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을 잠시 둘러봤어요. 결국 고진이 만든 용어 ’트랜스크리틱‘이란 ’시차parallax‘의 다른 말이거나 연장이군요.
가라타니 고진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1845) 시기에 자신이 그 가운데 있었던 헤겔 좌파를 ‘밖에서부터 ’비판했다. 그때 마르크스는 경험론적인 방법을 중시하고 합리론을 비웃었다.....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비판이 항상 ‘이동’과, 그 결과로서의 ‘강한 시차’에서 생겨나는 일이다. 칸트가 발견한 ‘강한 시차’는 그의 주관주의를 비판하고 객관성을 강조한 헤겔에게서는 사라져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강고한 체계를 쌓은 칸트, 또는 마르크스라는 상을 얻는다. 칸트나 마르크스는 끊임없이 ‘이동’을 반복한다. 그리고 다른 언어 체계로의 이동이야말로 ‘강한 시차’를 가져온다. 망명자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칸트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에 있었으며, 초월론적인 비판을 했던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칸트 역시 독단적인 합리론에 대해 경험론으로 맞서고, 독단적인 경험론에 대해 합리론으로 맞서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한 이동에 칸트의 ‘비판’이 존재한다. 초월론적 비판은 횡단적(transversal) 또는 전위적(transpositional)인 이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칸트나 마르크스의 초월론적(transcendental) 또는 전위적인 비판을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이 말이 이해가 잘 안 간다면, 로쟈의 표현을 빌리기로 하지요.
지젝이 말하는 ‘시차parallax’란 과학 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가장 단순하게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각각 한쪽씩 가리고 보았을 때 나타나는 약간의 차이가 시차다. 서로 다른 시각(관점)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시차라고 하면,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는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얻어오는데, 이미 [이라크]에서도 ‘시차’라는 개념을 사용해 이라크전쟁의 ‘진리’를 설명한 바 있다. 곧 “민주주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는 부시의 말이 집약해주고 있는 대로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이 전쟁의 첫 번째 이유이고(상상계),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면(상징계),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세 번째 이유(실재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어느 하나가 나머지의 ‘진리’라는 게 아니라, ‘진리’란 관점의 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에서의 진리다. -- [로쟈의 인문학 서재]
이런 식으로 시차를 넓혀놓으면 걸고넘어지지 않을 것이 없어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적실한 예네요. 자연재해를 통해 정신적 육체적 공황에 빠진 이웃에게 폭리를 취하는 미국인들의 정서는 무엇이고, 차 수리를 의뢰하지 않았는데 이리저리 만져보곤 사례를 요구하는 자동차 수리공은 뭐 하는 놈인가요. 주택모기지로 환란의 주범인 월가의 경영진들과 거기에 당한 가난한 서민들도 '시차', 즉 '트랜스크리틱'이군요. 그런 논리라면 법과 질서도 시차의 준거네요.
근대 이놈의 시차가 또 얼마나 웃기느냐면, 차연과도 연계가 되는군요. <마음>이라는 단어만 해도 영어로는 <heart>지만, <heart>가 우리의 <마음>을, <마음>이 영어의 <heart>를 대변해줄 수 없다는 이치이지 않겠습니까?
재미 철학자 브라운 대 교수 김재권
세계적인 한국의 토종 철학자가 없다는 말이 뭘 의미한는가요? 우리 한국의 세계적인 철학자 김재권님이 계시지만, 저 분도 미국에서 수학을 했고, 미국의 언어, 미국적 사고를 한다는 거지요.
....아니 하다못해 철학 전공이라고 명함이라도 내밀기 위해서는 영어로 책이나 논문을 써야 하는 것(한국어로 논문을 쓴 철학박사들? 그들도 최소한 번역투의 문장으로 논문을 써야 한다. 영어가 독일어에서 바로 번역한 듯한 논문. 즉 “이게 원래는 한국어 논문이 아닙니다”는 걸 보여주고 암시하는 논문 말이다). 이때 영어는 일개 자연어가 아니라 특별한 자연어, 즉 보편어로서의 위상을 점유한다. 그러니 다들 철학은 주로 미국에서(혹은 독일에서) 공부하는 것이며, 철학은 마할 때는 영어나 독일어를 반드시 병기해야 하는 것이다(한국어라는 자연어는 철학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미국 철학회 회장까지 역임한 재미철학자 김재권의 경우, 미국의 철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철학 논문 문장의 모범으로 제시될 정도로 탁월한 영어를 구사하는데, 대학생 때 미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난 그가 한국어를 거의 망실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한국어라는 자연어가 그의 ‘보편적’ 사고에 거의 ‘간섭’을 하지 않는 것).
