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 윤오영***
초가을은 사십 고개를 접어든 조용 나직한 여인의 눈매와 같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있거니와 사십은 실상 인생의 초가을이다.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여인의 눈매가 아닌가 한다. 십대의 소녀를 봄의 푸른 싹과 같다면 이십 대는 꽃봉오리다. 웃음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은 곱고 아름다운 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작열한 향기를 피우며 떨어지려는 정열의 꽃이랄까. 오뉴월 염천의 수은주와 같이 상승할 줄만 아는 불꽃이다. 그러나 사십 고개에 들어서면 어느덧 눈가에 싸늘한 침착성이 나타나며 진주 같은 눈에는 슬기로운 이슬까지 돈다. 인생을 음미하고 생활을 다시 한 번 가다듬으려는 지성의 의지와 알뜰한 부지런에 틀이 잡혀 갈 때 그의 눈매에는 엷은 애수가 깃든다. 오십에 서리가 앉아 육십이면 이미 겨울이다. 그래서 나는 초가을을 사십 고개를 접어든 여인의 눈매라고 한다.
‘여자는 고운 봄을 슬퍼하고 남자는 시원한 가을을 슬퍼한다.’고 한다. 슬퍼한다는 말은 지극히 사랑한다는 뜻이다. 담원춘(譚元春)이란 예전 문인은 가을을 장부의 계절이요. 운사(韻士)의 계절이라고 했다. 가을을 봄에 비하면 가인(佳人)을 놓고 고승(高僧)과 만난 격이요, 여름에 비하면 귀인(貴人)을 버리고 청천백석간(淸泉白石間)을 놓고 시인과 노는 격이요, 겨울에 비하면 고졸한 노인을 버리고 비오는 밤, 청등 밑에서 영웅을 만나는 격이라고 했다. 어디까지나 여자는 봄이요, 가을은 장부의 가슴을 움직이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봄이 되면 모든 것이 봄이요, 가을이 되면 모든 것이 가을이다. 더군다나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의 연령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음에랴.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여인의 눈매가 아닐까.
낮에는 아직도 불볕이 끓어 여름이건만 아침, 저녁으로 싸늘한 기운이 이미 가을이다. 이 신선한 바람이 실어오는 한 줄기 싸늘한 기운이 어느덧 여름과 가을을 교차시키는 것이다. 아직도 풍만하고 씩씩하고 정열과 웃음이 어제와 같은 여인의 눈매에서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한 줄기 침착(?)의 선(線)이 엿보일 때, 인생의 초가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깊이 있는 애정과 일생의 참스러운 대화는 여기서 즐거워지는 것이다. 어찌 고승이나 영웅뿐이랴.
가을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흔히 달을 말하고, 산천의 소조한 풍경을 말하고, 드높고 맑은 하늘을 말하고, 끝없이 푸른 강물을 말하고, 맑은 바람을 말한다. 그러나 달과 산천과 하늘과 강이 가을에 비로소 생긴 것은 아니다. 단풍을 말하고 황국(黃菊)을 말하고, 벌레 소리를 말하고, 구슬 같은 이슬을 말한다. 그러나 단풍이 들어서 가을이 되고 국화가 피어서 된 것은 아니다. 하물며 풀끝에 맺힌 이슬이나 섬돌 밑에서 우는 벌레들의 대단치 아니한 것이 가을의 벅찬 감정을 노래하는 데 무슨 값어치가 되랴. 그러나 나는 단원(檀園)의 군선도(群仙圖)를 본 적이 있다. 바둑을 두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돌에 걸터앉은 사람,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사람, 일어서 있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오는 사람, 가슴을 내 놓고 있는 사람, 배를 내 놓고 있는 사람, 맨발로 있는 사람, 대머리진 사람, 눈썹이 긴 사람, 수염이 많은 사람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하나하나 신기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바둑을 둔다고 무슨 신선이며 배를 내 놓고 있다고 무슨 신선인가.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체가 어딘지 알 수 없는 탈속(脫俗)된 선풍신운(仙風神韻)에 휩싸여 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기형스러운 사람들이 모두 다 신선으로 나타난다. 아니 돌 한 개, 풀 한 포기까지도 선경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이 된다.비로소 단원의 흉중에 가득 찬 신선들이 그의 붓끝에서 바람같이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양을 떠나서 따로 군선도는 없다. 한 줄기의 가을 기운이 일어나면, 세상의 모든 것이 가을이다. 단풍만이 가을이 아니다. 푸른 솔도 어제 보던 솔이 아니다. 이슬만이 가을이 아니다. 이끼 낀 돌도 이미 가을이다. 따라서 내 혈관에 도는 피가 이미 가을이요, 내 눈망울이 이미 가을이다. 낸들 어떻게 가을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이는 것이 모두 다 가을이다. 그러나 가을은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달이요, 물이요, 이슬이요, 하늘이요, 벌레 소리다. 여기서 가을을 보고 가을을 듣는 것이다.
