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
마가복음 3장 31-35절에서『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사역을 하는 것을 보고 귀신들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가족에 대해서 영적인 가족을 강조하신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걸림돌은 육적정체성인 것이다. 육적 정체성은 자기라는 것으로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한 진으로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자기와의 영적 전쟁이다.
마가복음 10장 26-30절『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부자가 모든 것을 팔아서 남에게 다 주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표면적으로 받아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기의 육적 정체성을 다 십자가에 못박고, 영적 정체성에 대해서 남에게 잘 말하라는 것이다.
성도가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도 일곱가지의 육적 정체성은 그대로 나타난다. 마치 출애굽한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과 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적 정체성은 일곱가지로 등장한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은 인간의 육적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첫째 육체의 본성은 감정적인 부분도 있으나, 물질 소유와 성적인 만족감을 채우려는 것이 가장 핵심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극히 조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세상(물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며, 간음하지 말도록 규정하기도 한다.
둘째, 혈연관계는 부모, 형제, 자녀를 의미한다. 아무래도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자녀를 우상처럼 여길 때, 가족관계는 파탄될 수 있다. 그만큼 심각하다. 가정을 유지하는데, 자녀는 핵심요소이지만, 지나치게 우상처럼 여긴다면 오히려 파탄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셋째, 경험과 지식은 영적 신앙생활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적적인 부분이 많다. 사도바울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자였다. 그와 같은 기억은 전도자로서 활동할 때, 가장 힘든 기억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또한 세상에 대한 높은 지식은 하나님 말씀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사상과 이념은 종교를 부인하고 탄압하는데, 동원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공산 독재주의가 그러했으며, 현재도 진행중이다.
다섯째, 종교심은 신을 찾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심은 자신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끌기도 한다.
여섯째, 자기의 의인데, 선행을 행하고, 자기 규칙을 만들어서 불법을 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스스로 선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한다. 그들은 나아가 스스로 선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사람부터 주목받기를 원하며, 심지어 남을 판단할 때도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일곱째,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항상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남보다 못하면 분노하며, 심지어는 상대를 괴롭히기도 하며, 이간질을 하거나, 함정을 파서 넘어뜨리기도 하며, 상대방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상대를 죽이기도 한다. 언어 폭력을 포함해서 폭력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성도가 이런 육적인 정체성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 자기와 싸움에서 완벽한 승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그런데『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파라 안드로포이스)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파라 토 데우)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파라 안드로포이스(παρὰ ἀνθρώποις)는 사람들과 함께는 할 수 없지만 이라는 의미이고, 파라 토 데우(παρὰ τῷ θεῷ)는 그리스도(하나님)와 함께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옆에 있어서 함께 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관사가 없는 데우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임마누엘(파루시아) 신앙을 가진 자는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앞서서 싸워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 정체성과 싸우는 영적 정체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싸우는 것이다.
복음을 위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에게 영적 정체성을 살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육적 정체성을 죽이게 된다. 복음은 혈연관계보다 더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더 위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마태복음 19장 29절에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라고 되어있다)』 라는 말은 임마누엘이라는 신앙을 위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임마누엘 신앙이 되면 세상적인 것이 보잘것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 신앙은 심령 속의 그리스도(호 로고스)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과 그에 따른 현재적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 것을 믿지 못하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31절에서『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 임마누엘 신앙이다. 제자들은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에도 성도는 호 로고스를 따르는 신앙이다. 먼저 된 자는 예수를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믿고, 나중에 들어온 자는 신앙이 미약한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중 된 자가 임마누엘의 신앙을 깨닫게 되어 참 신앙으로 들어간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누가 먼저 되고 나중에 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신앙으로 나아가는 자가 먼저 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 신앙은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지성소)이 세워지고 하나님이 성전에 임재(파루시안)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