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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에 계셨는데,
22.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23. 간곡히 청하였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24.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 오면서 예수를 밀었다.(마가복음5:21-24)
21 Jesus went back across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There at the lakeside a large crowd gathered around him. 22 Jairus, an official of the local synagogue, arrived, and when he saw Jesus, he threw himself down at his feet 23 and begged him earnestly, “My little daughter is very sick. Please come and place your hands on her, so that she will get well and live!”
24 Then Jesus started off with him. So many people were going along with Jesus that they were crowding him from every side.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에 계셨는데,
21 Jesus went back across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There at the lakeside a large crowd gathered around him.
튀르키예에서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지진이 일어났고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무너진 건물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튀르키예의 에르진이라는 곳에서는 이번 지진으로 단 한 채의 건물도 무너지지 않았고 또 사상자도 없었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에르진에 한 명의 시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엄격하게 불법 건물을 단속했던 것입니다.
다수를 대상으로 한 사람이 이런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또 당시의 통념을 역행하여 신념을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지진이 나기 전까지 욕먹는 일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을 다 죽이고 그가 옳았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 존립 의미입니다.
공적인 의미에서 미래를 보고 국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장 제 당파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고 간신배짓하는 그것이 국가입니까?
그것은 그렇고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교회 존립의 의미입니다.
주께서 왜 피 흘리시는 희생을 통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는가?
교회는 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인가?
교회의 역할은 타협 없이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일입니다.
에르진의 시장처럼 욕을 얻어먹어도 교회가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주님은 이방 땅 거라사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라사에서 쫓겨나셨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마을에서 나가 달라고 간절히 요구했던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한 사람이 치유되고 그 일로 인해서 2,000마리의 돼지 떼가 몰사당한 것입니다.
16. 처음부터 이 일을 본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돼지 떼에게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자기네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막5:16,17)
그들이 예수님을 쫓아낸 이유가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한 일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손해 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돼지 사건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경제 손실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시다가 이 돼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귀신들린 사람 치유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 일을 허락하신 것은 거기에 다른 동기를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미친 사람과 물에 빠져 죽은 돼지 떼를 통해 신앙이란 가치의 선택이라는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인생은 노상 가치의 선택입니다.
사람이냐 돼지냐 취사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가치를 택하느냐는 곧 예수님을 시인하는지 여부를 이릅니다.
생명의 선택은 곧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돼지의 선택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부인하는지를 이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생명을 택해야 합니다.
에르진의 시장처럼 어떤 강압에도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생명을 택해야합니다.
알고 보니 튀르키예는 터키였습니다.
그 지도자가 한심한 사람이었는데 이름 바꾸는 일에 흔들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독재를 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그 나라의 관건이 아닙니다.
사랑과 정의의 내용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생명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통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교회의 의미를 잃게 하는 책임이 먼저 목사들에게 있습니다.
목사들이 제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스스로를 코메디언으로 착각하고 사람 웃기는 일에 골몰하는 것입니다.
사람 숫자가 목회의 성공을 판가름한다고 여기며 사람만 많이 모인다면 무엇이든 하는 것입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초지일관 설교하시다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을 못 견디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럴듯한 예화를 나열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신학의 부실 공사는 지진이 나면 엄청난 사람이 죽고마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쫓겨날 각오로 주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거라사에서 보이신 것처럼 정확하게 생명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마을의 모든 돼지 떼가 빠져 죽어도 생명 편에 서야 합니다.
그 일이 안 되다 보니 무너진 교회 잔해 밑에 사람들이 깔려 죽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28.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12:28-31)
오직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을 회복하기 위해 치명적인 경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나?
2,000마리의 돼지 떼를 물에 빠뜨려도 그 입장에 변화가 없는가?
하지만 거라사 주민들은 하나님의 계명도 돼지 떼를 보장해주셔야지 지킨다는 식이었습니다.
돼지를 보장해주시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는 식입니다.
교회가 마치 거라사 마을 같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이제 거라사에서 쫓겨나신 주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움직이심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동을 성경이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제가 당시에 거라사에 갔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귀신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달려올 리가 없습니다.
