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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시감상
「우음」 조식
[ 偶吟 曹植 ]
高山如大柱(고산여대주) 높은 산은 큰 기둥과 같이
撑却一邊天(탱각일변천) 한쪽의 하늘을 받치고 섰네
頃刻未嘗下(경각미상하) 잠깐도 일찍이 내려앉은 적이 없기에
亦非不自然(역비부자연) 또한 자연스럽지 않음이 없네
〈감상〉
이 시는 우연히 지리산을 보고 노래한 것이다.
높은 지리산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큰 기둥과 같다(높은 산의 기상은 조식의 기상이기도 함). 지리산은 무거운 하늘을 떠받치고 있지만 일찍이 잠시도 내려앉은 적이 없기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조식은 지리산을 매우 사랑하여 10여 차례나 올랐으며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이란 글을 남기기도 했다.
〈주석〉
〖撑〗 버티다 탱, 〖却〗 어조사 각, 〖頃刻(경각)〗 잠시.
각주
1 조식(曺植, 1501, 연산군 7~1572, 선조 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함.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처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사직 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정구(鄭逑) 등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61세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차영남루운」 박상
[ 次嶺南樓韻 朴祥 ]
客到嶺梅初發天(객도령매초발천) 객이 이르니 고개에 매화가 막 피었는데
嘉平之後上元前(가평지후상원전) 12월은 지나고 상원날 되기 전이라네
春生畫鼓雷千面(춘생화고뢰천면) 봄은 우레 같은 천 가지 북소리에 생겨나고
詩會靑山日半邊(시회청산일반변) 시흥(詩興)은 푸른 산으로 지는 해에 모여드네
漁艇載分籠渚月(어정재분롱저월) 고기 잡는 배는 강을 두른 달빛을 나누어 싣는데
官羊踏破羃坡煙(관양답파멱파연) 관청의 염소는 언덕을 덮은 아지랑이를 밟아 부수네
形羸心壯凌淸曠(형리심장릉청광) 몸은 쇠해도 마음은 씩씩하여 맑은 하늘로 올라서
驅使乾坤入醉筵(구사건곤입취연) 천지를 몰아 취한 이 자리에 들게 하노라
〈감상〉
이 시는 경남 밀양에 있는 영남루에 올라 차운한 시로, 시간의 경과가 잘 묘사되어 있다.
밀양 고개로 들어서자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는데, 때는 음력 12월이 지나고 1월 15일 전이다. 영남루에 올라 봄을 맞아 잔치가 벌어졌는데, 진동하는 풍악소리와 기생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봄이 오고 있다. 대낮에 벌인 술자리는 어느덧 푸른 산으로 해가 지고 있으니, 저녁이 되었다. 밀양을 돌아 영남루로 흐르는 강에 달이 떴는데 저 멀리 고기잡이배에도 달이 떴다. 고개를 돌려 가까운 산을 보았더니, 낮에 풀어 놓았던 관청의 염소들이 안개를 밟고 부수는 듯이 안개를 뚫고 내려오고 있다. 비록 몸은 쇠했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라서 마음이 맑고 광활한 저 하늘로 올라가서 자신의 팔에 온 천지를 담아 술자리로 내려온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에서 박상(朴祥)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시는, 근고(近古)에는 이러한 품격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명가(名家) 속에 섞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석주(石洲) 권필(權韠), 눌재(訥齋) 박상(朴祥),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등 여러 문집만은 못하다. 동악(東岳)의 시(詩)는 언뜻 보면 맛이 없지만 다시 보면 좋다. 비유하자면 샘물이 졸졸 솟아 천 리에 흐르는 것과 같아서,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스스로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다. 읍취헌(挹翠軒)은 정신과 의경(意境)이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음운(音韻)이 청아한 격조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산수 간에 노니는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에서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배웠다고 하나 대개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아 당(唐)·송(宋)의 격조를 논할 것 없이 시가(詩家)의 절품(絶品)이라 할 만하다. 눌재(訥齋)는 고상하고 담백하여 스스로 무한한 취미(趣味)가 있으니, 비록 읍취헌과 겨룰 만하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석주(石洲)는 비록 웅장함은 부족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있는데 가끔은 깨우침을 주는 것이 있다. 성당(盛唐)의 수준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당(唐)의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면 너무 폄하한 것이다. 소재(蘇齋)는 19년간을 귀양살이하면서 노장(老莊)의 서적을 많이 읽어서 상당히 깨우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음운이 뛰어나게 웅장하다. 옛사람이 이른바 ‘황야(荒野)가 천 리에 펼쳐진 형세’라고 한 것이 참으로 잘 평가한 말이다.
