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행적.김임이 데레사 [강석진 신부]
1. 김임이(데레사)
동정과 순교라는 ‘이중의 월계관’을 받은 김임이(데레사)는 ‘태중교우(胎中敎友)’로 1811년,서울 ‘관우물골[館井洞I’ 의 ‘양민 집안’ 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재혼함으로 인해 계모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녀는 계모와 살면서도 항상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으며,효심으로 자식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녀의 성품은 온화, 온유하고 공손하면서 순수 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교회의 가르침을 열심히 지킬 정도로 신심 또한 깊었다.
김임이(데레사)는 평소 천주교 서적을 접할 때마다 온 마음을 다해 몰입해서 읽었으며,사주구령(事主救靈)즉 주님을 섬기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착실하게 수행하며 살았다. 특히 그녀는 천주교 서적 중 성인, 성녀의 행적이 기록된 내용을 읽을 때면 성인들의 삶을 부러워하였고,성인들이 보여 준 삶의 모범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그 모습을 온전히 본받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그녀는 주님을 자기 마음 안에 모시면서, 철저한 신앙인으로 살았으며, 언제나 애주애인(愛主愛人)하며 지냈다.12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였고, 그 일환으로 교우들 중에 초상(初喪)이 나면, 그 집을 찾아가서 연도를 바치거나, 자기 손으로 직접 염습(強襲)까지 하였다. 그녀는 힘들고 궂은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은 채 희생과 봉사를 수행하며 살았다.
어느덧 김임이(데레사)가 17세가 되자,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혼인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혼사가 늦어지면서 진척이 없었다. 그사이에 김임이는 동정(童붉)을 지킬 결심을 하였고,특히 예수 그리 스도께 자신의 순결을 봉헌할 마음을 굳혀 갔다. 그래서 그녀는 오로지 천주를 섬기는 것과 자신의 영혼 구원에만 온 마음을 두었 다. 그 후, 20세가 될 무렵에 아버지를 여왼 그녀는 오빠 김 베드로에게 기대어 살았다. 그리고 그녀는 주변 가족들과 친지들이 시집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궁안 나인 행세를 하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실제로 궁궐에 들어가 3년 동안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3년 후에 궁궐에서 나온 김임이(데레사)는 자신의 이모 집에서 생활하다가 또 다른 사람의 집에 얹혀살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갔으며, 신앙생활 또한 착실하게 수행하며 살았다. 언제나 삶과 신앙생활의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그녀의 모습에 대해서 당시 동료 신자들은 ‘덕행이 거룩하고,표양이 아름답고,착한 사람’이며, ‘천주교 신앙을 열심히 실천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켜내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김임이(데레사)의 삶에 대한 시복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증언에 의하면 김임이는 이 문우(요한)와 그의 수양모(收養母)인 오 바르바라와 함께 살았다. 세 사람이 함께 살던 당시 이문우는 체포 되기전 김임이에게 ‘내가 죽어도 수양모를 잘 보호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에 실제로 이문우가 체포되어 순교하자, 김임이는 이문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수양모와 ‘화개동’에 작은 집을 장만한 후 함께 살았다.
계속해서 김임이(데레사)는 1845년에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온 후부터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사제관의 안복사 일을 맡았다. 당시 안 복사 일을 하던 김임이에 대해서 동료 신자들은 ‘신앙인으로서 덕행이 초월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였다. 시복 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의 증언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의 사제관 일을 맡고 있던 김임이는 평소 자신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만일 김대건 신부님이 박해를 당해 체포되면, 나 또한 자수하여 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 나를 오랫동안 볼 생각은 하지 말라”
또한 시복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한 바울라의 증언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이후에 김대건 신부집의 바깥주인인 현석문과 안 복사인 김임이는 몸을 숨기고자 사제관을 떠났다. 그런 다음 현석문은 김대건의 집을 최 서방에게 맡겼고, 사포서동에 새로 매입해 놓은 김임이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김임이는 ‘장동(壯洞,혹은 백동 相洞)’에 있는 이간난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임이는 한 바울라의 집을 찾아와, “이간난 아가타도 만나 보고, 우리가 산 새집도 가서 보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때에 한 바울라는 “오늘은 못 가겠다”고 말했고, 그러자 김임이는 혼자 새로 산 집으로 갔다고 한다.