.....그 문제틀의 임의성에 대해서는 언젠가 김재권의 내한 강연을 언급하면서 김용옥이 지적한 것인데, 가령 기철학적 세계관 혹은 논리에 선다면, 마인드와 바디라는 별개의 ‘실체’는 인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마인드가 바디에 수반된다든가 하는 논리도 어불성설이 된다(우리말의 ‘몸’/‘맘=마음’ 또한 마인드/바디와는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김재권은 심신 문제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그의 수반이론이 진지하게 수용/검토되는 것은 제도적으로 영미권의 분석철학계 내에서일 뿐이다(혹은 그러한 문제틀이 ‘이식된’ 한국 대학의 철학과도 포함될는지 모른다).
.....김재권이 분석철학계의 가장 저명한 한국인 철학자라면 현상학계에서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한국인 철학자는 역시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하는 조가경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경제학 서적에서 시차를 읽는 재미도 괜찮네요.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에도 시차가 눈에 띄는군요. 저자는 '시간이라는 속성의 변화'라 표현하는데, 각 분야를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로 비유하는 대목이 바로 시차네요. 기업이 100마일로 달리는 반면, 시민 단체는 90마일, 가족제도의 변화 속도는 60마일, 노동조합은 30마일, 무엇보다도 '만만디'라 할 분야는 관료조직이나 규제기관이랍니다(25~30마일. 세계적 관료기구는 5마일).
자, 이번에는 남미 문학의 거장 보르헤스로 넘어가요. 차연, 즉 기표와 기의에 대해서지요.
미국 친화적이었던 보르헤스
......절대적 시어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진 보르헤스는 언어의 비결정성을 생각하며 언어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없다는 언어의 한계성에 직면한다.....따라서 이 경우에 우리가 언어를 통해 한 인간을 표현할 경우 그것이 올바른지에 관계없이 보편적 인간은 실재함으로, 우리와 인식대상물 사이에서 언어가 해낼 수 있는 역할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그저 진리를 왜곡시키는 방해물에 불과할 뿐이다.
.....보르헤스는 이미 언어는 현실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왜곡시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즉 그는 <언어로 재현해 낼 수 있는 인식 대상은 언어뿐이며 현실이 아니다>라는 다소 혁명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언어가 만드는 새로운 세계가 환상세계이고 이 환상세계는 바로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보르헤스에게 언어는 바로 우주이며 모든 것을 포함한 커다란 그의 언어 체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단지 보르헤스가 언어의 한계성으로 고민한 점은 모스너Mauthner가 지적한 <모든 언어는 은유적이고 근사치적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상대적으로 부정확하고 결함투성이>라고 한 점이다.
......텍스트 내에서 기호로 표현된 하나의 현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현실이 기호로 대치된다면 그 현실은 여러 개가 된다. 따라서 현실은 항상 우리에게 기호로 다가오는 이상 현실은 기호이며, 이제 현실은 기호가 연출해 내는 허구 속의 수많은 가능성의 현실이 된다. 구이 기표와 기의의 용어를 빌리자면, 처음에 현실이라는 기의를 표현할 기표의 한계성에 고민한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소쉬르 이후에 임의적이라는 사실을 주지한 보르헤스는 하나의 기호로 현실을 표현하려는 무모한 일을 포기한다. 오히려 하나의 기표는 다양한 기의를 나타낼 수 있는 마술적 힘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는 허구의 세계인 기호로 우리를 끊임없이 사로잡는다. 모든 기호는 발음되는 음가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언어로 이루어진 허구 세계가 현실의 일부를 잠식하는 일도 퍽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철학 전반에서 언어가 가지는 속성과 한계를 무던히도 고민하고 있어요. 비트겐슈타인, 소쉬르의 언어적 전회도 체질적으로 '시차'의 속성을 가지고 있군요. 특히 차연은 왜곡이 심할지도 모르겠네요. 번역서일 경우 역자의 문제는 자못 큰 몫이지요. 번역이 아니라도 기표에 의미가 굴절되는데 말이에요.
