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89년인지 90년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89년같습니다.) 5공비리 청문회가 열린 시기였습니다.
그때 5공의 각 인사들과 정주영회장등 재벌회장들이 청문회 증인으로
나와서 진술을 했는데 노무현이 소위 '뜬'것은 이 정주영회장과의 신문과정
에서 였습니다.
40대의 촌스런 외모의 고졸출신 야당의 초선의원이 대회장인 정주영씨를
논리적으로 몰아붙이며 아주 뛰어난 신문을 벌였죠. 다른 의원들이 깎듯이
대하며 아부하기 바쁜데 노무현은 아주 논리적인 언변으로 그 청문회에서
맹활약, 대스타가 되었죠. 이 청문회 하나로 노무현은 '스타정치인'으로
되어서 여성잡지를 비롯한 이곳저곳에 인터뷰가 실리고, 그의 고졸출신
서민의 성공기가 실리면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 되었죠.
정치인들이 인기를 모으는 것은 어떤 '계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소위 '스타정치인'의 탄생을 보면 과거 수많은 여성팬들을 사로잡았던
'홍사덕'의 예를 보면, 야당의 명대변인시절을 거쳐서 88년 총선에서
낙선한후, '라디오 칼럼'이라는 MBC시사프로를 통해서 구수한 입담을
과시, 낙선후 인기가 두배이상 올랐습니다.
홍사덕과 비견될 대중정치인으로는 박찬종씨가 있는데 그는 87년
양김후보단일화에 반발 삭발하고 '나는 이제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책으로 서릿발같이 양김을 비판하여 인기를 모았고, 92년 대통령
선거에는 맨주먹으로 출마하여 바바리코트로 전국을 누비며 연예인이나
아나운서를 훨씬 능가하는 세련된 '연설솜씨'로 인기가 폭발했었습니다.
노무현도 이들처럼 '매스콤'에 의하여 스타가 된 정치인이긴 하지만
조금 다르죠. 홍사덕 박찬종이 세련된 외모와 학벌,학식, 그리고
능수능란한 대중성을 바탕으로 인기를 모은 정치인인 반면,
노무현은 투박함과 소탈함(일단 외모에서 그다지 세련되지 못했죠.)
서민적이미지, 그리고 때론 '과격'한 듯한 행동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으로
어필했었죠.
이 5공청문회와, 이어 열린 광주청문회는 소위 '청문회스타의원'을
탄생시켰는데 그 선두주자가 노무현이었고, 김광일의원(그 영도다리
발언한), 김동주의원, 박찬종의원, 이해찬의원, 이철의원등이
청문회를 통해서 스타가 된 정치인이고, 요즘 노무현과 대립하는
경쟁자인 '이인제'도 역시 이 청문회 출신입니다.
(다만, 이인제는 위에 열거한 의원들에 비해서 그다지 뜨지는 못했죠.)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납니다. 노무현이 현직의원일때이니
90년이나 뭐 그 전후라고 봐야죠. 5공,광주청문회 훨씬 이후의 일이죠.
전직대통령인 '전두환'이 청문회에 호출되는 '초유의 역사적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생방송을 지켜보았죠.
노무현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은 과거에 주장했던
형식적인 발언만 되풀이하고 미리 준비해온 원고만 읽고, 자기는 별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여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청문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야간 몸싸움이 일어났고, 전두환을
자리를 피해서 단상에서 내려와서 떠나버렸습니다.
결국 전두환이 떠난고 단상은 빈자리로 남아버렸고, 청문회는
휴정이되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아마 자정이 거의 되었을 것입니다.)
온국민이 지켜보던 생방송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죠.
그때 노무현은 빈 단상을 향해서 국회의원 명패를 던져버렸습니다.
(이 명패던지는 모습은 TV에 방영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여당에서 꼬투리를 잡고 노무현은 나와서 사과를 해라 하고
밀어붙였습니다.
다시 생방송이 이어지고 노무현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국회단상에
나왔습니다. 여당에서는 그가 명패던진것에 대한 사과를 하려는줄
알았죠.
노무현은 차분한 그렇지만 비통한 음성으로 국민에게 연설을 했죠.
(이날 이 연설이 정말 노무현을 빛나게 해준 명연설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것도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되었으니)
노무현은 정말 국민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명패를 던진것에 대한 사과가 아니었습니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즉 전두환을 불러놓고 아무런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그런 망가지는
국회의 모습을 보여준것에 대한 사과와 한계,회의를 느낀것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했죠.
