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말아야할 6.25 전쟁의 비극
6·25전쟁 Korean War, 六二五戰爭
(6·25 사변, 한국전쟁, 韓國戰爭)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 불린다.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국군은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려
한달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이어 미국 주도로 유엔 안전 보상 이사회가 열려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유엔군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자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약 450만 명에 달하고,
남한의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군의 서울 침공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더구나 현재의 초등학교(初等學校) 교과서에서 ‘6.25’는 스치는
이야기 정도로 두 세군 데에 나올 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6.25의
노래’는 너무나 생소(生疎)하고 이해하기 힘든 노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의 60대 이상 세대들은 해마다 6월이 오면
이 ‘6.25의 노래’를 너무나도 열심히 불렀다.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도 써먹고, 나뭇길에 지게목발을 치면서 목이
터져라 부르기도 했다.
‘니나노집’에서 노래 밑천이 짧거나 떨어지면 대신 부르는
애창곡(愛唱曲)이 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교련선생(敎鍊先生)님은 매 구절 앞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어 부르라며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그렇잖아도 이 노래는 애당초 악을 쓰고 부르기에 딱 알맞은 노랫말과
곡조(曲調)를 갖추고 있어 제식훈련(制式訓練)으로 다리 아프고 배고프면
선생님의 호통이 아니더라도 지레 악을 쓰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새, 이 나라에서 ‘조국(祖國)’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원수(怨讐)’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이뿐인가. 저들 침략군들의 딸들이 남쪽으로 무슨 응원이라도 오면
그 미끈한 매력과 기계화된 동작에 매료되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며칠씩 그녀들의 숙소와 응원석을 맴돌기도 한다.
여기에다 북한군(北韓軍)의 6.25남침(南侵)을
듣도 보도 못한 일부 운동권(運動圈)에서는 그 전쟁에서 죽다가 살아난
세대가 눈을 부릅뜨고 고통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엄연한 '남침'을 한사코 '북침(北侵)'이라고 집을 부리고 있다.
북한군 서울침공 장면
6.25가 '북침'이면 왜 이들이 3일만에 서울 태평로까지 왔을까?
어쨌든 한반도의 남쪽에서 사라진 ‘조국(祖國)’이 그나마 북쪽 땅에서
위력(偉力)을 발휘하고 있으니 다행이랄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의 ‘6.25의 노래’는 차라리 북한(北韓) 어린이들이
불러야 할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도 북한은 6.25전쟁을 ‘북침(北侵)’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군에 의해 '인민의용군'으로 징집된 서울시민들
우리가 '북침'을 했다면,
어떻게 서울시민들이 미제 'M1소총'이 아닌 소련제 '장총' 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할까?.
소련에서 우리에게 무기 지원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어쨌든 ‘6.25의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사실상(事實上) 잊혀진 노래가 되고 있다.
‘민족공조(民族共助)’라는 큰 물살 때문이다.
어느 해이던가,
국방부(國防部)가 제작한 포스터에 국군과 북한의 인민군(人民軍)이
형제처럼 나란히 다정하게 그려져 있어서 말썽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원수(怨讐)’와 ‘적군(敵軍)’이 어느 한 순간 그림 한 장으로 ‘친구’와
‘형제’가 되어버렸던 이 해프닝도 ‘민족공조’의 큰 그림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6.25의 노래를 두고 그 가사가 초·중등(初中等)학생들이 부르기에는
너무 섬뜩하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필자가 생각해도
가사가 너무 극단적(極端的)인 용어로 구성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를 함께 나눈 동족으로서 평화로운 이 나라를 침공하여
100만명이 넘는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저들은 '원수'일 수밖에 없었고,
"쳐서 무찔러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었다.
사정이 이러했는데도 지금 세대들은 그 노래가 대단한 오류(誤謬)라도
있는 양 비난일색(非難一色)이다.
이뿐이 아니다. 이 노래의 근원인 '6.25동란' 자체를 마치 없었던 일이거나,
우리 쪽이 뭔가를 잘못해서 일어난 사단이나 되는 것처럼
슬그머니 교과서(敎科書)에서도 지우고, 노래책에서도 지우고 있다.
털끝만큼도 본받을 일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일본인(日本人)과 일본정부의 근성(根性)
이라도 닮았으면 한다. 63년전 순박하기 짝이 없는
우리나라 어버이들과 어린 여성들을 보국대(報國隊)와 정신대로
끌어다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만행을 저지른 일제(日帝)
출신 일본정부 관리들은 지금도 그때의 그것은 만행(蠻行)이 아니었다는
책을 만들어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세뇌교육(洗腦敎育)을 시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그들보다 5년이나 뒤인 1950년, 평화로운 일요일을 즐기던
우리들의 머리위에 포탄과 폭탄(爆彈)을 쏟아 부어 100만명이 넘는
무고한 우리 국민들을 살상(殺傷)한 북한공산주의자(北韓共産主義者)들의
만행과 '6.25동란'의 참상(慘狀)은 무슨 창피한 일이라도 되는 양 쉬쉬하고
감추려고만 하고 있다.
