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하지 못한 전쟁 영웅들을 위하여 2024.10.25.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 차녀 결혼식장의 한편에 이색적인 테이블 한 개가 놓여있었다는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미군의 실종자 테이블 (Missing man table)이었다. 흰색 테이블보에 빨간 장미꽃 한 송이, 엎어놓은 와인 잔, 소금이 뿌려진 그리고 레몬 한 조각이 각각 담긴 두 개의 접시, 빈 의자다. 이런 ‘실종자’ 테이블은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혀 돌아오지 못한 군인을 추모하는 일종의 미군 제례 의식이다.
결혼식장에 실종자 테이블이 등장하게 된 것은 최 회장 자녀 부부가 미군 장교와 한국군 장교 출신이어서 특별히 준비했다고 한다. 이런 의식은 월남전을 거치면서 널리 퍼진 것이라 한다. 내가 군대 생활하던 미군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메모리얼 데이(5월 마지막 주 월요일)나 미군 포로의 날(9월 셋째주 금요일), 베테랑스 데이(11월11일)에 실종자 테이블을 식당 입구에 설치하고 촛불을 켰다.
지난 1일 국군의 날 서울에서 열렸던 호국영웅 카퍼레이드를 보면서 실종이란 단어가 되살아났다. 첫 번째 차에 탄 이가 학도병 출신으로 대령으로 예편한 아흔 두 살의 춘천 출신 유재식옹이었다. 그는 심장 부근에 총알이 박힌 채 70년을 살아온 역전의 용사였다. 그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열여섯, 열일곱의 나이에 포연 속으로 사라진 그의 고교 동기 학도병들을 추모한다고 했다. 어린 그들은 압록강까지 진군했다가 중공군의 공세에 수십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학도병은 사실 정부가 공식 인정해 주지 않는 비공식 군인이다. 10대 소년병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법에, 정부가 애써 이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꺼리는 탓이다. 2000년대 초반에 귀환했던 대구 출신의 한 국군포로가 바로 학도병 출신이었다. 그는 정식 군인이 아니었기에 정부의 공식 문서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던 그림자 군인이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춘천의 젊은이는 학도병만 아니다. 춘천 시민들에게는 뼈아픈 8연대 기억이 존재한다. 해방되면서 1946년 춘천에서 창설된 8연대는 화천과 홍천, 횡성, 원주, 강릉 등을 돌며 장병들을 모았다. 혈기 넘친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뭉친 강원도민의 부대였다.
그러나 전쟁 나기 한 해 전인 1949년 5월 5일 좌익계열의 대대장 둘이 ‘야간훈련’ 명목으로 8연대 2개 대대 병사들을 속여 북으로 끌고 갔다. 대대장 명령에 불복한 일부는 인민군과 전투를 치르며 어렵게 귀환했지만, 300여 명은 북으로 끌려갔다. 8연대 장병들은 누가 북한에 억류되었는지도 모른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춘천 시민 누군가의 아들이고, 강원도민 누군가의 형이었겠지만, 행방불명자, 실종자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런 춘천의 학생과 군인들의 실종을 한낱 개인의 추억담으로만 남길 수 없다. 8연대 두 개 대대가 속아서 38선을 넘어 사라진 날(5월5일)이나 학도병을 기릴 현충일(6월6일)에 맞춰 우리 춘천에서도 실종자 테이블을 마련하는 식당이 생기면 어떨까. 그게 바로 호국의 도시 춘천을 기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강원도민의 군대인 8연대와 애국심에 불탔던 강원도 학생들의 꿈을 그렇게 해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실종자 가족들의 피눈물을 뜻하는 소금을 흩뿌린 접시와 실종자의 쓰라린 운명을 상징하는 레몬 한 조각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실종자가 돌아올 길을 환하게 비추도록 촛불을 켜놓고, 아직 귀환하지 못한 누군가를 기다리며 의자를 비워놓자. 실종자의 빈 의자는 춘천 시민의 마음 속에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영원히 살아 있어야 한다. (춘천 MS TODAY WEEKLY 매가진 2024년 10월 24일 금요일 페이지 22 오피니언 위 재목 김동섭 편집인 글에서 발췌)
①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 차녀 결혼식장의 한편에 이색적인 테이블 한 개가 놓여있었다는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미군의 실종자 테이블 (Missing man table)이었다. 흰색 테이블보에 빨간 장미꽃 한 송이, 엎어놓은 와인 잔, 소금이 뿌려진 그리고 레몬 한 조각이 각각 담긴 두 개의 접시, 빈 의자다. 이런 ‘실종자’ 테이블은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혀 돌아오지 못한 군인을 추모하는 일종의 미군 제례 의식이다. 결혼식장에 실종자 테이블이 등장하게 된 것은 최 회장 자녀 부부가 미군 장교와 한국군 장교 출신이어서 특별히 준비했다고 한다. 이런 의식은 월남전을 거치면서 널리 퍼진 것이라 한다. 내가 군대 생활하던 미군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메모리얼 데이(5월 마지막 주 월요일)나 미군 포로의 날(9월 셋째주 금요일), 베테랑스 데이(11월11일)에 실종자 테이블을 식당 입구에 설치하고 촛불을 켰다.
