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라는 말에 대하여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 하다가 철학이나 영성과 같은 일반인에게 익숙치 않은 주제가
우연히 나와 이야기 되면 그건 너무 형이상학적이야 하며, 말문을 흐리며
마치 형이상학이란 철학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인 듯 하며 본인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며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그런 이야기는 고리타분한 철학자(哲學者)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큰데, 특히 당장의 눈에 보이는 현실에 몰입해 있고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 현상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형이상학적이라는 말의 “형이상(形而上)‘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형이상‘이란형태(물질 모습)를 넘어서는(beyond) 것을 의미하는 셈인데,
세계가 의식이고 물질이 이미 의식이라면,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강독을 듣는 분들 입장에서는
물질이면서 이미 의식으로 넘어선 것이기에 궂이 ‘형이상(形而上)’이란 말이 필요 없어진다 싶습니다.
물질이면서 이미 형이상적 이었는데, 우리가 물질 따로 의식 따로 분리(分離)해 생각해
왔기에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다 이런 단어도 상식선에서는 필요하게 되고 또 사용해 온 것 같습니다.
맞는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전에는 그저 철학 종교 같은 조금 어려워 보이는 정신적 학문 체계를 ‘형이상학적이다‘
라는 당연한 말로 받아들였는데, 애초에 ‘형이상학적’이 있던 게 아니었고,
세계가 의식임을 모르는 전도몽상(轉倒夢相)의 입장에 서다보니,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해 보게 됩니다.
전도몽상(轉倒夢相)이 생기면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또 다른 단어(이름:名)가 생겨나고,
커버한 그 내용을 커버하기 위해 또 다른 단어가 생겨나고 그래서 나중에는 전도몽상을
뒤집기 더욱 어려운 상태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건 마치 어떤 일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살짝 거짓말을 했는데 그걸 안 들키기 위해
나중에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와 유사하다싶습니다.
형이상학도 형이하학도 그저 이원성으로 그럴듯하게 나타나 보여 졌을 뿐,
단일의식 앞에서는 설 자리가 없고, 숨바꼭질로 숨으려 해도 숨을 자리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던 말들 중에도 곰곰이 따져 보면 엉터리 같은 말들이 꽤 있겠다 싶습니다.
이런 새삼스레 돌이켜 볼 일이 있는 말들을 하나 둘 점검해 보는 일도
단일의식의 관점에서 전체를 보는 중에 더 쉽게 발견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