나는 사십 대에 들어선 여인의 눈매에서 초가을을 느낀다고 했거니와 어찌 이뿐이랴. 가을걷이를 하는 중년 농부의 억센 팔뚝에서도 초가을을 느끼는 것이다.
***깍두기설 /윤오영*** C군은 가끔 글을 써가지고 와서 보이기도 하고, 나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나도 그를 만나면 글 이야기도 하고 잡담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다.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깍두기를 좋아한다고, 한 그릇을 다 먹고 더 달래서 먹는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깍두기를 화제로 이야기를 했다. 깍두기는 이조 정종(正宗) 때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의 부인이 창안해 낸 음식이라고 한다. 궁중에 경사가 있어서 종친의 회식이 있었는데, 각궁(各宮)에서 솜씨를 다투어 일품요리(一品料理)를 한 그릇씩 만들어 올리기로 했다. 이때 영명위 부인이 만들어 올린 것이 누구도 처음 구경하는 이 소박한 음식이다. 먹어 보니 얼근하고 싱싱한 맛이 일품이다. 그래서 위에서 “그 희한한 음식 이름이 무엇이냐?” 고 하문하시자, “이름이 없습니다. 평소에 우연히 무를 깍둑깍둑 썰어서 버무려 봤더니, 맛이 그럴듯하기에 이번에 정성껏 만들어 맛보시도록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깍두기구나.” 하고 크게 찬양을 받고, 그 후 오첩반상의 한 자리를 차지해서 상에 오르게 된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그 부인이야말로 참으로 우리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솜씨 있는 부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다른 부인들은 산진해미(山珍海味) 희귀하고 값진 재료를 구하기에 애쓰고 주방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무 ‧ 파 ‧ 마늘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갖은 양념 갖은 고명을 쓰기에 애쓰고, 소금 ‧ 고춧가루는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료는 가까운데 있고 허름한데 있었다. 옛날 음식 본을 뜨고 혹은 중국사관(中國使館)이나 왜관(倭館)음식을 곁들여 규격을 맞추고 법도 있는 음식을 만들기에 애썼으나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국중에 올릴 음식을 그런 막되게 썬 규범에 없는 음식을 만들려 들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무를 썰면 곱게 채를 치거나 나박김치 본으로 납작납작 예쁘게 썰거나 장아찌 본으로 걀쭉걀쭉하게 썰지, 그렇게 깍둑깍둑 썰 수는 없다. 기름 ‧ 깨소금 ‧ 후춧가루 식으로 고춧가루도 적당히 치는 것이지 그렇게 시뻘겋게 막 버무리는 것을 보면 질색을 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깍두기는 무법이요, 창의적인 대담한 파격이다. 그러나 한국 음식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면 이 대담한 새 음식은 탄생될 수 없다. 실상은 모든 솜씨가 융합돼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무법 중의 유법이다. 무를 깍둑깍둑 막 써는 것은 곰국 건지 썰던 솜씨요, 고춧가루를 벌겋게 버무린 것은 어리굴젓 담그던 솜씨요, 발효시켜서 익혀 먹도록 한 것은 김치 담그던 솜씨가 아니겠는가? 다 재래에 있어온 법이다. 요는 이것이 따로 나지 않고 완전 동화되어 충분히 익어야 하고 싱싱하고 얼근한 맛이 구미를 돋우도록 염담(鹽淡)을 잘 맞추어야 한다. 