번역이라 함은 일종의 중역이겠지요. 텍스트(기표/기의) - 텍스트의 번역(이중 기표/이중 기의).
같은 책이라도 누가 번역을 하느냐에 따라 책의 질이 극명하게 갈리지요. 출발어(원문)를 어떻게 도착(역문)시키느냐는 사실 좀 심각해요.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수많은 함의들을 넘고 넘어야 제대로 번역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제게도 요주의 역자가 좀 있어요. 텍스트가 아무리 좋아도 오역을 하면 말짱도루묵 아니겠어요.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은 '시차'에 엮인 칸트, 마르크스적 고찰이지만, 시차 외에도 많은 얘기들을 하고 있어요. 칸트와 마르크스를 유비하며 상당히 깊이 있게 들어가는군요.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철학이 과학이 왜 연계해야 하는지 알게 된 거에요.
남이 쓴 글을 읽는 순간 오독과의 싸움이 시작되죠. 오독의 시작이 읽는 행위라 볼수 있겠죠 세상의 어떤 독자도 원본 자체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너무 엄격한 잣대인가요? 그렇군요 이글 자세히 설명한다고 한건데도 글자체가 뭔가 소거된게 많군요 이또한 시차의 빌미네요 일단 다른 거 다 걷어내고 시차 차연의 개념을 어느정도 잡고 읽으면 이해가 많이 됩니다 이런거죠 베이징올림픽 야구결승전때 9회초 1아웃잡아놓고 강민호 포수 구심의 계속된 볼판정에 항의하다 퇴장당하잖아요 이게 일종의 시차고 좀 확장하면 차연이죠
똑같은 말을 해도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큰거죠 엄격히 말하면 사실 좀 적당한 예 안같습니다만. 당시 민호는 조심스럽게 심판 심기 안건드리려 조심스럽게 low ball?이것도 낮았니?라 한건데 받아들인 구심은 상황이 워낙 첨예한 상황이라 no ball?로 듣게 되죠 조심스런 항의가 점차 오독으로 진행된셈이죠 바로 퇴장당하며 덕아웃으로 들어온 민호, 메이저리그홈페이지에 의하면 글러브를 99마일로 던집니다
@홍익시차가 개념 전달에 발언시랑 청자의 수신시가 다름에 따른 오독으로 이어진단 말씀이신가요?(그란개념?) 차연은 그런 상황에 청자가 가능한 비슷한 의미를 찾아서 수신한단 의미고요? 뭐 플라톤 이데아를 완벽히 이해 못해 동굴서 그림자를 대강 이상적인거에 가까운걸로 이해하면 차연이란 말씀입니까?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ㅎㅎ
@진홍여행자대화도 마찬기지겠죠 똑같은 말을 했는데 한사람은 1로 받고 한사람은 2로 받은수 있겠죠 물론 세상 모든 대화나 글이 이렇진 않겠죠 100프로 전부 왓다갓다할수도 잇고요 그리고 간단한 대화까지도 모두 이런식은 아니고요 같은 언어도 이럴진데 언어가 다를경우 이를 막을 도리가 없는거죠 학계에도 학자간 이런문제로 논란은 자연스런 일이죠 이렇게 봅시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러운건 나고자란 환경이 크게 좌우합니다 설명이 장황해지는데 곤란. 특히 언어 문화 기호가 다른, 나라를 달리하게 되면 정말 골치아픕니다 내가 아는한군주론은 아직 바로 번역된 책이 없다죠 두다리 걸쳐 번역됐기에 더욱 원본을 전달받기가 어렵죠
@홍익이게 쉬운 백과에선 차이와 지연의 결합어라 나오는데 이 설명은 확실히 대학때 배운 기억은 납니다. 아마 그때도 대충 이해하고 넘겼던걸로...ㅋ 오늘중으로 시간내서 한번 봐야겠네요. http://usoc.snu.ac.kr/m-promenade/17.htm 여기꺼 천천히 읽으면 될거 같아요. ㅎㅎ
@홍익전 비트겐슈타인 하면 히틀러랑 같은학교 다닌거나 칼 포퍼랑 싸웠단거나 오스트리아 갑부 집안이면서 돈 다 버리고 철학에 인생 걸었다는 인간적인 관계나 괴짜스러움 같은것만 알아서요. 확실히 언어철학 이란 류로 선배 철학자들의 개념을 몽땅 부정했다고 듣기두 했구. 자세한 사항은 귀찮아서 잘 안봤는데(칼 포퍼랑 부지깽이 들고 싸웠단 책을 읽어서 그런 사연만 잼있게 읽었거든요), 이참에 차연 공부하면서 차근차근 칼포퍼까지 알아보면 잼있을거 같긴 합니다. 감사해요 ㅎㅎ