그러나 그 대체는 염락(濂洛)의 기미(氣味)를 잃지 않았으니, 평생 한 학문의 힘은 역시 속일 수 없는 것이다(三淵之詩(삼연지시) 不但近古無此格(불단근고무차격) 雖廁中國名家(수측중국명가) 想或無媿(상혹무괴) 而猶遜於東岳挹翠石洲訥齋蘇齋諸集(이유손어동악읍취석주눌재소재제집) 東岳詩(동악시) 驟看無味(취간무미) 再看却好(재간각호) 譬如源泉渾渾(비여원천혼혼) 一瀉千里(일사천리) 橫看竪看(횡간수간) 自能成章(자능성장) 挹翠神與境造(읍취신여경조) 格以韻淸(격이운청) 令人有登臨送歸之意(영인유등림송귀지의) 世以爲學蘇黃(세이위학소황) 而蓋多自得(이개다자득) 毋論唐調宋格(무론당조송격) 可謂詩家絶品(가위시가절품) 訥齋淸高淡泊(재청고담박) 自有無限趣味(자유무한취미)
雖謂之頡頏挹翠(수위지힐항읍취) 未爲過也(미위과야) 石洲雖欠雄渾(석주수흠웅혼) 一味裊娜(일미뇨나) 往往有警絶處(왕왕유경절처) 謂之盛唐則未也(위지성당칙미야) 而謂之非唐則太貶也(이위지비당칙태폄야) 蘇齋居謫十九年(소재거적십구년) 多讀老莊書(다독로장서) 頗有頓悟處(파유돈오처) 故其韻遠(고기운원) 其格雄(기격웅) 古人所謂荒野千里之勢(고인소위황야천리지세) 眞善評矣(진선평의) 然其大體(연기대체) 則自不失濂洛氣味(칙자불실렴락기미) 平生學力(평생학력) 亦不可誣也(역불가무야)).”
〈주석〉
〖嘉平(가평)〗 12월. 〖上元(상원)〗 1월 15일. 〖半邊(반변)〗 일변(一邊). 〖艇〗 거룻배 정, 〖籠〗 싸다 롱,
〖渚〗 물가 저, 〖踏〗 밟다 답, 〖羃〗 덮다 멱, 〖羸〗 여위다 리, 〖凌〗 건너가다 릉, 〖淸曠(청광)〗 맑고 광활함.
각주
1 박상(朴祥, 1474, 성종 5~1530, 중종 25): 본관은 충주. 자는 세창(世昌), 호는 눌재(訥齋). 높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나 시를 잘 써서 조카 박순(朴淳) 그리고 이행(李荇)과 함께 당대에 이름을 떨쳤고, 박은(朴誾)과 더불어 후대에 높이 평가되었으며, 16세기 호남시단을 이끈 시인이다.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사가(四家)로 불린다. 1501년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등을 지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후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어 종친(宗親)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다시 종묘서령(宗廟署令), 임피현감(臨陂縣監) 등을 지냈고, 3년 만기가 되자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며 지냈다. 1515년(중종 6)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 주장과 박원종(朴元宗) 등 3명의 훈신(勳臣)이 국모(國母)를 내쫓은 죄를 묻기를 청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다음 해 풀려나서 순천부사 등을 지냈으나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 그만둔 뒤 상주와 충주목사를 지냈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했으나 병으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조」 이승소
[ 早朝 李承召 ]
東華待漏曙光回(동화대루서광회) 조정에서 조회를 기다리니 서광이 일며
萬戶千門次第開(만호천문차제개) 수많은 문이 차례로 열리네
雙鳳遙瞻扶玉輦(쌍봉요첨부옥련) 봉황이 멀리 보며 천자의 수레를 부축하고
九韶還訝下瑤臺(구소환아하요대) 구소곡 다시 맞아 요대에 내려오네
香煙殿上霏如霧(향연전상비여무) 향기로운 연기는 전각 위에 안개처럼 날리고
淸蹕雲間響轉雷(청필운간향전뢰) 맑은 벽제 소리 구름 사이에 우레처럼 울리네
聖代卽今家四海(성대즉금가사해) 성스러운 시대 당장 천하가 한집안이니
盡敎殊俗奉琛來(진교수속봉침래) 다 이국(異國)으로 하여금 보배 바치러 오게 하네
〈감상〉
이 시는 조회 때 일어나는 장면을 노래하면서 임금의 덕을 칭송하고 있어 이승소의 문재(文才)를 느낄 수 있는 시이다.