음식의 염담이란 맛의 생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인의 구미에 상하 귀천 없이 기호에 맞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격식이 문제 아니요, 유래가 문제 아니다. 이름이야 무엇이라 해도 좋다. 신선로(神仙爐)니 탕평재(蕩平菜)니 두견화다(杜鵑花茶)니 가증스럽게 귀한 이름이 필요 없다. 깍두기면 그만이다. 이 깍두기가 반상 오첩에 올라 어육(魚肉)과 어깨를 나란히 하되 오히려 중앙에 놓이게 된 것이요, 위로는 궁중 사대부가로부터 일반 빈사(貧士) 서민에 이르기까지 애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C군은 영리한 사람이다. “선생님, 지금 깍두기를 빌어 수필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지요? 수필의 소재는 우리 생활 주변에 있고 다시 평범한 데 있는 것이요, 신기하고 어려운데서 구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무가 싱싱하고 단 무라야 깍두기 맛이 나지 썩은 무나 시든 무야 되겠나?” “그것은 글의 품위에 관계 되겠지요. 청신하고 진실한 것으로 깊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야 되겠지요.” “이름이야, 소품(小品)이라 하든 에세이라고 하든 잡문이라고 하든 상관할 바 아니지요. 나는 내 글을 쓰는 것이니까요. 어느 이름에 구애될 필요는 없지요. 어느 형식이나 유파에 따를 필요도 없지요. 오직 파격이 필요하지요. 램의 수필이 어디까지나 환상적이요, 정서적인가 하면, 노신(魯迅)의 수필은 정열적이며 혁명적이었고, 주자청(朱自淸)의 수필이 서정적이요 미문적이었다 하면, 푸르스트의 수필은 사색적이요 내심적이었거니와 그들의 수필을 기준으로 할 아무 필요도 없으니까요. 서구적인 저널리즘이 칼럼니스트들을 수필문학가라 하고 한편에서는 서투른 작문을 수필 명작이라 떠드는 것을 추종할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남들이 내 글도 수필이라고 불러 준다면 그런대로 받아들여 족하고요. 다만 읽어서 싱싱하고 얼근한 깍두기 맛만 낸다면 소설 ‧ 시와 같은 문학들과 함께 오첩반상에, 오히려 중앙을 차지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던 중 무를 숭덩숭덩 썬 것이 무법인 듯하되 곰국 건지 썰던 법이요 운운하시던 말씀인데, 수필에서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자네가 내 말을 지나치게 생각하니까 좀 무서우이마는 수필에 정서가 흐르는 것은 서정시에서 빌어온 법이요, 수필에서 서술이 긴박하고 빈틈없이 나가는 것은 단편소설에서 빌어온 법일세. 설리(設理)는 평론의 수법에서, 묘사는 배경 소설의 수법에서, 독자에게 친절감을 잃지 않는 것은 저명한 서간문의 수법에서, 사색적요 반성적인 것은 저명한 일기문의 수법에서, 문장의 활기 있는 긴장은 희곡의 수법에서, 문단과 문단이 갈릴 때마다 청신(淸新)한 전환은 시나리오의 신(Scean)을 바꾸는 솜씨에서 자유자재로 섭취 활용해 가며 자기의 독특한 문체와 참신한 문태(文態)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거나 의식적인 기교에 지나치거나 익지 아니한 날내가 나면 그 글은 원숙한 글이 아닌 것일세.” “음식 맛의 생명은 염담(鹽淡) 맞추기에 있다고 하셨는데 문장에서 염담이란 무엇에 해당됩니까?” “문장의 농담(濃淡)이지. 문장의 농담이 없으면 정물화(靜物畵)에 음영(陰影) 없는 것과 같고, 음악에 박자 없는 것과 같지. 문장은 이 농담에 의해서 함축도 있고 여운도 있고 기환(奇幻)도 있고 내재적인 리듬도 있어 비로소 시취(詩趣)를 갖게 되는 것일세. 고인이 농담 없는 문장을 가리켜 몰골도(沒骨圖)라고 풍자한 이가 있어, 우리 모양으로 문장이 미숙하고, 또 배워 보려는 사람들은 이 깍두기에서 얻은 바가 있을 것일세.” 일후(日後)의 참고삼아 이 날의 문답을 적어 둔다.