다 읽었습니다. 칸트 마르크스 도입부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 못하겠다 생각했었는데 막상 아래로 가니 시차 개념만 이해하고 나니까 글이 잼있네요. ㅎㅎ 한국어로 사고하는 철학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땜에 진정한 한국인 철학자는 없다 이런류의 비판이 있던데요(로자의 서재요?). 사실 마음이란게 heart 든 마음 이든 그 의미를 결정짓는건 문맥적으로 가지는 관계적인 의미지 꼭 단어가 중요한게 아니므로(심지어 시적비유를 써서 단어를 달리쓰는게 더 의미 전달이 좋은 경우도 있고요) 언어가 사고를 결정짓고 그게 세계 자체를 규정한다는 관점에선 어느나라 철학자냐 하는건 중요한게 아닐거라 생각해요.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
시차라......하여튼 글의 말미에서 주장하시는 모든 지식은 철학과 연계해서 학습될때 그 가치를 뻥튀기 한다는 생각엔 저도 동의합니다. 쉬운 예로 글에 나온 저명한 한국인 교수가 서양에서 공부를 많이 하니 한국어를 망실?하여 사고에 개입 안된단 것처럼. 반대로 철학적 사고를 습관화하면 어떤 문제에 대한 대처로 합리적 사고를 행할때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틀에 박히지 않은 열린 사고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건 어떤 분야든 다 해당되는 부분이고요. 아 진짜 잼있네요. 철학과가 아니래도 대학들에서 이런 논의는 기본으로 필수과정에 포함이 되어야 할텐데. 요즘 취업난이 워낙 심해서 갈수록 성과가 빠른거만 선호하네요.
첫댓글 으어어어....왠만하면 어려워도 읽어보려 하는데 이건 엄두가 안나네요. ㅋㅋㅋ 나중에 진짜 할일없이 심심할때 시도해봐야겠습니다.
남이 쓴 글을 읽는 순간 오독과의 싸움이 시작되죠. 오독의 시작이 읽는 행위라 볼수 있겠죠 세상의 어떤 독자도 원본 자체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너무 엄격한 잣대인가요? 그렇군요 이글 자세히 설명한다고 한건데도 글자체가 뭔가 소거된게 많군요 이또한 시차의 빌미네요 일단 다른 거 다 걷어내고 시차 차연의 개념을 어느정도 잡고 읽으면 이해가 많이 됩니다 이런거죠 베이징올림픽 야구결승전때 9회초 1아웃잡아놓고 강민호 포수 구심의 계속된 볼판정에 항의하다 퇴장당하잖아요 이게 일종의 시차고 좀 확장하면 차연이죠
똑같은 말을 해도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큰거죠 엄격히 말하면 사실 좀 적당한 예 안같습니다만. 당시 민호는 조심스럽게 심판 심기 안건드리려 조심스럽게 low ball?이것도 낮았니?라 한건데 받아들인 구심은 상황이 워낙 첨예한 상황이라 no ball?로 듣게 되죠 조심스런 항의가 점차 오독으로 진행된셈이죠 바로 퇴장당하며 덕아웃으로 들어온 민호, 메이저리그홈페이지에 의하면 글러브를 99마일로 던집니다
@홍익 시차가 개념 전달에 발언시랑 청자의 수신시가 다름에 따른 오독으로 이어진단 말씀이신가요?(그란개념?) 차연은 그런 상황에 청자가 가능한 비슷한 의미를 찾아서 수신한단 의미고요? 뭐 플라톤 이데아를 완벽히 이해 못해 동굴서 그림자를 대강 이상적인거에 가까운걸로 이해하면 차연이란 말씀입니까?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ㅎㅎ
@진홍여행자 대화도 마찬기지겠죠 똑같은 말을 했는데 한사람은 1로 받고 한사람은 2로 받은수 있겠죠 물론 세상 모든 대화나 글이 이렇진 않겠죠 100프로 전부 왓다갓다할수도 잇고요 그리고 간단한 대화까지도 모두 이런식은 아니고요 같은 언어도 이럴진데 언어가 다를경우 이를 막을 도리가 없는거죠 학계에도 학자간 이런문제로 논란은 자연스런 일이죠 이렇게 봅시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러운건 나고자란 환경이 크게 좌우합니다 설명이 장황해지는데 곤란. 특히 언어 문화 기호가 다른, 나라를 달리하게 되면 정말 골치아픕니다 내가 아는한군주론은 아직 바로 번역된 책이 없다죠 두다리 걸쳐 번역됐기에 더욱 원본을 전달받기가 어렵죠
@홍익 그렇다고 100프로 의도를 전달받지못한다해서 읽지않으면 안되겠죠 요는 그런걸 감안하고 읽으면 됩니다 차연은 찾아보면 금방알수 잇을텐데요 알려주기보다 찾아서 얻는게 더 득이될것같네요
@홍익 이게 쉬운 백과에선 차이와 지연의 결합어라 나오는데 이 설명은 확실히 대학때 배운 기억은 납니다. 아마 그때도 대충 이해하고 넘겼던걸로...ㅋ 오늘중으로 시간내서 한번 봐야겠네요.
