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이 축복하는 사진 한 장이 던진 질문>
- 어느 나이롱 신자의 고백
프랑스 하면 에펠탑과 개선문, 그리고 《레미제라블》을 통해 접했던 대혁명이 먼저 떠오른다. 요즘도 집회와 시위가 끊이지 않으며, 표현에 망설임이 없어 보이는 매서운 나라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런 프랑스에서 최근 레오 14세 교종의 방문과 관련해 유독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진들이 있었다.
파리 콩코르드 광장을 가득 메운 수십만 명의 시민이 “레오!”를 외치며 미사에 참여하는 모습, 13세 소녀 에바 몰렌메이커가 교종 앞에서 노래하는 모습, 그리고 장애가 있는 어린 ‘마리 가랑스’를 교종이 따뜻하게 바라보며 축복하는 모습이었다.
※에바 몰렌메이커- Bernadette Soubirous(베르나데트 수비루)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한 성녀 베르나르데트 뮤지컬, 주인공
내가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한 것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단순히 사진이 구도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 사진을 바라보는 해외 네티즌들의 시선이 내 생각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습관처럼 이런 생각부터 떠올렸다.
‘교종이 축복했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저 아이가 치유되지 않는다면 그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해외 사람들의 댓글을 읽어 내려가며 내 생각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프랑스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 다큐멘터리를 기억합니다. 정말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이 가족은 마리 가랑스 외에도 또 다른 장애가 있는 여자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용감한 어머니가 모든 아이에게 쏟아붓는 사랑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관용, 공감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 댓글을 비롯해 어디에서도 ‘눈앞의 기적’을 바라는 기복적인 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이의 병이 씻은 듯 낫기를 바라는 열망보다, 아이를 사랑으로 온전히 품어 안고 살아가는 부모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던 중 어느 장애아 부모의 인터뷰 글을 읽게 되었다.
그 부모의 한마디는 오랫동안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장애를 없애는 것만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세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며,
아이가 세상과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접하는 순간, 장애를 바라보는 나의 편협한 시각이 부끄럽게 다가왔다. 나는 장애를 그저 ‘고쳐야 할 결함’이나 ‘불행’으로만 치부하고 있었다. 물론 치료와 회복을 위한 노력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장애가 사라지는 그것만이 행복의 유일한 조건은 아니다. 장애가 있음에도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함께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사회가 그런 환경을 갖추어 나가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역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다.
지하철의 엘리베이터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장애인을 위한 전용 시설로 도입되었지만, 지금은 노약자와 임산부, 무거운 짐을 든 이용객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편의시설이 되었다. 누군가를 향한 작은 배려가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배려로 확장된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영어: universal design, 보편(적) 설계)은 제품, 시설,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 나이, 장애, 언어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흔히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 '범용디자인'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공공교통기관 등의 손잡이, 일회용품 등이나 서비스, 주택이나 도로의 설계 등 넓은 분야에서 쓰이는 개념이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성당에 가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에 앉으려 하고, 내 뜻과 조금만 다르면 쉽게 서운해하는 나였다. 이런 내게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하겠느냐’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있을까. 20대 초반 보육원에서 봉사할 때, , 입양을 고민하며 아이의 나이, 외모, 건강 상태를 까다롭게 살피던 부모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당시 나는 그들의 타산적인 모습을 내심 비판했지만, 사실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나 또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편한 것, 내가 정의한 ‘좋음’만을 기준 삼아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자, 나의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말로는 늘 기복신앙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의 기도는 얼마나 기복적이었던가.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기보다
“주님, 제가 원하는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떼를 쓰듯 요구해 왔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돌아서 버리기 일쑤였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요구였고, 때로는 협박에 가까운 억지였다. 주님께서 이미 나를 위해 어떤 길을 마련해 두셨는지, 알 수 없는 깊은 섭리 안에서 무엇을 이루어 가시는지도 모른 것은 채 말이다.
‘마리 가랑스’가 교종을 만나는 장면을 볼 때도 나는 ‘치유(기적)’라는 내 기준의 결말만을 앞세웠다. 교종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 아이에게는 따뜻한 부모가 있었고,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있었으며, 아이만의 존엄한 삶이 존재했음에도 이를 보지 못했다. 내 기준으로 이웃과 주님의 뜻을 제멋대로 단단히 오판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득 오래전 한 수녀님이 던졌던 질문이 떠오른다.
성당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수녀님들과 시장도 가고 식사도 함께하던 시절, 어느 작은 수녀님이 내게 뜬금없이 물으셨다. “나 나이롱 수녀 같지?” 그 시절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아마 수녀님도 마음만큼 잘 따라주지 않는 자신의 부족함 속에서 자신을 겸손히 돌아보고 계셨던 것이리라.
이제 그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본다…!
여러모로‘나는 나이롱 신자입니다.’
주님의 뜻을 찾기보다 내 욕심을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고, 내 생각과 다르면 섭섭해하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던 나. 신앙을 가졌다고 믿었지만, 실은 그저 겉껍데기만 둘러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언제쯤이면 이 빈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내 뜻을 내려놓은 채 온전히 주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한 장의 사진이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아이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가?’.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주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사랑의 기적은 이미(‘마리 가랑스’의 양부모에 의해서) 일어났음에도 나는 어디서 어떤 기적을 찾고 있단 말인가?! 참된 신앙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떼써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미처 알 수 없는 주님의 깊은 뜻 앞에서 조용히 나를 내려놓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이롱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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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한 9,1-3)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공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직 우리가 사랑 안에서 충실하기만을 바라십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
아, 이 세상에서 동정하는 자들보다 더 바보스러운 짓을 하는 자들이 어디 있었던가?
그리고 동정하는 자들의 어리석음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온 그것이 이 세상 어디에 있었던가?
자신의 동정심도 뛰어넘지 못하면서 사랑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 애도를 표하라!
언젠가 악마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神에게도 지옥이 있으니,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또 최근에 나는 악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神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神은 죽었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에서)
※ 나이롱 - 나일론의 일본식 발음에서 유래한 은어로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 행세하는 가짜를 뜻하며, '나이롱 신자'는 좁게는 냉담자를, 넓게는 신앙심도 없으면서 종교활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교황님이 집전한 미사에
여섯 명의 다운증후군 소년들이 복사로 함께했습니다.
환한 미소로 기쁨을 나눕니다.
https://youtube.com/shorts/R5tN1JOsaaU?si=-3rCz7Xe0b8rP2k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