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2021학년도 수학능력시험을 기념하며

[배영수]

나는 간간이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쳤다. 지금 수능시험장에 들어간 학생들도 가르친 적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의 일부분을 발췌해 시험문제를 낸 것이다. 내가 지문으로 사용한 샌델의 글은 미국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의 수입 상당부분을 세금으로 걷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였다. 거기에는 자유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가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각각의 이유로 반대하고 찬성하였다. 그의 수입은 그의 개인 능력에서 나온 것이므로 국가가 그의 수입을 함부로 가져가는 것은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처럼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입장이다. 이에 반해 공동체주의자는 그의 수입은 그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인정해 준 사회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세금부과는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조던이 중세 시대에 살았다면 공 튀기는 재능 따위로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문제를 출제하기 위해, 그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 책을 펼쳐보다 그만 다 읽고 말았다. 하지만 어디에 적어 둔 것도 없고 기억나는 것도 거의 없다. 다만 전반적인 느낌은 남아 있다. 샌댈은 조던과 같은 실례를 많이 사용했다는 것(사실로 말하면 책 전체가 저런 예화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과 샌댈은 '정의'라는 말을 배분적 정의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배의 정의가 정의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은 플라톤 책을 보고 느끼었다. 철학계에서 고전적 실재론자로 분류되는 플라톤은 정의의 배분적 기능보다는 정의 그 자체(정의라는 것)에 대해 탐색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문장으로 말한다면, 정의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은 정의라는 것이 세상에 있기는 한가 하는 말이 될 것같다. 플라톤은 정의라는 것이 (적어도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하는 모양이다. 이런 가정은 국가론 초입에 나온 트라시마코스의 주장과 그 주장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 아데이만토스, 글라우콘의 주장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은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대다수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빠짐없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도 과감한 주장을 펼칠까? 내가 보기에 그 주장의 핵심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부정의는 욕망에서 나온다. 정의는 욕망(혹은 육체) 없는 존재의 관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깨지 않는 한 이들의 과감한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도 이 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가 그들의 질문을 존중하고 대답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인내심이 박약한 나는 국가론 앞부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기억해보면 고3때도 그랬던 것 같다. 내 수학 정석책의 측면을 보면 앞부분만 시커멓게 손떼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것 같다. 앞부분만 집중해서인지 앞부분이 제일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고, 거기에 투자를 하는 것이 올바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앞부분은 정의를 다루지만 정의를 샌댈식으로 혹은 독자에게 익숙한 대로, 현대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는 데에 유용하고,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이 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확신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정의의 문제를 욕망의 문제와 관련지어 바라보는 것은 어떤 중차대한 의미가 있는가? 바로, 정의의 문제가 인간을 규정하는 문제라는 점을 뜻한다는 것이다.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인간을 통제하는 것이 욕망이라면 욕망을 넘어(욕망을 무시하고) 정의를 논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이다. 나는 독서 초기에 자꾸 누구 편을 들려고 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맞아, 아니야 트라시마코스도 일리가 있지.. 이러면서 나는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진짜 문제는 간과했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인간의 지위에 관한 문제이다. 욕망이 문제를 이렇게 만들었다.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선생이시여 제발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기를.. 하는 식으로 나오는데, 이 간청은 인간을 그렇게 하급으로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이다. 소크라테스가 직전까지 '정의는 이익'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정의를 따르는 이유를 제시할 때, 이익을 경유하는 것과 막바로 정의를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지위를 완전히 다르게 보는 것이다.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 단지 이익뿐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동물과 다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들의 간청은 동물적 욕망에 지배받고 있는 인간을 욕망 없는 존재에게 통제받는 위치에 올려 달라는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그 간청을 수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내어 놓은 동굴의 비유는 정의(라는 것)를 대면한 인간의 형편을 보여주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의는 어느새 '좋은 것의 형식'이 되어 있다. 각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게 만드는 것, 좋은 것(혹은 욕망)의 원천을 이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샌댈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선정하여 플라톤 이래 인류 최고 지성들이 고민했던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국가론>의 주제의식을 전면에 내걸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플라톤, 내가 본 플라톤에 따르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응, 정의란 이런 거야"라는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다. 그 대답을 구하면 현실의 독자는 자신이 사는 현실의 문제(즉 욕망의 문제)와 관련지어 말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의조차도 욕망에 지배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플라톤은 정의를 직접 말하는 대신 정의를 지탱해 주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이런 내 말을 듣고 그런 대답없는 질문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묻는 이가 있겠지만, 플라톤처럼 최상이나 최고의 지배원리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질문이 바로 의미있는 것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정의관을 지배하고 있는 분배의 정의나 공정성이라는 것은 욕망의 그늘에 불과한 것이다. 샌댈은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정의의 문제가 인간의 욕망과 지위에 관한 통찰이라는 점을 통찰하지 못했다. 너무 심한가? 그렇다면, 최소한 그 책은 그렇게 쓰이지는 않았다고 낮추겠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낸 문항에 대해서도 후회를 하고 있다. 

[희주아빠]

음 좋은 글이로군요, 통찰력이 있는, 최소한 센댈을 능가하는.

[배영수]

선생님, 이러시면 남들이 흉봅니다.

[희주아빠]

그러니까 센댈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는 정의를 행동의 문제로 본다면, 배영수나 플라톤은 정의를 (행동을 하는) 사람(됨)의 문제로 보는 것이로군. 그리고 그 점에서 양측은 정의를 각각 정치의 문제 및 교육의 문제로 보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