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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5년 09월 09일 수요마음공부방
<정전 – 일원상의 진리 3>
설법 : 박세훈 교무님
타이핑 : 한지훈
오늘은 일원상의 진리 세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일원(一圓)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진리와 우리와의 관계)
두 번째 시간에는
“대소 유무(大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로서” (내용 – 비어있다)
일원상 진리의 세 가지 속성 중 비어있는 속성에 대해서 공부했죠.
오늘은 일원상의 세 가지 속성 중 밝은 속성과, 조화로운 속성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봉독해보겠습니다.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밝은 속성)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 자재(隱顯自在) 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조화로운 속성)”
먼저, 일원상의 밝은 속성에 대해서 보면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한자 그대로 보면, 빌 공, 고요할 적, 실령스러울 영, 알지 자입니다. 비고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공적 영지입니다. 비어있는 가운데에 소소영령하게 아는 것이 지혜 또는 진리의 광명이라고 합니다. 어찌되었던 아는 것이죠. 비어 있되, 신령스럽게 아는 그것. 좀 더 쉽게 설명해보면 두 가지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하나는 나무에 거름을 준 그림, 하나는 호수에 새가 떠다니는 그림입니다.
안다는 이것은 사람만 아는 것은 아니죠. 나무도 압니다. 나무에게 거름을 주면 거름인 줄 아는 것 또한 공적 영지입니다.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는 한 생각 또한 공적 영지입니다. 이런 알음알이는 우리 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이 알고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천지의 식(識)도 공적 영지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우주 자연, 천지는 정확한 때를 알아서,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닌데, 봄에서 여름이 되고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가을에서 겨울로 변화하는 걸까요. 때를 아는 것이죠. 주체는 없지만 정확하게 운행하고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살면서 사계절 중에서 하나라도 사라진 적 있나요? 한 번도 없죠. 너무나도 확실한 것이라서 의삼하지 않죠. 그것도 천지의 식이 들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운행되는 거죠. 그것이 공적영지의 광명입니다. 천지라는 실체가 따로 없어도 묘하게 알고 사시 순환을 하고 있는 것이죠.
- 분별(分別):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름
“마음이 분별나면 식이다” - 정산종사
- 대소유무의 분별: 크다 작다 있다 없다에 대한 구별
- 업보(業報): 행위(업業, karma)의 결과(보報, vipaka)로서 받는 것
선, 불선, 선악미정 無記-> 선악업보에 차별
광명(마음) -> 분별(경계) -> (중생과 부처의 갈림길) -> 행위(업) -> 결과(보)
여기서 대소 유무는 사리연구에 나오는 대소 유무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뭔가를 구별하는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뜻하죠. 공적 영지, 즉 아는 것을 따라서 구별이 생겨요. 짠 것을 먹거나, 달콤한 것을 먹거나. 계절이 변하면서 선선해 진다거나. 이러한 분별이 나타나고, 그것에 인해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요. 업보는 행위과 결과를 합친 단어에요. 업보, 인과. 그런데 왜 그냥 업보가 아니라 선악 업보라고 하였을까요? 업이라는 것의 특성 때문입니다. 업은 크게 선, 불선, 선악미정(무기無記)로 나뉩니다. 차별이 생기기 위해서는 선이거나 악이거나, 둘 중에 하나의 업을 지어야 합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은 과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악 업보’라고 지정한 것입니다. 이제 순서를 봅시다.
광명이라는 마음이, 대소유무의 분별이 나타나는데,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요란하게 하는 것만 경계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내 육군동작을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다 경계입니다. 분별 이후에 이제 차별이 생깁니다. 중생과 부처의 갈림길이 생깁니다. 중생은 경계를 대함에 습관과 업력에 끌려요. 그래서 악업을 아무래도 많이 짓겠죠. 그런데 부처는 경계를 당해도 습관과 업력 없이 진리 그대로 순하게 바랍니다. 부처는 물들지 않아요. 자성을 회광반조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경계를 보면 물들어요. 이 컵에 콜라가 차 있다고 생각해보면, 부처는 이것을 보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것은 콜라라고 분별할 수 있어요. 중생은 이것을 보고 콜라 먹고싶다, 공부방 끝나고 사먹어야지, 이렇게 습관과 업력에 따라서 행위가 이루어지죠. 부처는 아, 콜라구나, 하고 끝입니다. 경계에 끌려가지 않아요.
