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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에서 ‘휘파람’ 신형 승용차 인기
이게환
2013.5.22
평화자동차회사에서
제16차 평양봄철국제상품전람회(5.13-16일)에
30여종의 새로운 형태의 자동차들을 출품하였는데,
이중 가장 인기를 모은 승용차는 ‘휘파람’ 승용차 2005, 2009형이라고
재일 <조선신보>가 22일 평양발 기사에서 보도했다.
이 회사의 관계자는
“앞으로 이 차들을 위주로 승용차들을 계열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신문에 따르면, 이번 전시회에서는
연유소비량이 적고
가격이 눅으며(값싸며) 넓은 차 내부공간 등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신문은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자동차들이
“‘준마’ 상표의 고급승용차 2종,
‘휘파람’ 상표의 일반승용차 5종,
‘뻐꾸기’ 승용차 4종을 비롯하여
소, 중형 버스와
보랭차, 짐함차, 대형 화물자동차 등”이라고 소개했다.
1998년 4월에 발족한 평화자동차회사는
2002년부터 각이한 형태의 자동차들을 조립 생산하여
지금까지 수만여 대의 자동차들을 판매하였는데,
현재 회사에서는 모두 40여종의
새로운 형태의 자동차들을 개발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회사에서는 승용차들의 연유소비를 2/3로 줄이는 등
고객들의 수요를 끌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들을 실현시켰다.
한편, 신문은 이번 전람회장에는
“조국해방전쟁승리 60돌 경축 열병식에 참가할 지휘관 선두차도 전시되었다”고 알렸다.
출처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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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용 택시(편)
2018.4.16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재미동포 목사, 평양에서 택시를 타다
평양을 비롯한 이북 전역에서 택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 기차, 지하철, 버스 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대중교통수단이 되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18년 3월 31일
오전 남측예술단 ‘봄이 오다’ 공연팀 중에 한 명이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해 평양시내에 들어서니
영업용 택시들이 승용차들의 두 배가 될 정도였다고
첫 소식을 알려왔을 정도로 지금은 택시가 보편화, 대중화되었다.
필자가 평양에서 처음 영업용 택시를 탑승해본 시기는 2013년도였으며
그 후 재미삼아 매년 한두 차례씩 이용해왔다.
첫 승차 경험을 했을 때 13년 이야기다.
당시 평양 양각도호텔에 체류하던 필자는
일행 중 한 분과 함께
호텔에서 평양시내 오탄공원 앞 사거리까지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원래 해외동포나
외국인이 자신의 담당 안내원을 배제하고 택시를 타는 건 불법이다.
그러나 나와 동행한 분이 워낙 방북경험이 많은 분이신지라
마치 학생이 학교에서 땡땡이치고 몰래 학교 밖을 빠져 나가듯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택시 타는 거사(?)에 합류했던 것이다.
평소에 평양시내 호텔입구나 주차장을 보면
택시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어서
언제나 누구든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시내 도로변의 택시 승강장에서도
쉽게 택시를 잡을 수 있도록 했다
. 또한 호텔이나 주요 교차로에도 택시가 어느 정도는 대기하고 있다.
그러나 교통법규상 손님이 택시를 세운다고
아무 도로가에나 무작정 택시를 댈 수는 없다고 한다.
하필이며 필자가 택시를 타려는 날에는
호텔 주차장에 택시가 전혀 안 보이길래
호텔 로비 카운터로 가서 택시를 불렀다.
평양에서 택시를 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설레기까지 했다.
택시를 호출한지 5분도 채 안돼서 총알처럼 택시 한 대가 도착했다.
평양시내에서 택시를 이용하려면
호텔 데스크에서 제공해주는 전화번호를 보고
택시기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 수 있으며
콜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대동강택시를 이용할 경우에는
휴대전화나 유선전화로 ‘186(일팔육)’ 번을 누르고
요청하면 10분도 안 돼 곧바로 택시가 대기한다.
손님이 186을 누르면
택시사업소 중앙 캠프에서 전화접수를 받고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택시 분소로 연결해
택시를 쏜살같이 보내주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남측이나 서방세계의 콜택시 개념과 비슷했다.
탑승해보니 의외로 차량내부도 깔끔하고
운전기사도 매우 친절한 것으로 보아
택시 서비스는 매우 괜찮은 수준이었다.
호텔로 복귀할 때 이용한 택시 내부에 부착된
알림판(부착 게시물)들을 살펴보니
운전석 계기판에 ‘등불확인’이라는 글씨와 함께
그 옆에는 “신발을 벗지 마시요”라는 글씨도 붙어 있었다.
또한 천장 바로 아래 앞 유리에는
작은 글자로 “인민을 위해 복무합시다”라는 글귀도 붙여 놨다.
“등불확인 글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On, Off 여부를 점검하여
밧데리가 소모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그날 호텔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택시 내부에는
“담배를 피우지 마시요”라는 승객들에게 당부하는 문구도 부착되어 있었다.
또한 필자가 오가던 택시 내부 앞자리 조수석에는
공히 운전사의 사진과 이름,
휴대전화 번호 등 기사의 신상이 기재되어 있어
택시회사에서 승객을 보호하고 배려하려는 방침을 세운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차량의 뒷좌석 유리에는
택시 요금을 나래카드로도 결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자결제 스티커가 부착돼 있었다.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본요금이 원래 2불이었는데
그날따라 나는 기분이 좋아서 3불을 나래카드로 결재하고 팁을 7불 건네주었다.
오가는 차안에서 운전기사들과 이런저런 궁금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즐거운 시내 드라이브가 되었다.
그 후 이듬해 가을이 되자 또 다시 택시를 탔는데
이 당시는 마침 평양에 택시 2부제가 도입된 직후였다.
당시 평양시에 택시 숫자가 갑자기 1000대로 늘어나다보니
빈 차로 운행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그해 상반기에 이 제도가 도입됐다고 한다.
차량 끝 번호가 홀수인 차량은 홀수 날에,
끝 번호가 짝수인 차량은 짝수 날에만 운행되는 식이었다.
당시 홀짝제를 운영하면서 하루 운행 대수를 500대로 제한한 것이다.
그러나 2017년 초 무렵에는
이미 500대가 더 증가된 상태라서
현재 1500대의 택시가 운행 중이라고 한다.
▲ 평양 고려항공사 직영 택시회사의 영업용 승합차 택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가 목적지에서 호텔로 복귀할 때 탔던 택시.
소위 비야디(BYD)라고 부르는 택시 브랜드인데 중국산 차량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가 처음 탄 택시 뒷좌석 유리에는 나래카드 스티커가 부착돼 있다.
이때 요금은 카드로 결제하고 팁은 미화현금으로 지불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가 소지한 전자결제 카드인 나래카드 모습.
은행이나 호텔카운터를 방문해서 필요한 만큼 충전할 수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가 택시를 처음 타고 목적지를 가는 차량의 내부 모습.
운전석 계기판에 ‘등불확인’이라는 글씨가 붙어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가 처음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갔던 택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평양시내 택시요금은 가급적 미화로 지불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부터
평양시민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면서
시민들은 어느 누구나 부담 없이 택시를 이용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으며
지하철보다 택시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만
먼 거리는 택시를 이용하는데,
보통 기본요금은 첫 2km까지 미화 2달러이고,
이후 1km 당 56센트 정도가 부과되었다.
그리고 통상 10km이상 탑승할 경우
통상 요금 5달러를 지불하게 된다.
밤 9시 이후엔 할증료처럼 요금이 두 배로 계산된다.
택시비는 주야간, 주중, 주말에 따라 다르며
보통 1km에 미화 50센트~1달러 정도한다.
그리고 평양과 지방의 택시요금도 차이가 있다.
택시요금은 해외동포이든 외국인이든
혹은 내국인이든 미화 달러를 주로 지불한다.
간혹 택시기사가 손님에게 국돈(북 화폐)을 받을 경우에는
때마다 다르지만
가령 시세 환율 1달러당 8500원 정도로 계산하는 방식이다.
택시운전사들은 하루 규정된 사납금은 사업소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본인이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평양역전과 백화점 앞은 물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교차로 등을 다니며
한 명이라도 더 태워 수입을 올리려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택시요금은 보통 미화 달러나 중국 위안화를 내는 모습을 흔히 보았다.
또한 미화, 유로화, 위안화, 국돈(북조선 화폐) 등으로 지불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택시비용 계산 방법 자체가 미화 달러 위주로 되어 있어
국돈을 지불하는 경우 택시기사도 잘 받지 않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이는 달러나 위안화가
북측 사회의 기본 유통 화폐가 된지 오래됐음을 확인시켜준 케이스였다.
물론 택시 요금을 무조건 미 달러로만 받아야한다는 규정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국돈보다는 미화나 위안화가 경제적인 면에서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원동력이 되도록 시스템화 되었다.
택시를 이용하는 평범한 평양 시민들도 이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평소 생활가운데 미화를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택시를 이용하기 전에 가급적 미리 미화로 바꾼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됐다.
손님이 택시 요금을 국돈으로 내거나
혹은 운전기사가 주유소에서 기름 값을 국돈으로 지불할 경우
시세에 따라 변동되는 환율을 계산해야 되고,
다시 미 달러화로 환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에
이를 잘 알고 있는 주유소 측과 운전기사 측도 미화로 거래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 평양산원 앞에서 유아를 업은 여성과 남편이 대기 중인 자주색 택시에 탑승하려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손님을 태우고 출발하려는 하늘색 영업용 택시.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호텔 주차장에서 손님을 태우기 위해 빈차표시등을 켜고 대기 중인 BYD 택시와
손님을 태우고 출발하려는 회색 택시.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해당화관 길 건너편에서 택시에 탑승하려는 평양시민.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빈차표시등을 켠 택시가 다른 차량들과 함께 신호대기 중인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일명 개나리 택시가 김책공대 부근을 지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오래된 구형 택시가 평양시내를 달리고 있다.
영업용 택시도 새 차와 낡은 차가 공존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영업용 택시 운전사와의 대화
필자는 처음 택시를 탔던 2013년부터
그 후로 매년 한두 번씩 택시를 탑승했으며
이때 택시기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울러 필자가 체류했던 호텔주차장에서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던 택시기사들과도 역시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평양에는
과거 중앙기관의 택시사업소가 주도해서 운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기업이나 개인회사에서도 영업용 택시회사를 운영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현재 평양시에는 굴직한 택시회사들이 모두 열 개가 넘는다.
현재 택시를 운영하는 사업소들을 보면
고려항공에서 직영하는 택시회사를 비롯해
마식령 스키 리조트 회사,
KKG회사, 조선금강총회사,
대동강여객운수사업소가 운행하는 대동강택시 회사,
대외봉사총국 택시사업소,
운수무역회사,
승용차 관리소 등이다.
평양시내는 이처럼 많은 택시 회사들끼리 서로 경쟁을 벌여야 할 정도로 많이 늘었다.
