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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주재배 농부들의 둥지 개마고원 원문보기 글쓴이: 개마고원
먹이의 진실12 – 씨저의 것은 씨저에게, 물은 모두에게(1)
사흘 동안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꽤 뜸했던 참이라 농부들한테는 참으로 단비였지요. 비에 씻긴 하늘이 청청하고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들도 싱싱하게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작년 60일이 넘게 이어졌던 질긴 가뭄이 기억에 생생해서 올해도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마춤하게 내려주는 비만큼 농부들에게 고마운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이제 곧 망종이니 남쪽부터 어린 모들이 논에 가지런히 깔리겠지요. 벼가 자라나는 푸른 들이야말로 시골 풍경 중의 압권이라 할 만 합니다.
비야 어디든 골고루 내리지만 시골에 내리는 비와 도시에 내리는 비는 사뭇 다릅니다. 시골의 산과 들은 내리는 비를 그대로 품어 안지만 도시의 빌딩과 아스팔트는 비를 하수구로 밀어냅니다. 산과 들이 품어 안은 비는 개울을 만들고 강을 이루고 천천히 지하의 대수층을 채우며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을 키워내지만 아스팔트가 밀어낸 비는 하수구를 통해 곧장 버려져 아무도 쓸 수 없는 물이 됩니다. 참으로 아까운 일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우리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에 물을 공급하는 단 하나의 원천이기 때문이지요. 수도꼭지에서 나오든, 펌프에서 나오든, 우물에서 길어올리든, 페트병에 담겼든 그 어떤 물도 예외없이 그 최초의 형태는 빗물입니다.
물은 참 여러가지 얼굴을 가졌습니다. 유장한 신화의 모티브이기도 하고 애절한 전설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절실한 기원을 담은 정한수이기도 하고, 문학적 영감의 소재이기도 합니다. 흔들림 없는 한 길로 영혼을 남김없이 사른 김수영의 폭포이기도 하고, 아무 잡티없는 화살이 되어 날아간 신동엽의 강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키우는 젖줄인 반면에 생명을 앗아가는 공포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물이 수자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등장할 때면 떠오르는 햇살에 새벽이슬이 사라지듯 이 모든 낭만은 사라집니다.
지구의 푸르름은 물빛입니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가 그토록 푸른 빛으로 아름다운 것은 물의 존재 때문입니다. 물은 바닷물로, 강물로, 지하수로, 얼음으로, 구름으로, 대기 중의 수증기로, 또 이슬과 서리로, 형태를 바꿔가며 온 지구를 뒤덮고 있습니다. 물은 우주에서 왔다고 하지요. 모든 물질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하니 지구의 물도 언젠가 우주로 되돌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까지 쓸만한 물이 지구에 남아있다면 말이죠.
지구 표면의 70%가 물이라지만 지상의 생명들에게 베풀어진 담수는 그 물의 3%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구에 있는 물의 97%는 바닷물이지요. 게다가 거기서 빙하와 만년설과 지하수를 제외한 지표수는 1%가 채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희귀한 지표수를 이토록 풍부하게 갖고있는 우리 땅이야말로 참으로 복받은 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땅의 맑고 풍부한 지표수는 산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 땅을 여행해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갈피갈피에 부려놓은 골짜기를 따라 물이 흐르고, 그 물길을 따라 사람 사는 마을들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산줄기를 따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큰 마을과 작은 마을들이 알맞게 흩어져 있는 풍경들을 보면 그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에 목이 꽉 메입니다. 바로 그 풍경들이 우리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고유의 정서를 만들어온 근원인 것이지요.