그런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수심결 16장이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나의 분상에 있어서는 어떠한 것이 이 공적 영지의 마음(광명)이오니까?”
“네가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이 너의 공적 영지의 마음이니, 어찌 반조해 보지 못하고 오히려 밖으로 찾는가”
“아침으로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열 두 때 가운데 혹 보며 혹 들으며 혹 웃으며 혹 말하며 혹 성내며 혹 기뻐하며 혹 옳다 혹 그르다 하여 가지가지로 베풀어 행하고 운전하나니, 말하여 보라 필경에 이 누가 능히 이렇듯 운전하고 베풀어 행하게 되는고”
- 수심결 16장
즉, 지금 제 강의를 듣고, 보고 있는 것이 공적 영지의 광명입니다. 밖에서 따로 찾지 마십시오. 찾으려는 그 마음이 도둑입니다.
공적 영지의 광명을 가릴 수는 있어도 떠나거나 작용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十方三界)가 장중(掌中)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말과 글과 이름과 모양(인식수단)이 뚜렷하여. 앎이 분명하여 이무애사무애(理無碍事無碍)
- 시방삼계: 시방은 전 우주의 공간적인 표현,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곧 우주전체를 의미
- 시방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우주전체가 손 바닥 안의 구슬같이 드러나고, 공적영지의 광명이 우주전체에 비치지 않는 바가 없다.
명은 이름, 상은 모양이에요. 우리는 인식을 말, 글, 모양으로 하는데 완연하다는 것은 이것이 뚜렷하다는 거죠. 내가 아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이무애사무애라고 합니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완연하다. 어디에도 걸림이나 막힘이 없어서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나는 것. 있는 그대로 보기가 참 어려워요. 시방삼계. 시방은 열가지 방향이라는 뜻이죠. 팔방하고 상하, 십방. 욕계는 욕심에 끌려서 사는 세계, 색계는 형상에 집착하는 색계, 무색계는 형상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방삼계는 공간적, 시간적으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가 내 손바닥 안에 구슬처럼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거에요. 공적 영지의 광명이 뚜렷하고 밝아요. 원래 이치에도 걸림이 없어서 우저 전체가 손바닥처럼 보이는 거에요. 하나를 아는데 전체가 통한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이치를 알면 우주가 드러난다. 이치라는 것은 통하거든요.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대종사님은 이것을 영통(靈通), 도통(道通), 법통(法通)이라고 하셨어요.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공부가 최상 구경에 이르고 보면 세 가지로 통함이 있나니 그 하나는 영통(靈通)이라,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아니하여도 천지 만물의 변태와 인간 삼세의 인과 보응을 여실히 알게 되는 것이요, 둘은 도통(道通)이라, 천조의 대소 유무와 인간의 시비 이해에 능통하는 것이요, 셋은 법통(法通)이라, 천조의 대소 유무를 보아다가 인간의 시비 이해를 밝혀서 만세 중생이 거울하고 본뜰 만한 법을 제정하는 것이니, 이 삼통 가운데 법통만은 대원 정각(大圓正覺)을 하지 못하고는 얻을 수 없나니라.]
- 이치는 배워서만 아는 것이 아니다
- 하나를 알면 다 아는 이치가 있다
그런데 일원상의 진리를 다시 읽어보면, 일원상의 비어있는 속성에는 예시를 4가지 들지만 일원상의 밝은 속성에는 예시가 3가지밖에 없죠. 무엇이 빠졌나요?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가 빠졌어요. 왜 그럴까요? 정산종사 법어에 그 힌트가 있어요.
[진공과 묘유 그 가운데 또한 만법이 운행하여 생멸 거래와 선악 과보가 달라져서 드디어 육도 사생으로 승급 강급하나니 이는 곧 일원의 인과(정산종사)] -> 진공묘유의 조화
일원이 비어있고 밝고 조화로운 속성 중에서 조화로운 속성은 인과에요. 인과는 생멸거래이죠. 그래서 공적 영지의 광명에 따라서 없는 것이에요. 진공묘유의 조화 쪽에 포함되기 때문에 밝은 속성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일원상의 세 번째 특정 조화로운 것에 대해서 공부해봅시다.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無始曠劫)에 은현 자재(隱顯自在) 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 진공 묘유의 조화: 돈공한 가운데 묘하게 나타나서 생성 변화하는 진리의 작용. 음양상승, 인과의 변화
- 무시광겁: 무한한 시간
- 은현자재: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스스로 숨었다 나타남. 인因(은隱) 연緣(시공時空) 과果(현顯) 자재: 함이 없이 되어짐
- 일원의 조화가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인과로 변화한다.