택시회사들은 각각 택시 색깔을 달리하고 있으며
기사들은 각각 자신의 회사에 소속되도록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택시사업소에서 운전수를 뽑을 때는
인민위원회 노동과에 공고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체로 뽑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택시운전사들은 2급 운전 면허증을 소지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택시 운전사들 중에는
과거 중앙기관에서 운전사 직책을 맡았던 운전 경력자나
군부대 장령급 전용차 운전사 출신들이 의외로 많았다.
“운전기사 선생님들이 매우 친절하시고
택시도 안팎이 아주 깔끔하던데 운전사 교육을 따로 받습니까?”
“물론입니다.
운전사들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그 후로도 필요하면 더 받습니다.
운전하면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되어있고,
입 냄새가 나지 않도록 구강 위생도 잘 지켜야합니다.
요즘은 영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영어도 배우고 있습니다.
운전수들이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택시는 주로 어떤 제품입니까?”
“현재 우리 조선에서 사용하는 택시들은 전부 중국제 차량입니다.
평화자동차에서 나온 ‘휘파람’ 승용차가 있기는 한데
제 때 생산 공급이 잘 안되니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정도 택시차량이면 가격이 얼마정도 됩니까?”
“새 차는 1만 딸라를 줘야하고
중고 택시는 7천 딸라 정도 주면 구할 수 있습니다.
평양이나 지방이나 택시용 차량이 거래되는 시장에 가면
새 차일 경우 대당 1만 2000 딸라,
중고는 값이 5000-7000 딸라 나갑니다.
그뿐 아니라 번호판을 위탁할 경우에는
행정비를 포함해 모두 300-500 딸라를 더 지불해야 합니다.”
“운전하시면 한 달에 얼마정도 급료를 받으시나요?
월급인가요? 아니면 매일 일당을 받으시나요?”
“하루 벌은 돈을 납부하고 나머지는 운전사들이 갖게 됩니다.
급료는 얼마 받는지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하루에 보통 미화 50달러에서
많게는 100달러 정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영업은 잘되시나요?”
“아이구, 잘 안됩니다.
이게 돈이 되니까 지어(심지어) ooo에서도
회사를 차려 택시들이 아주 많아졌고
간섭도 심한편이라서 영업이 잘 안됩니다.”
필자는 뜻하지 않게 어느 일반 운전기사를 통해
평양의 택시 변천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사실 1987년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 축전을 했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우리 평양에 택시가 본격적으로 운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동무들이 택시운전사로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손님들은 대부분 외국인과 해외동포 분들이었고
당시는 국돈(북 화폐)으로 기본료금이 6원 정도였을 겁니다
. 1㎞당 잘해야 1원씩인가 추가될 정도로 료금이 아주 눅은 편(싼 가격)이었습니다.”
“현재 기본요금 2달러에 비하면 참으로 저렴했네요”
“처음이다 보니 택시비가 눅은 편이었지요.
지난 시기 우리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하셨을 무렵(2011년 12월)에
중국산 택시가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부터
올 초(2014년)까지 500대로 증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올 중순에 홍콩회사까지 참여해 500대의 택시가 또 들어오는 바람에
모두 1천대로 늘어났지 뭡니까?
택시가 2013년도에 아마 가장 많이 늘어났고
그 당시 료금은 1km에 국돈 500원이었을 겁니다.”
운전사들의 증언처럼 2012년-2014년 사이에
평양에 택시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며 급기야 1000대까지 증가했던 것이며
2017년 초 무렵에는 이미 평양에만 택시가 무려 1500대 이상 운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기본요금 2달러’ 규칙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2015년도만 해도 평양의 택시회사가 서너 개 정도였는데
지금은 대형 택시회사가 열 개가 넘는다고 했다.
필자는 호텔 주차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운전기사들에게
지방의 영업용택시에 관한 궁금증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2014년 당시는 평양시에만 택시가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나
그 후 택시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매년마다 지방에도 영업용 택시가 늘어났고
현재는 택시 이용자가 지방에도 무척 많아졌다고 한다.
“평양 외에 지방에도 택시가 많습니까?”
“이전에는 평양시하고 라선시에만 있었지만
지금은 평성, 원산, 함흥 할 것 없이 지방에도 모두 택시가 운행되고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알려준 자료들을 아래 단원에 상세히 적었다).”
아무튼 대부분 평양의 택시 차종들은 온통 중국산 비야디(BYD, 比亚迪汽车) 차량이 차지하였고,
차량이 워낙 많다보니
평양시내 택시 손님들을 싹쓸이 하고 있었다.
차량 색깔은 노란색과 초록색을 조합한 디자인,
노란색과 빨간색을 조합한 디자인,
파란색과 회색 조합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평양시민들은 비야디 택시들이 알록달록하게 두 가지 색상을 가진 탓에
‘알락이 택시’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비야디 택시는 필자가 북경에 방문했을 때 자주 목격했던 영업용 택시 차종인데
그래서 그런지 이곳 평양시민들은 ‘베이징 택시’라고도 불렀다.
택시기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느낀 것은
자신들은 외화를 벌어 애국을 하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다.
한편 대부분의 인민들은 농장이나 공장 기업소등에서 육체적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들은 시원한 찻바람을 맞으면서
돈도 벌고 여유롭게 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대부분의 택시기사들은 매우 애착심을 갖고 있었고
자기들 세계에서는 인기직종으로 간주하고 있음도 확인되었다.
▲ KKG회사 소속 택시가 로동당 구호문이 적힌 현수막 앞을 지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갓길에서 손님을 태운 KKG회사 소속 택시가 도로에 진입을 시도하려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비야디(BYD) 택시가 손님을 태우기 위해 주차하며 기다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다양한 회사소속의 평양시내 택시들이 호텔 주변에서 손님을 태우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
맨 앞차는 대동강 운수사업소 소속 택시이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지방에도 활성화된 영업용 택시
2016년도 만해도 평양과 나진(라선시)에서의 택시영업은 이미 체계가 잡혀 보편화됐으나
다른 지방 도시들은 활성화가 덜 됐었다.
이북의 영업용 ‘지방택시’는 무조건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한다.
영업용 ‘지방택시’는
평양시에 있는 고려항공 항공운수영업부 산하 조직에 소속한
‘지방택시’가 있으며
또 하나는 돈주나 개인 사업자가 국가기관의 승인을 얻어 직접 운영하며
사업하는 ‘개인택시’로 나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방택시와 개인택시는 비슷한 것처럼 들리지만
확연히 구분이 되는 것이다.
특히 고려항공 소속의 택시는 소위 ‘국가택시’로 불릴 정도로 특혜가 주어진다고 한다.
공항이나 중요한 기차역을 갖춘 지방 도시들을 출발해
평양을 가거나 반대로 평양에서 지방의 공항과 역을 가는 손님을 태우는 택시들을 말한다.
국가택시에는 반드시 미터기가 부착돼 있고
요금이 비싼 편이라고 한다
. 그러나 ‘지방택시(국가택시)’ 외에 미터기가 없는 ‘개인택시’는
기사가 임의로 요금을 책정해주며 비교적 요금도 저렴하다고 한다.
지방에서 운영하는 영업용 택시요금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30리(12km) 주행에 20위안 정도라고 보면 된다고 한다.
조중 국경도시인 신의주의 경우
영업용 택시가 증가해 시내 교통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시내에서 돌아다니는 빨간색, 검정색 택시는
모두 고려항공이 운영하는 국영 택시회사의 차량들이라고 한다.
고려항공 신의주-평양 항공편을 구매하면
해당 공항까지 택시 서비스가 제공되며
택시요금은 평양행 항공권 가격에 포함되어 있다.
필자가 신의주를 경유하거나 기차가 몇 시간동안 머무를 때
거리 전경과 역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평양 택시들이 많이 보였는데
대부분 중국 BYD F3 모델들이라고 한다.
신의주는 도로 교통량이 적어 미터기 택시가 교통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2017년 초반 당시에는
이미 강원도 원산과 평안북도 신의주,
함경도 청진시, 함흥시, 평안남도 평성시,
황해북도 사리원 등지에서 개인택시가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으며
지방 도시들은 중앙기관에서 주도하기보다는
자금력 있는 인물들이 운수업에 뛰어들어 택시영업을 하도록 기회를 주기도 한다.
지방 도시에도 영업용 택시 운행이 활성화되면서
지방에 거주하는 인민들이 빠른 시간에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가령 평안남도 평성에서 량강도의 혜산까지도 택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방택시들은 이제 단거리와 장거리 운행은 물론,
함경북도나 량강도 국경지역까지 직행할 수 있는 특별한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내륙 지방에서 회령이나 혜산 등 국경도시까지 빠르게 도착하는 교통수단은
개인택시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평안도 내륙과 량강도 북쪽 택시운전사들은
손전화로 긴밀하게 통화하면서
장거리 손님들을 중간지점에서 인수 인계해주는 방식으로 택시를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평안도 택시가 함경북도 경계를 넘어 운행할 수 없기 때문에
경계지역인 함경남도 함흥시가 택시 환승지역으로 자리 잡히고 있다고도 한다.
가령 평안도 평성에서 함경도 함흥까지 택시 요금은 중국돈 100위안을 지불하고
또 다시 함흥에서 량강도 혜산까지 가는 요금을 100위안 지불함으로써
모두 200위안을 지불해야 국경도시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국경지역으로 운행하는 장거리 택시는
편안한 승용차 형태의 택시가 아니라
15명 정도의 인원이 탑승하는 농구망차(승합차)가 운행한다고 한다.
이런 농구망차는
고려항공에서 제공하는 크기의 승합차와 비슷한 규모라고 한다.
지방택시 회사들이 택시기사를 채용하고
운수사업소에 택시를 등록하면
택시 운행증과 번호판을 발급 받아야만 여러 검문소를 그냥 통과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운행증과 번호판을 부여 받은 개인택시는
평양시와 국경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운행을 할 수 있다.
한편 택시기사가 연유소(주유소)에 들려 기름을 넣는 경우에도
미화로 지불하는 것을 주유소 측과 기사 측 피차간에 선호한다.
또한 지방 도시들 중에는 의외로 황해남도 사리원, 평안남도 평성,
함경남도 함흥, 양강도 혜산 등이 택시를 비롯한 대중교통 서비스가 발달됐다고 한다.
▲ 고려항공에서 직영하는 승합차 택시들이 일렬로 주차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비야디(BYD)택시가 국제배송서비스 업체인 DHL차량과 함께
나란히 해당화관 교차로를 통과하는 모습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타고 왕래하는 그날까지
1980년대 말
한국 대학가에서 청년대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민중가요 중에
‘서울에서 평양까지’란 노래가 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5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
우리민족 우리의 땅 평양만 왜 못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 볼란다”
1980년대 말부터 불리던 이 노래 가사를 보면
최초에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을 ‘2만원’으로 규정했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서 이 노래를 가수 신형원 씨가 다시 개사해
정식앨범으로 만들어 부르면서 요금 단가가 ‘5만원’으로 올라갔다.
