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1879-1940)
파울 클레 (Paul Klee, 1879년 12월 18일 - 1940년 6월 29일)는 스위스 화가이다. 국적은 독일이다.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여러 다양한 예술 형태의 영향을 받았다. 그와 그의 친구인 러시아 화가 칸딘스키는 예술과 건축의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1879년, 스위스의 수도 베른 교외의 뮌헨부흐제(Münchenbuchse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에서 이주한 주립 사범학교의 음악교사, 어머니는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배우는 음악가 집안이었다. 파울 클레 스스로도 7세 때부터 바이올린 교습을 받은 프로급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1906년에 결혼한 부인도 피아니스트였다. 음악이 클레의 그림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그림의 길을 선택하여, 1900년에는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상징주의의 대가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의 지도를 받았다. 슈투크는 또한 칸딘스키의 스승이기도 했다.
1906년까지 베른에서 세기말적인 환상과 풍자에 입각한 동판화와 유리화 등을 시도하였고, 또한 이론적인 수법의 유화를 남겼다.
1906년 이후로는 다시 뮌헨으로 돌아가 당시 바야흐로 발흥의 기운이 움튼 표현주의의 분위기 속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마르크, 마케 쿠빈, 칸딘스키 등과 사귀어 이윽고 블라우에 라이터의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제작은 흑백의 판화나 또는 단채(單彩)의 파스텔·수채·구아슈·템페라 등으로 한정되어 그 표현은 기괴하고 환상적인 소묘가(素描家) 알프레트 쿠빈(1877∼1959)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흑백 또는 단채에 의한 대상의 도식화를 통하여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굳혀 갔다. 클레는 1906년 뮌헨 '분리파전'에 동판화를 출품하였고, 1910년에는 베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칸딘스키, 마르크 등과의 '청기사전'은 제2회부터 참가하였다.
1914년 봄부터 여름까지 튀니지와 카이루안을 여행하였다. 여행하면서 색채에 빠져 들었다. 파울 클레의 색체가 풍부한 작품은 대부분 이 여행 이후의 것이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 1919년 이후 색체에 대한 자각은 독특하게 실현되어 간다.
1921년부터 1931년까지는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 초대를 받은 클레는 글라스화(畵)의 공방을 담당하여 후진을 지도하는 한편, 파이닝거와 칸딘스키를 이 곳에서 재회하여 활발한 제작 활동을 하였다. 《자연연구의 길》과 《교육적 스케치북》 등 이론적인 저술도 바우하우스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정리되었다. 1931년에는 뒤셀도르프의 미술학교에서 교수가 되었고, 나치스에 의하여 자유가 박탈되어 가던 독일에서 추방되어 1933년 고향 베른으로 돌아와 수 년간을 지냈다. 만년에는 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 난치병에 걸렸으나, 등받침이 있는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클레는 1940년 무랄토 로카르노에서 사망하였다.
클레의 평생을 통한 작품은 9천 점이란 다수에 이른다. 베른에 돌아온 후에도 제작욕은 왕성하였고 만년에는 독특한 천사의 상이 눈에 많이 띈다. 그의 단순한 표현은 형태 그것보다도 형태를 만드는 일을 주안점으로 한 것이며, 보는 자로 하여금 그 형성의 과정을 좇아 체험하여 가는 것을 그는 바랐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통상의 캔버스에 유체로 그린 것은 적고, 신문지, 판지, 천, 붕대 등에 유채, 수채, 텐페라 등의 여러 그림 재료를 사용하여 그렸다. 크기가 작은 작품이 많은 것도 특색이다.
2005년 6월에는 고향인 베른에 그의 업적을 집대성한 파울 클레 센터(Zentrum Paul Klee)가 세워졌다.
1)사회문화적 배경
클레가 산 20세기 초는 유럽에서 격동의 시대였다.
과학의 발달은 기계화를 빠르게 불러오면서 공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공업화로 인한 대량생산은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 대량생산은 많은 원료를 필요로 하면서 국가는 제국주의화하여 식민지 건설을 위시하여 국가간의 경쟁도 치열하였다.
사회 내부에서도 자본주의의 발달은 빈부간의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하였다. 이로서 사화 세력의 분화가 나타나면서, 세력간의 알력과 긴장은 사회를 혼란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불안해 하였다. 인간은 기계에 종속되어서 인간성 상실을 불러왔다. 기존의 도덕과 철학도 붕괴하였다.