또한 시복 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의 증언에 의하면 김임이는 포교에게 체포되기 전날, 자신을 만나러 왔다고 한다. 그래서 김 가타리나는 김임이에게 “자고가라”는 말을 했지만, 김임이는 “현석문 가롤로와 여러 사람들이 오늘 저녁에 새로 마련한 집에 모여 의논할 일이 있기에 가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임이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튿날 자신이 듣기로는 신시神時, 오후 3〜5시)에 현석문의 집에 포교들이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집안에 있던 6명의 신자들이 다 체포되었고, 체포된 이들은 우 포도청에 갇혔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관찬 기록을 살펴보면,천주교 신자인 김형중이 현석문에게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알려 주자, 현석문은 김임이의 집에 가서 숨어 있다가 김임이와 정철염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한다. 계속해서 시복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는 김임이와 함께 체포된 후 배교로 풀려난 이문우의 수양모 오(吳) 바르바라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통해서 김임이의 옥중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포교(捕校)에게 잡혀 포청(捕廳)에 들어가서 구류간(拘留間,감방)에 갇힌 김임이 테레사는 함께 갇힌 교우들이 배교하지 않고,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옥중에서 말로 다투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은 말로 서로 화목하게 하였고, 주님을 위해 고통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나 행실로 힘써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옥 중생활은 두 달 정도를 지냈다.
이 내용을 통해서 옥중 김임이는 신덕(信德)을 간직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시복 재판의 증인인 이 글라라의 증언에는 함께 체포된 이간난(아가타)이 포청에서 형벌을 받는 것을 어려워하였다. 이때 에 김임이가 이간난에게 ‘인내로써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자’며 독려 하였고, 그래서 이간난의 두려운 마음을 깨우쳐 주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서 이간난 역시 끝까지 형벌을 받아들였고, 마지막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다.36 시복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의 증언에서도 김임이는 옥중에서 온갖 형벌을 잘 받았으며, 모든 고통을 이겨냈다는 말을 수양모인 오 바르바라에게 분명히 들었다고 한다. 그 후 김임이 테레사는 옥사(獄死)했으며, 포졸 혹은 포청의 하인들은 옥사한 김임이 테레사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 버렸다.
시복 재판의 증인인 서 야고보의 증언에 의하면,본인(서 야고보)과 김경보와 김원보,그리고 강씨 성을 가진 교우와 두어 사람이 광희문 밖에 버려진 시신을 찾으러 갔다 이들은 광희문 밖에 버려져있는 시신이 여자 신자 세 사람뿐인 줄 알았는데, 네 구의 시신이 있어서 확인해 보니, 하나는 남자 도적의 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 시신은 따로 옆에 빼놓고,여자 교우들 시신만 1마장을 옮겨, 하나의 무덤구덩이 안에 세 구의 시신을 따로 분간하여 장사를 지냈다. 또한 김임이의 몸에 상처가 난 자국이 있었는데, 그것은 목을 맨 흔적이었다고 하였다.
그 후 김 가타리나는 자신의 오빠, 또 다른 언니의 남편, 그리고 다른 교우 이렇게 세 사람이 광희문 밖에서 김임이의 시신을 찾은 후에 근처 묘지에서 장사 지냈다는 말은 실제로 들었다고 한다. 또한 김 가타리나 자신도 3년 동안 언니 김임이의 산소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김 가타리나의 증언에 의하면, 평소 김임이의 시신을 운구(運植)할 마음은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으며, 그 후로 김임이를 묻은 무덤까지도 어느 곳인지 조차 잊어버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