***까치 /윤오영 ***
까치 소리는 반갑다. 아름답게 굴린다거나 구슬프게 노래한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고 기교 없이 가볍고 솔직하게 짖는 단 두 음절 ‘깍 깍. 첫‘깍’은 높고 둘째‘깍’은 얕게 계속되는 단순하고 간단한 그 음정(音程)이 그저 반갑다. 나는 어려서부터 까치 소리를 좋아했다. 지금도 아침에 문을 나설 때 까치소리를 들으면 그 날은 기분이 좋다.
반포지은(反哺之恩)을 안다고 해서 효조(孝鳥)라 일러 왔지만 나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좋다. 사랑 앞마당 밤나무 위에 까치가 와서 집을 짓더니 그것이 길조(吉兆)라서 그 해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영전(榮轉)이 되었다던가, 서재(書齋) 남창 앞 높은 나뭇가지에 까치가 와서 집을 짓더니 글재주가 크게 늘어서 문명(文名)을 날렸다던가 하는 옛 이야기도 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까치 소리는 반갑고 기쁘다.
아침 까치가 짖으면 반가운 편지가 온다고 한다. 이 말이 가장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왜냐 하면, 그 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반가운 소식의 예고같이 희망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까치뿐이 아니라 까치집을 또 좋아한다. 높은 나무 위에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엉성하게 얽어 놓은 것이, 나무에 그대로 어울려서 덧붙여 논 것 같지가 않고 나무 삭정이가 그대로 떨어져서 쌓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소쇄(瀟灑)한 맛이 난다. 엉성하게 얽어 논 그 어리가 용하게도 비가 아니 샌다. 오직 달빛과 바람을 받을 뿐이다.
나는 항상 이담에 내 사랑채를 짓는다면 꼭 저 까치집같이 소쇄(瀟灑)한 맛이 나도록 짓고 싶었다. 내가 완자창(卍字窓)이나 아자창(亞字窓)을 취하지 않고 간소한 용자창(用字窓)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정서에서다. 제비집같이 아늑한 집이 아니면 까치집같이 소쇄한 집이라야 한다. 제비집은 얌전하고 단아한 가정부인이 매만져 나가는 살림집이요, 까치집은 쇄락하고 풍류스러운 시인이 거처하는 집이다.
비둘기장은 아무리 색스럽게 꾸며도 장이지 집이 아니다. 다른 새 집은 새 보금자리, 새 둥지, 이런 말을 쓰면서 오직 제비집 까치집만 집이라 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의 집에 대한 관념이나 정서를 알 수가 있다. 한국 건축의 정서를 알려는 건축가들은 한 번 생각해 봄 직한 문제인 듯하다. 요새 고층 건물, 특히 아파트 같은 건물들을 보면 아무리 고급으로 지었다 해도 그것은 ‘사람장’이지 ‘집’은 아니다.
지금은 아침 여덟 시, 나는 정릉 안 숲 속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 오래간만에 까치 소리를 들었다. 나뭇잎들은 아침 햇빛을 받아 유난히 곱게 푸르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파란 하늘이 차갑게 맑다. 그간 비가 많이 왔던 관계로 물소리도 제법 크게 들려온다. 나는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여길 와 본 적이 있었다. 보건 운동을 하러 온 사람, 약물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붐비어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 보니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윽한 숲 속이 한없이 고요하다. 지금이 제일 고요한 시간이다. 까치들이 내 앞에 와서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이른바 까치걸음이다. 귀엽다. 손으로 만져도 가만히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사람이 옆에 앉아 있다는 데는 아무 관심이나 의구심도 없이 내 옆에서 깡충깡충 뛰놀고 있다.