그 후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방문할 무렵에는
당시 미터요금제를 적용해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이 15만~20만 원정도로 계산이 된다.
그러나 또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은
아마 서울-평양구간 택시요금이 30만 원정도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서울의 일반택시 요금체계를 따라 기본요금과 추가요금을 감안해 환산하면
서울에서 평양까지 250㎞를 편도 이동할 경우 30만원 정도 나올 것이다.
구글 인공위성사진에 보면
서울에서 평양까지 도로를 따라 거리를 잴 경우 250㎞ 정도의 거리가 나온다.
군사분계선까지 약 60㎞,
그리고 다시 개성과 사리원을 거쳐 평양까지 거리가 190㎞정도가 되니
총 250㎞정도가 되는 거리이다.
서울에서 광주(약 270㎞)보다 가깝고, 대전(약 150㎞)보다는 먼 거리다.
그러나 이처럼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70년이 넘도록 서울과 평양에 한 번도 택시 한대 운행하지 못했다.
조만간 평양택시가 서울로 손님을 태워 갈 수 있고,
반대로 서울택시가 손님을 태우고 평양을 갈 수 있는 날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 (계속)
▲ 평화자동차 공장 내부에 2002-2010까지 자체생산하고 있는 각종 차량들을 소개한 현황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화자동차 공장 내부에 2011-2013까지 자체생산하고 있는 각종 차량들을 소개한 현황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시내에 택시차량으로 제공되는 휘파람 승용차를 완성하기 위해
기술자가 평화자동차공장 조립라인에서 작업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시내에 택시로 제공되는 휘파람 승용차가 조립 생산되는 모습을
필자가 카메라를 들고 참관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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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편)
<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99회) |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트롤리버스(무궤도전차)의 보조수단으로 운영되는 시내버스들
평양시내는 어디를 가든지
하루 종일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들과 전차들이
대로를 분주하게 달리며 승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아울러 교차로에는 멈춰 선 차량들이
신호등이 아닌 교통안전원들의 수신호를 기다리는 모습도 매우 익숙하게 목격됐다.
특히 평양에는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단층버스보다는
이색적인 2층 버스가 많아서 이미 평양의 명물로 자리 잡고 있다.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 행렬들 중에는 유난히 외제차량들이 많았는데
최신형부터 2-30년 넘은 구형모델까지 외제차의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차령이 10년은 넘은 듯한 일제 자동차와 버스, 승합차 등이 주종을 이뤘지만
대부분 자국산 평화자동차들이 많았으며
현대에서 만든 스타렉스 승합차나
그랜저 승용차도 간혹 눈에 띄었고
중국제 차량들도 많았다.
필자가 버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던 시기는
모란봉과 대동강구역을 잇는 금릉동굴 입구 위,
대동강구역의 문수거리 등에는 온통 개나리, 살구꽃들이 한창이었다.
얼핏 보면 벚꽃처럼 보이지만
북조선에는 벚꽃나무가 일제를 상징하는 꽃이라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자세히 살펴보면 살구나무 꽃들이 많았다.
이처럼 평양 시내와 언덕들의 흐드러진 봄꽃 소식은
도로가의 다양한 버스와 자동차들만큼 화려하지는 못한듯했다.
해외동포들이나 외국인들이 평양을 방문할 경우 가장 많이,
가장 가까이서 흔하게 보는 광경이 바로 지하철을 비롯해
궤도전차,
무궤도전차(트롤리버스),
버스,
택시,
오토바이,
자전거 등의 대중교통들이다.
그중에서도 버스와 무궤도전차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그러니 평양시내의 버스 운영실태에 대해 필자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삼천리 금수강산’, ‘내 나라 제일로 좋아’, ‘
강성대국을 향하여’,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이런 구호문구들은
건물이나 벽면에 부착된 것들이 아니다.
바로 평양시내를 운행하는 다양한 종류의 버스 양측 외벽에 가로로 새겨진 구호문들이다.
또한 저 구호들은 2-30여년 동안 거의 바뀌지 않고
지속적으로 적혀있는 요지부동한 국가적 구호문들이다.
또한 각 버스마다 5만km 이상 안전주행을 했을 경우에는
차 외벽에 별 1개씩 부여하는 제도가 있다.
시내버스에 붉은 별이 그려져 있다는 것은
바로 무사고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버스좌석에는 전쟁참가로병을 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는 평양지하철에도 노약자석, 임산부 배려석은 없어도
전쟁참가로병을 위한 자리는 반드시 구분돼 있는 것처럼
공공 교통수단에는 거의 모두 비슷한 개념이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버스 종류들을 보면
우선 트롤리버스라고 불리는 무궤도 전차가 있고
이런 무궤도 전차의 보조 수단으로 운행되는 시내버스가 있다.
또한 주요 도시들 사이에 운행되는 시외버스들이 있고
유명 관광지를 셔틀버스처럼 운행하는 관광버스들이 있다.
또한 각 기관과 단체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직원들의 출퇴근 전용 버스들과
스쿨버스들도 많았다.
시내버스는 평양시의 경우 40여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어서
시내 변두리에서 인근 교외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시외버스는 평양과 신의주, 원산, 만포, 사리원, 남포 등
주요 도시 사이에 운행되고 있으며
시내를 벗어나야 하는 아주 먼 장거리는 철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평양시 당국은 2010년 무렵부터 시가지 정비를 위해
그동안 도로 한복판에 설치됐던 궤도전차 차선을 도로 양옆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하면서부터
도로마다 큰 변화를 겪어왔다.
평양시는 통상적으로 트롤리버스의 노선이 없는 시가지와
외곽지역 혹은 트롤리버스 노선이 끝난 지역에서
연계수단으로 일반 시내버스가 활용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시내버스는
트롤리버스(무궤도전차)와 함께 병행되는 보조 수단의 역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궤도 전차는 지난 1962년에 개통된 이후
현재는 10여개 노선이 운행 중이며
수송능력은 1량 당 대형전차는 100여명,
소형전차는 50명 정도 탑승하는 교통수단으로서
시내버스와 같은 레벨의 매우 유용한 대중교통수단이다.
▲ 평양시내를 달리는 2층 버스. 모든 버스 외벽에는 모두 4가지 종류의 구호가 적혀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양각도호텔 주차장에 세워진 대형버스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시내 주차장에 세워진 고급 버스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직장에서 운영하는 기관용 버스와 트롤리버스가 함께 도로를 달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고급 대형버스들이 어느 건물에 주차된 모습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국가선물관 주차장에 참관객들을 내려준 각종 버스들이 주차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뻐스비는 ‘리원’,
택시비는 ‘다섯 달러’,
무궤도전차 료금은 ‘오원’"
필자는 틈나는 대로 평양거리를 걷거나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는 것을 즐겨한다.
오후에는 길을 따라 지하도를 통해
평양호텔에서 김일성 광장까지 둘러보고,
다시 대동강변으로 돌아온다.
아침에는 대동강변 산책로를 따라 김일성광장 부근까지 갔다가 다시 강변으로 되돌아온다,
강변에는 아침마다 카세트를 틀어놓고 에어로빅 댄스를 하는 아낙네들,
이른 아침부터 낚시하는 노인들과 아저씨들이 볼만한 광경들이다.
또한 베드민턴을 치거나 달리기를 하는 시민들,
천천히 걷는 산책꾼들이 있는가하면
자전거놀이를 즐기는 청년들,
인근 건설지역에서 건축노동을 하고 대동강물로 아침 세수를 하기 위해
물가를 찾아온 병사들 일행도 볼 수 있었다.
낮에는 장기를 두는 노인들을 쉽게 볼 수가 있고
대동강 유람선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시민들과 관광객들도 많이 볼 수 있다.
때로는 군복 입은 인민군들이 풀밭에 오손도손 서너 명 모여 앉아
아코디언에 맞춰 멋진 노래를 열창하는 모습,
벤치에 앉아 독서를 즐기는 시민들도 목격된다.
뿐만 아니라 그냥 강변 뚝방에 걸터앉아
주체탑을 향해 상념에 젖어있는 시민들의 모습 등 다양한 군상들을 본다.
그러나가 고요한 시간이 지나고 출근시간 무렵이 되면
평양시 도로는 역동적으로 돌변하며 차량들 간의 출근전쟁이 벌어진다.
그 동안 필자가 방북기를 통해 북의 대중교통에 대한 관련 통계나 제도,
영상물을 올렸던 이유는
한 마디로 우리의 통일의 대상인 북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알아보자는 취지였다.
필자의 목격담이나 경험담은
실체적 사실에 있어서 정보와 자료가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그 이면의 모습은 눈에 선하게 보일 것이다.
남과 북이 서로 심리적, 문화적, 정서적 이질감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민족통일은 언감생심이다
. 필자는 교통문화에 대한 좋은 정보들과 경험을 바탕으로 ‘버스 편’을 비롯해
‘전차’, ‘기차’, ‘항공기’, ‘여객선’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그 외에도 ‘새 차를 뽑을 때’, ‘주차비 징수와 주차난’
, ‘교통위반 범칙금’, ‘운전기사들의 운전면허 문화’,
‘거리의 환경미화원’,
‘교통보안원’, ‘신호등 시스템’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연이어 소개하고자 한다.
주말이 되면 대동강변에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나
팔짱을 끼고 다정스럽게 걷는 젊은 연인들,
풀밭에 앉아 한 쌍을 이루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모습들은
익숙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고정관념을 떨치지 못하면
그런 모습들이 마냥 신기하게 보일 뿐이다.
필자가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이를 염두하고 “연애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라고
동행한 안내원 동무에게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최 선생님,
그럼 여기는 사람들이 안 살고,
모두 동물들만 사는 도시인 줄 아십니까?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라고 대꾸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특히 최근에는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거리낌 없이 연인들끼리 서로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모습도 보였다.
최근 필자가 안내원들에게 택시 요금을 물었을 때
“다섯 달러입네다”라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었다.
연이어 버스요금도 묻자 “두 달러입네다”라는 답변이 곧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내원이 말한 2$은 외국인에게 적용된 요금을 말해준 것이다.
실제로 내국인들과 평양시민들은 2달러가 아니고
국돈(북조선 화폐)으로 2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궤도전차 승차요금이 얼마입니까?”라고 물으니
“오원 입네다”라는 답변을 던져주었다.
그동안 평양의 시내버스 요금은 7.1 경제관리개선 조치 이전에는 10전이었는데
지금은 2원으로 인상된 것이다.
2원이나 5원은 미화 달러로 계산하면 좀 복잡하다.
