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시인 · 이초우
<신작시>
어눌한 낙하 외 2편
-만추(晩秋)
천문(天門)이 열리는 나의 시간 새벽 세 시
그것은 해 질 무렵이었지
아직도 떠나질 않고 날 기다려주었어
강물의 비늘 새 반짝반짝 날갯짓 파들거리고
어디선가, 경쾌하게 춤을 추며 달려오는 노랑 우편 마차
내 두 손 잡고 덩실덩실,
마른 이파리 더미 밟고 있는, 그 두 발
바스락바스락 묵은 이파리 덮고 잠들었던 줄거리
깨우고
어쩌면 그렇게 피부가 해맑고 간절한지, 나는
벌써 알았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이 폐병을 앓고 있는
그녀의 피부 아래 지층, 우수의 수맥 따라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난 왜 그런지 췌장이 약하다
앙상한 잔가지에 매달려, 무엇이 그토록 애가 타는지
목어처럼 흔들며 두 손 모아 비는 홍엽
휘 휙, 소슬 찬바람 내 곁을 지나가고, 아프지 않는 낙하
어디 있겠냐만
자살한 화가의 혼이 물든 은행잎, 제 몸 멍들지
않게 우수수, 왜 홍엽은 저렇게
어눌하게 떨어져 내릴까
아마도 저 가엾은 곡선의 유희, 하늘하늘
유언장 줄거리를 쓰며 내려앉기 때문.
말꼬리와 소년
우리 집 앞산은 하얀 말꼬리를 가진 산
비 오지 않은 날엔 그 긴 꼬리 엉덩이 사이에 감추고
비가 왔다 하면 엄청 높은 꽁무니에서 도랑 바닥까지
질질 끌며 휘둘러댔어
드러난 바닥 꼬리가 때릴 땐 그 소리 기수의
회초리 소리보다 더 아프게 들려왔어
비 오는 여름날
한참 동안 힐끔거리다 보면, 바닥 치는 꼬리 소리를 듣고
천녀들이 내려와 휘휘 그 말꼬리와 함께
요염하게 춤을 추다 공중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 어른거려
자꾸만 내 눈을 비벼보기도 했지
내 유년기의 발가벗은 목욕, 봇물에서 떨어지는
몽당 말꼬리에 여름을 식히곤 했지
봇물에서 새어 나온 그 짧은 꼬리 천녀가 거기까지 와
어린 소년을 유혹이라도 했는지 간지럽다 못해
어찌할 수 없는 달아오름을 느끼곤 했어
머리 길게 땋은 여자아이들, 등 뒤 머리카락 꼬리를 보면
비가 오다 햇살 퍼질 때
눈부시도록 춤을 춘 흰 눈 같은 천녀들을 보았고,
밤이 되면 그 사춘기 아이 꽤 긴 말꼬리 따라 뛰어내려
‘이젠 내 몸 박살 나 죽는구나’ 하다
온몸 무게 바닥에 닿기 직전
화들짝 깨어나 버리는 꿈 자주 꾸곤 했지
황홀한 도넛
나는 하품을 하다 고개를 책상 위 손등에,
뻘떡, 주방 서랍에 있는 담배 두 개비를 가져왔지
다시마 젤리, 그리고 땅콩사탕
내 생의 3모작, 하지만 새끼들 거느린 어미 사자를
만날지 모르는, 또 다른 담배,
꽤 오래 니코틴 맛을 보는, 롯데 자일리톨 껌 통을 열어
담배 두 개비를 한꺼번에 털어 넣었어
자근자근 열을 내려 보는, 어쩌면 어떤 결단을 내리기 위한
쫀득쫀득 내 발걸음 같은,
내가 이십 대에 피웠던 뻐끔담배
밖으로만 퓨, 퓨, 허공으로 줄지어 날려 보낸 도넛들
그 일이 성사될지 안 될지는 반 반,
다시 묘수를 짜낼 땐, ‘고소미’ 비스킷 한 봉지를
바싹바싹 피우다 분질러 버리고,
또 한 개비를 물고, 또 물고,
줄담배를 피워댄다
하루에 세 갑 정도를 태우며 애써 날 달래보지만, 오히려
여름날 탄산음료 마실 때 마냥
돌아서면 갈증이 난다
그뿐인가
이럴까 저럴까, 생각이 두 줄을 팽팽히 잡아당길 땐
내 마음의 손 슬그머니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물고
턱 되바라지게 하고 퓨 퓨,
황홀한 도넛 굴리기를, 아마도 끝내기는 어려울 것만 같다
<근작시>
0이란 외 1편
십수 년여 장고 끝에 꽃을 피운, 그 1 달포 동안 0을 향해
울어대는데, 옆구리의 떨림판
뱃속 공명실을 울려 때론 테너로, 바리톤으로
오후 한때 광란의 춤판, 그 1의 무리들 향해
0 한 마리 거침없이 가로질러 날아간다.