나는 일찍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민화(民畫) 하나를 생각한다. 한 노옹(老翁)이 나무 밑에서 허연 배를 내놓고 낮잠을 자는데, 그 배 위에 까치 한 마리가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신기한 그 상상화에 기쁨을 느꼈다. 민화란 어린아이와 자유화(自由畫)같이 천진하고 기발한 데가 있어서 저런 재미있는 그림도 그려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저 까치들을 보고 그것은 기발(奇拔)한 상상이 아니요,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이지봉(李芝峯)이 정호음(鄭湖陰)의 “산과 물이 바람에 소릴 치며, 강물은 거세게 울먹이는데, 달은 외로이 비쳐 있다.”는 시를 보고 ‘강물이 거세게 이는데 달이 외롭게’란 실경(實景)에 맞지 않는다고 폄(貶)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달이 고요히 밝은 밤중에는 물결이 잔잔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김백곡(金栢谷)이 황강역(黃江驛)에서 자다가 여울 소리가 하도 거세기에 문을 열고 보니 달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그래서 비로소 그 구가 실경을 그린 명구(名句)인 것을 알았다는 시화(詩話)가 있다. 나도 그 민화가 실경인 것은 모르고 기상(奇想)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 태고연(太古然)한 풍경의 민화 한 폭이 다시금 눈앞에 뚜렷이 떠오른다. 나무 밑에서 허연 배를 내놓고 누워서 잠자는 노옹(老翁), 그 배 위에 서 있는 까치 한 마리.
*****마고자/윤오영****
나는 마고자를 입을 때마다 한국 여성의 바느질 솜씨를 칭찬한다. 남자의 의복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호사가 마고자다.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같은 다른 옷보다 더 값진 천을 사용한다. 또, 남자옷에 패물이라면 마고자의 단추다.
마고자는 방한용이 아니요 모양새다. 방한용이라면 덧저고리가 있고 잘덧저고리도 있다. 화려하고 찬란한 무늬가 있는 비단 마고자나 솜둔 것은 촌스럽고 청초한 겹마고자가 원격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노인네가 겨울에 소탈하게 방한삼아 입으려면 그 대신에 약식인 반배를 입었던 것이다.
마고자는 섶이 알맞게 여며져야 하고, 섶귀가 날렵하고 예뻐야 한다. 섶이 조금만 벌어지거나 조금만 더 여며져도 표가 나고, 섶귀가 조금만 무디어도 청초한 맛이 사라진다. 깃은 직선에 가까워도 안 되고 , 너무 둥글어도안 되며, 조금 더 파도 못쓰고, 조금 덜 파도 못쓴다. 안이 속으로 짝 붙으며 앞뒤가 상그럽게 돌아가야 하니, 깃 하나만 보아도 마고자는 솜씨를 몹시 타는 까다로운 옷이다. 마고자는 원래 중국의 마괘자에서 왔다 한다. 귀한 사람은 호사스러운 비단 마괘자를 입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청마괘자를 걸치고 다녔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마고자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고자는 마괘자와 비슷도 아니 한 딴 물건이다. 한복에는 안성맞춤으로 어울리는 옷이지만, 중국 옷에는 입을 수 없는, 우리의 독특한 옷이다.
그리고 그 마름새나 모양새가 한국 여인의 독특한 안목과 솜씨를 제일 잘 나타내는 옷이다. 그 모양새는 단아하고 아취가 있으며, 그 솜씨는 섬세하고 교묘하다. 우리 여성들은 실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어받아 온 안목과 솜씨를 지니고 있던 까닭에, 어느 나라 옷을 들여오든지 그 안목과 그 솜씨로 제게 맞는 제옷을 지어 냈던 것이다. 만일, 우리 여인들에게 이런 전통이 없었던들, 나는 오늘 이 좋은 마고자를 입지 못할 것이다.