옛날 이야기들을 보면 우리 사람들은 고개를 넘어 마을을 떠나고 고개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옛날 이야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호랑이와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나타나는 것도 고개이지요. 옛이야기 속의 고개란 결국 사람사는 곳에서 가장 멀리에 있는 곳, 그래서 온갖 기기묘묘한 상상이 한껏 펼쳐지는 곳, 사람의 목숨과 운명이 뒤바뀌기도 하는 곳입니다. 바로 그 고개를 따라 흘러와 들을 적시고 강을 이루고 마을을 만들어낸 것이 물입니다. 마을이라는 말도 물에서 나온 것이라지요. 우리 사람들은 사회적인 성공을 일러 “용 되얐다” 고 합니다. 용 중에서도 개천에서 난 용을 최고로 치고, 가뭄을 용의 분노라고 여겼으며, 돼지꿈보다 끗발있는 꿈이 용꿈입니다. 그 용이 사는 곳이 물이지요. 그러니 물이란 또한 성공의 근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적 풍요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고색창연한 금이나 휘황찬란한 다이어먼드일까요? 나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는다는 석유일까요? 자고나면 버전을 바꿔가며 사람들을 사로잡는 첨단 전자기기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 물질적 풍요의 원천은 물입니다. 굳이 4대문명을 거들지 않아도, 멀고 가까운 모든 역사와 현실은 물이 흐르고 고이는 곳에 부도 더불어 쌓였음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생존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의 삶을 풍성하고 편리하게 하는 모든 재화들도 물에서 비롯됩니다. 농축산 식품산업과 섬유 목재 제지산업, 광공업과 금속철강업, 자동차 선박 항공 등 중공업과 석유화학 원자력산업, 전기통신업과 반도체 컴퓨터 전자공업에 이르기까지 물을 대규모로 소비하지 않는 산업은 없습니다. 물을 원천으로 하는 이 어마어마한 산업들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는 엄청난 풍요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들여다 볼까요? 제가 여러 책에서 찾아낸 것들입니다. 커피 한 잔에 140리터, 토스트 한 조각에 40리터, 사과 한 알에 70리터, 달걀은 120리터, 우유 한 잔에 240리터, 베이컨 1인분은 480리터, 햄버거 1개는 2천4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답니다. 맥주호프가 1만1천390리터/kg, 밤이 5천16리터/kg, 콩과 대두가 3천848리터/kg, 메밀이 2천555/kg, 쌀이 2천497리터/kg, 옥수수가 1천222리터/kg, 밀이 988리터/kg인 반면에, 초콜릿이 무려 1만7천196리터/kg 이라는군요. 또 축산물이 곡물보다 훨씬 많은 물을 사용하는데, 쇠고기의 경우 1만7천91리터/kg으로 가장 많고, 치즈가 6천697리터/kg, 돼지고기가 5천988리터/kg, 닭고기가 4천325리터/kg, 밀크·크림이 1천815리터/kg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농축산물의 물사용량은 비교적 자료들이 공개되어 있는 반면에 공업생산품들의 자료는 어찌된 일인지 참 찾기가 힘듭니다. 그나마 찾아낸 것을 보자면 입이 딱 벌어집니다. 자동차 한대를 만드는데 필요한 물이 무려 380톤, 종이 1톤에 250톤, 면사 1톤 표백에 180톤~270톤이 들어가며, 컴퓨터 칩 6인치 실리콘웨이퍼를 1주당 2천개를 생산하는 데는 1만7천톤에 달하는 엄청난 물이 사용됩니다. 자동차, 반도체, 철강 등이 대표적으로 물을 많이 소비하는 산업이라고 합니다. 실감나시는가요?
이쯤 되면 제가 왜 물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언제부터인지 물 이야기가 해일처럼 우리를 덮쳐오고 있습니다. 위기라지요?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달구고 도시의 멋쟁이들을 열광시켰던 와인바 유행이 수그러들더니, ‘워터바’가 럭셔리 포장을 두르고 등장했습니다. 물 소믈리에가 촉망되는 직업군에 오르려 한다는군요. 그런데 물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그것이 우리 삶의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물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을 알면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리 삶의 허황됨을 알게 되고, 우리를 포위하여 눈 멀게 하고 우리를 포섭하여 사고를 마비시키는 기만들을 보게 됩니다.