이승소는 “경연에서 범준(范浚)의 「심잠(心箴)」을 강의하고, 이어 아뢰기를, ‘임금의 마음에 좋아하고 미워함에 치우침이 있으면 좌우 신하들로부터 모든 집사(執事)에 이르기까지 각자 한쪽에 치우침에 말미암아 마음을 맞추려 할 것입니다. 만약 토공(土功)을 좋아하면 토공으로 맞추려 하고, 사냥을 좋아하면 사냥으로 맞추려 하고, 불로(佛老)를 좋아하면 불노로 맞추려 할 것입니다.
임금은 더욱 여기에 마음을 두고 조심하여 조금도 호악(好惡)의 편벽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於經筵講范浚心箴(어경연강범준심잠) 仍啓曰(잉계왈) 人君心有好惡之偏(인군심유호악지편) 則自左右至百執事(칙자좌우지백집사) 各因偏處而中之(각인편처이중지) 如好土功(여호토공) 則以土功中之(칙이토공중지) 如好田獵(여호전렵) 則以田獵中之(칙이전렵중지) 如好佛老(여호불로) 則以佛老中之(칙이불로중지) 人君尤當操存此心(인군우당조존차심) 不可少有好惡之偏(불가소유호악지편)).”라 한 『國朝寶鑑(국조보감)』의 기록대로 임금의 덕뿐만 아니라, 경계해야 할 것도 잊지 않았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사문 이윤인·이유인 형제가 이현을 지나다가 영천군(효녕대군(孝寧大君)의 아들)이 술에 취하여 남루한 옷을 입고 길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보통 사람이라 여기고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더니, 영천군이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하고는 말하기를, ‘너는 왕손(王孫)을 보고도 어찌 예를 하지 않느냐? 너희들은 누구냐?’ 하니, 이유인이, ‘우리는 문사로소이다.’ 하였다. 군이 ‘누구의 방(榜)에 급제하였느냐?’ 하니, 이유인이, ‘우리의 장원(壯元)은 고태정입니다.’ 하니, 군은 침을 뱉으며, ‘강자평의 유이니 너는 속히 물러가라.’ 하고, 윤인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니, ‘문사올시다.’ 하였다. ‘너는 누구의 방에 급제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의 장원은 이승소올시다.’ 하였다.
군이, ‘너는 「백두산부(白頭山賦)」를 아느냐?’ 하니, 이윤인이 외우자, 군은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보냈다(有斯文李尹仁有仁兄弟過梨峴(유사문리윤인유인형제과리현) 適君因醉微服坐路旁(적군인취민복좌로방) 二人以爲凡人(이인이위범인) 而不下馬(이불하마) 君使人招之曰(군사인초지왈) 汝見王孫(여견왕손) 何不禮焉(하불례언) 汝是何人(여시하인) 有仁曰我是文士(유인왈아시문사) 君曰(군왈) 誰人榜登第(수인방등제) 有仁曰(유인왈) 吾壯元則高台鼎(오장원칙고태정) 君唾涎曰(군타연왈) 姜子平之類(강자평지류) 汝可速退(여가속퇴) 問尹仁曰(문윤인왈) 汝是何人(여시하인) 答曰(답왈) 文士也(문사야) 曰(왈) 誰人榜登第(수인방등제) 答曰(답왈) 吾壯元李承召也(오장원이승소야) 君曰(군왈) 汝知白登山賦乎(여지백등산부호) 尹仁誦之(윤인송지) 君頓首禮拜而送之(군돈수례배이송지)).”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승소(李承召)의 시명(詩名)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주석〉
〖東華(동화)〗 중앙관서(中央官署)나 조정(朝廷)을 뜻함. 〖待漏(대루)〗 백관이 조정에 들어가 천자의 조회를 기다림. 〖曙〗 새벽 서, 〖雙鳳(쌍봉)〗 봉황(鳳凰). 〖玉輦(옥련)〗 천자가 타는 수레.
