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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겸손의 모델은 누구인가? / 빌 2:1-11
전쟁중에 한 신부가 동부에서 군인인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사막끝까지 왔습니다. 그곳 생활조건은 아무리 좋게 되어도 원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가 오는 것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집은, 인디언 마을 근처의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었습니다. 낮에는 그늘에서도 온도가 40도가 넘었습니다. 바람은 쉴새 없이 불었으며, 어느 곳이든 먼지며, 모래가 수북히 싸였습니다. 하루하루가 길고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이웃이라야 인디언뿐이었고, 그들은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작전 명령을 받고, 2주 동안 사막 깊숙히 들어가는 바람에, 아내의 외로움과 비참한 생활 여건으로, 그녀에게서 좋은 것까지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녀는 더이상 견딜 수 없어, 어머니에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얼마 후 두 줄짜리 답장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창살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땅을 보고, 다른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아내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마침내 무슨 뜻인지 깨닫고는,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별을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인디언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옷감 짜는 법, 도자기 굽는 법 등을 배웠습니다. 인디언들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생활에 친숙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사막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책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선인장과 유카와 조수아나무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막은 황량하고 쓸쓸한 곳에서, 아름답고 기묘한 곳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 여인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책까지 펴냈습니다. 무엇이 변했습니까? 사막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디언들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 여인이 마음을 바꾸자,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니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크게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실까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몇 가지 바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진보하기를 바랐습니다. 믿음이 점진적으로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믿음이 퇴보하지 않고, 점점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를 바랐습니다. 복음을 받고 복음을 가진 자답게 생활하기를 바랐습니다. 복음과 생활이 걸맞은 자로 살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은혜를 받은 자로서 고난도 받기를 바랐습니다. 받은 은혜로 고난을 이겨내기를 바랐습니다. 고난의 보자기에 싸인 은혜를 알아보기를 바랐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가 나오고 기쁨의 간구가 나오는 교회였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교회였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지상에 있는 교회 치고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또한 교회의 구성원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항상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는 셈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평안하여 든든히 서갈 수 있습니다.
마귀는 어떻게든 교회 공동체를 흔들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과 교회 다니는 것을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교회생활이 행복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교회 다녀봤자 특별한 거 없다는 생각을 불어넣습니다. 교회 안 다닌 것보다야 조금 낫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교회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예배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가 내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교회가 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내 주변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놀이터가 아닙니다. 교회는 훈련장입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교회는 전투함입니다. 늘 웃음만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늘 재잘거리는 노랫소리만 있을 수 없습니다.
2: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교회 안에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교회 안에 권면이 필요합니다. 권면의 사전적 정의는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다음은 목회자의 권면이 있습니다. 또한 리더의 권면이 있습니다. 알아듣도록 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알아듣기만 하면 격려하여 힘쓰게 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때론 알아듣기는 한데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면 권면하다가 화가 치밉니다. 그럼 친근하면 뭐라도 한 소리하고, 덜 친근하면 조용히 돌아섭니다. 권면하다가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됩니다. 또한 교회 안에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의 사전적 정의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입니다. 교회에는 유독 상처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상처 때문에 교회를 찾게 된 사람이 많아서일 것입니다. 저는 “상처 받았다”는 말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상처 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상처를 혼자 다 받은 것처럼, 입만 열었다하면 “나 상처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럼 곁에 있는 사람들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분명한 것은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치유 사역자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라고 해서 별다른 게 아닙니다. 따뜻한 말입니다. 가슴 따뜻한 말입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말이 위로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 교제가 필요합니다. 일반 교제가 아닙니다. 성령의 교제, 영적인 교제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교제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일반 교제를 함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그럼 교회가 라이온스 같은 클럽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인데, 어느 교회는 교회 안에 계가 있는 경우도 봤습니다. 같은 계원이라고 서로 챙겨주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그건 교회 안의 분파입니다. 그들의 교제는 성령의 교제와 무관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 긍휼이나 자비가 필요합니다. 둘의 의미가 비슷합니다. 마틴의 견해에 따르면, 긍휼은 사랑에서 비롯된 동정이나 애정을 가리키고, 자비는 긍휼에서 비롯된 외부적 표현입니다. 긍휼과 자비는 약자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특히 초대교회 때는 교회 안에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첫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긍휼사역인 구제를 열심히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만큼 교회 안에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3만5천불 시대에 도달했지만,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부가 복지정책을 펴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각지대가 존재합니다. 교회가 긍휼사역을 멈추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2:2절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교회에 필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그건 일치입니다. 일치는 마음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일치는 같은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치는 뜻을 합하는 것입니다. 일치는 한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0절에서 일치를 강조합니다. 고전 1: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줄여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분파가 있었고, 분쟁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장점이 많았음에도, 분쟁 때문에 장점이 묻히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게 싸움입니다. 애들은 싸우면서 큽니다. 하지만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가 싸우다가 싸우다가 해결이 안 돼, 결국 사회 법정에 가기도 합니다. 사회 법정에서도 교회 재판을 가장 골치 아파한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교회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툼과 허영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툼은 의견이나 이해의 대립으로 서로 따지며 싸우는 일입니다. 허영은 자기 분수에 넘치고 실속이 없이 겉모습뿐인 영화 또는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말합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따지며 싸우는 데까지 가면 안 됩니다. 겉모습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의 겉치레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기 분수에 맞아야 합니다. 다툼이나 허영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다툼은 자기 의견을 주장하여 자기를 드러냅니다. 허영은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통하여 자기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다툼과 허영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교회 일치를 깨뜨리는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다툼과 허영 때문인 것입니다. 일치를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다툼과 허영이라면,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겸손입니다. 오늘날은 겸손을 미덕으로 쳐줍니다. 하지만 당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예 근성에서 비롯된 굴욕과 비굴함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겸손의 의미를 바꿔놓으셨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겸손이 상당한 미덕입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얘기에 반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처럼 모두가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세태에서 겸손을 얘기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겸손이 뭔가요? 겸손의 사전적인 정의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입니다. 3절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일치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가능합니다. 일치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나서, 일이 잘 풀렸을 때 뭐라고 인사해야 합니까? “주의 은혜입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여기에 내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주의 은혜로 여기고, 당신 덕분으로 돌립니다. 이때 여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이게 다 내 덕인 줄 아시오.” 이런 말 듣고 기분 좋아질 사람 없습니다. 농담이라도 이런 주장을 자주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치가 깨집니다. 일치는 겸손의 결과물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모인 곳에는 일치가 자연스럽습니다.