② 지난 1일 국군의 날 서울에서 열렸던 호국영웅 카퍼레이드를 보면서 실종이란 단어가 되살아났다. 첫 번째 차에 탄 이가 학도병 출신으로 대령으로 예편한 아흔 두 살의 춘천 출신 유재식옹이었다. 그는 심장 부근에 총알이 박힌 채 70년을 살아온 역전의 용사였다. 그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열여섯, 열일곱의 나이에 포연 속으로 사라진 그의 고교 동기 학도병들을 추모한다고 했다. 어린 그들은 압록강까지 진군했다가 중공군의 공세에 수십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학도병은 사실 정부가 공식 인정해 주지 않는 비공식 군인이다. 10대 소년병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법에, 정부가 애써 이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꺼리는 탓이다. 2000년대 초반에 귀환했던 대구 출신의 한 국군포로가 바로 학도병 출신이었다. 그는 정식 군인이 아니었기에 정부의 공식 문서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던 그림자 군인이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춘천의 젊은이는 학도병만 아니다. 춘천 시민들에게는 뼈아픈 8연대 기억이 존재한다. 해방되면서 1946년 춘천에서 창설된 8연대는 화천과 홍천, 횡성, 원주, 강릉 등을 돌며 장병들을 모았다. 혈기 넘친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뭉친 강원도민의 부대였다.
③ 그러나 전쟁 나기 한 해 전인 1949년 5월 5일 좌익계열의 대대장 둘이 ‘야간훈련’ 명목으로 8연대 2개 대대 병사들을 속여 북으로 끌고 갔다. 대대장 명령에 불복한 일부는 인민군과 전투를 치르며 어렵게 귀환했지만, 300여 명은 북으로 끌려갔다. 8연대 장병들은 누가 북한에 억류되었는지도 모른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춘천 시민 누군가의 아들이고, 강원도민 누군가의 형이었겠지만, 행방불명자, 실종자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런 춘천의 학생과 군인들의 실종을 한낱 개인의 추억담으로만 남길 수 없다. 8연대 두 개 대대가 속아서 38선을 넘어 사라진 날(5월5일)이나 학도병을 기릴 현충일(6월6일)에 맞춰 우리 춘천에서도 실종자 테이블을 마련하는 식당이 생기면 어떨까. 그게 바로 호국의 도시 춘천을 기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강원도민의 군대인 8연대와 애국심에 불탔던 강원도 학생들의 꿈을 그렇게 해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실종자 가족들의 피눈물을 뜻하는 소금을 흩뿌린 접시와 실종자의 쓰라린 운명을 상징하는 레몬 한 조각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실종자가 돌아올 길을 환하게 비추도록 촛불을 켜놓고, 아직 귀환하지 못한 누군가를 기다리며 의자를 비워놓자. 실종자의 빈 의자는 춘천 시민의 마음 속에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영원히 살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