제가 가는 곳에 귀신들린 사람 그대로 귀신들려 있고 이제 제가 가버나움으로 갔다고 합시다.
또 죽어가는 사람은 그대로 죽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시면 귀신이 사람에게서 튀어나오고 또 죽은 사람이 죽음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의 사람들은 주님의 이동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심이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것입니다.
그러면 2,000년 전에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지만 지금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시는데 무엇 기대를 가지고 교회 가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1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14:12)
예수님께서는 안 계셔도 이 땅에 예수님의 역사는 똑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예수님의 사역이 교회를 통해 또한 그의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2.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22 Jairus, an official of the local synagogue, arrived, and when he saw Jesus, he threw himself down at his feet
주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입니다.
그 마을의 유지였던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등장한 것입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그 인파를 뚫고 예수님 앞에 바로 나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달아 내리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당장 아들이 죽어가고
딸이 죽어가고
나병에 걸린 남편이 있고
급한 사람이 야이로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회당장으로 그 마을에서 존경받는 양반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 모인 그 사람들이 야이로 나타나셨다고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반이고 뭐고 채면치레하지 않고 밀치고 주님께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앞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성경에 또 딸을 둔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이 여인 역시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렸습니다.
그래서 딸 좀 구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거부하셨습니다.
자신의 딸에게 든 귀신을 쫓아주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기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하였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막7:27-29)
이 여인은 나를 왜 개 취급을 하시냐며 주님께 따지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 녀에게 그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 녀는 기도했습니다.
내가 개취급을 받고 내 딸이 낫게 해주세요. 아멘
그리고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기 위해 그 모든 모독을 참으신 것입니다.
28.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힌 다음에,
29.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희롱하였다.
30. 또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서 머리를 쳤다.
31. 이렇게 희롱한 다음에, 그들은 주홍색 옷을 벗기고, 그의 옷을 도로 입혔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그를 끌고 나갔다.(마27:28-31)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방에서 온갖 방식으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뜬금없는 조롱을 참는 것은 신앙의 미덕 중에 핵심입니다.
주님은 낮아지심을 통해 우리로 그 분의 자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야이로는 하나님의 실체 앞에 여지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는 사람은 옷을 홀랑 벗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야이로 같은 양반이 살았습니다.
미국 선교사 데이트는 정읍을 가기 위해 말을 타고 금산리를 지나곤 했습니다.
그 금산에서 마방에 들리고는 했습니다.
그 때마다 마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전도를 통해서 마방 주인이던 조덕삼(1867~1919)은 예수를 믿고 자기 집의 사랑채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금산지역의 최고의 유지였는데 그에게 논과 밭을 빌어먹던 사람들은 지주인 조덕삼 때문에 모두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즈음에 조덕삼의 머슴이었던 이자익도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머슴 이자익은 총명하며 신실했습니다.
이자익은 1905년 10월 11일 주인 조덕삼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규모를 갖추게 되어서 장로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대상자는 조덕삼 영수와 이자익 영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놀라왔습니다.
주인 조덕삼은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된 것입니다.
김제의 최고의 갑부
땅을 헌물하여 금산 교회당을 봉헌한 사람
교회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
막강한 지주 조덕삼이 장로 투표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머슴 이자익은 교회 시무장로가 되었는데 조덕삼은 집사님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조덕삼 집사님은 제 머슴을 장로님으로 모셨습니다.
그 이유는 조덕삼의 눈에 그 예수님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냈습니다.
모든 경비를 조덕삼 장로가 대주었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교회를 잘 받들어 섬기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엎어지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자익이 조덕삼의 머슴이라고 알려진 곳은 김제 땅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세상 것 벌거벗어 버리고 예수님 앞에 서면 이자익이나 조덕삼이나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지주니 마을 유지니 그런 옷을 홀랑 벗어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벌거벗은 죄인으로 주님 앞에 엎어지는 것입니다.
23. 간곡히 청하였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23 and begged him earnestly, “My little daughter is very sick. Please come and place your hands on her, so that she will get well and live!”
