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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약의 구원/The Covenant Salvation>이 제 손을 떠나 출판사로 넘어갔습니다. 곧 책으로 세상에 출현되겠습니다. 그 글에 대해 얘길 좀 하려 합니다.
<언약의 구원>은 성경의 구원을 언약의 관점에서 영성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곁들여 소장될 만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근거로 살기 때문에, 소장한 모든 물건이나 글은 세상의 나아짐(betterment)을 향해 만들어지거나 표현되었습니다. 성경은 유일하게 구원으로 표현되었음으로 예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나아짐으로 사는 사람들은 성경도 세상의 나아짐으로 쓰진 글이라고 여기며, 세상의 나아짐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교회 교리나 신학은 성경을 세상의 나아짐으로 정리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담아진 구원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구원도 세상에서 일종의 나아짐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담아진 세상의 구원은 세상의 나아짐을 뜻하지 않습니다.
<언약의 구원>은 성경에 담아진 구원을 세상에 나아짐으로 풀이하지 않기 위해 쓰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을 근거로 전개될 수 없는 구원을 다루려한 것입니다. 따라서 쉽게 접근될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여력을 다해 전개하는 글이 있어, 틈틈이 연재해 가겠습니다.)
2. 세상의 나아짐은 세상의 근거로 말해지지만, 세상의 구원은 세상의 근거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서 나아짐을 추구하며 삽니다.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사람의 나아짐을 향한 성취의 자취입니다. 사람의 전기는 그런 자취를 기록으로 담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전기는 어떻든 출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죽음으로 마무리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인 복음서도 사람 전기의 일종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산 사람이라고 전제하며 복음서를 읽으니, 사실성으로 복음서를 이해하려합니다. 복음서의 예수님 이야기를 세상을 근거로 읽으면, 세상에 근거한 시각으로 예수님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세례에서 죽음과 부활까지, 마태와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탄생에서 죽음과 부활까지 서사합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일생도 그냥 탄생으로부터 죽음으로 정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예수님을 서사합니다. 예정에서 종말까지로 서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예수님 이야기를 세상에 근거한 탄생과 죽음으로 고정하고서 읽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를 서사한 저자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근거한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닌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바라보는 ‘특유한’ 시각입니다.
3. 성경은 세상의 근거가 아닌 언약의 근거를 보입니다.
성경은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라고 합니다. 즉 “빛”으로 빛의 이루어짐을 보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창조를 기술하는 뜻입니다. 성경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의 우선성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추어 사람의 말은 파생적입니다. 빛으로부터 “빛”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사람의 말로 전개되는 것은 세상을 근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우선성은 사람 말의 파생성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언약으로 전개하는 뜻입니다. 성경은 언약으로 전개함으로 우선적인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을 보입니다. 즉 성경은 세상의 있음을 서술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을 서사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우선성은 신구약을 관통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총체적으로 언약으로 전개됩니다. 저의 <언약: 함께로 그리스도교/The Covenant: Christianity as Togetherness>는 이 점을 반영합니다. 성경을 접하는 데는 무엇보다 언약의 시각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은 조건적으로 전개된 반면, 신약은 영적으로 전개됩니다. 구원은 조건적이 아니라 영적임으로 신약에서만 다루어집니다. 저의 <지성에서 영성으로/From Intellectuality to Spirituality>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나아감을 보입니다. 이렇게 신약에서 전개되는 구원은 언약과 영성이 전제되어야 온전히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쓰는 용어는 제가 글을 전개하기 위해 도입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아닙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선적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루어지는 하나님 말씀의 우선성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근거하여 살기 때문에, 성경도 모든 세상 말과 같이 세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철학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풀이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말씀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파생되는 말과 구별하여 지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이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이루어지는 말씀으로 지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이루어질 약속의 말씀으로 지닙니다.
이루어지는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을 이루어질 약속으로 지니는 언약의 백성에게 의미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파생되는 말만 생각하지, 세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말과 구별됨은 하나님 말씀을 지니는 언약의 백성과 사람의 말로 사는 세상 사람의 구별됨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짐이 기본 동사이지만, 사람의 말은 있음이 기본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언어는 존재론적 언어와 구별됩니다.