〖九韶(구소)〗 순(舜)임금 때의 악곡(樂曲) 이름. 〖訝〗 맞다 아, 〖瑤臺(요대)〗 전설상 신선의 거처.
〖霏〗 올라가다 비, 〖蹕〗 벽제 필, 〖琛〗 보배 침
각주
1 이승소(李承召, 1422, 세종 4~1484, 성종 15):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 1447년(세종 2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문과중시에도 합격했다. 부교리를 거쳐 145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1454년(단종 2) 장령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한 뒤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1457년(세조 3) 예문관응교로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예조참의로 『초학자회언해본(初學字會諺解本)』을 지어 바쳤다. 1459년 사은사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예문관제학·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으며,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를 지냈다. 이때 경연에서 사서(史書)의 간행·보급 및 교육의 강화와 불교 탄압을 주장했다. 그 뒤 우참찬을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이조·형조 판서를 지내면서 신숙주(申叔舟)·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했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예악(禮樂)·병형(兵刑)·음양(陰陽)·율력(律曆)·의약(醫藥)·지리(地理) 등에도 능통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고목」 김시습
[ 枯木 金時習 ]
長枝蟠屈小枝斜(장지반굴소지사) 긴 가지는 서려 굽고 작은 가지는 비꼈는데
直幹亭亭聳碧霞(직간정정용벽하) 곧은 줄기는 정정하게 푸른 노을에 솟아 있네
幾歲倚巖排雨雪(기세의암배우설) 몇 해나 바위에 기대 비와 눈을 맞으면서
何年趠走化龍蛇(하년탁주화룡사) 어느 해 뛰고 달려 용과 뱀이 되려는가?
瘤皮臃腫莊生木(유피옹종장생목) 혹이 난 껍질 울퉁불퉁 장자 나무인 듯한데
奇狀巃嵷漢使槎(기상롱종한사사) 기이한 모습 우뚝우뚝 한대 사절 뗏목일세
春至無心天亦惜(춘지무심천역석) 봄이 와도 무심하니 하늘마저 애석한데
敎藤爲葉蘇爲花(교등위엽소위화) 등나무로 잎 만들고 이끼로 꽃 피웠네
〈감상〉
이 시는 마른 나무를 읊은 영물시(詠物詩)로, 고목(枯木)에 자신을 의탁(依託)하고 있다.
고목(枯木)의 긴 가지는 서려서 굽어 있고 작은 가지는 기울어졌는데, 곧은 줄기는 푸른 하늘로 꼿꼿하게 솟아 있다. 고목은 바위에 기댄 채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비바람의 풍상을 겪었으며, 어느 때 멀리 달려 용과 뱀처럼 될 수 있을 것인가? 장자(莊子)가 산속을 지나다 본 무용(無用)한 나무가 유용(有用)하듯 울퉁불퉁 껍질에 혹이 나 있고, 월씨국(月氏國)으로 사신 가다가 흉노족에 사로잡혀 10여 년간 포로 생활을 하였던 장건(張騫)이 타고 가던 뗏목인 양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봄이 와도 나뭇잎을 피우지 못하는 고목을 하늘도 애석하게 여겼던지 등나무로 잎을 만들고 이끼로 대신 꽃을 피웠다.
김시습(金時習)은 지금은 고목(枯木)이 되어 하늘마저도 애석하게 여기는 처지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길게 뻗은 가지와 곧은 줄기가 하늘 높이 솟아 있던 고목(高木)이었다. 고목에 자신의 삶을 기탁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정조(正祖)가 “매월당은 절개만 기이한 것이 아니라 그 시도 매우 기이하다. 내가 반드시 모아 오래도록 전하려고 하는 것은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다(梅月堂非但節槩殊異(매월당비단절개수이) 其詩絶奇(기시절기) 予之必收輯裒梓(여지필수집부재) 俾壽其傳者(비수기전자) 非偶爾也(비우이야)『홍재전서(弘齋全書)』).”라고 언급한 것은 위의 시와 같은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주석〉
〖蟠〗 두르다 반, 〖幹〗 줄기 간, 〖亭亭(정정)〗 곧게 선 모양. 〖聳〗 솟다 용, 〖排〗 밀치다 배, 〖趠〗 뛰다 탁, 〖龍蛇(룡사)〗 용과 뱀으로, 걸출한 인물에 비유. 〖瘤〗 혹 류(유), 〖臃腫(옹종)〗 구조물이 큰 것을 비유함.
