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마음 제10차 백일릴레이명상 제96일 (0228 화)
여행의 이유
어제와 그제, 딸 아이와 둘이 1박2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행선지는 춘천. 상봉역에서 경춘선 지하철을 타면 쉽게 갈 수 있다는 걸 알고, 미리 정해 시간을 맞춰야 하는 ‘예약’이 필요 없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집 앞 지하철 역에서 춘천역까지 거쳐간 정거장 수를 세어 보니 무려 38개입니다. 시간은 약 2시간이 좀 넘게 걸렸습니다. 차로 가면 1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를 일부러 천천히, 제 발로 걸어서 가는 루트를 선택한 ‘슬로우 여행’이었던 셈입니다.
아이 아빠는 주말 골프에 회사 일로 바빠서 휴가 내기 어렵다는 상황이 아이와 단 둘이 떠나는 좋은 핑계가 되었습니다. 지인들 중에는 배우자를 동반하지 않고도 아이들과 여행을 잘 다니는 가족들이 있는데, 저 역시 가족이 꼭 완전체(?) 구성을 갖추는 게 여행의 필요 조건이 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수년 전, 우리 가족이 강릉에 갔을 때, 어린 딸을 데리고 강릉으로 여행을 온 모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현지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친해져서 그 이후로 교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제 춘천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그 집 모녀가 생각 나서 연락을 했더니, 다음엔 모녀끼리 강릉에 가자고 합니다. 이번에 앞으로 더 많이 시도하게 될 아이와 떠나는 여행의 첫 테이프를 잘 끊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춘천에서 아이와 둘이 닭갈비와 막국수를 먹고, 찜질방에 가고, 레일 바이크를 타고, 마을 서점에 들르고,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불현듯 5년 전 아이와 외국에서 1년살이를 했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남편은 서울에 남고, 제가 휴직을 한 상태에서 아이와 둘이 뉴질랜드로 떠났었습니다. 그저 맑은 공기를 원 없이 마실 수 있는 곳으로, 한번도 발을 닿아보지 않은 땅으로, 연고가 없는 미지의 장소로 훌쩍 멀리 떠나고 싶었던 절실했던 소망을 행동으로 옮겼던 거지요.
이번 여행에서 그때가 떠올려진 걸 보니, 길 위로 나서고 싶은 제 안의 변화 욕구가 꿈틀거리나 보다 싶습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직장과 일의 쳇바퀴에서 물러나와 당시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아이와 세세한 일상을 공유했던 경험이 지금 현재로 다시 불러져 왔습니다. 그간 훌쩍 성장한 아이도, 몇 가지 주요한 변곡점을 통과한 저도, 인생의 새로운 챕터에 들어섰고 낯선 도전과 모험이 기다리는 또 다른 항해를 시작했다 걸 알아챕니다.
춘천에서 머문 숙소 로비에서 “우리 놀러 왔는데 싸우지 말자”라는 문구가 붙어 있어서 혼자 빙그레 웃었는데요. 딸에게 말랑하고 다정한 여행 지기가 되어 주자는 게, 이번 여행에서 남몰래 간직했던 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잊을 만하면 짜증과 불평이 출렁이는 딸에게 살짝궁 날 선 감정이 올라올 뻔한 순간이 있었지만, 대체로 온화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여행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아이가 다음에는 좀 더 길게 여행을 떠나자 하네요.
이번 여행은 찻잎이 우러나듯 서서히 혹은 언젠가 먼 미래에 불현듯 제가 지금은 미처 알지 못한 이유와 의미를 드러내 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