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씨(許氏)는 연원을 멀리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서기48년)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夫人唐)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김수로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했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歸依)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成佛)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허백기(許伯琦, 1493 ~ ?) :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한 뒤 1524년 형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내고, 1526년 형조정랑, 1528년 경상도 도사, 1541년 헌납·장령, 1544년 사간·교리·동부승지, 1545년 형조참의, 1553년(명종 8) 판결사를 지낸 다음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562년 동지중추부사로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허수겸(許守謙, 1563 ~ ?) :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596년(선조 29)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있을 때,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토벌하지 않아 탄핵을 받았다. 얼마 뒤 사면되어 병조정랑·강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강진현감(康津縣監)로 재임 중이던 1602년(선조 35) 명망이 좋지 않고 세금을 과도하게 거둔다는 장령 조정견(趙庭堅)의 탄핵을 받고 다시 파직되었다. 이후 복직하여 공주목사 등을 지냈다.
허위(許蔿) : 한말의 의병장. 3백명의 선발대로 일본 통감부를 격파하려다 실패하고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