북진하는 국군
얼어붙은 한탄강을 건넌 이들은 절반도 살아오지 못했다
공산군은 후퇴를 하면서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신앙인 등을
무차별 학살한 뒤 식수원도 끊을 겸 우물에 던졌다
공산군에게 학살 당한 시체 가운데 남편을 찾고 있는 부인.
뒷줄엔 처리반원들이 악취로 인하여 코를 막고 있다.
시체가운데 가족을 찾는 생존가족들의 표정이 담담하다.
이래서는 안된다. 노래의 가사가
지금의 국민정서(國民情緖)에 맞지 않는다면,
그에 맞춰 개사(改詞)를 하면 된다.
그리고 그 개사된 '6.25노래'로 '6.25의 원혼'들을 달래줘야 한다.
가해자(加害者)의 눈치를 보느라 비굴하게 몸을 움츠리지 말고,
100만명의 원혼(?魂)들에게 제사(6.25 기념행사)라도 제대로 드려줘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와 못난 후대(後代)들이 '6.25숨기기'에 급급하고 있는 몰골이
너무나 한심하여 한 작가(作家)가 기존의 ‘6.25의 노래’를 개사(改詞)하여
‘신 6.25 노래’라는 것을 지어 발표한바 있어 이를 소개한다.
지금의 ‘6.25 노래’가 학생들의 정서(情緖)에 맞지 않는다면,
자기가 지은 노래로라도 그 당시 희생된 원혼(?魂)을 달래주자는
취지에서 지은 시라고 한다.
6.25 전상자
‘6.25전쟁’으로 인해 우리 국군(國軍)의 사망자는 무려 137,899명에 이르며,
실종자(失踪者) 수는 32,838명이나 된다.
부상을 당한 국군도 450,742명에 이르고 있다.
민간인(民間人)들의 사망자는 학살당한 사람까지 합쳐서 37만여 명에 이르며,
부상당한 사람도 23만여 명에 이른다는 통계다.
여기에다 피난민(避難民)이 240만여 명, 전쟁고아가 10만여 명이나 발생했다.
생떼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가 20만여 가정,
청상과부도 20여만명이나 발생했다. 부상자도 그냥 부상자가 아니다.
팔과 다리를 잃고, 악성 총상으로 신음하다가
조금 남은 논밭전지마저 모두 탕진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전쟁고아
부모는 모두 살륙당하고 병든 개처럼 버려져 있다.
이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미국(美國)을 포함한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자가 3만6천9백여 명이고, 11만6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실종(失踪)되거나 포로가 된 병사들이 6,900여명에 이르고 있다.
북한군(北韓軍)과 중공군에 비하면
유엔군의 희생은 적은 규모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은 북한군과 중공군(中共軍) 같이 남의 나라를 침략(侵略)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저들의 침략을 막아 우리나라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소중(所重)한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중공군에 생포되는 유엔군
6.25 동란에 따른 양측 피해
구 분 |
계 |
남 한 |
북 한 |
유엔군 |
중공군 |
인명
피해 |
계 |
2,666,247 |
621,479 |
990,968 |
159,800 |
894,000 |
전사/사망 |
732,398 |
137,899 |
373,599 |
36,900 |
184,000 |
부 상 |
1,506,367 |
450,742 |
229,625 |
116,000 |
710,000 |
실종/포로 |
427,482 |
32,838 |
387,744 |
6,900 |
- |
재산
피해 |
민간 가옥 |
612,000동 |
612,000동 |
- |
- |
- |
각급 학교 |
15,427동 |
15,427동 |
- |
- |
- |
행정 기관 |
2,700동 |
2,700동 |
- |
- |
- |
종교 단체 |
13,100동 |
13,100동 |
- |
- |
- |
철 로 |
329km파손 |
329km파손 |
- |
- |
- |
전 선 |
61km파손 |
61km파손 |
- |
- |
- |
※ 북한군의 전사/사망자에는 그들이 학살한 북한동포를 포함한 수이며,
실종/포로는 그들이 납치하였거나, 행방불명이 된 자를 포함하고 있음.