겸손이 쉬운 건 아닙니다. 미국 흑인들의 애환을 그린 ‘뿌리’라는 책을 쓴 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자신의 사무실에 이상한 그림을 걸어 두었습니다. 거북이가 높은 담장 위에 올라가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왜 저런 그림을 걸어 두었나요?” 헤일리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가끔 난 나 자신을 보며 스스로 교만에 빠집니다. 이렇게 위대한 글을 쓴 것이 마치 내가 한 것인 양, 그럴 때마다 나는 저 그림을 보며 ‘저 거북이가 스스로 저 높은 담장에 올라간 것이 아니지. 누군가의 도움으로 저기 올라갔지’란 생각을 하며, 내가 여기까지 올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생각합니다.” 작가 헤일리 같이, 자신이 겸손을 잃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럼에도 순간 방심하면 겸손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겸손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할수록 어려운 문제입니다. 겸손이 어디로부터 나오느냐를 생각해보면 가장 우선적으로 자기평가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의 순서를 생각해 봅시다. 남을 존중하는 게 먼저입니까? 자신을 낮추는 게 먼저입니까? 사실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를 낮추어야 다른 사람이 존중됩니다. 나를 높이 두고 있는 한은 다른 사람을 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나를 낮춘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겠습니까? 나를 얼마까지 낮추어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까? 진정으로 죄 된 자기의 본래성, 약한 자기 존재의 정체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겸손한 마음의 출발,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게 오늘의 이것은 오직 은혜로 있는 것입니다. 내가 더 큰 죄를 지을 수도 있는데 여기서 멈출 수 있었다는 것이 은혜요, 내가 더 나빠질 수 있는 사람인데 요만큼에 멈춘 것도 은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는 존재는 이만큼의 의, 이만큼의 거룩함이 있을 수 없는 사람인데 나에게 주어진 이 현실 자체가 은혜중의 은혜요,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이만큼의 오늘 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사탄도 유혹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험의 꺼리가 있어야 사탄도 시험을 하는데, 겸손한 사람에게는 시험의 꺼리가 없습니다. 교만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시험하기가 참 좋은데, 정말 겸손한 사람은 사탄마저도 시험꺼리가 없다는 말, 생각해 볼만합니다. 만약 나에게 시험이 있다면, 내가 겸손하지 못해서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 덕목을 겸손이라고 거듭 거듭 강조했던 어거스틴입니다. 그런 그에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제자인 레라를 찾았습니다. “레라~, 레라~”,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으니까, 홧김에 제자의 방을 찾아갔습니다. 노크도 안 하고, 방문을 확 잡아 당겼습니다. 순간 깊은 기도에 잠겨 있는 레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경솔함과 오만스러움을 통회하면서, 제자 앞에 엎드려 목을 내밀었습니다. “제자여, ‘이 교만한 어거스틴아’ 하면서 목을 세 번만 밟고 넘어가게”라고 소리쳤습니다. 잠시 실수한 것이지만, 겸손과 통회함으로 제자에게 용서를 철저히 빌었던 것입니다. 이 일화를 통해, ‘그를 괜히 성 어거스틴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에 비해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면이 있습니다. 타인이 교만한 꼴은 죽어도 못 보면서, 자신은 교만하게 굴기 쉽습니다. 겸손은 우리가 평생 수련해야 할 과정입니다.
2:4절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교회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타인에게 떠넘겨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손이 안 가게 해야 합니다. 리더가 믿고 맡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자기 일을 돌보되,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일도 돌보지 못한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대신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 숙제를 대신해 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곁에서 조금 거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때도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처럼 가르치려고 들면 안 됩니다.
2: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예수님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려고 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 11: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겸손은 예수님의 심성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품성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인품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겸손 그 자체이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걸 말해줍니다.