〖巃嵷(롱종)〗 산세가 높고 험한 모양. 〖槎〗 뗏목 사, 〖藤〗 등나무 등, 〖蘇〗 풀 소
각주
1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 17~1493, 성종 24):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5세 때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아 오세신동(五歲神童)이라 일컬어졌다. 과거준비로 삼각산(三角山) 중흥사(中興寺)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湳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야를 넓게 했다. 그의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중민(重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구가하는 사상으로 확립된다.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에서 그 근원을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혼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즉사」 이옥봉
[ 卽事 李玉峯 ]
柳外江頭五馬嘶(유외강두오마시) 버들 너머 강 머리 오마가 울어대니
半醒半醉下樓時(반성반취하누시) 반쯤 깼다 반쯤 취해 다락에서 내릴 때로세
春紅欲瘦臨鏡粧(춘홍욕수림경장) 화장이 얇을세라 경대 앞에 앉아
試畫梅窓却月眉(시화매창각월미) 시험 삼아 매화 창의 반달눈썹 그린다오
〈감상〉
이 시에 대해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에서, “이옥봉의 「즉사(卽事)」 시에 ······라 하였고, 「규정(閨情)」 시에는, ······하였는데, 모두 멋과 운치가 있다(玉峯詩(옥봉시) 如卽事(여즉사) 柳外江頭五馬嘶(유외강두오마시) 半醒半醉下樓時(반성반취하루시, 案嘉林世稿(안가림세고) 作半醒愁醉(작반성수취)) 春江欲瘦臨粧鏡(춘강욕수림장경) 試畵樓窗却月眉(시화루창각월미) 閨情(규정) 有約郞何晩(유약랑하만)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虗盡鏡中眉(허진경중미) 皆有情致(개유정치)).”라 평하고 있다.
〈주석〉
〖五馬(오마)〗 옛날 태수(太守)의 수레는 다섯 필의 말이 끌었으므로, 전하여 태수의 별칭으로 쓰임. 〖嘶〗 울다 시, 〖瘦〗 마르다 수, 〖月眉(월미)〗 부녀자의 초승달과 같은 빼어난 눈썹.
각주
1 이옥봉(李玉峰, ?~?): 선조 때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조원(趙瑗)의 소실(小室)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한 권의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영월도중」 이옥봉
[ 寧越道中 李玉峯 ]
五日長關三日越(오일장관삼일월) 닷새간 길게 문 닫았다 사흘에 넘어서자
哀辭唱斷魯陵雲(애사창단노릉운) 노릉의 구름 속에서 슬픈 노래도 끊어지네
妾身亦是王孫女(첩신역시왕손녀) 첩의 몸도 또한 왕손의 딸이라서
此地鵑聲不忍聞(차지견성불인문) 이곳의 두견새 울음은 차마 듣기 어려워라
〈감상〉
이 시는 비운의 임금 단종(端宗)이 묻혀 있는 영월을 지나면서 읊은 시이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에, “나의 누님 난설헌(蘭雪軒)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백옥(伯玉)은 조원(趙瑗)의 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청장(淸壯)하여 지분(脂粉)의 태가 없다. 영월로 가는 도중에 시를 짓기를, ······라 하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었다(家姊蘭雪一時(가자란설일시) 有李玉峯者(유이옥봉자) 卽趙伯玉之妾也(즉조백옥지첩야) 詩亦淸壯(시역청장) 無脂粉態(무지분태) 寧越道中作詩曰(영월도중작시왈) 五日長關三日越(오일장관삼일월) 哀歌唱斷魯陵雲(애가창단로릉운) 妾身亦是王孫女(첩신역시왕손녀) 此地鵑聲不忍聞(차지견성불인문) 含思悽怨(함사처원)).”라 평하고 있다.