보통 공식환율을 100:1로 치면 2센트나 5센트가 되겠지만,
들리는 말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환율은 8000: 1 정도라니 계산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평양에서는
외국국적의 해외동포나 외국인들은 공식적으로 미화 달러와 유럽의 유로화,
그리고 중국 위안화와 일본의 엔화가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북조선과 가까운 사회주의 우방국가인 쿠바에서는
외국 돈은 통용되지 않는다.
외국인은 환전소를 통해 외국인 전용화폐인 쿡(CUC)으로 환전을 해서 사용해야만 한다.
공식 환율은 미화 달라와 쿡이 1:1 비율이기 때문에
화폐운용 면에서는 북조선이 훨씬 더 개방적으로 보였다.
▲ 평양의 어느 대형주차장에 세워진 각종 버스와 차량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의 어느 주차장에 세워진 미니버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의 도로를 달리고 있는 고급 버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시내를 달리는 오래된 버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 미림승마장 셔틀버스가 시내 한복판을 달리고 있다.
평양에는 의외로 승마인구가 많았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해외동포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주차장에 세워져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운행되는 평양시내 버스
평양은 한국의 대도시들처럼 아주 번잡하지는 않지만
출퇴근 시간대의 행인들 모습을 보면
혁명의 수도답지 않게 조용하고 수수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치스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단조로운 건물들과
결집과 단결을 호소하는 대형 구호문들이 여기 저기 거리마다 나붙어있을 뿐이다.
일정을 보내기 위해 평양거리를 지나다보면
수십 명의 어린아이들이 붉은 기를 흔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행렬로 걸어가는 모습,
로동적위대 행렬이 지나는 모습,
수천 명으로 보이는 여학생들과 여성시민들이 드넓은 김일성 광장에 운집해서
무슨 군중대회를 준비하는 모습들을 본다.
아울러 연습하는 군중들 사이로 펼쳐진 광장 대로에는
다양한 차량들이 쌩쌩 지나가는데
그중에서 버스들의 행렬이 가장 많았다.
그런 버스에 몸을 실은 승객들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무색무취한 얼굴표정들을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들이 곧 평양의 일상으로 느껴졌다.
필자가 글을 쓰는 동안에도
평양에는 40개 노선에서 운행되는 각종 버스들이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조직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 단층버스나 2층 버스들이 중국에서 주기적으로 도입돼 운행되고 있어서 그런지
버스문화가 나날이 향상되어 발전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버스노선도 점점 개혁적으로 증설되면서
지하철과 전차 승객들과 버스 승객들 간의 균형을 맞추면서 조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시내의 출퇴근 모습들은 한국처럼 버스, 승용차, 지하철 등을 주로 이용한다.
그러나 한국과는 달리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주로 내근직 직장인들은 버스를 가장 선호하고
동시에 자전거도 선호한다고 했다.
버스는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트롤리버스(무궤도전차)가 많은데
이는 일반 버스처럼 중유나 가스 연료를 탑재하지 않고
버스와 연결한 전선에서 전기를 공급받아 운행하는 장점이 있어서 매우 친환경적이었다.
일반 버스와 트롤리버스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대로를 달리는 모습을 보면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현재 평양시내를 달리는 버스들 대부분은
평양시 인민위원회 교통당국이 직접 통제하고 운영하고 있으나
일부 노선들은 개인 사업가들이 영업용 버스사업도 진출한다.
특히 2층 버스들 중에
‘송신에서 대동교 방향’,
‘대동교에서 대성산 방향’이라고 쓴 노선 간판을 부착한 버스들은
버스사업소나 공장기업소에 등록된 영업용 개인 버스들이라고 한다.
평양시 대동강여객운수사업소에서 운영하던 송신 팔골 방향 궤도전차가 운행을 중단하였고,
연못동과 대성산 방향으로 달리던 무궤도 전차도 운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이 노선을 대신해 영업용 버스들이 운행되는 것이라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 수입하는 버스들 중에는 새 버스가 대부분이지만
간혹 개인사업자가 수입하는 경우에는 중고버스도 도입되고 있으며
약 10-20만 킬로미터를 사용한 중고버스들은
대당 미화 1만-1만 5천 달러에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13 평양시내 운행을 위해 차고에서 대기 중인 트롤리버스들
. (사진제공: 최재영목사)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평양시민들.
이 정류소는 공중에 전선이 설치된 곳이기 때문에
일반 시내버스와 트롤리버스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짐 가방을 맨 여성이 일반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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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류장 설치물은 없으나 지정 정류소에서도 버스가 정차한다.
정류소에서 나란히 버스를 기다리는 평양시민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평양시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2층 뻐스’
겉으로 볼 때 수도 평양은 세계 다른 나라 수도들보다 매우 조용한 도시로 보인다.
그러나 대개 아침 7시쯤이 되면 어김없이 러시아워가 시작되며 도시가 시끄러워진다.
인도위에는 서로 반대 방향에서 오가는 출근길 시민들이 서로의 몸이 스칠 정도로 혼잡하지만
각자 서로 실수하지 않도록 잘 피해서 보행하는 모습들도 쉽게 볼 수 있다.
근로자들과 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전용도로를 따라 달리는 경우도 있고,
인도를 따라 걸어가며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인들은 지하철역 등 각자의 행선지로 향했고
나머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서 길게 줄을 서며 기다린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나선 시민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들을 자세히 보면
아이들이나 청년들,
장년들 할 것 없이 대부분 손에 책을 들고 독서를 하고 있었다.
또한 “충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오래된 22인승 버스나
“천리마”라는 이름을 가진 구형 버스처럼 외형은 비록 낡았으나
고풍스런 느낌을 주는 오래된 버스들이 무수히 많이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반면 최신형 대형 버스를 비롯해
최고급 리무진 버스까지 매우 다양한 종류의 멋진 버스들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특히 승합차를 비롯해
울긋불긋한 원색적인 색상을 지닌 중소형 버스들이 거리를 달리고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북 인민들은 독특한 억양 때문인지 버스를 일컬어 ‘뻐스’라고 부른다.
특히 평양시내에 돌아다니는 독특한 형태의 다양한 ‘2층 뻐스’들은
이미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명물이 되어있었다.
웬만한 선진국에서도 2층 버스는 보기가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평양에는 너무 흔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거주하는 미국 남가주의 경우
그레이하운드 2층 버스가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운행되기는 하지만
시내에서는 대중적으로 보편화되지 않았고 보기도 드물다.
평양시내에서 2층 버스가 최초로 도입되어 대중화된 시기를 필자가 알아보니
지금부터 약 20여년 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0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당 55주년을 맞이한 날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최초로 도입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100대를 중국에서 직수입해서 운행에 투입했다고 한다.
당시 첫 도입된 2층 버스는 1대당 최대 160명까지 태울 수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수송능력이 아닐 수 없다.
이 2층 버스들은 2000년 당시
중국 장쑤성에 있는 난징(南京) 금릉쌍객공사에서 수입했는데
이때 2층 버스 100대뿐 아니라
단층버스 200대도 같이 수입하는 바람에 모두 300대의 새 버스를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이후에도 평양시 당국과 내각에서는 계속해서
중국으로부터 새 버스들을 수입해왔는데
특히 2008에는 평양시 인민들의 교통편의를 관장하는 평양 인민위원회가 주도해
110대의 시내버스를 주문했다고 한다.
이때 모든 수입버스에는 에어컨 장착을 요청해 주문 제작했다고 한다.
이어서 2010년 초에도 또 다시 2층 버스와 단층 버스를 수입했는데
그 숫자가 무려 400대에 가까운 총 388대였다고 한다.
당시 신형 버스는 기존 6개 노선 외에 팔골-2백화점, 칠골-련못,
조중우의탑-산업동 간 3개의 신설 노선을 달리는 등
모두 9개 노선을 운행할 정도로 인기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듬해 4월에는
평양-묘향산을 왕복하는 2층 버스가 운행돼
해외관광객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면서
지금까지 2층 관광버스로가 대중화가 된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한다.
평양-향산(묘향산) 관광노선은
지난 96년 총 120㎞로 건설된 관광도로를 따라 형성되었는데
당국에서는 이에 걸맞게 최신형 2층 관광버스를 투입한 것이다.
평양-향산 간에 정기적으로 운행되는 2층 버스 정류소는 평양역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필자가 직접 확인해보니
평양의 시내버스 요금은 7.1 경제관리개선 조치 이전에는 10전이었는데
지금은 2원으로 올랐으며
버스를 이용해 묘향산과 구월산 등을 관광하려면
시간 당 30원씩을 내야하기 때문에 매우 비싼 편이다.
▲ 출근하는 시민들이 김일성광장 부근 버스정류장에서 2층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2층 버스는 보통 1층에 34석, 2층에 55석을 구비하고 있으며
입석까지 총 150명을 태울 수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퇴근시간에 승객들을 가득 태운 2층 버스가 평양시내를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출근하는 시민들을 태운 2층 버스가 청춘거리 태권도전당 앞 거리를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2층 버스가 평양역 인근에서 승객들을 태우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대성산행 2층 버스가 승객들을 가득 태우고 거리를 달리고 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의 표정들을 지닌 승객들을 태운 2층 버스가 대성산 유원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평양시내 버스 운전기사들의 수고와 애국심
북에서 버스, 전차, 지하철들을 운전하는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힘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버스 운전기사일 것이다.
출퇴근시간에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를 직접 운전하는 것도 매우 힘들지만
낡은 버스일 경우에 고장이라도 한번 나게 되거나
빙판길과 빗길을 운전하는 날이 되면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처럼 출퇴근 시간에는 승객들과 함께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아침 출근시간이 시작되면 버스는 발 디딜 틈 조차 없을 정도로 승객들로 만원이다.
대로변에 있는 버스 정거장에는 승차를 기다리는 시민들로 장사진을 치고 있는데
이들을 모두 태워서 목적지에 내려주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평양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은 대개 오전 7시 50분이다.
출근해서 직장에 도착하면 곧바로 출근표에 체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든 미리 버스를 타야한다.