2:6-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부분을 신학용어로 ‘그리스도의 비하’라고 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 성육신이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로 탄생하셨습니다. 2) 율법에 대한 복종이 있습니다. 율법의 제정자가 율법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3) 수난이 있습니다.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고,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고초를 겪으셨고, 인류의 죄를 뒤집어쓰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습니다. 4) 죽으심이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저주의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5) 장사됨이 있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어, 타인의 무덤을 빌려 그곳에서 3일간 계셨습니다. 6) 지옥에 내려가심이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장사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 구약의 성도들을 구속하셨다고 합니다. 루터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 흑암 권세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지옥에 내려가심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3:18-19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신데, 성육신을 통해 낮아져서 지옥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2: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런 주님을 가만히 보고만 계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님을 높여주셨습니다. 이걸 신학용어로 ‘그리스도의 승귀’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승귀의 내용을 살펴보면, 1) 부활이 있습니다. 무덤에 갇힌 지 제 삼일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2) 승천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여일을 지내신 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3)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예배를 받으시며,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십니다. 4) 재림이 있습니다. 주님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십니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신 주님을, 하나님은 최고로 높여주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이보다 높아질 수 없을 정도로 높여주셨습니다. 교회는 영광스런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남은 삶 동안, 겸손의 롤모델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주의 몸된 교회와 그 지체들인 성도들을 겸손히 섬기기를 바랍니다.
어릴 적 살전 모래내는 가정마다 우물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우물을 사용했는데, 도랑 건너 마을에는 수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수돗물을 도랑 건너에 있는 가정에서 월 얼마씩 주고 받아왔습니다. 물을 길러올 때는 반드시 바가지 하나씩을 꼭 가지고 갑니다. 수도를 틀면 물이 나오기에 바가지가 필요 없는데, 왜 가져갈까요?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는, 반드시 바가지를 물통의 물속에 엎어서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통을 가득 채워서 가도, 출렁거려서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물이 절반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득 찬 물통에 바가지를 엎어 가면, 출렁거리지 않아서 물을 온전히 옮겨갈 수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찰랑거리는 물통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흔들리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고통으로 흔들리고, 절망으로 심하게 요동합니다. 때때로 시기와 질투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은 풍랑만난 듯 흔들립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을 덮고 있으면, 요동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속을 덮고 있으면,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줄 수 있는, 이 겸손의 마음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진정한 낮아짐과 섬김, 겸손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장 흉측한 십자가형을 당하면서도, 죽기까지 순종하는 겸손을 몸소 실천해주셨습니다. 겸손은 낮아짐입니다. 겸손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세입니다. 겸손은 다툼과 허영을 막고 하나 된 일치를 가져옵니다. 겸손은 나를 주장하지 않고 타인의 말에도 귀 기울여 경청하는 자세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알기에 남을 나보다 더 높이 여기는 태도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늘 무릎 꿇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배척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영광된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친히 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의 입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열심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까? 정말 열심히 일하는 성도들 많습니다. 자기 몸을 헌신하며 충성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면 현대 교회가 열심히 헌금하는 분들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정말 열심히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하고 목적헌금을 드리는 희생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아니면 주방에서, 봉사부서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없어서, 현대 교회는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한국 교회만큼 열심히 봉사하는 교회는 세계 어디에 가도 흔치 않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아니면 교회 안에 기도하는 분들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세계 어디를 가봐도 한국 교회만큼 열심히 기도하는 나라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겸손한 모습으로 섬기는 이들이 좀 더 많아야 합니다. 오늘 빌립보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마음은 사분오열 되었습니다. 찢어진 천 조각처럼 각자의 주장이 강하여 전혀 일치되지 않습니다. 다 자기를 따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다툼과 허영이 팽배하고, 다 자기가 제일 낫다고 타인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화목해야 할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서로 다투고 싸운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럽선교의 첫 교회인 빌립보교회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태도를 닮아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겸손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며, 그들의 땅을 치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대하 7: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겸손을 배우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히 3: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12:2절상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영광된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셔서, 우리 대신 모욕과 조롱과 멸시를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그분을 바라봅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낮아 지셨다면, 하찮은 내가 왜 낮아 질수 없습니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겸손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 영적 유전자를 바꾸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비결을 가르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겸손한 마음이 곧 믿음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해 줄줄 아는 마음속에 겸손이 있고, 믿음이 있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게 하옵소서. 겸손이 사라져가는 세상에서 겸손을 배우고, 겸손을 가르치는 삶을 지켜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마음을,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겸손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빛으로 나타나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 / 빌 2:12-18