〈주석〉
〖關〗 닫다 관, 〖魯陵(노릉)〗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의 능. 〖鵑〗 두견이 견
각주
1 이옥봉(李玉峰, ?~?): 선조 때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조원(趙瑗)의 소실(小室)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한 권의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재화택지」 박은
[ 再和擇之 朴誾 ]
深秋木落葉侵關(심추목락엽침관) 깊은 가을 낙엽이 문을 치고 들어오는데
戶牖全輸一面山(호유전수일면산) 창은 한쪽의 산을 온통 실어 들이네
縱有盃尊誰共對(종유배준수공대) 비록 술잔과 술병이 있은들 누구와 마시리오
已愁風雨欲催寒(이수풍우욕최한) 이미 비바람이 추위를 재촉할 것 걱정하노라
天應於我賦窮相(천응어아부궁상) 하늘이 응당 나에게 궁한 팔자 주었으니
菊亦與人無好顏(국역여인무호안) 국화조차도 사람에게 좋은 안색 보이지 않네
撥棄憂懷眞達士(발기우회진달사) 근심을 떨쳐 버려야 참으로 도사이니
莫敎病眼謾長潸(막교병안만장산) 병든 눈 부질없이 늘 눈물 흘리게 하지 말게나
〈감상〉
이 시 역시 이행(李荇)에게 화답하여 준 시이다.
가을이 깊어 떨어진 낙엽이 문으로 바람 따라 들어오는데 창을 여니 남산이 문을 통해 다 보인다. 허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술이 제격인데, 술이 있어도 대작하여 마실 사람이 없다. 더구나 이미 비바람이 겨울을 재촉하고 있어 걱정스럽다. 타고난 팔자를 궁하게 타고난 우리들이라 국화마저도 아름답게 피지 않았다. 하지만 근심 속에 빠져 있어서야 진정한 달사(達士)라 하겠는가? 그러니 더 이상 눈물 흘리지 말자.
보통 시에서는 ‘어(於)’와 ‘여(與)’ 같은 어조사를 잘 쓰지 않는데, 박은은 3연에서 이러한 어조사를 사용하고 있으며, ‘궁상(窮相)’ 또한 시인이 좋아하는 우아한 표현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강서시파(江西詩派)에서 ‘이속위아(以俗爲雅, 속된 것을 우아(優雅)로 만든다)’라는 이론을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선조조(宣祖朝) 이하에 나온 문장은 볼만한 것이 많다. 시와 문을 겸한 이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고, 시로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을 제일로 친다는 것이 확고한 논평이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에 이르러 대가(大家)를 이루었으니, 이는 어느 체제이든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화려하여 명가(名家)를 이룬 이는 유하(柳下) 최혜길(崔惠吉)이고 당(唐)을 모방하는 데 고질화된 이는 손곡(蓀谷) 이달(李達)이며,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옛사람의 말만 전용한 것이 많으니 유감스럽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은 염락(濂洛)의 풍미를 띤데다 색향(色香)에 신화(神化)를 이룬 분이고,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시는 정밀한데다 식견이 있고 전아(典雅)하여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宣廟朝以下文章(선묘조이하문장) 多可觀也(다가관야) 詩文幷均者(시문병균자) 其農岩乎(기농암호) 詩推挹翠軒爲第一(시추읍취헌위제일) 是不易之論(시불역지론) 然至淵翁而後(연지연옹이후) 成大家藪(성대가수) 葢無軆不有也(개무체불유야) 纖麗而成名家者(섬려이성명가자) 其柳下乎(기류하호) 痼疾於模唐者(고질어모당자) 其蓀谷乎(기손곡호) 蘭雪(란설) 全用古人語者多(전용고인어자다) 是可恨也(시가한야) 龜峯(구봉) 帶濂洛而神化於色香者(대렴락이신화어색향자) 澤堂之詩(택당지시) 精緻有識且典雅(정치유식차전아) 不可多得也(불가다득야)).”라 하여, 박은(朴誾)의 시(詩)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주석〉
