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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는 제나라에 비하면 강대국이었다.
그는 안영의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막말을
했다
어찌 그대 같은 사람을 매번 사신으로 보낸단 말이오?"
그러나 안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그런데 저희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낼 때 현명한 나라에는 현명한 사람을 보내고
우매한 나라에는 우매한 사람을 보냅니다.
마치 자기가 재상이라도 된 듯 기세등등하다고 흉을 보는 것이었다.
"안영 어른은 키가 6척도 안 되지만 재상으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안 하게 생겼습니까?
난 이제 그만 한심한 사람과는 같이 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 말이 맞소, 다시는 안 그럴 것이니 용서해 주시오."
그곳 경비원과 차를 주차시키려는 운전자 사이에 시비가 붙은 경우가 많다.
삐까번쩍 외제차를 몰고왔을 가능성이
높다.
나도 당신 같은 자식이 있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야!"
상대방의 외형이나 직업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자기자신도 그런 허세와 위선의 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동이
바로 안영의 마부 같은
허세이다.
마치 자기가 그런 위치에 있는 듯이 행세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제 잘난 맛에 사는 것도 꼴불견인데 남의 권세를 등에 업고 설치는 꼴은 더 못 봐주겠다.
그나마 마부는 나은 사람이다. 그는 아내의 지적에
남에게 피해주는 일도 없으며, 남에게 지는 법도 없다.
"주민 반대에 막힌 사이판 공장… '하수도 건설'로 民心 잡아"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의 '사이판과 현지화']
사이판 진출 3년 만에 공장 세워
"현지화는 나의 시각이 아니라 현지인 시각서 문제 찾는 것"
베트남 법인장 등
임직원들 현지 근로자 경조사 참석하고
인근 고교에 장학금까지 전달… 베트남 공장, 최대 수출 기지로
스물일곱 살이던 1972년 의류 수출 사업에 뛰어든 뒤
지금까지 40여년간 수많은 고비를 넘겼다.
부도도 맞아봤고, 백수 생활도 해봤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사이판에서 겪었던 일이다.
1980년대 중반 나는 일생일대의 벽에 부닥쳤다.
당시 나는 1979년 부도를 맞고 넘어져 3년 뒤 재창업해
한창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중이었다.
회사를 키우려면 인건비가 낮은 해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
사이판에서 공장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사이판은 한국에서 당시 존재했던 쿼터(수출 할당)도 없었고
관세(關稅)도 매기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사업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문제는 현지 주민들이 '공장 건설 반대'를 부르짖으며 들고일어났다는 점이었다.
정부의 공장 설립 허가를 받고 나서 직원 몇 명이
선발대로 가서 생활하고 있었고,
이미 공장 터와 건설 업체 계약까지 끝나
건설 자재를 모두 사이판에 갖다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공장 터 인근 주민들이
"이곳에 죽어도 공장을 지을 수 없다"는 시위를 벌였다.
주민들이 극렬하게 반대하니 '설립' 허가를 내줬던 사이판
정부도
'사용' 허가는 내주지 못하겠다는 이상한 논리를 대며 말을 바꿨다.
허가를 얻으려면 주민 청문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때 상황으로는 모두 반대할 것이 확실했다.
사이판 정부 사람들과는 열심히 만나면서 관계를 맺었지만,
정작 함께 생활하고 일해야 할 현지 주민들을 놓치고 있다가 생긴 일이었다.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갔다.
공장 설립을 위해 가져온 철제 등 건축 자재들은 녹슬기 시작했다.
해외 진출 꿈에 부풀어 야심 차게 준비했던 사이판 공장 설립이
엉망이 되자 속이 타들어 갔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사이판을 잘 알고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어렵게 주민들을 만나 "공장 주변 환경을 가꾸겠다"
"주민들을 위한 농구장을 지어주겠다"고 설득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공장 터 주변에는 하수도가 없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
그때만 해도 사이판 일부 지역은 체계적인 하수도 설비가 없었다.
집마다 땅을 파서 모래와 자갈을 채워 넣은 자체 정화조에 모든 하수를 버렸다.
