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전날 예매 중에 맞닥뜨린 영화값 13,000원이 무척 생소해 잠깐 결제를 망설였다. 언제 이렇게 영화값이 올랐지? 그간 영화를 안 본 게 아니었다. 충분히, 실은 지나칠 정도로 자주 소비하는 ‘일상 오락’이 바로 영화 보기였다. 집에 있기 좋아하고, 다양한 이유로 영화를 즐기며, 몇 년 전부터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으로서, 거의 모든 생활을 집에서 소화하기에 더 더 더 영화 보기에 최적화되는 기술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줄곧 구독해왔다.
집에서 OTT로 영화 보기 비중이 커진 건 사회적으로 거리두기가 권장되는 코로나 시대인 탓도 있지만, 오롯이 리모트컨트롤만 하면 되는 방식이 주는 편익이 무엇보다 컸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를 보기 위해 예매하고, 채비한 후, 집 밖으로 나가서 이곳저곳 흩어져있는 영화관 상영 시간에 맞춰 이동하고, 관람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마주할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응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이따금 비는 시간과 늦은 밤에 OTT로 집에서 영화 보기는 여러모로 가성비가 뛰어났다. 때에 따라 러닝타임 20분 정도의 짧은 작품을 일하다가 쉬는 시간에 배치하거나, 긴 영화를 리모트컨트롤로 스킵하며 내 맘대로 러닝타임을 조정하여 오락처럼 영화를 즐겼다. 많을 땐 월 서너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때마다 밖으로 나서야 했는데, 이제 OTT에 기반하여 집안에서 시도 때도 완전하게 통제하며 뭐든 골라 보다니. 대체로 완벽하게 느껴지는 영화 소비였다.
대체로 완벽한 방식의 영화 소비와 동거하는 일상은 빠르게 단순해져 갔다. 각종 ‘할 일’을 하는 시간과 (가장 자주 찾는 채널인) ‘넷플릭스 접속하기’ 시간으로 일과가 구성될 때가 많았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늘었고, 구독하는 OTT 채널도 늘었다. 최대 4개의 OTT 채널을 넘나들며 들이는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아지는 만큼, 새로운 영화관 개봉작 한 편 한 편마다 각각 들이는 노력과 비용은 자연히 감축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영화관에서 개봉하면 OTT로 넘어올 때까지 기다렸고, 대부분은 넘어왔다. 이 방식으로 시간을 쓰는 게 만족스러워서 그 밖의 활동들도 줄였다. 밖에서 사람들과 모이거나, 밖에서 열리는 행사에 관여하는 일과 같은 것들, 그 모든 걸 동거인과 함께하는 것 등의 일은 축소됐다. 어느 시점마다 무슨 영화가 영화관에서 개봉하는지도 점차 모르게 됐다. 대체로 완벽하게 느껴지던 영화 소비 방식은 일상의 패턴에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패턴이 가져온 것은 또 있었다. ‘영화들의 무덤’이었다. 집에서 보기 위해 포기한 ‘때’가 발단이었다. 새 영화를 얼마간 기다리면 집에서 볼 수 있는 순간이 오긴 했지만, 정작 때가 되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희미해져 있었다. 그 영화를 기대하고 갈망했으나 다음으로 미루어지고, 또 새 영화가 나오면 그만큼 멀리 밀렸다. 때를 놓쳐 포기한 영화들은 위시리스트로 보내졌고, 쌓였다. 결국 위시리스트는 보려고 했지만 안 보는 영화들의 목록이자 무덤이 됐고, 늘어나는 영화들의 무덤은 어느새 OTT 채널 구독을 계속 연장하는 이유가 됐다. 그럼에도 매번 나에게 맞는 최적의 영화를 고르기 위한 일상 리모트컨트롤은 계속됐다. OTT로 즐기는 일상 오락에서 ‘미리보기’가 사용 시간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앞부분 미리보기만 전전하다가 진을 뺄 때도 꽤 있었다. 대체로 완벽하게 느껴졌던 영화 소비 방식은 자꾸 리모트컨트롤하기와, 보고 싶었던 영화 목록 만들기에만 집중하는 식이 되어갔다.
컨트롤 할 수 없는 것들이 가져다주는 선물. (사진: 필자 제공)
2년 만에 영화관에서 관람하기로 한 작품은 〈보드랍게〉라는 다큐멘터리다.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이기도 했던 여성 김순악의 생애를 다루는 이야기. 온라인 뉴스 기사들을 보던 중에 우연히 〈보드랍게〉 리뷰를 읽고서 바로 상영관을 검색했다. 정말 오랜만에 OTT로 넘어오길 기다리지 않기로 맘먹었는데 서울에서는 딱 한 곳에서 오후 한 번만 상영 중이었다. 집에서 7.5km 떨어진 곳이었다. 이번 주 내내 같은 조건이었는데, 다음 상영은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먼 거리의 상영관을 확인하고 결심이 흔들렸으나 ‘영화들의 무덤’에 묻힌 것들이 떠올랐다. 작년 겨울부터 보려던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도 거기 있었다. 성소수자 자녀의 커밍아웃 이후에 그 엄마인 두 사람의 여정, 성장을 다루는 이야기. 영화관에서 볼 타이밍을 넘기고 OTT로 넘어온 지 오래, 아직 못(안) 봤다. 관련해서 그때 만들려고 준비하던 콘텐츠를 매듭짓지 못한 게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해보고 싶었다.
밤늦게 영화 예매를 하고 여느 때처럼 새벽에 잠자리에 누워서 약간 긴장했다. 평소보다 일찍 기상했다. 맘먹고 나선 영화관 나들이에 이렇게 저렇게 옷도 고르고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오후 1시께 전철을 타는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는 동안에는 집에서 챙겨온 한 주 밀린 주간지를 읽을 수 있었다. 도착역에서부터 영화관으로 가는 길에는 따뜻한 라떼를 테이크아웃했다. 커피를 들고 영화관 건물에서 출력한 티켓을 검표하고 마침내 상영관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봤을 땐, 10분 정도 여유도 있었다.
스크린에만 집중하도록 구성한 이 공간에서 그날 우연히 다섯 편의 영화를 새로 알았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온 세상이 하얗다〉 〈굿 보스〉 〈시크릿 카운터〉 〈나의 촛불〉. 문득 ‘영화관이란 이런 곳이었지’ 싶었다.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나만의 집이 좋아서 발걸음을 끊었던 장소인데, 단 한 번의 리모트컨트롤도 할 수 없는 영화관에서 이번엔 뜻밖에 해방감이 들었다. 본편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단 한 번의 스킵이나 멈춤 없이 영화 한 편이 보여주려는 이야기 속으로 온전히 접속한 게 얼마만의 일인지. 엔딩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갈 때까지 불을 다시 밝히지 않는 상영관에서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영화 관람객 모두가 그대로 앉아있었다. 상영관이 밝아지면서 한 명 두 명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처음 보는 도넛집에서 맛이 궁금한 도넛 몇 개를 포장했다. 그날 새삼 본 맛들을 곱씹었다. 영화 한 편을 보려고 모처럼 멀리까지 출타한 신선한 경험, 영화 시간을 복기했다. 영화라는 타자의 이야기로 접속하는 과정을 몸으로 수행하면서 그 시간 때 일상의 장면들을 마주쳤고, 마스크를 쓴 채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거의 2년간 미뤘던 영화관에서 영화 보기는 집 안에서 몇 걸음과 리모트컨트롤만으로 얻어지고 아무 때나 하차할 수 있는 안락함과는 또 다른 유익으로 다시 다가왔다. 영화 보기가 더는 개인적 행위로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