국가에서는
이를 반영해 지금부터 15년 전에 시내버스 운전사들의 헌신적인 수고에 대해
국가가 직접 발 벗고 나서
매일 아침 빵과 콩우유를 기사들에게 제공해주어
아침식사를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평양시내 버스운전기사들은 보통 새벽 4시 반에 집을 나와
오전 6시부터 운전대를 잡는다고 한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기사들은 그동안 아내와 자녀들이 가져오는 곽밥(도시락)이나
보따리에 싸온 약식 식사로 운전 중에 잠시 짬을 내 식사를 대충 해결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빵과 콩우유를
도시락 대신 먹게 되었으니 기사들 입장에서는
그 기쁨과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 지금까지 평양시내 여객운수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6-7천여 명에게
매일 아침 제공되는 빵과 콩우유는 단순히 한 끼 식사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운전기사들이 제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도착하며
안전한 운행을 보장한다는 건 몇 푼의 월급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성심과 애국적인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기에
식사제공을 계기로 전체 기사들의 사기가 매우 더 높아졌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스나 궤도전차가 정류소에 들어서면
아침밥을 먹지 못한 채 출근한 운전기사 가장을 위해 곽밥을 날라다 주는 부인이나
자녀들의 모습은 매일 아침 벌여지는 흔한 아침 풍경중의 하나였다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계속)
▲ 직장인과 학생들이 김책대학교 부근의 버스정류장에서 출근과 등교를 위해 버스에 오르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낡은 시내버스가 만경대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호텔 앞 버스정류장에는
아침마다 작업을 위한 복장과 도구를 들고 승하차하는 인민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아침 출근시간에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승객을 가득 태운 시내버스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아침 출근시간에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차례대로 질서 있게 버스에 오르는 모습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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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전차와 무궤도 전차 (편)
<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100회) |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2018.5.21
“무궤도 전차(트롤리버스)는 평양의 얼굴”
필자가 평양에 체류하는 기간에 간혹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을 할 때
혹은 시내거리를 지날 때 틈나는 대로 이것저것 시민들에게 궁금한 내용들을 질문하곤 한다.
북측의 인민들과
평양시민들에게는 평양시내 전차들에 얽힌 여러가지 일화들과 추억들이 의외로 많았다.
특히 평양 전차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면
다들 저마다 아름다운 추억담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기 체험들이 달랐다.
그들은 대부분 전차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간혹 전차에서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출퇴근할 때 콩나물시루처럼 불편한 상태에 대해서는 좋지 못한 기억들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궤도 전차 공사가 시작될 때부터 마칠 때까지 힘들었지만
2-3년 동안 공사 현장에 동참했다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궤도 전차는 1991년에 개통되었다.
그런데 이 궤도 전차노선 개통을 위해 큰 도로 위에 궤도를 설치하는 작업과
전차 지붕에 연결되는 전기줄을 공중에 설치하는 작업들은
아주 고도의 정밀 기술을 요구하는 일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당시 많은 인민군 장병들과 평양시민들,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한 마음으로 개통되기 2-3년 전부터 땀 흘려 완공했다고 한다.
웬만한 평양시민들과 병사들은 전차궤도 건설 동원에 한두 번쯤은 참가했으며
완공 후에는 대부분 전차를 자주 이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주부들은 주말 아침이 돌아오면 야외로 소풍갈 준비를 하느라
한참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새벽부터 깨우며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아침부터 일찍 서둘러야
첫 전차를 타고 가족들끼리 문수원이나 창광원을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전차 문화는 평소에는 자녀들의 학교 통학과 남편의 직장 출퇴근 시에
매일 이용하기 때문에 이미 가정마다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또한 과거 70년대 초에 개통된 지하철이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동평양 지구에는 다니지 않기 때문에
대동강을 건너 출퇴근하려는 시민들을 위해
국가와 평양시에서는 송신역에서 만경대구간에 무궤도 전차 노선을 건설했으며
일반 시민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문수거리와 락랑거리 구간에도
무궤도 전차노선이 개통됐다
. 무궤도 전차노선은 궤도 전차보다 역사가 아주 더 오래됐다고 한다
. 특히 무궤도 전차의 역사는 1962년 5월부터 시작되었는데
그중에서도 1963년~1967년 사이에 평양무궤도 전차공장에서는
많은 전동차들을 생산했다고 한다.
이처럼 궤도 전차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송신-만경대 노선을 버스가 두 대 연결된 노란색의 굴절버스 전차가 다니며 운행을 했는데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때 당시 그 노랑색 차량들이 그토록 멋지고 예뻐 보였다고 한다.
그 후 이 노란색 굴절버스(무궤도 전차)를 없애고
송신역부터 만경대까지 궤도 전차가 최초로 운행되기 시작했으며
락랑거리에서 문수거리까지 구간에도 이 궤도 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인민들의 생활가운데 전차들은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중요 부분이 된 것이기 때문에
“무궤도 전차는 평양의 얼굴”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 말은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무궤도 전차 생산 공장을 시찰하는 도중
최신형 무궤도 전차에 탑승하며
“무궤도 전차가 수도 평양의 얼굴이 되게 하여야 한다”며 강조했던 교시였다.
여기서 언급된 무궤도 전차는 일반 무궤도 전차가 아니라
외형이 고급 일반버스처럼 생긴 최신형 트롤리버스를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이 최신형 무궤도 전차인 트롤리버스들이
평양시내의 핵심적인 교통수단을 상징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 무더운 한 여름 낮에 승객을 적당히 태운 궤도 전차가 유유히 시내를 달리고 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비가 간간히 내린 오후 시간에 궤도 전차가 시내를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락랑-서평양 구간을 운행하는 궤도 전차가 대낮에도 승객을 가득태운 채 시내를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청색, 붉은 색 무궤도 전차들이 평일 낮 평양 학생소년궁전 앞 도로에 정차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아침 출근시간대 승객을 가득 태운 채 시내를 달리는 무궤도 전차.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무궤도 전차는 평양 외에도 청진, 원산, 함흥 등에도 운행 중
현재 평양에는 무궤도 전차와 궤도 전차 두 가지 다 운행되고 있다.
특히 무궤도 전차는 평양 이외에도
청진, 원산, 함흥 등 주요 대도시에도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궤도 전차 노선을 잠시 살펴보면
1호선은 만경대에서 평양역을 거쳐 송신까지 운행하며,
2호선은 시작역, 종착역이 토성역-문수역 구간이며 이는 모두 대동강 남쪽이다
. 3호선은 서평양에서 락랑까지 운행하는 노선이다.
이들 궤도 전차 노선들에서 운행되는 전동차들은
대부분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에서 자체 생산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붉은기 6호’가 궤도전동차 중에 가장 대표적으로 운행 중인 차량이다.
무궤도 전차는
궤도 없이 공중에 설치된 전깃줄을 따라서 움직이는 전차(Trolly-Bus)를 말하는데
이는 전기를 이용한 동력으로 운행하는 버스라 할 수 있다.
평양에는 현재 15종류 이상의 무궤도 전차 차량들이 운행 중이며
색상 등이 컬러풀하거나 심플한 디자인들이 많았다
. 평양에서는 1962년 5월 처음으로 무궤도 전차를 운행한 이래
지금까지 주요 간선도로 10개 노선에 무궤도 전차가 운행되고 있다.
무궤도 전차는 대형 전기버스라고 이해하면 되며
대략 1백 명 정도 태우는 대형버스와 50명쯤 태우는 소형버스가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북조선은 1961년 무궤도 전차 설치계획에 따라
평양 화물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무궤도 전차선 가설을 추진하기 시작해
현재 평양에만 평양-공업농업전람관 구간을 비롯해
평양역-연못동, 평양역-서평양역, 황금벌-송신역, 평양제1백화점-사동구역,
문수거리-낙랑구역, 모란봉-광복거리, 연못동-평성, 팔골동-대동강역 등
10여 개 노선의 무궤도 전차가 운행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90년대 들어와 평양과 청진 등에 궤도 전차화 공사를 추진해 왔는데
그 일환에 하나로 평양을 비롯한 청진, 원산, 구성진, 평성,
안주, 경성, 함흥, 서천, 혜산 등 10여개 도시에서 대중교통수단으로 무궤도 전차가 운행되고 있다.
이는 배기가스가 없고 건설비가 적게 드는 특징을 지녀 전국적으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무궤도 전차는 이번에 최신형 트롤리버스를 대량 자체 생산하게 되면서
전차의 문화도 새롭게 변모하고 있는 추세였다.
일반적으로 무궤도 전차의 요금은 초창기에는 일반성인 10전, 학생은 5전이었는데
현재는 모든 승객들이 내는 요금이 일괄적으로 5원으로 통일되어 인상됐다.
이처럼 무궤도 전차의 또 다른 명칭인 트롤리버스(Trolley bus)는
일반적으로 팬터그래프가 차량 천장에 탑재되어 있으며,
이곳으로 카데나리로 연결된 외부 전력선을 통해 전력을 공급 받아 차량을 구동하는 시스템이다.
얼핏 보면
노면 전차(궤도 전차)와 비슷할 수도 있으나,
노면 전차는 별도의 레일이 설치되고
전차의 바퀴도 레일위로 쇳덩이 바퀴가 굴러가는 방식이지만
트롤리버스는 도로 위에 타이어식 바퀴가 굴러가며
레일도 필요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
트롤리버스의 시초는
전기철도를 개발한 독일의 발명품인데
당시 독일을 비롯해 영국, 미국, 유럽 각국에 활발하게 보급되었으나,
점차 지하도로와 고가도로를 운행하는 도시철도나 도시버스들이 그 역할을 차지하는 바람에
트롤리버스 운행이 점차 사라졌으나,
최근 들어 전기차량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매연과 소음이 없고
정전사태가 발생해도 문제가 없고
에너지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당국이나 시민들로부터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 한여름 무더위 대낮에도 승객을 가득 태운 궤도 전차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 차량 출입문을 닫지 않은 상태에서 승객이 매달려 가는 모습이 아찔하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출근길 승객들이 무궤도 전차에 탑승하려고 정류장에서 질서 있게 탑승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종점에 거의 다다른 궤도 전차를 필자가 가까이 따라가며 찍은 모습.
차량과 차량을 중간에서 잇는 장비들이 약해 보였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정전 되도 멈추지 않는 신형 무궤도 전차를 생산하다
평양시의 전차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다.
궤도 전차와 무궤도 전차가 있으며,
무궤도 전차의 일종으로서 고급버스 외형을 지닌 트롤리버스가 있다.
트롤리버스는 기존의 무궤도 전차를 리모델링한 것을 말하며
외형은 일반 버스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트롤리선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아 운행하는 최신형 첨단 대중교통수단이다.
특히 트롤리버스 생산을 담당하는 부서는 평양 수도여객운수국이다.
2017년 3월말 이 운수국이 주도해
축전지를 동력으로 활용하는 신형 무궤도 전차(트롤리버스)를 개발해 시운전한 것이
트롤리버스 대중화의 시초가 됐다.
북조선 자체의 순수기술과 힘으로 100%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평양시민들은 큰 도로에 설치된 전차 선로를 가리켜 트롤리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선로에 전기가 아닌 축전지를 동력으로 이용해
전차를 움직일 수 있도록 개발했다는 것은
이 선로에서 공급하는 전기 동력만을 의존하던 기존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강력한 밧데리(축전지)를 구비하는 2중 전원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의미이다.
평소에는 외부에서 공급받는 전력으로 운행하다가
정전이 되면 즉시 사전에 충전해놓은 축전지가 가동될 수 있도록 해서
운행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원리이다.