비위생적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넘어갔는데,
문득 '하수도를 건설해주겠다고 제안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제안을 했더니 수십 가지 제안에도 꼼짝하지 않던 주민들이 이번엔 반응을 보였다.
주민 대표와 만나 가까스로 타협안을 만들었다.
타협안을 만들자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사이판에 거주하던 한인 건설업자가
"하수도를 만들 수 있다"며 나서 일을 맡겼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서도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 건설업자는 하수도 건설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결국 같이 가 있던 직원 5명과 함께 두 팔을 걷고 삽을 들었다.
당시만 해도 건설의 '건' 자도 몰랐지만 '절실함' 하나만 갖고 매달렸다.
한국에 전화해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고
어렵게 수소문해 비슷한 공사를 해본 현지인도 채용했다.
하수관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고 엉뚱한 땅을 팠다가
다시 덮기를 얼마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더디기는 했지만 결국 공장 인근에 약속대로 수㎞짜리 하수관을 설치했다.
하수도를 완성한 뒤 주민과 정부의 허락을 얻어 공장 가동을 시작한 것은 1988년 말이었다.
공장을 바로 세우려고 1986년에 사이판에 갔지만 거의 3년이 걸린 것이다.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그렇게 공장을 지은 1988년부터 1998년까지 10년 동안 회사는 전성기를 누렸다.
더 중요한 것은 사이판 진출에서 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배웠다는 점이다.
바로 '현지화는 나의 시각이 아니라 현지인 시각에서
절실한 문제를 찾고 해결하려고 애쓸 때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니카라과·과테말라·중국·캄보디아·베트남·미얀마에도 진출했다.
사이판에서 워낙 호되게 고생한 경험이 있는 터라 이 경험을 밑거름으로
다른 국가에서는 진출 초기부터 '현지 민심 잡기'부터 시작했다.
"난 당신네 나라에 투자했다"고 큰소리치는 식이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인간적 차원에서 겸손하게 접근하는 기업 문화를 만들어 가는 데 주력했다.
이런 원칙이 잘 적용돼 있는 곳이
베트남이다.
베트남에서 우리 직원, 법인장을 비롯한 임원은 일반 생산직 근로자 결혼은 물론
조문, 장례에까지 무조건 참석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또 공장을 짓자마자 인근 7개 고등학교 모두에 장학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고
지금까지 학교마다 30명씩 총 210명에게 매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가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장학금까지 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베트남 정부와 지역 정부도
한세실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이 덕분에 한세실업 베트남 공장은 한세실업 최대 수출 기지로 성장했다.
나는 사이판의 경험이 지금의 우리 회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 달이면 반 이상을 세계 각지 직원들과 함께
밥 먹고, 조깅하고, 안부를 묻는 데 쓴다. 물
론 각 나라의 성향에 맞는 그들의 언어로 말이다.
☞김동녕 회장은
누구?
김동녕(金東寧·69)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MBA를 마치고 귀국해
1972년에 의류 수출 업체인 한세통상을 창업했다.
하지만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자금이 막혀 부도를 맞았다.
3년 뒤인 1982년 한세실업을 창업해 재기했으며,
이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과 제조자개발생산(ODM)으로 회사를 키웠다.
2003년에 예스24를 인수했고, 한세실업과 예스24의 노하우를 활용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온라인 쇼핑몰을 선보였다.
"은퇴때 헬기 동원 생중계했던 '라멘神'의 마지막 말"
('다이쇼켄' 창업자 야마기시, 지난 1일 심부전으로 타계)
일본 '라면 神'이 마지막 남긴 말 "어서옵쇼, 특제 메밀국수입니다"
소스에 찍어먹는 라면 元祖
독립한
100여명 제자들에게 로열티 안 받고 상호 내줘
2007년 현업서 은퇴할 때는 방송국, 헬기 동원 생중계도
'라면의 신(ラ一メンの神樣)'이라 불리던 여든 노인이
지난 1일 도쿄 시내 병원에서 지병인 심부전으로 타계했다.
자식도 없고 부인도 먼저 세상을 떠나, 제자들이 병상을 지켰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세 마디가
"어서 옵쇼, '특제 모리소바'(메밀국수)입니다.