어느 기독교 선교잡지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료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한 흑인 청년이 정글에서, 칼로 나무를 찍다가 자기 발등을 잘못 찍어, 피 흘리는 발을 나무 잎으로 움켜 싸고, 병원이 있는 이십리 길을 뛰어 온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그 청년을 치료 하고 있는데, 얼마 후 그 흑인 청년의 어머니가 찾아 왔습니다. 선교사님은 그 어머니에게 밀림에서 어떻게 이곳을 찾아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의 핏자국을 보고 따라왔지요.” 그 말이 선교사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메시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의 핏자국을 보고,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이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합니까?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리신 예수님! 우리가 그 분의 피로 죄 사함 받았다면, 이제 예수의 피에 대한 감사, 감격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 그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음에도, 우리의 환경은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고, 성령과 더불어 산다고 하지만, 우리가 몸 담고 사는 세상은 결코 녹녹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니라도, 우리 삶의 주변은 이미 기준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문의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는 표현이 실감이 납니다. 이런 입장에서 거꾸로 말하면, 기준만 바로 지켜도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칭찬 들을 수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천국을 소망하며 산다고 하는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기준을 잃고 세상과 함께 휩쓸려가고 있는 듯이 보여서, 마지막 때라는 것을 어느 때보다 실감하고도 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필요한 것 몇 가지로 말했습니다. 권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권면이 있어야 합니다. 장로나 구역장, 신도회장의 권면이 있어야 합니다.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모임입니다. 위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목회자도 리더도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교제가 아닙니다. 친한 사람끼리 가까지 지내는 교제가 아닙니다. 성령의 교제요 영적인 교제입니다. 긍휼과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긍휼과 자비는 약자에게 필요합니다. 사회에 약자가 있듯이, 교회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긍휼사역은 교회를 넘어 사회에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에 보다 결정적인 것이 필요함을 말했습니다. 일치입니다. 바울은 일치를 다양하게 표현했습니다. 일치를 위해서 버려야 할 것으로 다툼과 허영을, 가져야 할 것으로 겸손을 들고 있습니다. 다툼과 허영엔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겸손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깁니다. 그리고 겸손의 롤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들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교회였습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내용을 보면, 완벽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치고, 완벽한 교회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한 교회는 있을 수 있어도,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빌립보교회에 필요하다고 한 것이, 현대 교회에도 필요하고, 우리교회에도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도 같은 차원입니다.
2: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친근하게 호칭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이 호칭에서 그들을 사모하는 바울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감옥에 갇힌 채 내일을 알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바울에게, 그들은 너무나 고마운 존재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감옥에 있는 바울을 생각해 준 것은 아닙니다. 대단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기억해 준 게 감사하고, 마음을 써준 게 감사합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있을 때도 잘했습니다. 12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2:12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목회자에게 잘하는 게 별건가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목회할 때도 언제나 순종했습니다. 교회의 출발이 은혜로워서 그런지, 성도들이 순종을 잘했습니다. 순종을 잘하는 성도들을 만나는 것은 목회자의 복입니다. 아무리 목회자가 뛰어나도 성도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교회가 영적 전쟁터가 됩니다. 서로가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목회자는 나는 성도 복이 없다고 생각하고, 성도들은 우리는 목회자 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때 언제나 순종했던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떠올리며, 지금도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갈 것을 부탁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하는 표현입니다. 언뜻 구원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단번에 구원 받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한 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럼 12절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지나치게 좁혀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구원이란 단어가, 실제로는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칭의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해결하셨습니다. 내가 그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됩니다. 그러나 칭의는 구원의 출발이지 완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영화입니다. 요일 3: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구원에 있어 칭의가 출발 단계이고, 영화가 완성 단계라면, 그 중간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성화입니다. 이 단계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계속해서 걷는 것을 말합니다. 성화는 평생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이 칭의라면,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영화입니다. 그럼 성화는 광야를 걷는 것입니다. 칭의나 영화는 일회성입니다. 성화는 반복 반복 반복 또 반복, 될 때까지 반복입니다.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닮아가는 과정으로, 반복 반복 또 반복하는 것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은 성화를 가리킵니다. 성화는 성령님이 주도하시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이게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걸 말해줍니다.
2: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곧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행하십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후 그대로 두시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일하십니다. 물론 거룩한 소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고자하는 거룩한 소원을 말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고 싶다는 거룩한 소원을 말합니다. 타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거룩한 소원을 말합니다. 그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행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십니다. 그렇다고 아무 소원이나 가지면 안 됩니다. 내 욕심으로 충만한 소원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불타는 소원을 가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애타는 염원을 가지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소원을 두고 하나님이 행하실 것입니다.