*죽음의 문제
참으로 한심한 일은 목사가 코메디언보다 웃기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이들이 모든 종교적인 단어를 동원해서 아주 설교를 코메디로 만들고 있습니다.
배꼽 쥐고 듣도록
아니면 유행가를 동원해서
아니면 종교적 신비주의를 동원해서.......
말세는 말세입니다.
옛적에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문제였습니다.
30. "너 사람아, 네 민족의 자손 모두가 담 밑이나 집 문간에서 네 이야기를 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말하기를 '어서 가서, 주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들어나 보자' 하면서,
31. 마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너에게 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이다.
32. 그들은 너를,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33. 그러나 내가 너에게 시켜서 한 그 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겔33:30-33)
그런데 이제는 설교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알아서 청중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설교란 사람들이 원하는 주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편히 사는 것입니다.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예언자들의 부흥회에 등장하는 것은 당시의 그 사람들이 원하는 그 소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듣기 위한 것입니다.
내 원하는 소리가 목사님의 입으로 증거되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또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소원을 말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사람이 원하는 주제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주제를 말씀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지금 야이로가 중요한 주제를 주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딸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이 주제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던 그 주제였습니다.
주님의 주제 역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건강했을 때 야이로가 그런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양보할 수 없는 주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등장한 것입니다.
야이로는 생전에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밀치고 주님께 달려가더니 아주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주제 앞에서 자신을 벌거벗어버렸습니다.
실은 야이로의 현실이 모든 사람의 현실입니다.
야이로의 딸의 생존의 시간이 한 두세 시간이라면 우리는 한 이삼십 년 남은 차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영원 앞에서 두세 시간이나 이삼십 년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딴 주제를 주님 앞에 가져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코메디로는 취급할 수 없는 아주 엄격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전제를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27.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른 주제로 예수님 앞에 나타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것은 내가 다룰 주제가 아니라고 심하게 꾸중하셨습니다.
13.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에게 명해서, 유업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1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눅12:13-15)
당시의 일반적인 랍비들은 이런 재산 상속의 문제를 다루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역시 이런 주제를 다루어줄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사람을 향해서 네가 나를 뭘로 봤느냐고 따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유문제를 다루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의 문제를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15.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눅12:15)
야이로는 딸의 죽음을 두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정주영씨도 산삼 한 뿌리를 몇 십억의 강남의 아파트 값에 사서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에집트의 엄청난 피라미드는 바로의 죽음 문제 때문입니다.
거대한 규모의 왕릉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가들이 살림 도구를 챙겨서 무덤에 넣어두고 죽은 그 사람과 함께 생사람을 묻어버렸던 것도 죽음 문제의 해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슨 방식을 통해서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권력가들이 더 잘 먹고 건강해서 몇십 년을 더 산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 앞에서 몇십 년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심판을 벗어나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압니다.
그 일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영생을 위한 것입니다.
그 죽음의 심판을 벗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그 주제를 바로 찾고도 오판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매한 사람들은 종교 행위를 통해서 주님의 심판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야 할 뿐입니다.
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9.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눅3:7-9)
요한의 말씀을 따르면 세례 행위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종교 고백은 하나님의 진노만 살 뿐입니다.
세례가 심판을 피해 가는 효과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 행위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큰 오해를 한 것입니다.
오히려 영생의 길은 교회가 아닌 제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10.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13. 요한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14.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을 하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해라."(눅3:10-14)
그것은 하나님을 전제하는 구체적인 삶이었습니다.
그 일은 두 손 들고 찬양과 경배를 하는 교회라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생명 사랑과 정의의 삶을 이르는 것입니다.
시장의 좌판에서 물건을 사다가 팔다가
직장에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맨날 남에게 거짓말이나 하고 아부나 하면서 두 손 들고 경배와 찬양을 하는 삶이 아닙니다.
엄청난 규모의 예수상을 짓는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따위 것보다 더 큰 것을 만든 사람은 헤롯입니다.
그는 독재자였습니다.
그가 직장에서는 예수님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들이 할 일은 두 벌 옷 이상을 갖지 않는 부를 제 가치로 두지 않는 삶
세리라면 공정하게 공무를 행하는 것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을 하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해라.
