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 수필)
껍데기의 노래
도창회(본회 고문)
껍데기는 아프다. 가슴이 터질 지경이다. 빈 껍데기가 무엇을 바라 목숨 바칠 일이 있으려나. 껍데기가 갈 곳은, 어디란 말인가. 고작 향하는 곳이 어둑한 내 가슴팍 안이란 말인가. 껍데기의 허무가 가슴을 친다. 아리게 가슴을 후벼 판다. 껍데기는 뭐라 해도 껍데기가 아니던가.
그러나 껍데기도 할 말이 있다. 할 말이 남아있다. 한때는 쩌렁쩌렁 청산을 호령하던 호피(虎皮)가 아니던가. 여우 껍데기, 수달 껍데기, 심지어 다람쥐, 껍데기까지 제각기 할 말이 있다. 악어나 뱀의 껍데기가 돈지갑이 되고, 양피(羊皮)가 옷이 되고 우피, 마피, 돈피가 신발이 된다. “껍데기도 껍데기 나름이 아니겠나.” 껍데기도 할 말은 있다.
알갱이가 쏘옥 빠지고 남은 빈 껍데기를 바라다본다. 청춘이 가버린 노인, 밑천을 까먹은 장사치, 발기부전증에 걸린 사내, 전쟁터에서 자식을 잃은 어버이, 밑창 없는 신발, 엔진을 들어낸 중고차 등 빈 껍데기들이 온통 가득 널려 있다. 껍데기 인생들은 얼핏 눈요기로도 실속이 없다. 껍데기만 남은 지난 세월의, 두께가 실감나게 애꿎고 한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어루만지고 나니 허공뿐이다.
허나, 껍데기의 전제(前提)는 알맹이가 있었다는 표증, 껍데기 없는 알맹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얕잡아 볼 것이 아니다. 외피(外皮)가 없으면 내실(內實)도 없다는 말이 지당하게 맞는다. 채우지 못한 껍데기는 없다는 말이겠다. 거기다 요즘은 껍질에 자양분이 많이 들어 있다고 TV에서 떠든다. 과일 껍질, 옻나무 껍질, 나무껍질에 자양분이 거하다고 한다. 귤껍질, 계수나무 껍질 등 일찍부터 약용으로 쓰는 것들도 무수하다. 어쩌면 껍질이란 껍질은 모두 제 나름의 효험이 있는 성싶다. 껍질이 괜히 생겨났겠느냐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버려진 알 속보다 더 많은 영양가가 들어 있다고 하니 껍질을 사랑하는, 이른바 ‘껍질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닌지.
껍질과 껍데기의 차이는 얇고 두꺼운 차이다. 껍데기의 허세 또한 결코 무기력이나 공허한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 호피는 죽어서도 위력을 발산한다. 그 위력은 유보되어 아직도 유효하다. 간혹 아버지를 ‘껍데기’라고 호칭한다. 대그룹 회사의 사주를 ‘껍데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껍데기가 외국으로 도망갔다.”라고 말하면 금세 알아차린다. 가장이나 사주 등 큰 자리 권위의 상징이 ‘껍데기’로 대치된다면 안 될 것인가? 아무튼 껍데기는 알 속을 감싸 안고 또 포용하는 입장에 선 존재로 군림한다.
그렇지만 껍데기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어느 누가 껍데기를 알갱이에다 비할까보냐. “빈 껍데기의 존재 이유가 있다면 그건 쓰레기통으로 가는 일이다.”라고 강변한다. 알 속을 끄집어낸 빈 상자, 빈 껍데기는 고물 장수의 차지다. 껍죽대는 빈 껍데기는 우리 사회의 개밥에 털과 같은 존재고, 개털은, 천대를 받아 마땅하다고 우긴다. 거리에 개털 같은 존재들이 득실거린다.
가차없이 휴지통이나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껍데기, 껍데기, 껍데기들이...
껍데기는 가라, 써억 꺼져버려라!
양파의 껍질을 까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오만상이 머릿속을 스친다. 벗기는 쪽의 고통, 벗기어지는 편의 아픔, 연상은 자유다. 껍데기를 벗은 도둑놈, 껍데기를 그리워하는 양아치 족속, 껍데기를 감추고 살아가는 정상 모리배, 껍데기의 이미지는 알 듯 모를 듯 다양하다. 실체를 들여다보기 위해 양파껍질 까듯 그들의 껍데기를 까볼 수 없을까 하고 혼자 웃고 서 있다.
//껍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중립의 초례청 앞에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의<껍데기는 가라> 전문
이 노래를 뇌이고 있으면 괜스레 눈물이 인다. 그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목청껏, 불러보던 노래가 아니던가. 4․19세대 대학생 시절은 이 노래 하나로 대변된다. 나 또한 그 세대였다. 맞절을 올린 사람 중에 나도 끼었다. 껍데기를 치우기 위해 최루탄의 눈물 가스 속을, 헤매던 나였다. 책가방을 안고 저항의 깃발을 앞세우고 거리를 내달리던 그때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직도 여전히 껍데기는 존재한다. 그 지긋지긋한 껍데기는 존재한다. 변질된 허울을 뒤집어쓴 채 껍데기가 활개를 치면서 백주에 쏘다닌다.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껍데기, 껍데기, 껍데기들아...
껍데기는 가라. 써억 꺼져라.
나는, 껍데기도 할 말이 있다고 강변하는 쪽과 빈 껍데기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딱 잡아떼는 쪽 그 사이에서, 아니 껍데기의 허울을 벗으라고 삿대질을 하는 쪽과 무슨 허물이 있느냐며 맞장구를 치는 쪽 그 사이에서, 혼자 웃고 서 있다. 껍데기가 껍데기를 보고서 껍데기라고 부르는 “에라 손...”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이 변질한 껍데기, 껍데기, 껍데기들아...
껍데기는 가라고 혼자 속으로 ‘껍데기의 노래’를 부르고 서 있다.
사월은 내게 가장 잔인한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