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아이들과
말과 글 성인 이야기 시간에 원효 대사를 배우는 중이다.
원효...
우리 성인이야기라서 접근성이 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다.
아마도 일단 원효의 생애는 알아도
사상에 대한 깊이가 없으니,
그 뜻을 알기가 어렵다.
(애들 에포크를 준비하며, 늘 내 무식함이 드러난다.
그러고 어찌 대입 입시학원 강사며, 공교육 교사를 했을까..
게다가 지금은 발도르프 교사로 아이들 앞에 서는게, 가끔은 사기치는 기분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 心造) 역시도
그의 이후 삶을 통해 읽어내 보려 할 때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항상 문제이다.
모든 것이 다 마음먹기 나름인가?
아님,
모든 것이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상인가?
그 둘은 같은가?
아님 다른가?
마음은 생각인가? 의지(뜻)인가?
그의 해탈은 무엇이었을까?
유학길을 나서기 전,
이미 신라에서 공부가 깊은 학승 중 하나였던 그가,
44살이라는 많은 나이에
유학길을 올랐다면
그 심지가 보통은 아니었을텐데,
해골물 한 바가지가
삶을 송두리채 바꿀 정도로
그렇게 깊은 깨달음을 줄 수 있는걸까?
평범한 현대의 보잘것없는 지성을 가진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불법을 민중에게 전파하다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을 때,
마지막 원효라는 이름까지 내어주길 바라는
신의 뜻에 순명하여
(자식이 내려오는 일을 잘 이루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
파계의 끝판왕으로 보일 수 있는
그의 기행은
결국 원효라는 이름마저 내어준 채
소성거사로
철저히 낮은데로 임하였던 원효.
도대체 해골 물 한 바가지로 무엇을 깨달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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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에 소재한 소요산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자재암이 있고, 이곳에는 원효대사의 부인이었던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과 함께 머물렀던 요석궁의 옛터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요석궁의 옛터는 찾을 수 없으나 그들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자재암에 있었다고 전하는 요석궁지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자재암이 있다.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이 자재암에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과 함께 머물렀던 요석궁의 옛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요석궁의 옛터는 찾을 길이 없으나, 지금도 그 일대에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요석공주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원효대사
신라 때의 일이다. 하루는 원효대사가 경주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 많은 사람이 그 노래를 들었지만, 누구도 그 노래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때 노래를 들은 태종무열왕은 ‘누군가 원효대사와 귀부인을 맺어주면 신라의 큰 보탬이 되는 인물이 태어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무열왕의 딸 가운데 요석공주가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었기에 원효대사와 맺어줄 결심을 하고 그 방법을 찾았다. 이 사실을 들은 요석공주도 평소 원효대사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지라 매우 기뻐하였다.
원효대사를 그리워했던 요석공주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
그러던 어느 날, 궁궐 사람들은 원효대사가 문천교를 지난다는 사실을 알고 요석공주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요석공주는 반드시 원효대사를 궁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하였고, 나졸들은 문천교 밑에서 원효대사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원효대사가 문천교 들어서자 나졸 대장이 정중하게 “원효대사님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요석궁으로 가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원효대사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가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급해진 대장은 원효대사의 앞을 막고, “대사님 저와 무예를 겨루어 이기시면 가던 길을 가시고, 지면 저희와 함께 가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이를 승낙하고 무술을 겨루었다. 허나 무술이 뛰어났던 대장도 출가 전 낭도로서 무예가 깊었던 원효대사에게는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기대와 달리 대장이 패하자, 이번에는 모든 나졸이 한꺼번에 덤볐으나 이길 수 없었다. 마지막 나졸 하나가 원효대사를 잡으려 하자 일부러 발을 헛디딘 척하며 문천교 밑으로 빠졌다. 결국, 원효대사는 나졸들과 함께 요석궁으로 갔고, 요석공주는 젖은 옷을 말려야 한다며 며칠 동안 궁에 머물게 하였다.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머물렀던 것은 단 사흘뿐이었지만, 요석공주와 인연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고, 훗날 설총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승복을 벗고 파계승이 된 원효대사
이 사건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 승복을 벗고 파계승이 되었고, 자신을 ‘소성거사’라 하였다. 그리고 광대들이 사용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라는 도구를 만들어 북처럼 치고 다녔는데, 이렇게 신라 전역을 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하여 삼국통일의 원천이 되도록 하였다. 이후 원효대사는 40세가 되었을 때 소요산의 원효대에서 수행에 전념하였고, 요석공주도 설총을 데리고 원효대 인근에 작은 별궁을 짓고, 아침마다 원효대를 향해 삼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때의 별궁터가 지금의 요석궁지이다.
사흘간의 사랑, 그리고 오랜 그리움
원효대사를 가리켜 한국 최고의 학승이며, 민중들을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한 최고의 승려라 말한다. 그러면서 요석공주는 원효대사를 파계시킨 사연 많은 과부쯤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석공주는 당대 최고의 승려이자 엘리트였던 원효대사의 모든 굴레를 벗겨주었고, 원효대사가 민중 속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도와준 인도자였다. 물론 여인이었기에 오랜 그리움으로 사랑하는 임에 대한 원망과 설움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흔들림 없이 먼발치에서 원효대사를 지켰던 요석공주의 ‘바위 같은 사랑’은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