크라비아의 선교사 조지 스미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의 목표를 아프리카의 선교에 두었습니다. 그는 결국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아프리카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몇 개월의 선교 활동으로 여자 1명을 전도한 이후에, 추방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거듭나게 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1백년 후에, 아프리카에서 만 3천명의 크리스천이 탄생했습니다. 조지 스미스의 소원을 두고,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2: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우려를 전합니다. “원망과 시비” 3절의 다툼과 허영에 이어 또 등장한 부정적인 단어입니다. “원망”의 사전적인 정의는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함’입니다. “시비”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다툼’입니다. 원망, 불평은 자기를 불행하게 합니다. 시비, 말다툼은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물론 자기 안의 평안도 깨집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일을 해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애써 일하고도 시비하고 말다툼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반대말이 감사라면, 시비와 말다툼의 반대말은 침묵입니다. 보면 입으로 공치사하는 게 문제입니다. 괜히 침묵을 금이라고 한 게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향해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에 이어,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말을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겸손하고 교회가 일치된 상태였다면, 다툼과 허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고, 모든 일에 감사와 침묵이 잘 지켜졌다면, 굳이 원망과 시비를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 다툼과 허영이 있어도 되고, 원망과 시비가 있어도 괜찮습니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그런 걸 가만히 두고 보라는 말도 아닙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불평합니다. 그게 고질병입니다. 웬만해선 고칠 수 없는 고질병입니다. 두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한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게으를 뿐만 아니라 늘 불만불평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세상살이가 어떠했느냐?” 그러자 부지런한 사람은, “힘들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살던 집도 좁고, 돈도 마음껏 써 보지 못하였고, 또 자식들도 다 속을 썩이고, 남편도 마음에 안 들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이 거처할 곳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땅은, 세상에서 보지 못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역시 하늘나라는 아름다운 곳이군요!” 하며,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는 벌써부터 소매를 걷고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내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평 많은 사람은 똑같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무슨 하늘나라가 이럽니까?” 하며,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계속 투덜댔지만 소용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잘 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인드가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불평을 찾아내는 탁월한 재능이 있습니다. 불평가와는 무슨 일이라도 동역하기 힘듭니다. 시비 가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피곤합니다. 시비를 가리려고 하면,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시비를 가릴 때 판단 기준이,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똑똑하여 원망하고 시비할 바에는, 차라리 미련하여 감사하고 침묵하는 자가 낫습니다.
2: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한 이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흠이 없다는 말은, 타인에게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없는 걸 의미합니다. 순전하다는 말은, 이질적인 것이나 온전하지 못한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원망하고 시비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타인에게 책망받을 만한 일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원망하기를 좋아하고 시비하기를 좋아하면 싫어합니다. 그게 자기 정신 건강에도 나쁠뿐더러, 공동체 생활에도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망을 잘하는 사람도, 원망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비 가리는 것을 잘 하는 사람도, 자기에게 시비 걸어오면 싫어합니다. 무엇보다 세상에 빛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는 말을 합니다. 뒤틀리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반항하는 부패한 세대를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대가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흠이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생명의 말씀으로 세상을 밝히는 빛들로 나타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다툼과 허영, 원망과 시비를 멀리하고, 겸손과 순종과 섬김으로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고,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빛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고 싶은 뜻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뭐가 많이 섞여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불교 같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유교를 닮아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이슬람교를 본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이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가 순전한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순전함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왜 교회를 욕합니까? 교회가 불교 사찰 같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가톨릭 성당 같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이슬람 사원 같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 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게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이자 세상의 빛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입니다.” “당신은 세상의 빛입니다.” 문제는 이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과 연합한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코 기독교에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잘합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은 예리합니다. 하나같이 맞는 말만 합니다. 세상이 틀린 말을 하면 무시하면 됩니다. 그들이 뭐라 하든지, 우리는 우리 길을 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맞는 말만 골라가면서 합니다. 그러니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교회는 그들의 비위를 다 맞출 수 없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하든지 그들은 비판의 소리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은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너무 다릅니다. 그런데 때론 교회가 교회법을 지키지 않아서, 여론의 지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땐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 탓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쩌고 하면 안 됩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는 못할망정, 걱정거리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2: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을 밝혀”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합니다. 원문에는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아”라는 뜻입니다. 왜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까? 우리가 원망과 시비로 인해, 삶을 망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우리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심히 부패했던 인생이기에, 죄의 유혹에 한없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항상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그 분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모든 일에 항상 복종함으로, 그 분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생명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며, 우리들의 믿음의 달음질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기 원합니까?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의 빛 된 삶을 살아가십시오. 항상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으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로써, 그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빛으로써, 세상에 충격을 주는 호소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면, 우리가 세상에 무엇을 비춰야 합니까?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합니다. 이건 교회만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해야 할 것들도 상당합니다. 그러나 교회만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교회 본연의 사명입니다. 그건 교회가 깊은 산속이 아닌 세상의 한 복판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 위한 달음질은 헛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 위한 수고 역시 헛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그게 교회의 자랑이 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게 우리들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교회가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히려면, 교회에 생명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생명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받은 생명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명의 말씀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먼저 자신이 생명의 말씀을 누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누리는 사람이,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의 말씀을 귀히 여기기 바랍니다. 