지구상의 물의 양은 일정합니다. 형태와 장소는 바뀔지언정 총량은 변함없이 그대로이지요. 지구에 물이 존재했던 시간만큼 물은 형태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순환해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물은 어디서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머나 먼 과거의 선조들이 쓰고 복원하고 저장하여 넘겨준 것입니다. 우리는 고조선인들이 마시던 물을 마시고, 고구려인들이 조와 수수를 키웠던 물로 벼를 키우고, 고려인들이 발을 씻던 물로 세수를 하고, 조선인이 국을 끓이던 물로 변기를 씻어내립니다. 물론 다른 대륙에서 온 것일 수도 있지요.
사람이 물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농사를 지으면서부터입니다. 고대인들은 강물의 범람을 이용하고 관개를 사용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습니다. 대규모 관개로 토양의 염류화를 초래하여 몰락한 수메르의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지구의 모든 곳에서 수 천 년을 이어 지속되어온 전통적 농사는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빛나는 성과 중의 하나입니다. 선조들은 범람의 주기를 이용해 물길을 만들어 땅을 관리했습니다. 관개시설을 사용해 사막에도 오아시스를 만들었고, 빗물을 가두어 건기에 대비했으며, 습지를 자연의 질서에 따라 개조하기도 했습니다. 해발 3,300미터의 가파른 산비탈에 천 년이 가도 유실되지 않는 경이로운 계단밭을 만들었고, 해발 3,800미터의 설원에서도 작물을 길러냈습니다. 우기와 건기를 지혜롭게 대비했고, 습한 기후든 건조한 기후든, 더운 곳이든, 추운 곳이든, 자기 지역에 맞는 시설과 농법과 씨앗들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개선하면서 불어나는 인구를 부양해왔습니다. 각 지역의 전통농업은 수 천년에 걸쳐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축적해온 소중한 기술이며, 빚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장기적인 생존과 후손들의 안정적인 삶을 지키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온 지혜입니다. 그들은 수없이 사용하면서도 고갈시키지 않은 맑고 깨끗한 물을 우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지구상의 물은 고갈되지 않습니다. 고갈되는 것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깨끗한 물입니다. 깨끗한 물의 고갈은 현실입니다. 인간이 존재한 이래 인간활동의 모든 결과물이 궁극적으로 고스란히 축적되는 곳이 물입니다. 그것은 절대 없앨 수도 감출 수도 없습니다. 그 어떤 첨단 기술로도 불가능합니다. 아니 오히려 기술이 발전할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져만 왔습니다. 그러므로 물의 고갈은 인간활동의 정직한 결과입니다. 서서히 진행되던 물의 고갈이 본격화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입니다. 여러 원인들이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물의 오염’이요, 그 둘은 ‘물의 사유화’입니다.
물의 오염이 시작된 것은 18세기 산업혁명에서부터입니다. 정확히 유럽에서 시작되었지요. 석탄과 철광석 채굴, 철도–선박–기계산업으로 인한 대규모 숲의 파괴, 상품화를 위한 단작농업, 급속한 도시화 같은 요인들로 유럽에서는 복원력을 넘어서는 물의 오염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그로 인하여 유럽인들은 지구상의 그 어느 곳에서보다 일찍 발전이라는 괴물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그 경험으로부터 아무 것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깨달음은커녕 발전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에 중독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수출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외부로 돌립니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지배에는 부의 약탈과 위기의 전가라는 두 측면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다른 대륙에 강제한 금속자원의 대규모 채굴과 단작 플랜테이션 농업의 대규모 확산이 가져온 치명성은 부의 유출보다도 토양의 파괴와 물의 오염에 있습니다. 부의 유출은 일시적이지만 토양의 파괴와 물의 오염은 대를 이어 계속되고, 한계를 넘어서면 영원히 치유 불가능한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토양보다도 더욱 치명적인 것이 물이겠지요.
