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톤으로 가자
2023년 10월 15일 문화부 주관으로 문화 활동이 있었다. 오후 2시 20분 평창시네마를 대관하여 단체로 영화를 관람했다. 2023년 9월 27일에 개봉한 영화 「1947 보스톤, Road to Boston」이다. 강제규(姜帝圭)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영화배우 하정우, 임시환, 배성우, 김상호가 출연한 영화 「1947 보스톤」은 제목 그대로 1947년 제51회 보스톤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하고 2시간 25분 39초라는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조선의 마라토너 지암(志巖) 서윤복(徐潤福)의 이야기다. 마침 서윤복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에 개봉되었지만 사실 이 영화는 2020년에 개봉하려다가 코로나와 주연배우들의 스캔들이 겹쳐 개봉을 미룰 수밖에 없었고 올해 개봉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탄생 백주년과의 시기적인 일치가 이 영화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들었다.
영화는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올림픽에 조선의 대표로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 2로 세계 신기록을 세워 시상대에 올라선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흑백 장면으로 문을 연다. 당시로는 2시간 30분대의 마의 장벽을 깨부순 경이적인 기록이라서 온 세계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런데 애국가가 아니라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면서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였기에 손기정은 손기태(そんきてい)라는 일본인으로 전 세계에 알리게 된 것이다. 손에 든 월계수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가릴 수밖에 없었고 기쁨의 여백은 망국의 설움으로 채워졌다. 전 세계인의 찬사와 축복받을 자리가 고통의 시간이었기에 그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동아일보에 일장기 말소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가중되었다. 일제는 금의환향하는 국민영웅 손기정을 범죄자로 연행했고 다시는 마라톤을 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으니 마라톤 선수의 생명인 두 다리를 잘라 놓은 셈이다.
그 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1947년이 되었다. 민족의 영웅 손기정과는 달리 베를린 올림픽에서 3등을 차지한 남승룡(南昇龍)은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때 10년 전 손기정의 영광을 이어 줄 사람이 혜성처럼 등장했으니 서윤복이었다. 그는 타고난 뜀박질 재능을 생계형 달리기로 활용하고 있었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발군의 실력을 뽐냈지만 그에게는 우승이란 영예보다는 상금이 더 필요했다. 사실 서윤복은 제2의 손기정을 꿈꾸던 불굴의 마라토너였다. 가정환경이 열악해서 그렇지 그도 좋은 스승 만나서 제대로 뛴다면 얼마든지 손기정을 능가할 장래가 촉망한 조선의 꿈나무였다. 결국 이들에게는 한 가지의 목표가 주어졌다. 1947년 4월에 미국 보스턴에서 열리는 제51회 국제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여 이제 막 독립한 신생국을 세계에 알리고 온 국민에게 희망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10년 전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망국의 백성은 내 나라 국기도 달지 못했지만 이제 독립을 했으니 당당하게 태극기 가슴에 달고 달릴 수 있게 되어 손기정에게는 가슴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5세의 손기정과 24살의 서윤복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스턴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존 하지(John Reed Hodge) 장군이 다스리는 미군정시대였기에 대한민국은 독립은 했어도 아직은 건국 이전의 난민국이었으므로 이들이 미국에 들어가려면 보증인과 보증금이 필요했다. 이 정도는 지금이야 일도 아니지만 그때는 해결불능의 난제였다. 미군정청에서도 특별히 재정적 지원이 없었고 이들을 보증해주지 못했다. 영화는 이런 난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관객들에게 남모를 감동과 가슴 벅찬 조국애를 느끼게 해 준다. 대한문(大漢門) 앞에서의 출정식 때 미국 가는 길이 막히자 군중들이 마음을 모아 모금하는 장면은 눈물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김포공항,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도착한 보스턴 대회에 또 하나의 장벽이 놓여 있었다. 서류상으로 대한민국이 아닌 미합중국 국민이라고 성조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답답한 대회 담당자들과 미국 언론 앞에서 눈물로 독립된 나라의 자부심을 높일 수 있도록 태극기를 달게 해달라고 무릎 꿇는 세 명의 감독과 선수의 피 끓는 호소에 마침내 태극기 달고 뛰도록 허락받는 순간은 두 번째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리고 지난 대회 우승자와 같이 쟁쟁한 우승후보들 가운데 무명의 서윤복이 뛰는 모습은 앉아 있는 관객들을 같이 달리게 했다. 주인의 부주의로 개 끈을 놓치자 갑자기 뛰쳐나온 개와 선두로 달리던 서윤복 선수가 부딪치고 넘어질 때는 관객들도 같이 넘어지고 말았다.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쥐어 짜내면서 다시 달리는 서윤복 선수, 마침내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역전의 레이스를 펼치면서 손기정 선수의 세계 신기록을 갈아 치우며 결승선 테이프를 끊을 때는 76년 전 대한민국 백성들의 감동이자 76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감동이었다.
혼란의 시기에 꿈을 실현시키고 노력했던 이야기, 태극기를 몸에 달고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온몸으로 알리던 보스턴의 기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렇게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가슴에 품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던 선조들이 땀과 피로 일군 대한민국이다. 자유의 기초석 위에 민주의 기둥을 세우고 저 높은 창공을 향해 자유와 민주의 기치를 펄럭이며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잘 보전해서 더 높은 이상을 실현할 국가로 만들 시대적 사명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없던 무의 발판을 딛고 무한 가능성을 발산하며 힘차게 또 달려가도록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절실하다.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미래는 평안이로다”(시편 3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