그 때도 정말이 아닌데 고발을 해대는 고위 공무원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짓 안하는 것이 심판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관계의 문제
야이로가 거기 예수님 앞에서 제 무릎을 꿇은 것은 자신의 일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딸의 문제였습니다.
딸이라는 관계는 어느 가게 주인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10원 더 비싸면 옆 가게로 바꿔치기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아버지께 상속 받을 돈을 챙겨서 그 돈으로 노름하고 술 퍼마시고 배고파서 집으로 돌아와도 변하지 않는 자식의 관계를 이르는 것입니다.
제 딸에게 문제가 생겨서 자신 직장 일이고 자신의 체면이고 버리고 그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딸 일이 자신의 일이고
딸의 일이 혹은 자신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중시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무슨 관계에 있습니까?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이전에는 담으로 막혀 있었는데 그 막힌 담을 헐어서 관계를 만드신 일입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엡2:14-16)
예수님께서는 모든 만민을 제 딸로 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원을 막는 담을 허신 것입니다.
그 관계 회복을 하신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그 모든 죄를 없애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한 식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크나리나와 러시아의 담을 허신 것이니다.
그 담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그들이 고백하는 예수님은 진짜 주님이 아닙니다.
왜 가장 거룩하신 분이 가장 낮은 죄인의 모습을 취합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 관계의 회복을 위하신 것입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2:6-8)
야이로가 딸을 대신해서 자신을 낮춘 것처럼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유일의 방식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높은 위치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 지역인 거라사를 찾아가셨습니다.
거라사에서 귀신은 예수님께 이 질문부터 했습니다.
7. 큰소리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막5:7)
마귀는 주님을 향해 이 더러운 인간과 무슨 상관이냐고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귀신들린 사람과 깊은 관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결과로 하나님은 이 죄인을 그의 자녀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한 아버지로 두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인해 세상은 새로운 관계에 놓인 것입니다.
모두 형제자매가 된 것입니다.
이 회복된 관계를 이념으로 가를 수 없습니다.
인종으로 가를 수 없습니다.
혹은 지적인 차이로 벽을 쌓을 수 없습니다.
사회 지위의 차이로 가를 수 없습니다.
*구원자의 문제
주님은 미친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어떤 존재가 바다를 향해 외친다고 바다가 말을 듣겠습니까!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자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말고 그 일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쇠사슬로 혹은 쇠고랑으로 귀신을 통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도가 귀신에게 통하겠습니까!
야이로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권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써 그 능력에 차이가 있습니다.
두 번째 이 야이로가 딸의 문제로 예수님을 깊게 신뢰하는 데에는 주님의 가치관을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사람의 생명의 편에 서시기 때문입니다.
돼지를 부인하고 말입니다.
주님은 돼지의 번성을 위해서 그 사람이 귀신들려 있기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생명의 편에 서십니다.
우리 모두는 그 영원 앞에서 시한부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남이 아닌 자신의 죽음 문제를 두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 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유일의 그리스도이십니다.
24.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 오면서 예수를 밀었다.
24 Then Jesus started off with him. So many people were going along with Jesus that they were crowding him from every side.
그래서 야이로와 함께 가셨는데 즉 야이로가 그 인파를 뚫고 그 앞에 엎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님 앞에 엎드려지지 않았더라면 주님이 그의 집으로 동행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즉 그의 딸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엎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는 예수님의 주제와 일치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엄청난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갔습니다.
실은 그 무리들이 야이로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27.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들 자신의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당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무리가 예수님을 밀쳤던 것입니다.
주님과 그 무리들이 바삐 가던 길에서 혈루증 앓던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야이로에게는 일 분 일 초가 급했습니다.
그런데 또 바쁜 여인이 예수님의 바쁜 길을 막는 것입니다.
이 여인으로 인해 그 바쁜 길을 지체한 것입니다.
야이로는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전혀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에게는 너의 딸이 죽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딸이 죽은 것인가 살아있는 것인가?
예수님은 전혀 다른 시각을 보이신 것입니다.
분명히 죽었는데 그 딸은 죽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