〖牖〗 창 유, 〖輸〗 나르다 수, 〖尊〗 술통 준, 〖催〗 재촉하다 최, 〖賦〗 주다 부, 〖撥〗 없애다 발,
〖敎〗 =사(使), 〖謾〗 부질없이 만, 〖潸〗 눈물 흐르다 산
각주
1 박은(朴誾, 1479, 성종 10~1504, 연산군 10):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의 성취와 문장이 남달리 뛰어나 4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8세에 대의(大義)를 알았으며, 15세가 되어서는 널리 명성을 얻어 당시 대제학이던 신용개(申用漑)의 사위가 되었다. 17세(1495년)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인 1496년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성품이 곧아 옳은 소리를 잘했다. 1501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 연산군(燕山君)의 비호를 받던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사사불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이후 실의에 빠져 시와 술만을 즐기며 지냈다. 25세(1503년)에 동갑이던 아내를 잃었다. 이듬해 봄에 지제교로 복직되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음력 6월에 효수되었는데, 성격이 참으로 강직하여 죽음을 앞두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는 예전에 연산군이 밤늦게 사냥한 일을 여러 신하와 연명 상소한 일의 주동자였다는 것이었고, 죄명은 ‘사충자안 신진모장관(詐忠自安 新進侮長官, 거짓 충성으로 제 안일을 구하고 신진이 상관을 업신여김)’이었다. 연산군은 박은을 너무 미워하여 그가 죽은 지 4일 후에 의금부로 하여금 박은의 친구들을 색출하여 곤장을 치게 하고 그들을 유배 보냈으며, 음력 8월에는 전교를 내려 박은의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 두게 한 다음, 봉분 없이 묻게 했다. 1505년에는 음사해인(陰邪害人)이라는 죄목을 추가하였다. 3년 뒤에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양근야좌 즉사시동사」 정사룡
[ 楊根夜坐 卽事示同事 鄭士龍 ]
擁山爲郭似盤中(옹산위곽사반중) 산을 끼고 이룬 성곽이 소반과 비슷한데
暝色初沈洞壑空(명색초침동학공) 노을이 막 지자 골짜기는 텅 빈 듯하네
峯項星搖爭缺月(봉항성요쟁결월) 봉우리에 별빛이 반짝이며 이지러진 달과 다투니
樹巓禽動竄深叢(수전금동찬심총) 나무 끝에 새가 움직여 깊은 숲으로 숨네
晴灘遠聽翻疑雨(청탄원청번의우) 맑은 여울 소리 멀리서 들려 빗발이 뿌리는 듯
病葉微零自起風(병엽미령자기풍) 병든 잎 살짝 떨어지자 절로 바람 일어나네
此夜共分吟榻料(차야공분음탑료) 이 밤 시를 읊는 침상 값을 함께 내겠지만
明朝珂馬軟塵紅(명조가마연진홍) 내일 아침이면 붉은 흙길에 말방울소리 울리겠지
〈감상〉
이 시는 양근에서 밤에 앉아 즉석에서 시를 지어 동료에게 보여 준 것이다.
탄핵을 받아 물러난 양근은 마치 소반처럼 성곽이 둘러싸여 있어 해가 지자 어둠에 휩싸인다. 산봉우리에 별빛이 반짝이며 조각달과 빛을 다투니, 나뭇가지에 있던 새가 눈이 부시는지 더욱 깊은 숲으로 날아간다. 달이 떴으니 비가 오지는 않을 텐데, 마치 빗소리인 듯 멀리서 여울물 소리가 거세며, 바람이 부는지 낙엽소리가 들린다. 지금은 나란히 누워서 시를 읊조리지만, 내일이 되면 다시 속세로 떠나야 한다.
홍만종의 『소화시평』에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싣고 있다.
“양곡 소세양(蘇世讓)이 이러한 말을 하였다. ‘국조 이래로 각 시대마다 작가가 있어 각자 명가라고 떨쳤으나, 치우친 나라의 기습에 얽매인 단점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유려한 데 빠지지 아니하면 짜 맞추는 데 빠졌다.