http://usoc.snu.ac.kr/m-promenade/17.htm 여기꺼 천천히 읽으면 될거 같아요. ㅎㅎ
@진홍여행자 구조주의 철학자들을 찾으면 상당히 유효합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와 관련해서 충격적인 말을 많이 하죠
@홍익 전 비트겐슈타인 하면 히틀러랑 같은학교 다닌거나 칼 포퍼랑 싸웠단거나 오스트리아 갑부 집안이면서 돈 다 버리고 철학에 인생 걸었다는 인간적인 관계나 괴짜스러움 같은것만 알아서요. 확실히 언어철학 이란 류로 선배 철학자들의 개념을 몽땅 부정했다고 듣기두 했구. 자세한 사항은 귀찮아서 잘 안봤는데(칼 포퍼랑 부지깽이 들고 싸웠단 책을 읽어서 그런 사연만 잼있게 읽었거든요), 이참에 차연 공부하면서 차근차근 칼포퍼까지 알아보면 잼있을거 같긴 합니다. 감사해요 ㅎㅎ
@진홍여행자 벌써 많이 알고 있으심. 비트겐슈타인은 천재라는데 내같은 평범한 사람은 이해가 안가는 말을 말이 하데요 비트의 어릴 때를 보면 전형적인 서구미남인데 나이들어선 완전 ....철학하느라 번뇌만 하는 삶이라 얼굴이 인상쓰고 있어요 ^^ 삶이 고달프죠
다 읽었습니다. 칸트 마르크스 도입부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 못하겠다 생각했었는데 막상 아래로 가니 시차 개념만 이해하고 나니까 글이 잼있네요. ㅎㅎ 한국어로 사고하는 철학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땜에 진정한 한국인 철학자는 없다 이런류의 비판이 있던데요(로자의 서재요?). 사실 마음이란게 heart 든 마음 이든 그 의미를 결정짓는건 문맥적으로 가지는 관계적인 의미지 꼭 단어가 중요한게 아니므로(심지어 시적비유를 써서 단어를 달리쓰는게 더 의미 전달이 좋은 경우도 있고요) 언어가 사고를 결정짓고 그게 세계 자체를 규정한다는 관점에선 어느나라 철학자냐 하는건 중요한게 아닐거라 생각해요.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
시차라......하여튼 글의 말미에서 주장하시는 모든 지식은 철학과 연계해서 학습될때 그 가치를 뻥튀기 한다는 생각엔 저도 동의합니다. 쉬운 예로 글에 나온 저명한 한국인 교수가 서양에서 공부를 많이 하니 한국어를 망실?하여 사고에 개입 안된단 것처럼. 반대로 철학적 사고를 습관화하면 어떤 문제에 대한 대처로 합리적 사고를 행할때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틀에 박히지 않은 열린 사고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건 어떤 분야든 다 해당되는 부분이고요. 아 진짜 잼있네요. 철학과가 아니래도 대학들에서 이런 논의는 기본으로 필수과정에 포함이 되어야 할텐데. 요즘 취업난이 워낙 심해서 갈수록 성과가 빠른거만 선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