한계의 수출로 전 세계를 오염시키면서 유럽은 서서히 회복됩니다. 그들은 세기를 이어 투자와 무역을 통해 오염원을 외부로 돌리고 전 세계 자원과 부를 독점합니다. 처음에는 1차산업을, 다음에는 2차산업을 외부화하고 그렇게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3차산업과 금융으로 세계의 부를 입맛대로 조정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효율성과 경제성과 편리성을 우위로 하는 이데올로기를 광범위하게 퍼뜨리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우월함과 열등함의 경계를 고착화해 왔습니다. 그들은 고급기술을 개발해 독점함으로써 자신들의 오염과 위기를 효과적으로 수출합니다. 또한 개발도상국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미개하고 더럽고 비과학적이고 비효율적이며, 그 모든 열등함을 개선해줄 수 있는 것은 자신들뿐이라는 독선의 논리로 다른 나라를 압박함으로써 세계 곳곳의 오염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과 유럽의 세계지배로 물 오염이 확산되고 축적되었지만, 자연의 물 순환체계가 이토록 처참하게 파괴되는 오염이 가속화된 것은 지난 50여년 동안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서슴없이 물 오염을 넘어 ‘물 파괴’라고 말합니다.
본격적인 물 파괴의 선두에 녹색혁명이 있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멕시코에서 시작되어 70년대부터 전 세계에 반강제적으로 확산된 녹색혁명은 한마디로 말해 ‘산업형–단작–관개–화학농업’입니다. 이것은 상품화에 요구되는 작물들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대규모 관개시설과 대형기계와, 석유에서 비롯된 정화불가능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농업이지요. 생태조건을 고려한다면 건조한 지역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농업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평지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서는 예외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불가능한 곳에서의 대규모 관개사업은 광범위한 지역의 지하수를 고갈시키고 강을 마르게 하는, 실로 엄청난 물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이 농업방식이 세계화되는 과정은 수 천년에 걸쳐 각 지역에 정착되어온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 맞는 작물과 농법들을 깡그리 말살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가뭄에 강한 토종작물과 씨앗들이 사라지고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고수확 종자들이 선택되었고, 사탕수수, 목화, 유칼리나무, 커피 같은 물 대량소비작물들이 단일재배되었습니다. 지역마다 기후와 지형에 맞게 만들어졌던 저수지와 습지와 소규모 관개시설이 모조리 파괴되고, 물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농법도 잊혀졌습니다. 그리고 대형관개시설은 지역생태계에 분산되어 있는 물을 한쪽으로 끌어모음으로써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화학물질의 대량사용은 더할 수 없이 치명적으로 물을 오염시켰습니다. 이러한 파괴를 배경으로 그들은 상품화한 작물유통을 통해 일차적으로 돈을 벌고, 관개시설 건설로 대상 나라들의 곳간을 헐어내고, 대형농기계와 종자와 비료와 농약을 팔아 농민의 주머니를 털어내면서 이것이 경제고 효율이고 발전이며, 돈은 이렇게 버는 거라고 뽐냅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진짜 그런 줄 압니다.
오염으로 인한 물 파괴의 또 하나의 요인은 자연의 복원능력을 넘어서는 모든 형태의 상품생산입니다. 숲을 망가뜨리는 광산의 개발은 숲이 보존한 엄청난 물을 고갈시키고 오염시킴으로써 마을 단위의 지역들을 파괴합니다. 일자리를 명분으로 유치하는 대규모 공장과 산업들 역시 지역 단위의 물을 돌이킬 수 없이 오염시켜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대규모 상품생산이 지역 단위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역에서 생산된 부는 대부분이 외부로 유출되고 지역에는 부스러기가 조금 떨어집니다. 그 신산스런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지역은 풍요의 기초인 물과 토양을 바칩니다. 부는 독점하지만 오염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든 물이 오염되고 고갈되면 그들은 떠납니다.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산업들은 물과 토양으로부터 부를 깡그리 빨아내고 더 이상 복원되지 않는 오염을 지역 사람들에게 남겨놓고 빠져나가지요.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상품은 크게든 작게든 그렇게 물을 파괴한 결과들입니다.