- 대타적(상대적) 심신작용 -> 사은 + 시간 = 자인타과
- 대자적(독자적) 심신작용 -> 자기 + 시간 = 자인자과
우주를 생멸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진공 묘유의 조화입니다. 그래서 음양상승의 이치고 인과의 변화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볼까요. 아까 나무가 거름을 아는 것은 공적 영지의 광명이라고 했죠. 그 거름을 흡수하면 그것이 진공묘유의 조화입니다. 또 다른 예시로, 경계에 따라서 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공적 영지의 광명이죠. 그 다음에 심신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진공묘유의 조화입니다. 인과 이치에 따라서 작용하겠죠?
그러면 진공묘유의 조화와 공적영지의 광명은 어떻게 다를까요? 비료가 비료인 것을 아는 것은 공적 영지의 광명, 그 비료를 흡수하는 것이 진공묘유의 조화이죠. 전기가 있는데 전등으로 가서 빛이 나는 것은 공적 영지의 광명입니다. 전기가 선풍기로 가서 동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진공묘유의 조화입니다. 전기는 하나인데, 빛과 동력 두가지로 나타날 수 있어요. 일원상의 진리라는 것은 밝은 측면으로도 나타나고, 조화로운 측면으로도 나타납니다. 천지가 사계절로 나타나는 것, 그 시기와 때를 아는 것이 공적 영지의 광명입니다.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아는 것은 광명이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그 실체는 진공묘유의 조화입니다. 모든 것이 같이 이루어져야 해요.
은현자재에서 ‘은’은 원인, ‘현’은 드러나는 과 이고, 그 가운데 연이 있어요. 인을 심으면 바로 과가 나오지 않아요. 그 시공이라는 것을 연이라고 합니다. 숨었다가 나타나는 것인데, 숨은 것이 인이고 나타나는 것이 과에요. 즉 은현자재는 인과 과가 스스로 그렇게 자동적으로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다 연결해서 설명해보면, 일원의 조화가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음양상승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대타적, 대자적으로 구분될 수 있어요. 대타적은 내가 인을 심었는데 그것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쳐요. 그러면 과가 되는 것은 타인에게 달려 있어요. 대자적은 독자적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나한테 심은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적공. 내가 수행한 만큼 내가 받는 것이죠. 수행한 만큼 결과가 나타나는 것. 이것들이 다 진공묘유인 것이에요.
정리해 볼까요?
비었다 (돈공) | 밝다 (광명) | 바르다 (조화) |
- 진공의 체성 - 천지미분 - 공 - 대 - 법신 - 무소부재 | - 묘유의 상모 - 삼라만상 - 원 - 소 - 보신 - 전지 | - 인과의 변화 - 음양상승 - 정 - 유무 - 화신 - 전능 |
이 세 개는 떨어져 있지 않아요. 물의 속성을 나눌 수 없듯이 진리도 이 세가지가 함께 돌아가요.
그래서 어쩌자는 걸까요?
이것이 다음 시간에 배울 일원상의 진앙과 순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일원상의 진앙과 일원생의 수행] -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
- 일원상의 진리의 속성인 “비었다. 밝다. 조화롭다”에 순응하고 불공하여 위력을 얻는 것이 신앙이고 (진리불공, 실지불공, 합리적 불공)
- 일원상의 진리의 속성인 “비었다. 밝다. 조화롭다”에 합일하여 체받는 것이 수행입니다.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
비어있는 속성에 신앙하는 것이 진리불공, 밝은 속성에 하는 것이 실지불공, 조화로운 속성에 하는 것이 합리적 불공입니다.
비어있는 속성에 수행/합일하는 것이 정신수양, 밝은 속성에 하는 것이 사리연구, 조화로운 속성에 하는 것이 작업취사입니다.
하지만 이 세가지가 떨어질 순 없죠. 정신수양 없이 사리연구 할 수 없고, 사리연구 없이는 작업취사 할 수 없어요.
다음시간에 더 자세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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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지훈 교우님 고생하셨어요!!!
은혜롭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