 하니 그의 일생 행적은 매우 기이하고 종횡가에 가깝다.
후대 사람들이 수집한 낙빈왕 시문집은 꽤 많은데, 청나라 진희진(陳熙晉)의 '낙림해집 필주(駱臨海集筆注)'가 가장 완벽하다.
생애의 사적
낙빈왕의 부친 청주 박창현령(青州博昌縣令)이 임소에서 사망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박산(博山)에 머물다가 옌저우티추현(兗州瑕丘縣)으로 이주하여 가난하고 초라한 생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650~655(당 고종영휘) 연간 도왕 이원경(李元慶)의 부속이었는데, 도왕이 재능을 진술하라고 하자 자현을 부끄러워하며 명을 받들지 않았다.후에 예랑을 모시고 동태상정학사가 되었습니다.일로 좌천되어 서역에 종군하여 오랫동안 변방을 지키다.후에 촉나라에 들어가, 거요주도대총관 이의군의 막을 다스리고, 만족의 반란을 평정하자, 문시는 그 수를 많이 썼다.촉에 있을 때는 노조와 이웃해 노래하며 사례했다.
678년(의봉 3년), 무공주부(武功主簿), 장안주부(長安主簿)로 옮겼고, 다시 장안주부가 시어사(朝御史)로 입조하자 무측천이 정권을 잡자 낙(낙빈왕)이 여러 차례 글을 올려 비꼬아 죄를 짓고 옥고를 치렀다.낙은 '옥에서 매미를 노래하다(在獄詠蟬)', 내용은: "노중비는 들어가기 어렵고, 바람이 많으면 소리가 나기 쉽다.고결함을 믿는 사람이 없으니, 누가 여심을 표하겠는가?(露重飛難進,風多響易沉。無人信高潔,誰為表余心)"비분강개하다가. 이듬해 사면되었다.
재옥영선병서(在獄詠蟬幷序)-낙빈왕(駱賓王)
옥에 갇혀서 매미를 노래하다
西路蟬聲唱(서노선성창) : 가을에 매미가 우니
南冠客思侵(남관객사침) : 죄인의 몸 향수에 젖는다
那堪玄鬢影(나감현빈영) : 어찌 견디랴, 검은 머릿결이
來對白頭吟(내대백두음) : 백발의 노래 부르게 된 것을
露重飛難進(노중비난진) : 이슬이 무거우 날아가지 어렵고
風多響易沉(풍다향역침) : 바람이 심하여 소리가 쉬이 잠긴다
無人信高潔(무인신고결) : 고결한 마음 믿어줄 사람 없으니
誰爲表予心(수위표여심) : 누가 나의 속마음 드러내 줄까
680년(조로 2년), 임해현승(臨海縣丞)에 올랐으며, 세칭은 낙림해(駱臨海)이다.벼슬을 버리고 광릉(廣陵)을 유람하며, "보검사존초, 금추허보한.(寶劍思存楚,金椎許報韓)
出自《詠懷》
少年識事淺,不知交道難。一言芬若桂,四海臭如蘭。
寶劍思存楚,金錘許報韓。虛心徒有託,循跡諒無端。
太息關山險,吁嗟歲月闌。忘機殊會俗,守拙異懷安。
阮籍空長嘯,劉琨獨未歡。十步庭芳斂,三秋隴月團。
槐疏非盡意,鬆晚夜凌寒。悲調絃中急,窮愁醉裏寬。
莫將流水引,空向俗人彈。
낙빈왕 최후
자치통감에서 봉기군이 토벌된 뒤 서경업과 낙빈왕을 모두 주살했다는 설이 있다.구당서도 낙빈왕이 정부군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두 번째 도주: 신당서는 이런 견해를 갖고 있다.무칙천이 죽은 후에도 이현은 황위에 계속 앉았고, 낙빈왕의 충용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며 정운경에게 전국에서 그의 가작을 모아 책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였다.그리고 패망 후의 상황을 조사하여 사서에 기록하였다.
정운경은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많이 찾아내 처음에는 낙빈왕이 피살된 줄 알았지만 단서가 많아지면서 '낙빈왕 도주설'을 더욱 지지했다.세 번째 출가: 시인 송지문(宋之問)은 일찍이 영은사에서 대련을 본 적이 있다: 누관창해일, 문청절강조(樓觀滄海日,門聽浙江潮).그는 매우 궁금해서,바삐 누가 한 짓이냐고 물었다.절의 어린 스님이 늙은 스님을 불러내자 송지가 물으니 바로 낙빈왕이었다.또 근대 학자들이 낙빈왕로 족보에 그가 패망한 뒤 장쑤성 난퉁(南通) 일대로 도망쳐 갈대밭에 은거했다는 기록이 있다.훗날 낙빈왕은 남통을 객사하고 70세의 나이로 황니구에 묻혔다.주국정(朱國楨)의 『용당소품《湧幢小品》』에 따르면 명 정덕 9년(1514년)에 남통성 황니구(黃泥口)에서 조(曺)씨 성을 가진 농부가 땅을 파다가 낙빈왕 묘를 발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