지금까지 무궤도 전차들은 트롤리선으로 공급받은 전력만으로 운행했기 때문에
전기가 아웃되어 정전되면 차량이 전혀 움직이지 못한 채 꼼짝없이 서 있기 때문에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나 통학하는 학생들의 지각 사태가 벌어지거나
많은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고지도자의 지시로 이런 불편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과 시운전에 성공하게 되자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는 평양 무궤도 전차공장은
현대화 개건공사에 착수해 12개 건물을 새로 짓고 기존 4개동의 건물을 보수해
개건공사를 끝내고 2018년 3월부터
드디어 무궤도 전차 전동차 생산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산한 첫 제품이 바로 ‘천리마-316’형이라고 한다.
개건공사를 하기 전에는 이 공장에서는
연결식 대형 무궤도 전차 ‘천리마-091’형만을 기본으로 생산하여왔는데,
이번에 개발한 ‘천리마-316’형은 ‘천리마-091’형에 비해 규모가 소형이기 때문에
수송승객은 다소 적다고 한다.
그러나 보니 차량 객실에 오르내리는 계단 높이를 더 낮추어
승객들이 전차에 편안히 오르내릴 수 있고 안전한 운행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좌석 수는 24개. 탑승 정원은 80명이고
최대 120명까지 탈 수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 전차는 전압이 낮아도 안정적인 운행을 할 수 있고
전력도 종전에 비해 절반정도 절약할 수 있게 되었으며
평소보다 진동과 소음도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는 평양 무궤도 전차 공장 차고 모습.
생산된 무궤도 전차(트롤리버스)들이 출고를 기다리고 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완성된 무궤도 전차(트롤리버스)들이 운행을 앞두고
차고에서 마지막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모두 3호선을 보유한 궤도 전차 노선
궤도 전차는 앞서 밝혔듯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다가
, 1961년도 들어서 무궤도 전차가 도입되며 다시 전차시대가 시작됐다.
그 후 교통난을 해결하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지시로
1991년에 궤도 전차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이 궤도 전차는 현재 3개 노선이 운행 중이며
1호선은 평양역-만경대, 2호선은 토성-락랑-문수, 3호선은 서평양-락랑노선이다.
금수산태양궁전 전용노선은 삼흥역-금수산태양궁전까지 운행되며
1996년 4월 15일에 맞춰 개통됐다.
개통연도를 보면 1호선은 1991년,
2호선은 1992년,
3호선은 1998년에 개통했으며
1-3호선 모두 김일성 주석 탄신일인 4월 15일에 맞춰 개통했다.
특히 대표적인 궤도 전차는 1호선으로 보통 2-5분 간격의 배차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한편 1991년 4월 15일 만경대-평양역-선교-성신 간 19.1km가 최초로 개통했으나
대동강 횡단교의 노후화로 통과 중량 제한 규정이 생기게 됐다.
동시에 영광거리 공사와 정비를 하는 도중에
평양역-선교간의 2.6km 구간이 전격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 그 후 세월이 지나 2014년에는 선교-성신 간 6.2km 구간이 폐지되며
무궤도 전차 노선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지금 현재는 만경대와 평양역을 잇는 10.3km 구간만이 운행 중이다.
또한 모든 전차는 출퇴근 시간이나
주중 주말 관계없이 2-5분 간격으로 정확하게 운행되고 있으며
특히 서성거리-천리마대로 구간은
궤도 전차노선과 무궤도 전차 노선이 나란히 부설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공중에 가설한 전차선(카데너리) 등도 궤도 전차용과
무궤도 전차용이 함께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진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신서교 전후 0.7km 구간은 궤도 전차 3호선과 선로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광복거리 인근의 청년영웅 도로에는 150m 지하도는 평양전차가 통행하는 유일의 지하구간이다.
대부분의 차량기지는 만경대 부근에 있으며
이곳에서 전차 2, 3호선의 차량검수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성신에 있다는 차량기지는 선로 철거 후 무궤도 전차 전용으로 전환되었다.
전차 요금은 어느 구간에서나 무조건 5원 단임 요금제이며,
시내차표라는 이름의 패스와 자유승차권도 있다.
한편 평양시내에서 미림승마 구락부가 개원하기 전에는
궤도 전차 노선이 운행되고 있었는데
승마장이 개원하면서 노선 일부 정거장을 철거했다.
궤도 전차 레일을 일부 걷어내고 대신 대체 버스가 투입된 것이다
미림 승마구락부로 가는 궤도 전차가 없어진 이유는
이용객들이 좀 더 효율적으로 최단거리로
목적지에 편안하게 왕래하도록 배려한 차원이라는 것이다.
▲ 위험한 상황임에도 낡은 궤도 전차 뒤편에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천진난만하게 매달려가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궤도 전차가 시내를 주행하는 모습을 외출 중에 찍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락랑-서평양행 구간 궤도 전차가 간선도로를 지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날씬한 외형의 빨간색 궤도 전차가 유유히 인도 옆을 지나치고 있다.
필자의 담당안내원이 전차 가 지나가는 순간에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무사고 문구표시를 부착한 문수-토성구간 궤도 전차가 궤도 위를 달리고 있다.
원래 1호선이었으나 현재 2-3호선으로 이적됐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석암동-개선문 구간 무궤도 전차가 정거장에서 승객을 태우는 장면.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복거리 인근의 청년영웅 도로의 지하도를 2량짜리 무궤도 전차가 통과하는 모습.
지하도는 150m 길이로서 평양 유일의 전차통과 지하구간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역이 종점인 노랑색 무궤도 전차가 정류장에 정차하기 직전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평양의 이국적인 전차 문화와 역사
필자가 평양 시내 대로변에 다니는 전차들의 모습들을 보노라면
마치 일곱 빛깔 무지개 색상처럼 다양하고 원색적이었으며
게다가 전동차의 디자인과 모델, 문양들도 워낙 다양해서
그야말로 평양시내 전체가 마치 전차 박물관처럼 보였다.
이처럼 이국적이고 다양한 풍경을 연출하는 전차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
평양 기차박물관 참관을 바탕으로 잠시 알아보았다.
조선 땅에 운행되었던 전차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23년 일제에 의해 개통된 전차가 그 모태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전쟁 이전에는 서울, 부산, 평양 등 조선 3대 도시들이 전차를 가장 먼저 도입해 운영했다.
그 후 이 전차들은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운행되었으나
,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차 시설물들과 전동차량, 전용도로 등이 모두 파괴되었다
. 그 후 남측은 전후 복구시기를 거쳐 이전처럼 그대로 운행을 하였다.
그러나 남측과 달리 평양은 파괴된 전차 시설들을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폐지되었으나
한 동안 서울과 부산의 전차운행은 전쟁 후에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60년대 들어 자동차가 대중화되자
마침내 모두 폐지되어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에 없었다.
그리고 서울, 부산등 대도시는 자동차 증가와 더불어 지하철 시대로 전환되었다.
그 후 평양의 전차는 다시 전후 복구 시대를 거쳐 1960년도가 되자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지원으로 무궤도 전차가 도입되면서
다시 해방 이전처럼 전차 시대가 개막됐고
1961년 9월경에는 첫 무궤도 전차를 생산하기도 했다.
남측과는 달리 북조선에서는 일반인이 자동차를 소유하는 경우가 드물다보니
필요에 의해 다시 전차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후 점점 증가하는 인구대비에 맞춰
그 대안으로 새로운 교통수단 건설이 시급하자
노면전차(궤도 전차)의 건설을 시작해 마침내 1991년 개통된 것이다.
그 후 궤도 전차는 2008년경에 대대적인 노반 보수를 끝내며 새 단장을 했고
이때 선로를 중앙에서 인도 쪽으로 이전하는 대공사를 단행했다.
결국 트롤리버스 노선이 포화상태가 되자
평양시 교통당국에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궤도 전차 도입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궤도 전차를 노면전차라고도 부르는데 1991년에 들어서면서
궤도 전차가 최초로 운행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로서 평양은 전기로 구동되는 트롤리버스와 궤도 전차
그리고 지하철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으며
일반 시내버스들중에는 전차 노선에 공백이 있는 구간에 대체버스로 투입돼 운행되기도 했다.
비근한 예로 평양역- 선교간의 2.6km 구간이 전격 폐지되며
만경대-평양역을 잇는 구간과 선교-성신을 잇는 구간의 노선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되는 사태가 발생할 때
그 대안책으로 선교-평양역 사이에 대체버스가 투입돼 운행됐다.
▲ 만경대-평양역 구간을 잇는 10.3km 구간의 무궤도 전차.
원래는 궤도 전차 구간이었으 무궤도로 변경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산뜻한 디자인으로 단장한 굴절차량 형태의 무궤도 전차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4월의 봄 행사를 알리는 청색 깃발들이 날리는 정류소 앞에 정차한 무궤도 전차를 이용하는 승객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송산-송신구간 궤도 전차 노선표.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서평양역-평양역 노선에 운행 중인 천리마 091형 무궤도 전차가
만수대 인근 정류소에 정차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가 련못동을 다녀오는 도로에서 찍은 최신형 무궤도 전차.
현재 평양에는 15종류 이상의 무궤도 전차 차량들이 운행 중이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아침시간에 승객을 가득 태운 무궤도 전차가 시내를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무궤도 전차가 로동신문사 앞 교차로에 진입해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전차가 가장 한가한 시간은 오후 2시-4시 사이라고 한다.
빈자리가 많이 보이는 가운데 궤도 전차가 평양시내를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무사고 운전 5만km 달성 시마다 차 외벽에 붉은 별 표시
필자가 가끔 궤도 전차가 지날 때마다 유심히 쳐다보며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차 전동차 양 측면에 그려진 빨간색 별 표시 때문이었다.
마치 장군들 계급장처럼 일렬로 나란히 그려져 있는 별들은
모든 차량마다 각각 별 숫자가 달랐다.
어떤 차량에는 5개, 7개,
어떤 차량에는 10개, 20개, 30개
심지어 어떤 차량에는 50개가 넘기도 했다.
알고 보니 별표는 5만km 무사고 운행을 달성할 때마다
평양시 당국에서 수여하는 명예스런 모범운전 표시라고 한다.
매번 목표가 달성될 때마다 평양시 당국에서 직접 별표를 하나씩 더 그려준다고 한다.
어떤 차량에 7개의 별표시가 그려졌다면
이 차량은 35만km 무사고 운행을 한 것이다.
그러나 무궤도 전차노선은 궤도 전차보다 역사가 더 오래됐으나 별 표시가 없다.
1963년~1967년 사이 평양 무궤도전차공장에서 많은 전동차들이 생산되었는데
그 당시 전차가 지금도 유일하게 남아서 운행되고 있었는데
가장 오래된 무궤도 전차는 ‘천리마 70형’인데
현재 차량번호 903호인 이 차량 1대만 남아서 상징적으로 운행 중이었다.
이미 주행거리가 300만 km을 아득히 넘은 상태였으나
무궤도는 별 표시 제도가 없다고 한다.