문화의 모든 면이 다 이렇다. 전통적인 안목과 전통적인 솜씨가 있으면 남의 문화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든다 할지라도 이를 고쳐서 새로운 제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송자에서 고려의 비취색이 나오고, 고전 금석문에서 추사체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예전엔 남의 문물이 해동에 들어오면 해동 문물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탱자가 아니라 진주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남의 것이 들어오면 탱자가 될 뿐 아니라, 내 귤까지 탱자가 되고 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석류장石榴杖 / 윤오영***
그는 처음부터 나를 유혹했다. 내가 충무로 고물상 앞을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용춤 항아리에 꽂혀 있으면서 유리창으로 내게 손짓을 했다. 그래서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다가, 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손을 덥석 잡고 말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는 지금까지 십오 년을 같이 살아왔다. 그는 잠시도 나와 떨어져 있은 적이 없다. 잘 때도 내 방 구석에 꼭 지켜 서 있다. 그는 필시 남쪽 지방의 출생일 것이다. 그는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열은 적이 없다. 그도 한 때는 붉게 타는 꽃을 피워 사람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요, 그 보석을 간직한 열매로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혹은 그 보석 같은 붉은 알이 하얀 식혜 위에 동동 떠서, 귀한 댁 아가씨 사시 위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너무 강직하고 모양이 우툴두툴해서 괴기하기 때문에 호사자의 손어 꺾이어 단장이 돼 버리고만 것이다. 그런데 누구 손에서 옮겨 어디서 유랑하다가 고물상까지 팔려 왔는지 말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그와 그럭저럭 지내는 동안에 그는 완전히 내 의지를 지배하고 말았다. 나는 이제 그의 그림자가 돼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어느 때나 그와 더불어 산책을 한다. 그는 이제 하나밖에 없는 좋은 친구다. 가끔 나를 끌어낸다. 나의 거취는 어느덧 그에게 맡기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가끔 나를 말꾼들이 잘 모이는 이웃집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문앞까지 가서는 슬쩍 돌아서 오기도 한다. 나는 그의 변덕에 아무 이의도 없어야 한다. 그가 가다가 주춤 섰을 때는, 먼 산에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가다가 걸음을 가만히 멈추고 무엇을 듣는가 하면, 발밑에서 맑은 물소리에, 이름 모를 꽃송이에 그는 항상 예민했다. 그가 공중에 원을 그리면, 나는 맑은 하늘에 새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가 발길을 가볍게 옮길 때 나는 경쾌했고 그가 무겁게 땅을 밟을 때 나는 침울했다. 그가 내 뒤에 비스듬히 누워서 끌여올 때 나는 솜같이 피로했고 그가 내 무릎에 누워서 떠가는 구름을 읊조릴 때 나는 애상과 추억에 잠기어야 했다. 그가 한 허리를 중심으로 널뛰기를 흉내 낼 때 나는 출근 시간이 십 분밖에 안남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오만한 신사를 만나면 그는 너도 배를 내밀고 버티어야 된다고 내 뒤에 가서 허리를 버티어 준다. 그는 나를 영화관으로 끌고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덕스럽게도 대합실 의자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웠다가 오기도 했다. 가장 그가 분개한 때는 내가 어느 연회에 초청을 받아가서 부득이 그를 현관에서 개 패 같은 패가 달린 오래기로 얽어서 구두와 함께 문간에 맡기고 들어갔을 때의 일일 것이다. 나도 그의 분노한 감정을 느낀 관계인지 노래와 춤과 질펀한 음식과, 오고 가는 화제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술은 받아 놓은 첫잔을 잠깐 입술에 댄 채 그대로 연회를 마치고 말았다. 빨리 나와 그를 찾았다. 그는 신발들 틈에서 곤욕을 당했다. 해방이나 된 듯이 와락 내 앞에서 내달았다. 그는 나를 천병으로 끌고 갔다. 시원한 바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희미한 밤하늘의 별빛이 약간 슬펐다. 그는 어느 헙수룩한 술집으로 나를 끌었다. 궤짝 같은 걸상 위에 걸터앉아 나는 대폿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는 내가 몽롱하게 취한 뒤에야 서울의 밤 거리를 휘저으며 걸어왔다. 그의 울퉁불퉁한 굵은 선은 꽤 험상스러워 보이지만 한 번도 사람을 때려 본 적은 없다. 역시 신사도를 아는 친구다. 그러나 그는 또 젊은 혈기를 보여 주는 때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언덕에서 소릴치며 눈앞에 잔디를 힘껏 내리치고는 껄껄 웃는 때도 있었다.
달밤/ 윤오영
내가 잠시 낙향(落鄕)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윗마을 김 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 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 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 됐소, 농주(農酒) 두 사발이 남았더니······."
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죽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 본 적은 일찍이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