대규모 물 오염의 나머지 주범은 급격한 도시화의 확산입니다. 도시는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의 결과물입니다. 상하수도와 도로같은 기반시설들이 잘 정비되고, 주거지와 생산지들이 알맞게 구획되고, 각종 교육, 문화, 교통 여가시설들이 잘 완비되고, 거기에 청정한 기운을 보존한 녹지대까지 곁들여지면 사람이 살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 탄생하지요. 그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최상의 편리함과 쾌적함과 풍요로움을 누립니다. 하지만 그런 도시는 다면적으로 물을 오염시키고, 도시인의 편리한 생활은 참혹한 대가를 남깁니다. 도시는 만들어지는 것 자체로 숲과 들을 대규모로 파괴합니다. 도시의 규모가 클수록 그 영향은 심각합니다. 대형도시 하나가 소비하는 물을 감당하기 위해서 대형 하천 하나가 결딴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빌딩과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배기가스로 뒤덮인 도시는 엄청난 양의 빗물을 하수관을 통해 곧장 유출시키고 물을 품지 못함으로써 열섬현상이라는 기후이상을 초래합니다. 또한 아무리 기반시설이 완벽하다 할지라도 도시는 결코 정화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유럽인들이 한계를 수출하는 것처럼 외부로 오염을 전가시킬 뿐이지요. 대량소비의 횡행과 온갖 화학물질로 채워진 도시가 배출하는 쓰레기, 생활하수들이 일으키는 물 오염을 돈으로 환산하여 처리한다면 도시인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게 대량으로 소비되는 깨끗한 물들은 모두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물 만큼은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담을 그릇만 마련하면 되겠군요. 사람들이 물을 얻는 방법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릇을 만드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남의 그릇의 물을 뽑아오는 방법이고, 마지막 하나는 못쓰게 된 물을 고쳐 쓰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수 천년 전부터 선조들이 사용해온 방법들이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술의 발달로 속도가 빨라지고 대량화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아니, 또 있군요. 선조들이 사용한 방법은 물의 순환체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고 이차적인 오염을 발생시키지 않는 것이었던 반면, 현대의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은 물 순환체계를 파괴함은 물론, 물을 얻는 방법 자체가 또다시 물을 파괴하는 자가당착의 모순에 걸려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릇을 만드는 방법이야 간단합니다. 저수지를 만드는 것이지요. 고대의 농부들도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지역의 지형과 물길을 따라 밀도있게 만들어지고 거미줄 같은 수로로 연결되어 경작지에 물을 공급하고, 마르지 않는 지하수의 공급원이 되어 사람들을 먹였던 고대의 지역적 물공급체계는 현대의 과학자들마저도 경탄하는 과학적인 것이었다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그런 저수지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스리랑카의 건조지대에는 그렇게 천 년을 이어온 소규모 저수지들이 건재하며 그것에 기대어 30만이 넘는 농가들이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스리랑카의 농부들은 사람이 가지 않는 숲 속 정글에까지 저수지를 만들어 야생동물들에게 마실 물을 마련해주었다지요. 그 방법으로 야생동물들이 마을까지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일을 해결했다 합니다.
현대인들은 그릇의 크기를 키웠습니다. 댐입니다. 전 세계에 높이 15미터 이상의 댐이 4만5천개 이상 건설되는데 2조 달러가 투입되었다고 하는군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대공황 시기인 1935년, 미국의 콜로라도 강을 막아 건설한 후버댐 준공은 대규모 댐 건설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물이 물 아닌 ‘수자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물을 나누고 공급하는 체계와 더불어 물과 관련된 모든 일들이 ‘물 산업’으로 등장했습니다. 자연을 개조하는 인간능력의 무한함에 대한 칭송이 하늘을 찔렀고, 대형 댐은 수자원을 통제하는 명백한 임무로 하여 권력이 되었습니다. 후버댐 건설을 추진한 한 관리는 ‘거대한 강이 구불구불 한가롭게 흘러가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수치스런 일’이라고 주장했다지요. 지금 보면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말이지만, 기가 막히게도 ‘평화와 식량’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벌어지는 세계 곳곳의 댐 건설사업에서는 이 논리가 아직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습니다.