감사합니다"였다는 기사가 NHK 방송과 요미우리 신문에 났다.
특제 모리소바는 노인이 개발한 대표 메뉴다.
제자들은 "의식이 흐린데도, 계속 라멘 생각을 하신 것 같다"고 했다.
그 기사를 보고 수십년 단골들이 주말 내내 가랑비를
견디며
노인이 창업한 라멘집 본점에 줄을 섰다.
일본 라멘집 '다이쇼켄' 창업자 야마기시 가즈오(山岸一雄)씨 얘기다.
5일 오후 찾아간 도쿄 도시마(豊島)구에 있는
다이쇼켄 본점은 발 디딜 틈 없었다.
일곱 살 아들을 데려온 나오마사 마쓰다(53)씨가
라멘을 기다리며 가게 역사가 적힌 안내문을 아들에게 읽어줬다.
"부음을 듣고, 추억의 맛을 가르치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점원들이 연신 "어서 옵쇼"와 "감사합니다"를 외치는데도
가게 바깥에 20~30명씩 줄 선 행렬이 짧아질 줄 몰랐다.
이 가게는 라면 따로, 소스 따로 담아주는 이른바 '쓰케멘'의
원조다.
2차대전 후 일본 라멘집 종업원들은 하루 일을 마친 뒤 팔고
남은 면을 모아서 메밀국수를 소스에 찍어 먹듯 라면 수프에 찍어 먹었다.
부엌 일 하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후루룩 먹는 거친 음식이었다.
고인은 나가노현 출신으로, 16세 때 돈 벌러 상경해
라면집에 취직했다가 이렇게 먹는 법을 익혔다.
어느 날 손님이 "맛있겠다"고 한마디 했다.
다른 종업원들은 흘려들었지만, 고인은 손님 말을 기억했다가
자기만의 레시피로 만들었다. 대히트였다.
이 가게가 단순히 맛만으로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노인은 자식이 없었다.
대신, 300명 가까이 제자를 길렀다.
"나는 라면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누구하고든 맞는다"고 했다.
호랑이처럼 훈련시켰지만, 그들이 독립할 때가 되면
"나는 자식이 없으니까 제자들이 내 자식"이라면서 로열티 한 푼 안 받고
'다이쇼켄'이라고 적은 '노렌(暖簾·일본 상점 처마 밑에
가게 이름을 적어서 두르는 천)'을 걸도록 허락해줬다.
일본 사회에서 노렌을 내주는 건 '장사의 영혼'을 상속하는 행위다.
그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 차린 가게가
홋카이도부터 하와이까지 100여곳에 이른다.
일본 서민 중에는 "사는 게 고단할 때, 이 가게에 와서
주인장 얼굴을 한 번씩 보고 간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야마기시씨가 한동안 주방을 떠난 적이 있다.
1986년 부인이 위암으로 별세했을 때,
충격으로 가게 문을 닫고 7개월간 칩거했다.
어느 날 가게 앞을 지나다가, 휴점 안내문 여백에
단골들의 메모가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을 봤다.
'오사카에서 왔습니다.' '다시 맛있는 라면을 먹게 해주세요.'
그걸 보고 다시 나와 라멘을 끓였다.
2007년 건강 문제와 도심 재개발로 끝내 은퇴할 때는,
'라멘의 신이 끓여주는 마지막 라멘'을 먹기 위해
마지막 영업일 전날 밤부터 일본 전역에서 라멘 팬들이 몰려들었다.
"5시간 기다렸다"는 사람, "6시간 기다렸다"는 사람, "아오모리에서
야간 고속버스 타고 올라온 시간까지 합치면
총 17시간 걸렸다"는 사람이 속출했다.
끝이 안 보이는 줄을 생중계하느라,
방송국 카메라가 총출동해 헬기까지 띄웠다.
은퇴 후에도 그는 제자들 가게에 나와
"어서 옵쇼, 감사합니다" 하고 웃어 보이곤 했다.
병상을 지킨 제자들은 일본 언론에
"수프 맛에 관한 한 타협을 모르는 분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대청소하십시오"
"말은-아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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