이 시대에 등장하는 철학은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니체와 벨그송과 프로이트이다.
니체는 영원한 진리란 착각이다 라는 주장을 하면서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함축하였다. 벨그송은 절대불변의 진리를 부정하고,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운동성에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생철학을 주장하였다.
프로이트는 서양사회를 지탱해온 이성을 의식의 차원으로 보았다면, 실제로 우리를 지배하는 무의식이다 라는 주장을 하므로, 서양의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보수적인 사유 체계와 진보적인 사유 체계도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사회였던 독일에서 더 심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폭발하면서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1870년대의 보불전쟁, 1914년의 제1차 대전, 1938년의 제 2차 대전 등의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아니 화가들은 몸으로 겪으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는 당연히 미술계에서도 나타났다. 낭만주의가 퇴조하면서 사실주의, 심리주의가 등장하였다. 전통의 미술에 반기를 드는 인상주의에서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면서 새로움을 모색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상징주의-후기 인상주의-야수파-입체주의로 거듭 새로운 사조가 전개되고 있었다. 후진적인 독일에서는 이들 화파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미술 운동이 다리파, 청기사파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들 모두 전통 예술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형태의 재현보다는 의미내용을 종요시하였다.
클레도 이 시대에 살아가면서 부단히 새로움을 추구하여 자기의 미술 세계를 구축하였다.
2) 클레의 작가론
클레의 생애에서 대강 언급하였듯이 그의 그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선과 색채이다. 그리고 평생 동안 주제로 삼았던 자연을 묘사하였다. 어린 시절에 음악 가정에서 자란 것도 그의 미술을 형성하는데 주요 요소로 등장한다.
(1) 색채
그는 그림을 그리다 벽에 부딪히면 여행을 하였다. 파리 여행을 하면서 인상주의 그림을 보고는 색채에 심취한다. 고호에서는 선의 독립성, 고갱으로부터는 자연의 신비를 표현하는 방법에서 상징정을, 세잔에게는 빛에 따른 색조의 변화에 대하여, 들로네를 통해서는 색채를 통하여 주관주의적 감정을 표현하려는 것을 받아들였다. 칸딘스키로부터는 색채에 의한 내적 요구를 해방하려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음악적 요소는 클레 그림에서 운명적으로 따라 다닌다. 칸딘스키처럼 선과 색채를 음악의 하모니처럼 조화롭게 구성하여 표현하려 하였다.
특히 괴테의 색채론을 좋아하였다. 괴테는 ‘특정한 색은 특수한 감각에 의해 눈을 자극하고, 눈의 보편성을 갖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클레는 ‘색사각형 유형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더욱이 바우하우스 교수 시절에는 색사각형 그림을 체계화하여 교육용으로 사용하였다.
색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에 근거하여 줄무뉘나, 바둑판 무뉘, 원 등의 색채 구성을 나타내었다. 색사각형도 이 이론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색채를 단순한 색의 나열로 보지 않고, 조화로 보았다.(이것은 음악의 하모니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사각형의 색채는 음악적 추상회화의 기초가 되었다.
(2) 선(線)
클레는 철저하게 과학주의적 방법으로 사고하였다. 조형요소들을 근거로 하여 그림을 연구하고 탐구하였다. 회화가 정신적인 내용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엄격한 법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형요소를 연구하면서 ‘선’을 조형요소의 기본이라고 믿었다.
그는 선을 기본적으로 모티브로 하여
a) 유희적 양상으로 그림을 그렸다.
b) 가는 선을 이용하여 운동과 시간을 절절히 표현하므로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c) 초기 작품에는 대상을 윤곽선으로 표현하여 점차 재현적인 기능을 버리고 표현적이고,
즉흥적으로 변해갔다.
후기로 가면 선의 윤곽선 표현도 점차 사라지고 기호적인 문양으로 표현한다.
클레의 선은 형태의 윤곽이라기 보다는 화면 그 자체의 전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전체의 조화에 우선을 둔 선이었다. 클레의 선은 화면 그 자체를 형성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요소가 된다.
선에 대해서 허버트 리드는 ‘선이란 볼 수 있는 대상의 외관과는 관련이 없다. 그 외관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