댐은 물을 대규모로 가두어 취수, 홍수조절, 가뭄해결, 전기생산, 농업용수 공급 등 다목적으로 쓸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댐 건설의 진짜 목적은 수로변경과 대도시와 산업지역에 대한 물 공급입니다. 이 목적은 4만5천개의 지역에서 달성되었지만 지역적이었던 물 관리체계가 중앙집권적인 통제로 변화하면서 생태계와 지역사회에 헤아릴 수 없이 심각한 문제와 갈등을 불러왔습니다. 댐으로 인한 수몰 이주민들의 문제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지하수위의 변화로 나타난 침수지역과 갈수지역의 토양의 황폐화, 생물의 서식처 파괴가 불러온 생물체들의 대량멸종, 수량감소에 의한 하구 삼각주의 파괴, 수로변경과 물 유출에 의한 수자원 파괴, 물 흐름이 정체되면서 일어나는 오염의 상승과 국지적인 기후교란 등의 문제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고 있지만, 생태적으로 가장 심각한 것은 수량변화로 인해 강이 결국 말라버려 더 이상 바다에 이르지 못하는 강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콜로라도강과 리오그란데강, 이집트의 나일강, 중국의 황하,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호주의 머레이강, 중동의 요르단강, 중앙아시아의 옥서스강이 그렇다고 합니다.
서구에서는 대형 댐이 야기하는 문제들로 인해 댐 건설이 한 풀 꺾였지만 그들이 축적한 댐 건설기술은 세계은행의 자본과 결합하여 지금도 제3세계 곳곳에서 대형 댐 건설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조리한 작업은 세계은행이 앞장서서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고, 각국의 중앙 정부나 지역정부와 결탁하여 생존을 걸고 댐 건설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세계은행이 제공하는 차관은 건설기술을 제공하는 서구기업들의 주머니를 터지게 채우고, 건설에 협조하는 정부관리들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하고, 나라를 빚더미에 앉힘으로써 수자원을 통제하는데 참여하고, 모든 국민들에게 그 비용을 부담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이렇게 대형 댐 건설로 인해 나타나는 소수의 수혜자와 다수의 피해자 사이의 갈등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분쟁을 일으킵니다. 과거와는 달리 더 이상 세상을 속일 수 없는 상황에서 폭압적으로 밀어붙이는 댐 건설사업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목숨을 건 싸움에로 나서게 하고 있습니다.
물을 얻는 또 하나의 방법은 남의 물을 뽑아오는 것인데, 지하수개발과 수로변경입니다. 지하수를 퍼올리는 대형관정은 댐보다도 훨씬 일찍부터 등장했고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여전히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지하수는 태곳적부터 서서히 채워져 온 실로 귀중한 물입니다. 지하수가 채워지는 시간은 매우 오랜 것이어서 순환체계가 파괴되면 몇 세대에 걸쳐서도 복원되지 않고 완전히 상실되어버립니다. 옛날 선조들이 사용했던 우물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었지요. 대형관정으로 퍼올려 대규모 관개와 산업에 사용함으로써 고갈된 지하수는 더 이상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을 모든 생명체들이 공유해야 할 생명유지의 기초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광물처럼 먼저 찾아낸 자가 임자이고 강한 자가 소유하는 ‘자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태계의 한계도, 다른 생명체들의 필요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전 세계가 그들의 식민지였던 시대에 시작되어 지금은 전 세계 ‘물과 생명체의 사유화와 상품화’라는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들에 의해 줄기차게 퍼뜨려진 이러한 사고방식이 지금은 그것으로 인해 혹심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까지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하수의 고갈은 엄청난 문제들을 야기시킵니다. 물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평형을 이룹니다. 모든 지하수는 지역적으로 서로 연결되어있고, 지표수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부분에서의 수량변화나 고갈은 한 지역 전체의 물 체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역에 들어온 음료산업 생수산업이나 물을 많이 사용하는 대규모 공장은 지역 전체의 수자원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그런 지역의 주민들은 50미터 우물이 100미터가 되고 200미터를 파내려가도 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10년 동안 500개의 관정을 판 인도의 어느 마을에서 물이 나오는 관정은 5개에 불과합니다. 지하수가 마르면 강물도 마릅니다. 기업은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들은 뜨내기들입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 뼈를 묻지도 않고, 거두어야 할 후손을 남기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내일은 없는 것처럼 지내다가 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꼭지만 틀면 펑펑 쏟아지는 수돗물과 스프링쿨러가 파란 물을 뿜으며 돌아가는 잔디밭과 맑은 물을 찰랑이게 채운 수영장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지역 사람들에게 남겨진 것은 떠나거나 자살하거나…. 어쨌든 두 가지군요.