그래서 자신이 국회의원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명패를 버린 것이고,
이 명패를 던진것에 대한 행동에 대하여 여당에게 사과할 뜻은 추호도
없다고 했고, 이 문제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자신은 더이상
국회의원신분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다고 말했죠.
즉 청문회에서 국민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실망시킨것에 대해서
분명히 사과했지만, 전두환을 옹호하는 여당에 대해서는 추호도
사과할 생각이 없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타협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죠. 마치 울분을 토하는 듯한, 그의 발언과 연설에서는
현실정치의 한계에서 체념한 초선의원의 진솔함이 담겨 있었죠.
이것이 바로 소위 '노무현 명패사건'입니다.
이걸 가지고 '노무현이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졌다'이렇게 왜곡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꼬마민주당은 거대여당인 노태우의 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하여 야권의
힘을 모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의 평민당과 합당해서
야권통합을 이루었죠.
92년 국회의원선거, 95년 부산시장선거에서 노무현은 김대중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연거푸 낙선했습니다.
김대중의 정계복귀이후, 노무현은 그 행위를 비판하고 반대하였죠.
그러자 김대중은 동교동계와 지지의원들을 데리고 '뛰쳐나가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만들었죠.
결국 다시 '꼬마민주당'이 되버린 노무현, 이철등은 비장한 각오로
96년총선에 나섰고, 수도권에 대거 출마했죠.
여기서 노무현은 정치1번지 종로에 출마했는데 여당의 고정표는
이명박이 가지고 갔고, 30%에 달하는 호남고정표는 김대중의 공천을
받은 이종찬이 가지고 가서 3위에 그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때가 노무현의 정치생활 최대의 위기였죠.
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90년 3당합당과 비견되는 희안한 일이
또 발생했습니다. 민주화운동출신과 개혁야당인사들로 집합되었다고
할 수 있는 '꼬마민주당'이 난데없이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으로 탄생했죠. 정말 희안한 일이었죠.
김용갑, 정창화, 최병렬, 정형근, 양정규, 하순봉, 박희태등
5,6공 인사들로 포진된 전두환 노태우의 후손이랄 수 있는 한나라당에
재야출신, 운동권출신인 이부영, 제정구, 이철등이 손을 잡은 사건이었죠.
결국 정치적 소신을 지킨 노무현은 오갈데없는 '왕따'를 당한셈입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은 결국 '정권교체'를 위해서 다시한번
야권통합을 위해서 함께 남았던 김원기의원과 함께 김대중후보를
지지하게 되죠. 거기에 DJP연합까지 해서 극적으로 민주당의 김대중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노무현의 도움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극적인 상황으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고, 98년에 이명박이 선거법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자,
노무현이 보궐선거에 공천되어 큰차이로 당선됩니다. 6년만에 비로소
국회의원 배지를 되찾게 되죠.
2000년 다시 총선이 열립니다. 종로지역구 의원인 노무현은 일찌감치
'부산출마'를 선언하고 정치적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갑니다.
민주당 깃발로 부산에서 출마하여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였죠.
여론조사에서 계속 앞서던 노무현은 선거 막판에 허태열후보의
지역감정 선동발언으로 다시 낙선하게 됩니다.
노무현은 '젊은층'에게 지지받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의 강력한 지지층은 30,40대 중장년층이 정확합니다.
즉 저항의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주를 이루죠.
광주폭거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집단출신의 '5,6공인사'들과의 정치적
타협이나 야합을 끝까지 거부하고 정치적 소신을 지킨 거의 유일한
'영남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노무현에게 가려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김정길전의원'도
부산지역구의원으로 계속 소신된 행동을 했죠.)
즉 '청문회세대'가 아닌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은 사실 노무현에 대해서는
주워들어서 얻은 사실외에 실제 그가 정치판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많이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연하죠. 그는 맨날 낙선해서 국회에서
정치를 많이 하진 못했으므로)
노무현에 대해서 가장 잘 알수 있는 것은 강준만교수가 지은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란 책을 읽어보면 가장 많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노무현은 특유의 투박함과 소신있는 행동으로 인기를 얻은,
'쇼맨십과 외모'에 의해서 떠오른 '홍사덕' '박찬종'과는 대비되는
보기드문 한국의 정치인이죠. 요즘 부는 '노풍'의 진원지는 90년의
5공청문회와 3당합당거부에서 '뿌리'가 내린 오랜 세월의 결과이지
'반짝'바람이 아닌것입니다. 노무현은 박찬종이나 이인제처럼
'이미지'로 먹고사는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