5. 세상의 구원은 세상의 근거로 전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전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도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으로 보아져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언약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되는 영성으로 다루어집니다.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구원의 내용을 언약과 영성으로 정립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이 점을 잘 보입니다: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이루신 것으로 집약됩니다. 여기선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이어지는 3:17,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hat the world through Him might be saved,”은 구원을 명시적으로 표현합니다.
바울과 요한을 위시한 초대 사도들은 구원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웁니다. 예수님을 언약과 영성으로 서사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구원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분이십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처형된 사실을 근거로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세상 사실로 들려집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세상 지식으로 정리됩니다.
예수님을 세상 지식으로 전개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있어선 해가 됨으로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이롭다고 한 유대인들의 판단이 문제됩니다. 예수님의 세상 자취가 세상을 나아지게 한다고 주장하면, 유대인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초대 사도들은 예수님을 지식으로 전개하지 않고 믿음으로 전개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나아짐을 향한 투쟁이 아닌 세상의 구원을 복음으로 전합니다.
6. 그리스도교가 종교로 굳혀짐에 따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종교적인 믿음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세상에 근거한 삶의 형태이고, 종교성은 지성, 도덕성과 같은 사람의 속성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종교적인 믿음은 개인의 마음에 자리잡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종교적인 믿음일 수 없음을 보입니다. 종교적인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의미를 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근거한 종교는 세상으로부터 사라지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줄 수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보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들과 갈등일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 삶을 나아지게 하는 측면에서 강조됩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됩니다.
그러나 초대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구원의 믿음으로 정립합니다. 복음서가 보이는 풍성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전개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십자가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분은 세상의 나아짐으로 서술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원자로 서사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세상을 근거로 전개됩니다. 구약 삶을 지속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을 세상으로부터, 또 구약으로부터 단절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전개되는 내용은 세상에 근거하거나 구약을 이어가는 내용일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님은 세상 이야기가 아닌 세상의 구원으로 이야기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한 구속론으로 전개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구원의 믿음임을 보입니다.
7.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들에 의해 제소되고, 로마인들에 의해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이 유대 전통으로부터, 또 세상으로부터 제거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을 의미 있게 말하려면,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의 판단과 다른 시각으로 사실적인 이야기를 전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초대 사도들은 십자가가 죽으신 예수님을 사실적인 측면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믿음의 내용으로 전개합니다. 이 경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유대인들이 지녀온 구약의 율법적인 언어나 세상의 존재론적 언어에 담아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초대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복음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은 복음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세상에 등장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에 임하신 성령님에 의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성령님에 의해 인도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적인 말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복음이라는 새로운 언어는 이루어짐과 영적인 면을 겸하여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에 존재함이 아닌 세상에 이루어짐이고, 세상 현상으로 다루어질 수 없는 영성입입니다. 이루어짐은 언약의 이루어짐이니, 복음은 언약과 영성으로 서사됩니다. 복음은 세상에 영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좋은 소식으로 알리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복음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바라보는 시각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8. 구원은 이루어짐이지, 이르게 됨이 아닙니다. 이루어짐은 언어의 이루어짐임이기 때문에, 구원은 이루어지는 언어, 곧 언약으로 말해집니다. 따라서 구원은 언약의 구원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이르게 됨입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지닌 종교성을 계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면, 이르게 되는 상태로 말해집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구원은 종교적인 구원이 아닌, 언약의 구원입니다.
언약의 이루어짐이 조건적이냐 영적이냐에 따라 구약과 신약으로 갈립니다.
하나님 말씀은 언약의 말씀으로 구약에서부터 이루어짐으로 전개되지만, 구약에서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은 세상 조건과 얽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적자가 없을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할 것과, 그들이 살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구약은 그렇게 약속의 이루어짐으로 시작됩니다. 출애굽과, 나아가, 창조도 이루어짐이라는 언약의 시각으로 정리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은 세상 조건으로 형성되는 세상 상태입니다. 따라서 변화하는 세상에 조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에 조건적으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측면과 세상 조건의 변화하는 측면이 얽혀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은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구약은 결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은 세상에 조건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영적 이루어짐이 말해집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즉 그들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구약엔 아브라함의 후손이 언약의 백성이지만, 신약엔 하나님의 자녀가 언약의 백성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 이루어집니다.