유엔군 측 국가별 사상자
명 |
계 |
전사/사망 |
부 상 |
실 종 |
포 로 |
계 |
776,360 |
178,569 |
555,022 |
28,611 |
14,158 |
한 국 |
621,479 |
137,899 |
450,742 |
24,495 |
8,343 |
미 국 |
137,250 |
36,940 |
92,134 |
3,737 |
4,439 |
영 국 |
4,908 |
1,078 |
2,674 |
179 |
977 |
오스트레일리아 |
1,584 |
339 |
1,216 |
3 |
26 |
네 덜 란 드 |
768 |
120 |
645 |
- |
3 |
캐 나 다 |
1,557 |
312 |
1,212 |
1 |
32 |
뉴 질 랜 드 |
103 |
23 |
79 |
1 |
- |
프 랑 스 |
1,289 |
262 |
1,008 |
7 |
12 |
필 리 핀 |
398 |
112 |
229 |
16 |
41 |
터 어 키 |
3,216 |
741 |
2,068 |
163 |
244 |
타 이 |
1,273 |
129 |
1,139 |
5 |
- |
그 리 스 |
738 |
192 |
543 |
- |
3 |
남아공화국 |
43 |
34 |
- |
- |
9 |
벨 기 에 |
440 |
99 |
336 |
4 |
1 |
룩 셈 부 르 크 |
15 |
2 |
13 |
- |
- |
콜 롬 비 아 |
639 |
163 |
448 |
- |
28 |
이 디 오 피 아 |
657 |
121 |
536 |
- |
- |
노 르 웨 이 |
3 |
3 |
- |
- |
-
|
남침 중 중앙청을 점령하고 춤을 추는 중공군들
아직도 6.25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운동권에서는
이들 중공군들이 그 먼 중국땅에서 왜 우리의 수도 '서울'까지 와 있으며,
무엇이 좋아 춤을 추고 있는지를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개미떼 같이 기어 올라오는 적병(敵兵)들 앞에서
"소대장님! 총알이 안나가요"라며 울부짖다가 처참하게 쓰러져간
그들 무지렁이 소총병(小銃兵)들의 절규가 '조국'과 우리들 후대들에게
이웃집 강아지 죽은 것보다 못한 이 따위 '홀대'를 자청(自請)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속 깊이 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1951년 7월 3일. 중공군과 합류한 공산군과 치열한 전투에서 부상한 샘
아얄라 상병이 후송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옆에는 카튜사한국병사.
전쟁은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파괴하여 피폐한 삶을 남겨둔다.
다시는 이러한 민족적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애국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어설픈 감상적 민족주의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것이다.
북은 변하지 않았다. 변할 수도 없다. 북한동포를 위해서라도 반공은
우리 풍족한 대한민국 국민의 사명이며 몫이다.
1951년 1월 25일 수원시 화성에 소재한 장안문은 공산군의 포격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다.
1950년 9월초, 대구 학도의용군 병사들이 보급품을 받으면서
전장에 투입되기 직전 최소한의 교육을 받고 있다.
20세를 전후한 대한의 아들들...귀한 가문의 금지옥엽같은 아들들...
이들의 애국적 헌신으로 대한민국은 지켜졌다.
1950년 8월 중순 경남 창녕군 영산지역전투에서 참패한 북한군이
물러나면서 밤이면 나타나 양민을 괴롭혔다.
낮에는 조용하다가 밤만되면 나타나 무법천지가 되어
공포에 떨던 주민들이 북한공산군을 피해 피난을 가다가 발각되어
학살 당한 모습.
1951.10.1. 서울수복 후에 발견된 전쟁고아들.. 전쟁의 폐허더미를
헤매다가 유엔 복지담당관에 의해 시립보육원으로 보내기 전..
북한군포로 신상명세를 타자기로 작성하는 중,
누가 이 청년들을 죽음의 현장으로 내 몰았는가?
구덩이에 버려진 시체들..우리들의 정겨운 가족들이 어느 날 공산군의
남침으로 참혹한 피해자들이 되었다.
다리 밑에 응달에 몸을 피해 잠시 쉬고 있는 피난민 가족들.
포격에 가족을 잃고 피난 길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누군가 밥한술을
놓고 간 뒤에 홀로 울고 있다.
철수하는 LST미국 군함을 타려고 몰려든 피닌민들
철수하는 미국 군함을 타기위에 흥남 부두에 몰린 피난민들
어선과 군함 후퇴하는 다국적군과 피난민의 북새통
UN군과 피난민14000명을 태우고 흥남부두와 군수물자를 폭파했다,
북한을 출발한 피난 열차의 종착역은 부산역이였다.
화차안 좌석이 없자 화차위에도 피난민이 기득
화차 위에타고 졸다가 터널에서 많은 목숨도 잃었다
한강 얼음위를 건너는 1.4후퇴 서울 시민들
나뒹구는 시체들.
6.25사변으로 행불처리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한반도 곳곳에서
죽고 썩어갔다.
6.25의 노래
작사 박두진작곡 김동진
1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짖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케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3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을 오지 않게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