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10]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6남 2녀 중 첫째이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고향 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병원도,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북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즉 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다만 당시는 초등 의무교육이 없고 보통학교 취학률이 약 4%[12]였던 시절이라 학력 인플레가 일어난 지금 기준과는 달리 보아야 한다
젊은 시절에는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있으며[14],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다. 이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 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결론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판단은 틀렸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서울에 정착했다.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 엿공장(현재의 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노름에 빠진 외아들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가게를 매도하여 3년 뒤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가게가 문을 닫았다. 이후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였지만, 화재로 건물과 수리중인 자동차들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는데, 정주영이 쌀가게를 하면서 알게 된 후원인 오윤근은 사람보는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허나 처음 그에게 빌린 돈으로 세운 공장이 날아가자 정주영이 그를 찾아가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 라고 했다.
이 말에 후원인도 자신이 돈을 떼인 적이 없다는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빌려줘야겠다고 하며 선뜻 빌려주었고, 정주영은 약속대로 돈을 갚았다.
미군정 말기인 1947년에는 서울에서 건설 회사를 차렸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사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