9.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백성으로 유지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나라와 삶이 붕괴되니,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신 것을 보고,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을 예언합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이 주장하는 언약의 백성 됨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메시아의 예언은 임마누엘 예언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예언자들의 임마누엘 의식은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나아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약속의 이루어짐을 그들이 가나안 땅에 율법으로 사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단순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약속임을 보입니다.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백성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과 함께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임마누엘은 근본적으로 언약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임을 보입니다. 그것이 예언으로 말해지니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부각됩니다. 즉 임마누엘은 이루어지지,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한 것처럼 그들 자신들로 고정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구약은 임마누엘 언약은 예언의 내용임을 부각하며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임마누엘 탄생으로 서사하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을 임마누엘의 이루어짐으로 서사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도입된 성육신은 예정된 임마누엘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정된 임마누엘의 오심으로 서사됩니다.
구약은 임마누엘의 예언으로 마무리되고, 신약은 임마누엘 예언의 이루어짐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내용입니다. 즉 구원은 임마누엘의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10. 제가 <언약: 함께로 그리스도교>와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쓰게 된 배경과 여정을 2022년 2월 8일부터 21까지 이 단톡방에 올렸고, 그 글을 출간된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후기로 담았습니다. 그 글의 마지막 부분에 문화의 고침에 대한 Wittgenstein이 시사하는 바를 여운으로 남겼습니다. 물론 W는 문화의 고침을 시사할 뿐,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언약의 구원>은 그 때 남긴 여운의 구체적인 결실로 보아도 됩니다. 물론 <언약의 구원>은 성경의 구원을 언약으로 전개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화적인 현상을 직접적으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구원이 세상에 드러남에 따라, 문화적인 영향으로 고침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W는 그 점을 알고 시사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W가 철학의 과제와 방법으로 제시한 언어 분석은 문화적인 배경에서 보아집니다. 철학은 철학이라는 언어로 지탱되지만, 문화는 다양한 언어를 담고 있습니다. 그 다양한 언어를 다루지 않는 한, 철학은 문화를 고침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화에 등장한 언어는 모두 문화 현상을 거느리며 나타납니다. 따라서 문화에 등장하는 언어에 대해선 해당하는 현상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정치 현상과 종교 현상은 정치적인 언어와 종교적인 언어로 추적됩니다. 따라서 문화에 나타나는 현상은 그 현상을 보이는 속성을 분석함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화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교가 문화의 추축으로 자리잡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다루지 않고, 현실적으로 처한 문화 문제를 접근해 갈 수 없습니다. 즉 성경이라는 언어를 다루지 않고, 인류가 처한 문화 문제를 다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교가 문화에 자리잡은 형태로 읽어지면, 문화 현상으로 다루어질 뿐, 문화의 고침으로 접근되지 못합니다.
11. “문화의 고침”이라는 말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의미는 그럴싸하게 잡히지 않습니다.
세상은 부단히 변화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로 이루어지는 문화도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갑니다. 변화하는 세상은 부단히 요동할 뿐, 스스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변화하는 세상에 이루어지는 문화도 부단히 진전되더라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진전하는 문화를 이루려 열심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루는 문화는 발전을 향하지 고침을 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병든 사람 몸이 나아지는 것으로 고침을 말합니다. 이 경우 고침은 사람 몸이 아픈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픈 사람 몸이 나아지는 상태로 고침을 말하듯이 붕괴되는 문화에 대해서도 고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화의 고침은 나아지는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니, 문화의 발전을 뜻합니다.
사람 몸이 나아지도록 변화시키는 의학적이나 약학적인 지식은 세상 변화 과정에 나타나는 인관관계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문화도 나아지도록 인과관계를 이용하는 것이면, 문화에 등장하는 모든 분야는 각기 나름대로 나아지도록 나아가니, 문화의 발전을 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화에 나타나는 현상을 문화의 고침 현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세상이 부단히 변화하니, 문화도 부단히 변화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고쳐지는 변화를 보이지 않으니, 고침은 세상에 내재된 내용일 수 없습니다.
세상을 자연으로 보면 문화도 자연적입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냥 운행될 뿐 고침은 말할 수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사는 삶에 고침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의식은 단지 나아짐으로 변화할 것을 기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문화의 고침을 말하려면, 나아짐(betterment)이 아닌 고침(healing)의 뜻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12. 아픈 사람의 몸을 고치는 것과 문화를 고치는 것은 다릅니다.