1을 꿰찬 0, 황홀한 혼인 비행으로 수천 개의 별똥별이
우수수
아직도 너는 0의 또 다른 색깔, 그 비스킷이
그렇게 먹고 싶었던, 그래서 넌 감당이 안 되는 +를 향해
산달 앞둔 사생아 같은 +덩어리로, 그때만 해도 0이 뭔지
몰랐던 너
그러다 어느 날 -의 나락으로 떨어져
줄곧 -를 더해, -1, -2, -3 ~ ~, -10.
X 와 -X는 분명 서로 반대된다
하지만 X의 경계 속엔 -X가 있고, -X의 경계 속엔
X가 있다는 걸
그럼 X 와 -X, 혼인 비행이 가능할까
X = -X
달을 보지 않고, 내 손가락만 줄곧 보고 있던 너
+를 향해 가더라도 금방 돌아와야 하고, 그렇다고 -로,
너는 언제나 0의 자리 가까이, 더 이상 네 심장에
방망이질 말고, 그 바람 때때로 네 멱살 잡고 끌고 가도
조금도 흔들림 없는, 한가롭게 수련이 피어있는
0의 자리로.
-『시작』 2021년 여름호
까르페 디엠*
도시는 온통 안개에 저려 방향감각을 잃고, 신선들이
안개 속을 날아간 고속도로
가파르게 오른 불쾌지수
우린 주먹 키스로 서로를 위로하고,
해안가를 돌고 돌아 '웨이브 온'**에 도달, 벽이 하얀
개미 동굴, 여기저기 여왕개미들 비스듬히 누워,
오! 바닷가 시트, 자연풍과 에어컨 바람이
왈츠를 추며 돌고 도는,
영상 강의로 집 안에서, 긴 장마철 창문이
일을 하지 않은 날들
아버지와 난 목마 위에 앉아 둥실둥실 파도타기를
하며 돌던,
그러나 우리들의 도시, 그렇게 기다렸지만
안개가 걷히질 않는
하필이면 해지는 오후, 디스코, 힙합, 망치 춤, 수컷
하루살이들의 군무
저쪽 발치에서 지켜보던 암컷, 쏜살같이 가로질러
유유히 날아오른, 미련 없이
마감한 멸(滅)의 향연
바다는 언제 봐도 깊은 내륙에서 온 나그네의 몫
첨벙대는 갯물 위에 노동을 한 아버지
어둠이 수면 삼키려 들면
아버지의 허약한 췌장 흐물흐물해졌겠지
나는 그와 헤어지고 꽤 먼 해안가 '文化酒所'***로, 펜트하우스
모서리 달로 착각 석양을 붙잡고,
옷깃만 미어질 뿐 네 어찌 승자가 될 수 있겠나
"메시아"를 관람하고 눈물로
작곡한 '천지 창조'
호랑이와 사자 으릉, 으흥, 포릇 포르릇
종달새의 날갯짓 소리로 그려진 고전주의
너와 난,
불협화음이 사라진 제6일의 피조물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오늘을 즐기라’ 말한 핵심 경구,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원뜻의 라틴어.
** 부산 기장의 해안가 유명 카페.
*** 부산 송도 소재, 인문학 갤러리 이름.
-『작가와 사회』 2021년 가을호
이초우
2004년 『현대시』 등단. 시집 『1818년 9월의 헤겔선생』 『웜홀 여행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