기록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는 생명의 말씀을,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생명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2:17-18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빛은 그냥 비춰지지 않습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보면 희생을 뜻하는 말들입니다. 자기를 태움 없이는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자기희생 없이는 생명의 말씀을 밝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희생이 억지가 아닙니다. 타인의 강요에 의한 억지 희생이 아닙니다. 자발적인 희생이요 자원하는 희생입니다.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일시적인 기쁨, 세상적인 기쁨이 아닌 진정한 기쁨을 원합니까? 그것은 내가 무엇을 더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어 주고 섬기는데서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듯이, 이제는 이웃을 위해 내어주고 섬겨 보십시오. 어느덧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섬김의 기쁨, 천국 기쁨의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이웃들에게 복된 이름으로 기억되며, 그리스도의 날에 그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희생의 토대가 될 때,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남은 삶을 생명의 말씀으로 세상에 환히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 같기를 바랐으며, 그들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지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포도주로 드려지는 전제가 되기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글을 쓰며, 어쩌면 언젠가 자신이 피를 흘리며, 순교하게 될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피가, 그리고 그 피로 마감하는 자신의 삶이, 제물과 함께 부어지는 포도주 같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향기로운 전제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 됨은 교회의 생명입니다. 다툼과 허영과 원망과 시비 등, 교회의 하나 됨을 해치는 일체의 일들을 삼가고, 겸손과 순종과 섬김으로 하나 되어, 생명 있는 교회를 이루며,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어떤 형편이나 조건이나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은혜로 주신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인생의 가장 값지고 중요한 과제임을 알게 하옵소서. 지도자가 있건 없건 항상 말씀 아래에 서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나 개인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그치지 않고, 인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복음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받은 은혜를 생각하여,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 일지라도,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흠 없고 순전하여 빛들로 나타나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 주님께서 재림 하셨을 때, 자랑할 것이 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는 예수의 신실한 동역자입니다. / 빌 2:19-30
어느 날 사람의 얼굴을 이루고 있는 입과 코와 눈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먼저 얼굴에서 제일 밑에 처져 있는 입이 불만스러운 듯 말했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어 힘을 내게 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내가, 왜 늘 꼴찌에 있어야 하는 거지?” 이번에는 얼굴 중심에 우뚝 자리잡고 있는 코가 우쭐거리며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무엇보다 중요한 호흡을 할 뿐 아니라, 어떤 냄새도 신통하게 잘 맡는 나도 중간밖에 있지 못하는데…” 그러자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이, 자신도 할말이 있다는 듯 말했습니다. “얘들아. 아마 너희들은 사물을 보고 살피는 내가 없다면 ,답답해서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할 걸?” 서로 불평을 이야기하던 셋은, 뚜렷이 하는 일도 없이 얼굴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눈썹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우리보다 가장 높은 곳에서 잘난 척 뻐기고 있는데, 도대체 맡은 일이 뭐니?” 그러자 눈썹이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말을 들으니 내가 참 부끄럽구나. 나는 다만 중요한 일을 맡아 잘하고 있는 너희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자리를 열심히 지킬 뿐이란다.”
때때로 우리는 주어진 직분이나 위치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기 쉽습니다. 때로는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의 모든 기관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여서, 신체의 기능을 유지하듯, 교회는 서로 다른 지체들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어진 위치를 겸손히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남을 나보다 소중히 여기고, 높여주는 마음이 모아질 때 교회는 건강해 집니다.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우기다보면, 공동체 전체에 갈등과 분열이 찾아옵니다.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거나 소홀히 하다보면, 공동체는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앞에서 이끄는 자와 뒤에서 돕는 자들이, 서로 한마음이 될 때 힘있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운동회나 레크레이션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 중에 하나가 2인삼각경기입니다. 두 사람이 안쪽 발을 서로 묶고, 반환점을 돌아오는 경기입니다. 보기에는 쉽지만 막상 뛰다보면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마음은 급한데 생각처럼 앞으로 뛰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빨리 달려야겠다는 의욕이 앞섭니다. 그러다보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뛰게 됩니다. 결국은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넘어집니다. 골인지점을 향해 빨리 뛰어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어깨 동무를 해야 합니다. 서로가 몸을 밀착하고, 발의 보폭을 서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외치면, 한 사람이 달리는 것처럼 뛰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뛰어난 은사를 가졌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결국 본인도 넘어지고, 다른 사람도 실족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리의 일기’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준 어떤 사람의 권면이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죠? 명심하세요. 당신 혼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동지를 찾으십시오. 없으면 동지를 만드십시오. 성경은 혼자서 고독하게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는 혼자 고독 속에서 수행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도와주고 격려하는 믿음의 동지, 신앙의 동역자와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을 향해 나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제도가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스템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건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사람이 일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제도를 만들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든다.” 하나님이 왜 사람을 만드셨을까요? 사람을 통해서 일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몸된 교회를 박해하는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를 부르신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죽어라고 예수를 싫다고 하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를 불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동족을 위해서는 12사도면 족했지만, 이방 선교에 최적화된 바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그의 동역자를 쓰셨습니다. 바울에게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수많은 바울의 동역자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는 슈퍼스타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동역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동역자들의 힘을 빌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몸이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지금 그 곁에는 신실한 동역자인 디모데와 에바브라디도가 있었습니다.
빌 2:19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바울은 이 중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보내고 싶어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사정을 좀 더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을, 지금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기억해줬습니다. 자기들 곁을 떠나 멀리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어려움을 생각해서,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바울을 섬겼습니다. 참 좋은 교회요, 심성이 착한 교인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빌립보교회가 완벽한 교회는 아닙니다. 그들 안에 다툼과 허영이 있었습니다. 2: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들 사이에 원망과 시비가 있었습니다. 2: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립보교회 역시 다른 교회들이 안고 있는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자신을 생각해주니, 바울 입장에서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빌립보교회는 기본적으로 바울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를 그냥 보내면 됩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보면 빌립보교회에 동의를 구하는 인상이 짙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바울이 그들을 존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존중하고 그의 필요를 채워줌 같이, 바울 역시 그들을 존중했습니다.