의사가 환자를 고치는 경우, 의사는 인과관계를 이용해 환자의 상태를 바꿉니다. 의사는 외부에서 환자의 변화를 유도합니다. 그러나 문화는 인류의 삶의 총체적 표현입니다. 어떤 수단을 문화에 작용하든 문화에 내적으로 적용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화의 고침을 의사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합니다. 문화로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대상적으로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문화에 대해서도 대상적으로 접근하면서, 자기도 문화에 내포된 것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보통 힘으로 문화를 향상한다고 하는 이들은 이런 경향을 보입니다.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힘으로 문화를 발전시킨다고 여기는 이들은 문화를 대상화하면서 부분적으로 수선하려 합니다.
그러나 문화의 고침은 부분적인 수선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내포하는 상태로 보아져야 합니다. 환자와 의사는 같이 문화에 내포됩니다. 아무도 문화를 대상적으로 고치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문화의 한계를 자신의 한계로 반영하게 됩니다. 자신의 고침이 내포되지 않는 문화의 고침은 말해질 수 없습니다. 또한 문화의 고침과 괴리된 자신의 고침은 말해질 수 없습니다.
고침은 총체적이지 부분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고침을 문화의 고침으로 전개하는 이유입니다. 달리 말하면, 고침을 부분적으로 의식하는 한 변화를 의식할 뿐, 고침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내포한 총체적인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문화의 내적 시각일 수 없습니다. 문화의 고침은 문화에 내재될 수 없습니다.
13. 문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속성을 파악함으로 진전되어 왔습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의 속성을 파악하는 의식은 언어에 담아짐으로, 문화의 내용은 문화가 지닌 언어로 특징지어집니다. 문화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태양은 밝다”와 같이 세상을 표상합니다. 존재하는 태양에 밝음이라는 속성을 부여함으로 밝게 빛나는 태양 현상을 표상합니다. 이런 언어는 존재론적 언어입니다. 즉 문화의 언어는 존재론적 언어입니다.
문화의 존재론적 언어는 파생적입니다. 태양의 밝음으로부터 “태양은 밝다”가 표상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근거한 문화이니, 문화에 담아진 것은 세상으로부터 파생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이루는 문화가 세상에 근거함은 존재론적 언어가 단적으로 보입니다.
문화는 파생적이고, 문화의 파생적인 내용은 사람의 지성에 담아집니다. 따라서 사람의 지성은 파생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근간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의 속성인 지성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속성을 파악함으로 계발되면서 문화의 추축을 이룹니다. 사람의 지성으로 계발된 지식은 세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되는 내용입니다. 이 때문에 지식은 대상적으로 표현됩니다. 도덕과 종교는 이차적인 반응입니다.
지성이 세상에 있는 것을 직접 속성으로 표상하기에, 지성의 소산인 지식은 문화의 골격이 됩니다. 그런 만큼 무엇이든 문화에 참여하는 것은 지식을 입어 표현됩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도덕성이든 종교성이든 우선 이해되어야, 문화에 참여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에 대해서든, 이해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파생적임으로 이해도 파생적입니다.
14. 문화로 사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도 이해로 접근합니다. 성경에 담아진 내용도 문화에서 접하는 모든 글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성경의 언어는 파생적이 아닙니다. 언어의 우선성을 지닙니다. 파생적이면 이해되지만, 파생적이 아닌 언어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추축을 이루는 두 구절은 파생적으로 읽어질 수 없음을 보입니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창세기 1:1)."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요한복음 3:16)." 이 두 구절은 세상으로부터 파생적일 수 없는 세상의 창조와 구원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받아들이느냐 않느냐는 문제이지, 이해될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개시되는 언어의 우선성을 그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종교로 문화에 자리잡으면서, 성경도 문화적으로 이해되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지식으로 정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문화에 굳건히 자리를 굳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Thomas Aquinas의 <Summa Theologiae>는 성경을 지식으로 표현한 대 작업입니다. 그는 성경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입어 풀이합니다. 그의 지성적인 작업으로 scholasticism이라는 지식 체계가 세상에 나타납니다.
성경이 보이는 언어의 우선성을 간과한 채, 파생적인 언어 체계인 철학에 담으려 하니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은혜”라는 말은 철학엔 없음으로, 철학에서 유사한 말로부터 시작하여 접점을 이루려 하니, 논리 전개가 meticulous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언약: 함께의 그리스도교>와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120개의 용어를 성경 내에서 서로 연계시켜 재현하려한 것입니다. TA와 같이 성경 체계를 다른 언어 체계로 풀이할 수 없다는 제 입장을 반영한 글입니다.)