그런데 호음 정사룡은 기이하고 예스럽고 깎아지른 듯하고 빼어나서 시들고 얽매인 기운을 완전히 씻어 버렸기 때문에 당나라 이하(李賀)나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재주를 겨룰 만하다.’ 호음의 「야좌즉사(夜坐卽事)」에, ······라 하였는데, 이 시는 참으로 하늘이 높아진 가을에 홀로 자연을 조망하고, 저녁 비가 개인 뒤에 외로이 피리를 부는 경지라 일컬을 수 있겠다(陽谷曰(양곡왈) 國朝以來(국조이래) 代有作者(대유작자) 各擅名家(각천명가) 而未免偏邦氣習之累(이미면편방기습지루) 不趨於流麗(불추어류려) 則或失於組織(칙혹실어조직) 鄭湖陰士龍奇古峭拔(정호음사룡기고초발) 一洗萎累之氣(일세위루지기) 可與唐之長吉義山並較才云(가여당지장길의산병교재운) 湖陰夜坐卽事詩曰(호음야좌즉사시왈) ······眞所謂高秋獨眺(진소위고추독조) 晩霽孤吹(만제고취)).”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의 「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정사룡(鄭士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詩)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정사룡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이몽양(康海·李夢陽, 명(明)의 전칠자(前七子)로 시문(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文)은 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詩)는 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吾東僻在海隅(오동벽재해우) 唐以上文獻邈如(당이상문헌막여) 雖乙支(수을지), 眞德之詩(진덕지시) 彙在史家(휘재사가)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불감신기과출어기수야) 及羅季(급라계) 孤雲學士始大厥譽(고운학사시대궐예) 以今觀之(이금관지) 文菲以萎(문비이위) 詩粗以弱(시조이약) 使在許鄭間(사재허정간) 亦形其醜(역형기추) 乃欲使盛唐爭其工耶(내욕사성당쟁기공야) 麗代知常(여대지상) 足窺一斑(족규일반) 亦晩李中穠麗者(역만이중농려자) 仁老奎報(인로규보) 或淸或奇(혹청혹기) 陳澕洪侃(진화홍간) 亦腴艶(역유염) 而俱不出長公度內耳(이구불출장공도내이) 及至益齋倡始(급지익재창시) 稼牧繼躅(가목계촉) 圃陶惕(포도척) 爲季葉名家(위계엽명가) 逮國初(체국초) 三峯陽村(삼봉양촌)
獨擅其名(독천기명) 文章至是(문장지시) 始可稱達(시가칭달) 追琢炳烺(추탁병랑) 足曰丕變(족왈비변) 而中興之功(이중흥지공) 文靖爲鉅焉(문정위거언) 中間金文簡得圃(중간김문간득포), 陽之緖(양지서) 人謂大家(인위대가) 只恨文竅之透不高(지한문규지투불고) 其後容齋相詩入神(기후용재상시입신) 申鄭亦瞠乎其後(신정역당호기후) 蘇相又力振之(소상우력진지) 玆數公(자수공) 使生中國(사생중국) 則詎盡下於康李二公乎(칙거진하어강이이공호) 當今之業(당금지업) 文推崔東皐(문추최동고) 詩推李益之(시추이익지) 俱是千年以來絶調(구시천년이래절조) 而儕類中汝章甚婉亮(이제류중여장심완량) 子敏甚淵伉(자민심연항) 此外則不能知也(차외칙불능지야)).”
〈주석〉
〖楊根(양근)〗 양평. 〖同事(동사)〗 같은 일을 하는 사람. 동료. 〖盤〗 소반 반, 〖暝〗 어둡다 명, 〖搖〗 흔들리다 요, 〖缺〗 이지러지다 결, 〖巓〗 머리 전, 〖竄〗 숨다 찬, 〖灘〗 여울 탄, 〖翻〗 뒤집다 번, 〖吟榻(음탑)〗 시를 조탁함(진사도(陳師道)가 밖에서 좋은 시구(詩句)가 떠오르면 급히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를 조탁했다 함). 〖珂〗 말굴레 장식 가
각주
1 정사룡(鄭士龍, 1491, 성종22~1570, 선조3): 본관은 동래.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 1509년 생원을 거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숙부 정광필(鄭光弼)이 영의정을 지낸 명문가로, 중종과 명종대에 관각(館閣)을 이끌었으며,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나 탐학리(貪虐吏)라는 비난을 들었다(시를 잘 지었기 때문에 탐학리라는 면을 더 부각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저서로 『호음잡고(湖陰雜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