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1월 하나대투증권 지점장이던 정길동(53·가명)씨는 사내 인터넷 게시판에 뜬 '희망퇴직 모집' 통보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내에는 '부장급은 대부분 나간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결국 그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회사측은 재취업 준비 기간을 벌어준다는 차원에서 15개월짜리 임시계약직 투자상담사 자리를 제안했다. 억대 연봉을 받던 그는 지난 15개월 동안 월 200만원쯤 받는 투자상담사로 일하면서 재취업 자리를 찾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정씨는 "우리 같은 중장년층이 취업·창업하는 데 도움되는 서비스나 정보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08년 11월 하나대투증권의 희망퇴직에서는 모두 180명이 회사를 떠났다. 대부분 50세 전후의 베이비붐 세대였던 이들 중 시간을 벌려 회사측이 제안한 15개월짜리 투자상담사에 지원한 사람은 160명에 달했다.
이들 160명 중 15개월 사이에 재취업 자리를 구한 사람은 3명뿐이었다. 10명은 전혀 무대책이었고, 7명은 창업을 생각하고 있다는 식의 추상적인 계획에 머물렀다. 응답자들은 개인적인 준비도 부족했지만, 은퇴자들을 위해 우리 사회가 내놓는 재취업 시장도 보이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재취업 시장도, 지원 시스템도 없다
또 다른 정모(52)씨는 15개월 동안 인터넷 쇼핑몰 창업에 매달려, 석달 전 야심차게 인터넷 쇼핑몰을 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고 돈을 까먹고 있다는 이씨는 인터넷 환경에서 자란 젊은 사람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면서 중장년층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식당이나 치킨집뿐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청년 일자리 문제에만 매달리는 사이 중년층의 일자리 문제는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었다.
현역시절 신탁업무 전문가로 불리던 이모(55)씨는 15개월 동안 취업 ‘뽀개기’같은 인터넷 취업 카페나 각종 창업 사이트에 수시로 드나들며 재취업 정보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이씨는 대부분 젊은 사람 위주의 정보들만 있어 내가 필요한 정보 찾기는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나대투증권에 첫 직장으로 입사해 25년간 일했던 A(51)씨는 15개월 사이 증권사 세 곳의 계약직 일자리에 지원했지만 모두 고배를 마셨다. 지점장을 3년 한 경력이 도리어 약점으로 작용했다. A씨는 지점장을 오래하다 보니 고객 밀착관리는 아래 직원에게 맡기고 조직 관리만 해왔는데, 면접에서는 내가 보유한 고객 수를 물어와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재취업에 성공한 3명은 모두 아는 사람의 도움 덕분이라고 했다. 개인적 네트워크로 일자리를 찾았지, 사회적·공공적 시스템의 도움은 받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직장 다니며 은퇴 후 준비가 가능한가
대부분 사람들이 현직 시절 재취업 준비를 제대로 못했다고 고백했다. 10여년 전 외환위기 때 대리나 과장이었던 이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선배들을 보고 나름 준비하지 않았을까 추정했지만 전혀 딴판이었다.
하지만 준비 소홀의 원인 분석에는 자기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항변이 더 많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응답자는 내가 입사했을 때 정년은 60세였지만 나는 51세에 나왔다면서 조기 퇴직 현상은 현업에서 경쟁이 그만큼 치열해진다는 뜻인데, 과연 일하면서 재취업 준비가 가능할까라고 반문했다.
김모(47)씨는 재취업을 위해 자격증 등을 따면 좋다고 하는데, 선배들 중에 자격증 따서 재취업했다는 사람 한 명도 못 봤다고 말했다. 자격증이 일자리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고용지원 관련 공공서비스기관 직원 1명이 담당하는 국민 숫자를 보면, 한국(8,199명)이 일본(2,217명)의 4배, 영국(405명)의 20배에 달한다. 그만큼 사회적인 지원시스템이 미약하다는 말이다. 기업 중에서도 KT·삼성 등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은퇴자 재취업 지원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곳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