성경을 앎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Calvin에게도 이어집니다. Calvin은 그의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을 하나님과 ‘나’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도 성경이 지식 체계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15. 복음서가 보인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문화에 종교로 자리잡게 됨으로, 믿음의 언어는 지식의 언어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Augustine은 <고백론>에서 믿음의 우선성을 견지하지만, 문화에 자리잡게 된 그리스도교는 믿음의 언어가 아닌 지식의 언어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복음에 담아진 믿음의 언어가 지식의 언어로 풀이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영성인 믿음의 언어를 지성인 지식의 언어로 풀이한 교회 교리나 신학은 영성이 아닌 지성입니다.
인식론은 인간의 이해가 파생적임을 전개한 이론입니다. 옛 그리스 철학은 사람이 지닌 사고의 논리적 전개로 지식을 구축한 것입니다. Plato는 현상에서 초월로, Aristoteles는 물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지식을 전개합니다. 그런데 경험론자들은 사람의 이해는 경험으로 시작한다고 합니다. 인간의 경험과 이해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보인 것이 경험론자들의 기여입니다. 즉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이해는 경험으로 파생된 것임을 보입니다.
Kant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경험에 근거해서, 인간의 지성의 한계를 보입니다. 그는 지성이 경험의 한계를 넘으면, 지식이 아닌 도그마를 세운다고 합니다. Hegel은 경험을 넘어가는 인간의 지성을 이념이라는 정신현상으로 다룹니다.
지성으로 풀이된 영성은 경험적일 수 없으니, Kant의 용어로는 도그마이고 Hegel의 용어로는 이념입니다.
16. 그리스도교가 종교화해서 문화에 등장하는 것과 일반 종교가 문화에 출현하는 것은 다릅니다. 인반 종교는 사람들이 지닌 종교성이라는 속성을 계발함으로 문화에 등장합니다. 특정한 방향으로 종교성을 계발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종교가 세상에 보입니다. 다양한 민족성이 비교되고 분석되듯이, 다양한 종교성도 비교되고 분석될 수 있습니다. 종교성도 사람의 속성이니 세상에 있는 모든 속성과 같이 이해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종교화는 다릅니다. 성경이라는 언어를 지성으로 풀이함으로 문화에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나 신학은 성경이라는 언어를 풀이한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사람의 종교성이라는 속성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지닌 다양한 종교성의 표현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Schleiermacher는 사람은 지성과 도덕성외에도 느낌(gefühl)이라는 종교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그는 느낌이라는 종교성으로 <The Christian Faith>를 전개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인 것은 느낌이라는 사람의 종교성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성경에 담아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풀이입니다.
종교적인 언어는 종교성으로부터 파생된 언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언어는 파생된 언어가 아닙니다. 성령님에 의해 인도된 언어입니다. S가 전개한 Christian faith는 성경에 담아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풀이임으로, 사람이 지닌 종교성과 무관합니다.
이 때문에 Karl Barth는 아예 <Church Dogmatics>를 전개합니다. 그가 전개하는 신학은 성경에 담아진 언어를 도그마로 풀이한 것이라는 솔직한 표현입니다. 즉 영성을 지성으로 풀이한 도그마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Barth의 <Church Dogmatics>에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이어온 전통 교회를 뜻합니다. 전통 교회는 도그마(이념)를 가르쳐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 교회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나 신학은 지식이 아닌 도그마(이념)라는 실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정은 그리스도교가 지닌 문제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합니다.
사람들은 지식은 선호하지만, 도그마(이념)는 질색합니다. 지금 인류는 이념의 갈등을 벗어날 수 없어 신음합니다. 지식은 변화하는 세상 과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도그마(이념)은 갈등을 안고 문화에 등장합니다. 도그마(이념)는 상반성을 띠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며 열심히 성경을 읽는 이들 가운데 성경을 도그마(이념)로 읽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초대 사도들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며 이룬 교회, 곧 초대 교회를 접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은 삼위일체, 자유 의지, 예정론 같은 교회에서 들은 교리나 신학 이론으로 고정된 시각으로 성경을 접합니다. 전통 교회가 세운 도그마(이념)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에 서사된 것은 초대 사도들이 선포한 구원의 복음으로 이루어진 초대 교회이지만, 성경을 읽는 이들은 도그마(이념)로 정립된 교리나 신학으로 이어지는 전통 교회 교인들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담아진 초대 교회와 성경을 지니는 전통 교회 사이의 문제가 부각됩니다.
