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학교 학생들 잡지에 청탁받은 원고입니다. 글이 길고 지루해서 올릴까 망설이다가 윤혜철회장 노고에 빚갚는 기분으로 올렸습니다. 그래도 읽어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박인기 백
‘애모(愛慕)’를 위하여
‘애모(愛慕)’란 문자 그대로 ‘이성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온 마음과 정성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애틋하게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애모의 감정은 제삼자가 보기에도 안타깝고, 그래서 때로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문학이나 영화가 이렇듯 애틋한 애모의 사연을 형상화 하는 것은 그만큼 이 주제가 인간의 보편적 공감을 건드릴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애모의 감정이 얼마나 대중에게 호소력 있는 것인지는 대중가요의 영역에서 확실하게 파악된다. 대중가요에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주제의 노래를 제외하면 무슨 노래들이 남을지 궁금하다.
대중가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아예 제목 자체가 ‘애모(愛慕)’인 노래가 두 개쯤 생각난다. 하나는 1960년대에 널리 불리어졌던 가수 한상일의 ‘애모(愛慕)의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1990년대 초반에 크게 히트했던 가수 김수희의 ‘애모(愛慕)’이다. 30년의 세월, 즉 한 세대를 격하여 ‘애모’를 기표(記標)로 하는 가요가 대단한 대중의 인기를 누리면서 등장했던 셈이다. 나 또한 이 노래들을 쉽사리 익혀서 흥얼거려 본 경험이 있고, 노래방에 가면 유행 따라 한두 번 부르게 되는 노래이기도 하다. 두 노래의 일절 가사만 비교해 본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게 꿈같은 구름 타고
천사가 미소를 짓는 지평선을 날으네
구만리 사랑 길을 찾아 헤매는
그대는 아는가. 나의 넋을
나는 짝 잃은 원앙새
나는 슬픔에 잠긴다 <한상일, 애모의 노래, 1965>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너머 우리 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얼마만큼 나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한 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갈 수 없는 사람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요 <김수희, 애모, 1992>
한상일의 노래는 왠지 남성 화자의 목소리처럼 들린다(이 가사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 순정의 청년이 구원의 여인을 향해 간절히 사랑의 마음을 품는다. 하지만 그녀는 청년의 의식 속에서 이미 높고 귀하여 아득히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래서 사랑의 그리움은 한갓 빈 메아리로 돌아오고, 한없는 그리움만큼 매양 한없는 슬픔으로만 확인되는 그런 애모의 감정이다. 선덕여왕을 향해서 품었던 ‘지귀(志鬼)의 애모(愛慕)’라고나 할까.
티없이 맑고 순정하여 도무지 육체적 정욕이라고는 비집고 들 틈조차도 없어 보이는 그런 마음의 공간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총체적인 느낌은 플라토닉 사랑이다. 이런 애모의 모습에서 애절한 짝사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상상력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60년대식 사랑하기의 한 전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 맞아, 그 때는 그런 식으로 애모의 감정을 겪어내었어. 나의 내면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김수희의 노래는 멜로디도 그러하지만 가사 또한 약간은 끈적거린다. 그리고 딱 찍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불온한 냄새도 난다. 우리들의 통념적 윤리에 비추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 노래의 화자는 여성 화자로 명시되어 있다. 어떤 여성이 오래도록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어 온 남자를 명실공히(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소유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한스러운 애모의 정을 노래한 것으로 느껴진다.
이 노래에서 플라토닉 사랑의 흔적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라고 강변하는 대목에 가면 상대에 대한 강한 소유욕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한다고 그랬지만, 침묵의 현실적인 이유는 우리의 사회 규범이 용납하지 못하는 사랑 때문이지 않을까. 자꾸 그렇게 읽혀진다. 나만의 오독일까? 그래서 이 노래에서는 어떤 치정(癡情)의 분위기까지도 연상하게 된다.
김수희의 ‘애모’를 이런 식으로 상상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상일의 ‘애모’와 대비해서 보면 그런 느낌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게 든다는 것을 굳이 부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순정은 바람직한 것이고 치정은 고약한 것이라는 계몽의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치정이라는 것 또한 우리 내면의 리얼한 실재라는 점에서 딱하고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딱하고 안타까운 것을 조금만 물러서서 보면 삶의 풍경이 가지는 슬픈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치정 또한 우리들 내면의 부끄러운 실재이기 때문이다. 김수희의 노래에 나타난 화자의 정서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내면의 리얼한 실재가 아니라면 이 노래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우리들은 내면으로 순정을 꿈꾸기도 하고 치정의 상상력에 휘말리기도 하는 것이다. 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치정을 굳이 남녀 상열(男女相悅)의 정황에서만 보라는 법은 없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등 우리들 삶이 살아가는 곳곳마다에서 우리는 치정 같은 삶을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가. 그런 사실조차도 불감증으로 인해 느끼지 못하고 있음 그 자체는 또 치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상일의 ‘애모(愛慕)의 노래’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쯤에 유행했던 노래이고, 김수희의 ‘애모(愛慕)’는 내가 마흔 고개를 넘어서서 만나게 된 노래이다. 내 인생 또한 그런 순정기와 치정기를 나이 따라 세월 따라 겪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영역이야말로 순정과 치정이 매양 넘나드는 곳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인간의 행위 속에는 가히 천사적인 것에서 악마적인 것 모두가 들어 있는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이른다. 곱고 순수한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삶의 각질 속에 들어 와 박히는 사랑의 실재에는 치정 같은 얼룩들이 묻어난다. 때 묻은 사랑의 지평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을 두루 포괄하는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때 묻은 지평이 스무 살 시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우리들 삶의 모순이 있다. 그 모순 때문에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던가. 아니, 그런 모순을 발견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의 때 묻은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는지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면 잠시 누구에게나 넉넉하게 너그러워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된다.
달리 생각하면 두 노래의 차이는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방식의 차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사랑의 현상이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사랑의 현상 자체는 60년대나 90년대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니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시대에 따라 사랑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랑의 어떤 단계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지? 사랑의 어떤 대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지? 사랑의 어떤 부분이 더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보는지? 이런 것들이 달라지는 것이지, 사람들의 사랑 행태가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상일과 김수희, 두 가수의 노래 사이, 그 30년 세월 사이에는 분명히 애모의 변화가 있었다. ‘은근한 애모’에서 ‘당당한 애모’로의 표정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당당한 애모’에는 ‘애모’라는 단어를 쓰지 말고 왠지 다른 이름의 말을 지어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
애모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