또한 필자가 알아보니
예전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궤도 전차 탑승이 pq게 허용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관광 패키지에 포함시기도 해서 제한된 자유롭게 이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해외동포나 외국인이 전차를 타고 싶을 경우에는
1호선의 만경대-평양역 구간인 10.3km 거리에 한정해서 승차가 가능하다.
1호선 구간 중에서도 관광객들이 탑승하는 전차는
일반 인민들이 이용하는 영업용이 아닌 전세용 전차만 이용하도록 배려해준다
이 전차는 탑승 인원에 구애받지 않고 운행을 해준다.
전차 탑승 의사를 밝힌 해외동포나
외국인이 공식적으로 궤도 전차를 시승할 수 있는 유일한 노선이
1호선의 만경대-평양역 구간이며
전세로 이용 가능하며, 단 한명이 신청해도 운행을 해준다.
▲ 모두 51개의 무사고 별을 달은 궤도 전차 모습.
5만 Km 무사고를 달성했을 때 1개의 별을 달아주기 때문에
이 차량은 무려 255만Km의 무사고 운전을 달성한 차량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금수산태양궁전만 운행하는 무료 전차 노선
필자 일행이 금수산 태양궁전을 참관하기 위해 입구에 방문해보니
그곳은 방문객들을 위한 전용 전차가 셔틀차량처럼 수시로 운행되고 있었다.
예전에 평양 지하철노선 중에 혁신선이 있는데
이 노선은 애초 9개역사가 개설돼 운행 중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이후에는
락원역과 삼흥역 사이에 있던 광명역이 폐역되고 말았다.
바로 그 광명역이 금수산주석궁에 내리는 유일한 역이었기 때문이다.
주석이 부재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보안상 그런 조치를 내린 것 같다.
알려진 대로 주석궁은 서거 이전에는 주석의 관저와 공식집무실이었으며
이 광명역을 통해 주석궁 방문객들이 주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거 후에는 광명역을 곧바로 폐쇄하고
그 대신 3년상을 마친 후인 1996년부터 이른바 ‘금수산노선’을 새로 개설한 것이다.
금수산노선은 궤도 전차 노선이며 운행되는 전차의 전동차들은
모두 스위스산 제품으로 매우 산뜻하고 고풍스런 이미지였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해가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하는 조문객들과
여행객들을 위한 별도의 노선을 운행함으로서
이용자들에게 전적으로 교통편의를 제공해주려는 차원이었다.
금수산태양궁전 전용노선인 금수산노선은 삼흥역-금수산태양궁전까지만 왕복 운행되며
1996년 4월 15일에 맞춰 개통됐다.
이 노선은 평양의 다른 궤도노선들과는 완전히 다르며,
어느 노선과도 연결되지 않고 독립노선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이용요금은 무료이다.
궤간은 다른 표준궤 노선들과는 달리 1000mm이며
선로 미관이나 객차 미관도 매우 깨끗했다.
평양의 수입 전차들은 주로 체코, 동독 등 구공산권 국가들에서 들여온 것들이지만
이곳 금수산노선의 경우
녹색 바탕에 상부에 연두색 띠를 두르고 있는 고급스런 디자인의 스위스 취리히산 차량들이다.
이 객차들은 1940년대
스위스에서 설계된 스위스 표준형 노면전차 IB형 차량을 취리히에서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금수산선에서 운행되는 전동차량은 대부분 2량 편성해 운행하고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필요에 다라 2+2량으로도 긴급 편성되기도 한다고 했다.
(계속)
▲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하는 조문객들과 여행객들을 위해 운행 중인 금수산노선 궤도 전차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금수산태양궁전 전차 종착역에 도착한 참배객들이 전차에서 내리자마자
첫 관문인 검색대와 소지품 관리실로 향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금수산태양궁전에 정차하고 있는 금수산노선 전용 궤도 전차 모습.
스위스산이며 2량 혹은 필요시 2+2량으로도 운행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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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교통 환경미화원 편
<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101회) |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2019. 8.4
눈에 띄게 증가하는 평양시내 도로교통 환경미화원들
필자는 미국에 거주하는 재미동포로서 간혹 서울과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두 도시에서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을 매번 체감한다.
다름 아니라 서울을 방문해 인도를 걷다보면
도심이나 외곽을 막론하고 어디에선가 은은하게 악취가 풍긴다.
일명 ‘시궁창’ 냄새와도 같은 이 악취는
화려한 수도 서울의 미관과는 아무 상관없이 나의 후각에 지속적으로 감지되며
길을 걸을 때마다 불쾌감을 주고 있다.
아울러 엄청난 교통량과 거기서 뿜어 나오는 매연으로 인한 탁한 공기들까지 합세해
그리운 고국의 수도 서울을 걷는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
아마 역겨운 냄새들은 맨홀 뚜껑 밑이나 하수구, 배수구등
지하 오폐수 시설 운영 시스템과 구조상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곳에 사는 현지 서울시민들과 거주민 동포들은
그런 냄새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반면 평양은 서울과 달랐다.
서울보다는 아직 교통량이 많지 않아 매연도 적을 뿐 아니라
도시계획이 잘 돼 있어서 아직까지는 그런 악취가 감지되지 않아 그런지
계절과 기후에 상관없이 언제나 공기의 쾌적함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평양에도 시민들이나 관료들의 입에서
‘교통체증(Traffic jam)’이라는 말을 흔하게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차량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며
머지않아 평양도 매연과 악취가 나지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이다.
평양 거리는 더 이상 한산하지 않고 역동적이다.
도심 차도 위에는 부지런히 오가는 버스와 전차,
트럭과 택시, 승용차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으며
이에 질세라 다양한 오토바이, 자전거들까지 합세하고 있고
땅속에는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
신호시스템이 없는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제복차림의 여성 교통보안원들은
여전히 주목을 받으며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반면에
교통량 증가로 인해 신호등들은 여기저기서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새로 준공한 평양국제공항(순안공항)과 평양기차역 등의 공용주차장과 백화점,
시장 등의 주차장에서는 주차요금을 철저히 징수하고 있다.
또한 평양시내 한복판은 물론이고
외곽지역에서도 주유소 찾기가 이전보다 훨씬 더 쉬워졌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그만큼 교통량이 많아졌고
이에 따른 대책으로 평양식 새로운 교통문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최근 평양의 색다른 교통 문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차도를 종횡무진하며 청소를 하는 거리의 천사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유니폼을 입고 도로가를 누비며 청소부들인데
이들이 바로 여성들로만 구성된 도로교통 환경미화원들이다.
김정은 위원장 취임 이후 평양은 시시각각 급속도로 변모하며 발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것은 바로 이들 도로 환경미화원들의 출현이다
. 사회주의식 교통문화와 도시미화 사업이
한데 어우러진 평양의 도시 미관이 나날이 청결해지는 비결은
도로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 여성 도로환경미화원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평양시 각 구역별로 조직된 도시미화사업소에 소속된 도로환경미화원들은
주황색뿐만 아니라 창의적으로 디자인한 다양한 유니폼을 입고
그 위에 야광조끼를 걸쳐 입고 차량들이 다니는 대로와 인도의 청결을 책임지고 있다.
▲ 필자가 차를 타고 이동 중에 만수대의사당과 인민대극장이 있는 큰 사거리에 당도할 무렵
환경미화원이 청소도구를 실은 리어카를 몰고 차도 한복판을 횡단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평양 오페라극장 광장에는 대규모 청년대학생들의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마침 관할 환경미화원들이 청소도구를 실은 손수레 옆에서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시민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과거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추대될 무렵에
도로 환경미화원 한 명이 차도를 말끔히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필자가 찍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도로환경미화원들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사회현상
평양은 사회주의 국제도시로 주목받으며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어울리는 유니폼을 입은 환경미화원들의 출현과 활동들은 예견된 일이다.
필자가 볼 때 지난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시작된 평양시 현대화 사업이 2010년 무렵에는
거의 마무리되었다.
당시 궤도전차 노선을 도로 중앙에서 도로 양 옆으로 옮기는 공사를 비롯해
도로포장공사, 인도의 보도 블럭 교체작업들도 모두 보기 좋게 완성되었고
아울러 천리마거리, 영광거리 등
평양 도심지의 도로와 순안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9.9절 거리
, 금성거리등도 말끔히 조성되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후 관리는 모두 도로환경미화원들의 몫이었다
. 평양시 현대화 사업은 주로 대동강변 미화사업과 주택개건사업 외에도
주요시설물의 조명교체작업이나 강안도로건설, 가로수심기,
교량개보수, 영화관과 음식점 등 문화 편의시설 개축 등에 주력하며 새롭게 탈바꿈했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 시대의 말기이자 김정은 위원장 시대의 시초가 되는
2010년과 2011년도의 새해 신년사는 인민생활 향상과
강성국가 건설을 최대과제로 제시되었고
그 후 본격적으로 김정은 시대가 개막되면서
나무 심기, 잔디 깔기, 도로 주변 정돈 등을 위한 녹화사업,
도로정비사업 등 일반적인 도시미화사업이 가장 먼저 평양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아울러 국토건설 전략은
도시미화 사업과 유희오락시설 건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대도시에서는 주로 인민생활 향상과 함께 주택 거리 조성사업과
도시의 공원화 사업이 중요과제로 추진되었으며
평양 외에도 전국의 각 지방 도시들도 도시미화 사업과 산림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환경미화원들뿐 아니라
일반시민들과 주민들은
과거 보다 더 환경 미화사업에 책임을 지는 구성원들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사회주의 수도 평양은 국가 공동체의 권력과 문화가 집중된 특수 지역이다 보니
평양에서의 거리와 차도들은 도시를 구성하는 일상적인 건물들과
그곳에서 이뤄지는 삶의 모습들이 어우러진 공간이 되었다.
특히 도로의 시작점과 끝점, 교차점들에 높고
규모가 큰 공공건물들과 아파트 살림집들을 배치하여 거리의 축을 형성한 것을 볼 수 있었다
. 그 결과 평양 중심부에는
사상교양지구, 대학지구, 과학지구,
보건지구, 체육지구, 중심봉사지구 등
기능별로 지구를 구축하고
다양한 형식의 건축물들을 건설함으로써
도시미학의 다양성과 입체성을 설계대로 확고하게 완성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차량증가와 교통량의 증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에 완공하지 못한 창전거리 공사를 재개해
2012년 6월 만수대지구에 45층의 초고층 아파트단지를 완공한 것을 시작으로
2013년 은하과학자거리(일명 과학자살림집),
체육인살림집,
김일성종합대 교육자(교수)살림집,
위성과학자 주택지구,
김책공대 교육자(교수)살림집,
2015년 미래과학자거리를 완공했다.
이처럼 공공주택거리들을 빠른 속도로 건설하면서 평양의 교통량은 더욱 증가하였다.