초대 교회는 교회가 생겨난 원시적인 형태로서 시간이 지나면서 전통 교회로 발전되어 간다거나, 전통 교회가 문제임으로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초대 사도들이 보인 대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는 초대 교회이고, 도그마(이념)으로 문화에 안주한 교회는 전통 교회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지니지 못하면 전통 교회로 안주할 수밖에 없고, 구원의 복음을 지니면 초대 교회로 구원을 선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된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좋음으로 표현되는 것은 어떻든 도그마(이념)이기 마련입니다.
18. 성경의 언어를 일종의 존재론적 언어로 보아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풀이한 것이라고 하면, 성경은 결국 존재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상한 것이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도 일종의 파생적인 지식을 보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이 보인 것은 이런 시각입니다. 무엇이든 지식 체계로 읽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성향을 보입니다. 존재론적 언어는 언어가 기본적으로 파생적이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태양으로부터 “태양,” 사랑으로부터 “사랑”이 파생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약의 언어로, 언어의 우선성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말씀이고, 하나님은 약속을 따라 이루신다고 봅니다. “빛”으로부터 빛, “사랑”으로부터 사랑의 이루어짐을 보입니다.
이렇게 존재론적 언어와 언약의 언어를 구별하는 것이 언어 분석의 입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언어 분석”은 Wittgenstein의 영향을 받아 제가 전개하는 것입니다. W는 언어 분석이 어떤 것이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언어의 우선성을 보이는 언약의 언어는 사람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속성으로 파악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속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파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우선성을 언어의 파생성으로부터 구별하지 않은 한 혼란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 혼란의 결과가 도그마(이념)입니다. 도그마(이념)은 언약의 언어를 세상 현상으로 풀이된 지식의 언어, 곧 존재론적 언어로 세워진 것입니다.
세상 현상을 다루는 지식의 언어는 현상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즉 문화의 언어는 문화 현상을 파악함으로 자체로 정리됩니다. 그러나 문화에 도그마(이념)으로 등장한 것은 문화 현상을 다룸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원래 언어, 곧 언약 언어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언약 언어는 속성을 내포하지 않음으로 자체적으로 분석될 뿐입니다.
성경을 언어적 우선성에 근거하여 읽으면, 초대 사도들이 선포한 구원의 복음을 듣습니다. 구원은 선포된 복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선포된 복음은, 들으면 구원으로 이루어지지만, 이해하면 도그마(이념)가 됩니다.
(머리에 맴돌던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나니, 하나의 과제를 마친 것 같아 자유롭고, 좋습니다.
어쩌다 성경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아무리 써도 문화의 근거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내용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문화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채 글쓰기가 마무리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2016년 11월에 <언약: 함께로 그리스도교>를 쓰면서 문화에서 성경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그리고 <언약의 구원>을 쓰고 나니, 성경의 근거에서 문화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초대 사도들이 문화에 복음을 선포한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화에 근거해서 설교하지 않고 성경에 근거해서 설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설교할 156개의 설교문을 쓰고 있습니다. 도그마(이념)으로부터 벗어난 설교문, 문화에 구원을 선포하는 설교문입니다.
성경은 언약과, 옛 언약의 조건성에서 새 언약의 영성으로 나아감으로 전개됩니다.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로마서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복음이 파급되는 점을 부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로마 교회로 구심점이 이전됨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루살렘 교회로 전개된 성경을 서구 문화권에 자리잡은 로마 교회는 서구의 언어로 풀이하여 교리와 신학을 세웁니다. 그런데 서구 문화권에는 언약과 영성의 언어가 없습니다. (무리수와 허수를 모르는 학생은 무리수와 허수로 전개된 내용을 알기 위해 우선 무리수와 허수를 배웁니다.)
바울의 로마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로 선교적인 면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로마로부터 그리스도교가 확립되니, 그런 면은 고려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도그마(이념)로 변질됩니다.
이제 바울의 로마서 시각으로 설교문을 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