존중은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합니다. 삼상 2:30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한쪽만 존중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서로 존중은 하나님께도 해당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목적이 나옵니다.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바울 자신이 자신의 근황을 알림으로, 자기를 도와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인편을 통해 빌립보교회 성도들 사정을 들음으로, 자신이 위로받고 싶기도 했습니다. 여기 좋은 인간관계의 모형을 봅니다. 서로 존중할 때 좋은 인간관계가 됩니다. 서로 위로를 주고받을 때 좋은 인간관계가 됩니다. 교회와 목회자와의 관계도 그렇고,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난하고 비방하는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밖에서도 존중의 말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멸시할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를 위로해주는 사람을 미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2:20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바울이 왜 디모데를 보내고 싶어했을까요? 왜 바울이 다른 사람이 아닌 디모데를 선택했을까요? 디모데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역자란 뜻을 같이하는 동지여야 합니다. 평생 동역자는 뜻을 같이할 때만 가능합니다. 같은 비전을 이루는 것도 뜻이 같을 때만 가능합니다.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 곁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디모데가 지금 바울 곁에 있다는 말은, 그가 바울과 뜻을 같이한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자기와 뜻을 같이하여 자기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이, 얼마라도 있으면 리더는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디모데가 자기와 뜻이 통해서만 보낸 것은 아닙니다.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을 생각해서였습니다. 디모데가 빌립보교회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바울과 뜻이 통한 디모데가 가면, 빌립보교회를 잘 보살필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바울이 그만큼 디모데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게 동역자입니다. 동역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단기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오랫동안 봐왔습니다. 그 결과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2:21절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바울 주위에 디모데 같은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불특정 다수를 지칭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바울이 아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빌립보교회와 관련 있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들도 주의 일을 하겠다고 뛰어든 사람들입니다. 아니 그들은 지금도 자신이 주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자기 일을 구하는 자입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자기 일을 추구했습니다. 자기 일을 하는 사람과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희생입니다. 희생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희생의 자리에서 그가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압니다.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서 그가 어떻게 나오느냐를 보면 압니다. 자기 일을 구하는 사람은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색깔이 보다 분명하던 그 시대도 그랬습니다. 복음에 미쳐 생명을 걸었던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자에게도 분별력이 필요하고, 성도들에게도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직분자를 세울 때는 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사람인줄 알고 세웠더니, 자기 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참 어려워집니다.
2:22절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참된 믿음을 알아볼 수 있는 장치가 있습니다. 연단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믿었습니다. 그가 받은 연단 때문입니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면서 받은 연단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자기의 일을 구했더라면 받지 않아도 됐을 연단을, 주의 일을 구함으로 기꺼이 받았습니다. 바울을 믿음의 아버지로 섬기며,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연단을 받았습니다. 디모데의 믿음은 그것으로 검증됐습니다. 연단은 참된 믿음을 분별할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연단이 왔을 때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영국의 조지 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순찰하는 길목에 2개의 꽃병이 놓여있었습니다. 하나의 도자기는 보기에도 도자기답게 윤기가 흘렀습니다. 생동감이 넘쳤고 예술품으로서 그 자태가 출중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도자기는 우선 외모가 볼품이 없을 뿐 아니라 빛깔조차도 흐릿하고 가치가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조지 왕이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도자기는 왜 이렇게 윤기가 나는데 저 도자기는 왜 저렇게 볼품이 없는가?” 그 물음에 안내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윤기 나는 도자기는 불에 구워졌기 때문에 윤기가 나고, 저 도자기는 아직 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윤기가 나질 않습니다.”
이게 연단입니다. 연단은 고통을 주지만, 믿음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디모데의 충성된 믿음은, 연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그의 믿음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딤후 1: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분들의 믿음이 디모데 믿음의 자산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가 바울을 만나기 전에는 평범한 믿음이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다가 겪은 연단이, 그의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단단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때, 연단을 주시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연단을 피하는데 급급합니다. 어떤 사람은 연단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됩니다.
불행해 보이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종일 실을 뽑는 방직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족들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큰오빠는 잔칫집에서 얻어온 상한 음식을 먹고 숨졌고, 둘째오빠는 굶주린 가족을 위해 피와 쌀을 바꾸었습니다. 그녀는 공장에 다니면서도 희망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역경을 극복하면 반드시 희망의 날이 올 것이다.’ 소녀는 기업체 부설 학교에 다니며 꿈을 키웠습니다. 그녀는 국내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오스트리아로 유학, 빈의 음악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교 교수로 금의환향했습니다. 그녀가 바로 창원대 이점자 교수입니다. 연단은 당할 때는 힘들지만 감당하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연단 없이 큰 사람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연단 없이 믿음의 거장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연단 중에 있다면 조금만 더 버텨보기 바랍니다. 버티다보면 연단이 끝나는 날이 옵니다.
