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 삼층석탑 앞에는 배례석이 있고, 주변에 석등의 부재 일부로 보이는 석조물 2기가 있다. 성주사 북동쪽 500여m 위에서 많은 석재들이 수습되고 있어 원래의 절터였다고 전해지는 곳에서 옮겨온 것이다. 성주사의 삼층석탑은 대웅전 정면에서 비켜난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나라 전통적인 가람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절집 마당으로 나오면 근래에 건축 된 것으로 보이는 지장전(地藏殿)과 설법전(說法殿)이 마주하고 있다. 지장전은 명부전이나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주불(主佛)은 지장보살상(地藏菩薩象)이다. 다른 보살상은 한결같이 화관(花冠)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유달리 지장보살만은 승상(僧像)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남김 없이 구제하겠다고 서원(誓願: 보살이 수행의 목적을 밝혀서 그 달성을 서약하는 일)한 보살이다.
왼 손에 든 쇠지팡이(金錫)로는 지옥의 문을 두드려 열고, 바른 손바닥의 밝은 구슬로는 어두운 세상을 광명으로 비춘다. 지장전에는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고, 성주사 답사를 하던 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제가 지장전에서 엄숙하게 거행되고 있었다.
설법전을 가리켜선 무설전(無說殿)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설한 바 없이 설하는 것이 진짜 설법이기 때문이다. 설법자(說法者)가 설법이라는 관념에 걸려 있거나, 청중이 또한 듣는다는 데에 집착해 있으면 제대로 법(法)을 설(說)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격식을 갖춘 옛날 절집에서는 설법하는 전당(殿堂)이 따로 있었는데, 요즘에는 다른 전각(殿閣)은 잦은 중건(重建)을 하면서도 설법전(說法殿)은 아예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 불교가 제 기능을 다 할 때는 불사(佛事)보다는 법회(法會)가 성했던 것을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성주사 설법전은 불자 교육활동을 위해 춘추로 문을 여는 성주사 불모학당에 좋은 교육의 장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은 선이며, 곡선을 가장 많이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 용마루이다. 치미는 목조 건축의 기와 지붕에서 위쪽 용마루의 양끝에 부착시키는 대형의 장식 기와다. 길상(吉祥)과 벽사(사귀를 물리침)의 상징인 봉황의 날개 깃 모양을 한 경우가 많고,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물을 뿜어내는 어룡형(魚龍形)으로 변형되었다.
용머리나 독수리머리 등 새로운 모양을 한 장식 기와로 바뀌면서 퇴화되었고, 조선시대의 궁궐 건축에는 용마루나 추녀 등에 짐승의 모습 또는 손오공의 모형을 작게 만든 잡상(雜像)이 등장하면서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성주사 설법전의 치미는 학이다. 필자도 처음 보는 것이라서 필시 주지스님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을 하고 스님을 찾아갔다. 종무소에서 연유를 말하고 부탁을 하니, 주지스님 방에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예의를 갖추고 방에 앉으니 한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온함과 고요함이 배어 나왔다. 주지스님은 스님 두 분과 차를 나누며 담소를 하고 있었다.
필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설법전 용마루 끝에 있는 학(鶴)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설법전 불사는 전임 주지께서 하셨습니다. 불교 경전에 운거학가(雲居鶴駕)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앞에 놓고 스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구름 속에서 학을 타고 논다는 뜻입니다, 성주사를 안고 있는 산이 볼모산 인데, 불모산의 제신(諸神)이 학을 타고 편안하게 지내라는 뜻으로 해석해 주십시오.』
차 공양을 받으면서 나누는 대화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만들어진 허상(虛像)이 아닌 진정한 사상이 깃든 문화유산이 된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 선방을 나서는 필자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주지스님의 말씀처럼 나는 눈에 보이는 표상(表象)만을 찾아서 답사를 했는지도 모른다. 정성스럽게 차 공양 시중을 들던 스님의 차 맛도 성주사 답사의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