2009년 12월에는 김정은 후계 체제가 진행 중이던 시기였는데
만수대 아파트 단지거리에 800여 세대의 입주가 이뤄졌다.
이를 시작으로 2010년에는 평양 10만호 건설사업이 시작되면
앞에 언급된 공공주택들이 들어선 것이다.
소위 ‘강성대국 진입의 해’로 규정한 2012년까지
2년 남짓한 기간 안에 10만호를 짓겠다는 목표 아래 추진한 결과 계획대로 완성한 것이다.
이처럼 인구유입과 유동인구 증가는 교통량 증가 현상으로 나타난다.
원활한 교통 흐름을 관장하고 통제하는 업무와 도로를 관리하고 유지 보수하는 사업들
그리고 도로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도로 환경미화 사업들과 직결이 되어
평양시 당국은 시시각각으로 분주해졌다.
도로 환경미화사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도로청소기계 운행과
청소인력 등을 보강하는 것은 물론
쓰레기 수거 화물차와 담당 인력 등을 보충하기 위한
재정과 인원을 계속 투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분화된 평양의 도시환경미화 종사자들
과거에는 청소를 담당하는 부서가 평양시를 비롯해
지방의 각 시군 경영사업총국 산하의 경영사업소에서 맡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각 구역별로 도시미화사업소에서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시의 경우 쓰레기 수거차로 사용되는 화물차는
과거에는 승리 58형 2.5톤 트럭 1백대와
청소원 2백여 명 정도가 담당을 하며 미화사업을 맡았는데
지금은 그 인원과 장비가 3배 규모로 늘었으며
중국제 수거용 화물차등이 사용된다고 한다
. 이밖에도 과거에는 자동차 전용도로 청소요원이 2백여 명 정도였고
도로 청소차 20대와 가로수 관리원이 50여명 정도가 근무해도 충분히 감당을 했는데
지금은 당시보다 5배 정도의 규모로 증가되었다고 한다.
창전거리, 백두산 영웅청년발전소, 청천강 계단식발전소,
과학기술전당, 미래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
김정은 위원장 취임 이후 매년 대규모 건설사업이 이어졌고
이어서 평양시 차원을 넘어서 당과 내각 차원에서 대규모 거리 조성과
도시문명의 경관화가 이뤄졌다.
지난 8-9년 동안의 김정은 시대를 함축하는 의미를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면
“조미대결전으로 인한 핵과 미사일 고도화와 함께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문화 건설 사업 주력”이라고 볼 수 있다.
평양에는 도로교통 환경미화 분야 외에도 아래와 같이
모두 일곱 가지로 세분화되어 종합적인 도시환경 정책을 펴 나가고 있다.
첫째,
다양한 유니폼을 입고 그 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은 채 빗자루를 들고
차도와 인도를 청소하는 도로환경미화원들이다.
이들은 빗자루와 청소도구를 손수레(리어카)에 실고 다니며
차도를 활보하며 다닐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둘째,
도로의 도면 전용 청소기를 운행하며 부지런히 차도 갓길과 도면을 운행하며
청소하는 환경미화 요원들이다.
이들은 일반 환경미화원들의 재래식 청소방법이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차로를
비가 오나 눈이오나 청소기를 몰고 다니며 청결하게 하고 있었다.
이들도 유니폼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었다.
셋째,
평양시에도 살수차가 정기적으로 차도를 지나가며 물을 뿌린다.
살수차를 운행하는 운전기사와 관계자들도 도로환경미화원들이다.
넷째,
공공기관이나 중요 국가기관 건축물, 유적지, 사적지
, 관광지등에 배치되어 청소를 담당하는 환경미화원들이다.
이들은 주로 건물과 부대시설, 주차장등의 청소를 전담하고 있으며
이들의 유니폼은 매우 화려하고 밝은 색상이며 야광조끼는 착용하지 않는다.
다섯째,
평양시내 각 지역의 일반 주택단지나 아파트단지에 설치된 대형 쓰레기 보관함을
화물트럭을 몰고 주기적으로 찾아가
시민들의 생활 쓰레기를 전문적으로 수거하는 일을 맡고 있다.
화물차량 운전기사와 이를 돕는 환경미화원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들도 유니폼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는다.
여섯째,
시 당국에 소속된 전문적인 환경미화원 외에 평범한 일반 평양시민들도
각 지역마다 조직된 인민반별 담당 청소구역이 정해져 있다.
반별로 집집마다 반드시 의무적으로 참여하여야 하며
자기 집은 물론 정해진 동네 구역을 책임지고 청결을 유지해야한다.
또한 각 직장별, 인민반별로
잔디밭이나 작은 공원이나 녹지 등을 담당구역을 정해 자발적으로 관리한다.
일곱째,
일반 시민들이나 거주 민간인 외에도
특별한 국가행사나 도시환경 조성을 위한 공공사업이 벌어질 경우
군인들이나 학생들도 동원되어 참가한다.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차량들이 다니는 평양시내의 대로변과 거리,
골목 등이 청결하게 유지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일곱 가지를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1. 차도와 인도위에서 빗자루 청소를 하는 도로환경미화원들
손수레를 끌고 이동하면서 차도나 인도위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환경미화 봉사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필자가 만수대의사당과 만수대인민대극장이 있는 큰 사거리를 지날 때
차도 한복판을 유니폼을 입은 환경미화원 여성이 청소 리어카를 몰고
도로를 횡단하는 모습도 가끔 목격했고
인민대학습당 뒤편 차도를 청소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담당구역을 청소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교통법규상 환경미화원들은 홀로 걸어가며 청소를 하거나
리어카를 끌고 차도를 종횡무진 다닐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
아울러 리어카 한 대에 3-4명의 청소요원들이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덕담을 나누며 함께 이동하는 모습들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필자가 개선문을 방문해 구경하는 동안에도
환경미화 요원들이 부지런히 내 주변에서 청소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고
승합차를 타고 시내를 달리던 도중에
고가도로 밑에서 환경미화원들이 청소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또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인도위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의 모습이다.
또한 특수한 지역에 있는 도로는 환경미화원들이 정기적으로 물청소를 하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이들은 모두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밝은 유니폼위에 야광조끼를 갖춰 입었으며
모두 각 평양시 각 구역의 도시미화사업소 소속이며 그곳에서 월급을 지급받는다.
하지만 아파트단지나 주택가의 작은 골목 등은
그곳에 거주하는 인민반이 앞장서 자치적으로 담당제를 만들어
청소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환경미화원들이 관여하지 않는다.
상점과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평소 자기 가게 앞이나 가게 앞 인도를 자발적으로 청소를 해야한다.
▲ 평양시내 경사진 인도를 환경미화원들이 청소를 하는 광경.
공사가 방금 끝난 장소라 유난히 먼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네 명의 환경미화원 일행 중 한 명이 멀리 휴지가 떨어진 모습을 발견하고
대열을 이탈해 휴지를 줍느라 세 명만 이동하는 광경.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고가도로 밑에서 환경미화원들이 청소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환경미화원들은 인도는 물론 차도에도 상황에 따라 정기적으로 물청소를 실시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청소 도구 없이 관할지역의 인도를 걸으며 휴지를 줍는 환경미화원.
필자와 평양의 청소행정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2. 차도 전용 노면청소기계차 담당미화원들
평양에도 정기적으로 청소차가 도로에 물을 뿌리기도 하는데
그 뒤를 도면 청소기가 따라가며 도로를 청소한다.
최근에는 새로운 대체에너지로 제작한 도로청소기가 운행되고 있다.
특히 필자가 2015년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교파인 정백교회당을 방문하기 위해
인근 도로를 지나다가 노면청소기가 도로를 청소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체 개발한 최신 청소기계가 차도를 청소하는 모습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졌다.
알고 보니 낙랑구역 하천시설 사업소가 자체 개발한 기계였는데 태양전지로 작동된다고 했다.
휘발유나 경유 등의 연료를 전혀 쓰지 않고
태양전지로만 움직이다보니 매우 효율적이고 비용도 절감되었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매우 독특했다.
이 청소기계차는 마치 삼륜 오토바이와 삼륜 자전거를 개조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운전자의 좌석 위에는 100W 태양열전지판이 설치돼 있었으며
기계 앞쪽에는 세 개의 자동 솔이 설치됐는데
이 솔들을 돌려주는 전동장치가 부착되어있었다.
좌우 양옆에는 크기가 동일한 두 개의 솔이 연신 빙글빙글 돌며
쓰레기를 가운데로 몰아주면 가운데 있는 나머지 솔이 빨려온 쓰레기들을
오물함으로 집어넣는 역할을 하는 매우 단순한 시스템이었다.
청소기 한 대가 1시간 동안 무려 2만㎡의 도로 면적을 청소한다고 하니
청소부의 수고도 많이 덜어줄 수 있고
인력으로 하는 것보다 경제적 실리가 클 뿐만 아니라
기름 연료를 쓰지 않아 공해발생이 전혀 없는 친환경적인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도로관리의 기계화를 실현한 이 청소기들은 앞서 밝혔듯이
태양광 전지판으로 축전지 자전거나
오토바이 형태를 결합해 만든 것이다.
바퀴의 회전 에너지와 전기 에너지를 동력으로 제공받는 청소용 솔이 제 구실을 하여
쓰레기를 빨아들이는 것 일 뿐
특별한 부속이나 장치가 없는 단순한 작동원리에 불과하지만
이용 범위가 매우 넓고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어 매우 호기심이 가는 인기 제품이다.
남한에서는 수도 서울 외에도
워낙 전국적으로 대도시가 많고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이 많다보니
거리 청소를 하거나 쓰레기 청소 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고들이 많이 발생한다.
어두운 새벽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청소를 하다 보니
청소차량이나 일반 과속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빈번하며
안전이 담보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평양도 이제는 서울처럼 예외가 아니다.
이제 막 기계화의 시작 단계이며 많은 사고에 노출되어 있어서
철저한 안전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도로전용 청소기계차 미화원들은
평양시 각 구역의 도로시설관리소에 소속되어 있고 월급도 그곳에서 받는다.
▲ 태양전지를 에너지로 활용하는 자전거 형태의 노면 청소기계를 운행하는 환경미화원이
잠시 운행을 멈추고 주차를 한 후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오토바이 형태를 갖추고 있는 청소기계차를 운전하는 환경미화원이
광복거리일대를 지나며 부지런히 청소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또 다른 환경미화원이 오토바이 형태를 갖춘 청소기계차를 운행하고 있는 모습
.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자전거 형태의 노면 청소기계차들이 도로시설관리소에 나란히 주차된 모습
. 태양전지를 에너지로 활용하는 친환경적인 제품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첫댓글
https://blog.naver.com/bmss4050/223033474282
김정은의 일상과 주민들의 반응 ,방역대전 성과는?
https://blog.naver.com/bmss4050/222921226520
공산주의 사회주의 구분은 무엇인가?
감사합니다. 너무 깔끔한 평양모습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