지하수를 마음껏 뽑아쓰는 것은 미래를 당겨쓰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가 20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많이 쓸수록 그 미래는 앞당겨지겠지요. 다가오는 미래가 이미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요즈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공포의 씽크홀 현상은 결코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지하수 고갈로 인해 일어나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지만 좀처럼 공개적으로 입을 열지 않습니다. 물 과다사용산업에 대한 사람들의 엄청난 저항이 예상되는 일이니까요. 지하수를 펑펑 쓸 수 있도록 눈부시게 발전해온 기술이 우리의 생존시간을 단축시키고 있습니다.
수로변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대기술의 수로변경은 송유관이나 가스관처럼 거대한 관로건설을 창안해냈습니다. 창안이라고 하기에는 무지막지한 방법이지요. 어쨌든. 이 기술도 역시 대규모 생태계 파괴를 동반하지만 비합리적이고 기형적인 현대 도시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밀어붙입니다. 대표적인 대형건설사업으로 멕시코시티의 마자후아스 인공호 이동 수로사업, 사해 소멸 위기에 봉착한 이스라엘의 홍해 물 이동 수로사업, 인도 델리의 테흐리 지방 댐 건설과 수로사업, 중국의 남북 물수송사업 등이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바이칼호의 물을 중국과 중동, 미국까지 수송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물은 힘이 약한 곳에서 강한 곳으로 흐르는군요. 누가 돈과 물은 위로 흐른다더니 딱 맞는 말인가 봅니다.
물을 얻는 나머지 하나는 썼던 물을 고쳐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업으로 나타나는데 해수 담수화와 폐수정화입니다. 해수담수화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스라엘, 호주와 같은 돈 많은 나라들이 애용하는 방법입니다만, 사실은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서나 나올 수 있는 방법이지요. 물 기업들에게는 첨단기술의 수준만큼 고수익을 창출하는 사업으로 열성적으로 홍보하며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 생태적 폐해는 참담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담수화 시설가동에 들어가는 엄청난 에너지 비용은 차치하고라도, 농축된 소금물과 사용된 화학물질 중금속이 섞여 배출되는 치명적인 오염물질은 담수화의 재료가 되는 바닷물 자체를 대규모로 오염시켜 엎친 데 덮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담수화를 연구한 한 학자는 이를 두고 ‘결론적으로 우리의 실패를 자인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했다지요. 에너지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원자력 담수화나 보다 정밀한 정화를 위해 연구된 나노기술이 갖고있는 문제들은 더욱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고 갈 길은 먼데, 지면 여섯 장이 빼곡합니다. 여기까지가 물 이야기의 전편, 오염에 관한 것입니다. 물 이야기의 다음 편은 ‘사유화’에 관한 것입니다. 물 고갈에 대한 진짜 본론이 되겠지요. 물 위기가 인구증가와 기후변화 때문이라구요? 아닙니다. 다음 편에서 그것이 왜 아닌지 밝혀질 것입니다. 물 이야기의 제목이 ‘씨저의 것은 씨저에게, 물은 모두에게’로 붙여진 까닭도 아실 수 있습니다.
2013년 6월 개마고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