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의미
지금 우리는 종교개혁을 요(要)하는 시대를 당하였습니다. 혹은 이미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기 위하여 모인 두 분 우찌무라(內村鑑三)선생과 김교신(金敎臣)선생, 이 두분의 무교회적(無敎會的)인 신앙의 생애에 관련시켜 설명해보려 합니다. 먼저 종교개혁이란 말의 뜻에서부터 말하기로 합니다.
여기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한 것은 물론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 대립시켜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종교개혁이란 말은 서구 말의 reformation이란 것을 번역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정관사(定冠詞)가 붙습니다. 즉 역사상에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을 말할 때는 단순히 The Reformation이라고만 하면 족합니다. 본래 reformation이란 말은 그저 개혁 혹은 혁신이란 뜻이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는 종교의 개혁인지 정치의 개혁인지 무슨 개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16세기의 종교개혁에 관해서만은 그저 The Reformation이라고만 하면 누구나 압니다. 동양 말로 종교개혁이라 한 것은 이미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종교라고 붙인 것이지 본래 종교란 말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개혁입니다. 또 종교란 말도 하나의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어느 종교나 가리켜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순히 개혁이라면 무슨 개혁인지 구별할 수 없는 이 한개 명사가 누구나 설명 없이 16세기의 기독교개혁인 것을 알 수 있으리만큼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거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합니다.
본래 종교개혁에는 좁은 것과 넓은 것의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는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회에서 발매하는 면죄표(免罪票)에 관한 95개의 의견서를 발표함으로부터 시작이 되어 구교와 신교의 분열에까지 이르게 되는 그 운동을 가리키는 것이요, 넓은 의미로는 종교에만 국한하지 않고 학문․예술․정치․경제, 각 방면에 걸쳐 15,6세기에 일어난 사회 전반에 뻗힌 신생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과 한가지 이 큰 운동의 한 부문이 되는 소위 예술부흥을 Renaissance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것도 신생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16세기에 일어났던 그 운동은 인간생활의 어느 부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으므로 이것을 Re-form 즉 고쳐 만듬이라 혹은 Re-birth 즉 고쳐 남이라 부르는데, 좁은 의미의 종교개혁은 이 운동에 있어서 중심적인 지위를 가집니다. 즉 루터로 시작이 되었다고 일반이 말하는 그 신교운동은 이 큰 신생운동 속에 포함되는 것이요, 또 그러면서 그것을 완성하는 운동입니다. 부분은 부분이지만 전체를 대표하는 중심적인 부분입니다. Reformation이란 말이 아무 설명어(說明語) 없이 종교개혁을 표시하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그와 같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종교 그것이 두 가지로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 하면 종교란 기독교니 불교니 하는 모양으로 어떤 일정한 조직체를 이루어가지고 일정한 제도 아래 일정한 교리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것이 참 종교는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의 한 나타남뿐입니다. 참 종교란 정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어라 이름지을 수도 없고, 형용할 수도 없습니다. 이름지을 수 있고, 형용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종교는 아닙니다. 종교의 외양 껍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자의 이른바 도를 도라 할 수 있을 만한 것이면 상도(常道)는 아니요 이름을 이름지어 말 할 수 있을만 한 것이면 상명(常名)은 아닙니다. 유교에서는 중용지도(中庸之道)라 해서 중(中)을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의 지경(地境)이라 하는데, 참 종교란 말하자면 미발의 지경입니다. 그것은 인격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는 전적(全的) 지경(地境)입니다. 그러나 정신은 아무래도 발(發)하게 생긴 것이요, 인격은 아무래도 분화하게 생긴 것이지, 아니하고는 생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 발(發)하여서 절(節)에 맞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중(中)이 있고 화(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근본종교 자리를 중(中)이라 한다면 좁은 의미의 조직적 종교생활이란 화(和)를 목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종교에 두 가지 의미가 있게 되고, 따라서 종교개혁을 두 가지로 생각하게 됩니다.
종교의 지경이란 생명의 근본자리인데 그 근본자리란 한정하여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한정할 수 없는 것이 한정을 받아 밖으로 나타나 나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래 한말로 한다면 생활이란 정신의 발현입니다. 여기 정신이라 한 것은 생명의 절대적인 지경을 파악한 것으로 하는 말입니다. 나는 이 생활은 정신의 발현이란 말을 한개 철학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말의 분석으로써 생명의 진상을 살펴보자는 철학은 한개 토론을 낳아 놓을 뿐입니다. 생활은 정신의 발현이라 하면 철학자들은 곧 머리를 기웃거리고 토론하자 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한개 시로 말합니다. 시인에게는 토론 무용입니다. 나는 토론을 할 여가는 없습니다. 몸으로써 절대를 감득하고 싶지. 하여간 생활은 정신의 발현입니다. 순정신적인 생명은 스스로 발전합니다. 발전이란 관념을 넣지 않고 생명을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특징을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말한다면 발전이란 것이 그 근본 양상(樣相)의 하나일 것은 사실입니다. 살았다는 것과 자란다는 것은 뗄 수 없이 한데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라 할 때 창조 없이 생각할 수 없고, 창조라 할 때 발전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근본을 우리가 상상해본다면 마치 화산구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들여다본대야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볼 수 없는 깊음 속에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의 되어 오름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멀리서 바랄 수 있는 것이지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알 수 없고, 나 자체를 지지(支持)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요, 정신이란 그런 지경입니다. 종교는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가까이만 가면 소멸해버리는 그 불의 깊음 속에서 한정 할 수 없는 것이 치받아 오르는 것이 화산이지만 일단 올라와버리면 형형색색의 것으로 고정해버립니다. 생명은 본래 정신적인 것이지만, 순정신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