2:23절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바울은 디모데를 속히 보내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재판을 앞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내 일”은 재판을 가리킵니다. 재판의 결과가 나오면 보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재판장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재판 결과를 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때가 가끔 있습니다. 특히 요즘엔 사법부 정의가 살아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삼권이 분립된 오늘날에도 이러니, 바울 시대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니 바울의 재판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흉악범이 아니고, 또한 로마시민권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꼭 석방되란 보장은 없습니다.
2:24절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럼에도 그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 편에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의 석방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겠습니까? 그가 확신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보면 전혀 객관적인 근거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확신은 맞았습니다. 바울이 잠깐 석방됩니다.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그러다 로마 대화재 때 다시 붙잡혀서, 네로에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2: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바브라디도가 누구입니까?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빌립보교회에서 바울에게 보낸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바울이 쓸 것을 에바브로디도의 편에 보낸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지금은 바울 곁에 있지만, 본래는 빌립보교회 성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에서 큰 신임을 받는 자가 아니고서는, 교회가 그 일을 맡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에 하나 배달 사고라도 일어나면 큰일 아닙니까? 에바브로디도는 교회의 기대대로 바울에게 도착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만나 교제를 하면서 그의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바울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자랑을 하는 바울의 얼굴 표정이 그려집니까? 바울이 아무에게나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바울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자기를 도와주면 좋습니다. 돕는 손길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를 붙잡으려고 하기 보다는 보내는 쪽으로 생각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자신의 필요를 생각하기보다,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한데는 에바브로디도의 의지도 한 몫했습니다.
2:26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 곁에 있으면서, 자신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울에게서 배우는 시간들이, 자신에게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보낸 빌립보교회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자신이 병든 소식이, 교회에 들어갔을 거 같아서였습니다. 그가 바울에게 가던 중에 병들었는지, 도착해서 병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2:27절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확실한 것은, 그 병이 가벼운 질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병이었습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병세가 너무 위중했다는 말입니다. 참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사자로 보냈던 사람이 아파서 죽게 됐다’고 그러면 이거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닙니다. 너무너무 속상하고 근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바울은 얼마나 기도했겠으며, 자신은 또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하나님, 긍휼이 여겨주세요.” “하나님, 에바브로디도를 긍휼이 여겨주세요.” “하나님,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빌립보교회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깊은 근심 가운데서 기도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바울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정말 자기를 떠나보내기에 아까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를 더 필요로 하는 빌립보교회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2:28절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빌립보교회에 보내려는 생각이 들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그를 급히 보냈습니다.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할 교회 성도들을 떠올리며,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짐도 하나 덜게 됩니다. 사실 내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짐입니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도 내 것이 안 됩니다. 그럼 빨리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맘 편합니다.
저는 십일조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내가 쓴다고 해도,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소득이 생기면 십일조를 우선적으로 구별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놓는 내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십일조는 보통 마음먹고는 못합니다. 어릴 때부터 하든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해야 합니다. 생활비 부족할 거 각오하고 해야 합니다. 밥 굶을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런 사람 책임져 주시지, 누구를 책임져 주시겠습니까?
2:29-30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에 보내며, 잘 영접해주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병들어 죽게 된 상황에서도,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교회에서 위임한 것을 감당한 에바브로디도를 극진히 영접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를 한 번 더 챙기고 있습니다. 그를 기쁨으로 영접해 줄 것을 바랐습니다. 그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향한 바울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며, 빌립보교회에 가서도 믿음 생활을 잘하기를 바랐습니다. 자기와 함께 있을 때처럼, 이제는 빌립보교회의 형제가 되고, 함께 수고한 자가 되고, 함께 군사된 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우리가 다 바울 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 바울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디모데 같은 동역자는 될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같은 신실한 동역자는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남은 삶을 주의 몸된 교회와 목회자에게,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같은 복음의 신실한 동역자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에바브라디도를 ‘나의 형제,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 너희 사자’ 그리고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하실까요?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섬겼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삶과 신앙의 일치를 이룬 자,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된 자, 정직하고 진실한 자라는 칭찬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성도는 본질상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교역자, 평신도의 구분은 기능적인 구분일 뿐, 존재론적 구분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복음의 동역자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따라,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을 섬기고 봉사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수고하는 주님의 일꾼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누구의 섬김이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그에 합당한 사랑과 위로를 베풀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에 있어서, 깨끗한 신앙과 양심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서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든 안 쓰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나갑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주님 앞에 서서 결산하게 됩니다. 세월을 아끼며 때를 잘 활용하는 지혜로운 성도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인치심 가운데, 먼저 하나님의 사람, 주님의 제자들이 되고, 가정에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교회에 덕이 되고, 살아계신 주님을 보여주는 능력의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은 저희들의 관계를 아름다운 동역 관계로 인도하여 주셔서, 바울,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와 함께 이루었던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복음 역사에 도움 되는 사역자들의 동역 관계가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낮출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심으로, 더욱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해주시고, 우리의 구원을 오늘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사도 바울과 같이, 사람들을 배려하고 희생하는 삶이 되어서, 우리의 그 섬김과 희생이 있는 곳에 분열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견고하게 세워져 가게 해달라고, 기도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의 동역자가 된 우리도, 이제 이후로 겸손함과 섬김으로, 그리고 돕는 자로서 세상 속에서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