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현감 조창문 타루비
현감 조창문의 타루비는 봉덕정 입구에 선정비 群에 있다.
조창문의 선정비는 사진 촬영을 2016년에 한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사진을 찾아보니 없어 시간을 내어 재촬영한 碑이다.
비의 각자는 ‘縣監趙侯昌門遺愛墮淚碑’라 되어 있고, 뒷면에는 ‘甲寅三月日□成’이라 되어 있다.
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창문의 구례현감 재임 기록을 찾아보니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는 구례현감으로 부임한 기록이 보이지 않았다.
1657년에 감찰에 제수된 기록이 승정원 일기에 보이는데 이게 마지막 관직 기록이다.
그러나 허목 선생의 문집인 『미수기언』 38권에 구례현감 조창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기언 제38권 원집- 동서기언(東序記言)
강승지(姜承旨) 유사(遺事) 부(附) 조인의(趙引儀)
- 중략 -
조충남(趙忠男)은 그의 조상이 한양인(漢陽人)으로 조문정공[趙文正公 문정은 조광조(趙光祖)의 시호] 형제의 자손이라 한다. 몸을 깨끗하게 가져 더럽히지 않고 세상에 은둔하니 세상에서 아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이 문충공이 마음으로 서로 허여하여 공을 일컫기를,
“고행(高行)으로 세상에 은둔한 사람이다.”
하였다. 벙어리를 칭탁하고 남과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사람의 선악‧사정(邪正)‧득실을 일체 눈을 찌푸리거나 웃음으로 표시하였는데, 그가 눈을 찌푸렸던 사람은 후에 하나같이 모두 패하였고 그가 웃어 준 사람은 모두 영예(令譽)로 끝을 맺었으니, 그 또한 기이한 일이다. 일찍이 벼슬하여 인의가 되었으나 버리고 떠났다. 강승지보다 10년 연장이라 한다. 그의 사적은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고, 강승지의 탄금(彈琴)을 두고 읊은 절구 한 수가 있는데 강석무(姜碩茂)가 그것을 외고 있다.
아들 조이첨(趙爾瞻)은 의금부 도사가 되었고, 손자 조창문(趙昌文)은 지난해에 구례 현감(求禮縣監)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필자로써는 많은 의문을 가진다.
갑인년(1614년)에 벼슬한 것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타루비가 임기 중에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이 1614년에 별세하였는지 추정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타루비를 하나 더 찾았다는 것에 만족을 하며, 현감 조창문의 타루비는 기록이 많이 없는 관계로 영원한 숙제로 남겨 놓는다.
앞에 나열한 타루비 외에도 부산에는 2좌의 비가 있지만, 필자가 직접 가서 비를 확인한 결과, 현산의 돌이라는 표현밖에 보이지 않아서 이번 목록에는 제외시켰으며, 강원도 양양에 있는 양양부사 이상일의 선정비도 자료에는 타루비라 하였지만 필자가 직접 가서 확인하니 ‘타루’라는 명문이 없었지만 이상일 부사 선정을 많이 베풀었기에 공덕비를 세운 것인데 많은 선정비들 중에서 왜 이상일 부사만 타루비라 하였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비의 명칭을 정하는 데 있어서 墮淚, 下馬 등의 용어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모든 비를 타루비가 할 수 없으므로 선정비 명문에 ‘타루’라는 명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타루비의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춘향전』에 타루비라는 글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 나오는 내용이고, 『춘향전』의 무대인 남원 광한루에 타루비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소설이라도 광한루에 타루비가 있으면 글을 썼을 것이다.
벼슬아치의 평가를 碑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만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운데, 그 이유는 수령의 통치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에도 조선 말의 유학생인 타루비는 박유굉은 1882년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도일하여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 그 뒤 국가에서 들어오라는 명이 있어 갈등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 자살을 하였는데 나중에 같이 간 유학생 친구들이 그의 묘비에 타루비라는 명문을 새겼다.
타루비 중 외국에 있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되고, 연천에 파평윤씨 참회타루비가 있지만
2005년에 제작되었기에 여기에 목록에 제외시켰다.
북한에도 타루비가 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보긴 어려운 것이여서 생전에 보기를 희망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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