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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마당 스크랩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
협화 추천 0 조회 116 12.02.04 11:0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 협화(協和)

2011/07/01 23:53 수정 삭제

복사 http://blog.naver.com/ash856/30112190835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

 아르헨티나 당대의 포퓰리스트 후안 페론은 두 미녀 부인의 내조를 받아가며 아름다운 청사진으로 자신의 2대(10년)와 부인 1대(1년9개월)의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나 지나친 복지 일변도 정책을 쓴 결과 오늘 빈민의 나라(2010년1인당 국민소득 세계62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남미 증후군

 막대한 천혜의 자원의 보고를 간직한 중남미가 답답한 구석이 왜 이리도 많을까! 앵글 색슨이 차지했던 북미와  달리 남미는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라틴족들로 흥청망청 놀고먹기를 좋아하고 정부는 빚을내어 이를 도우며 한편으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챙기는 그런 사회풍토를 두고 사람들은'南美病'혹은'南美症候群'이라 비난한다.아르헨티나는 2차대전을 전후한 시기에는 5대강국으로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잘 나가던 시절 지은 화려한 건물들이 남아있어 '남미의 파리'로 불린다.국토의61%가 비옥한 팜파스 대평원으로 한때 유럽의 곡물창고 역할을 했으며 통조림을 개발하여 엄청난 부를 끌어 모았다.유럽자본이 엄청나게 들어오고 호황를 누려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왔다.1914년 전국토에 지하철도가 개통될 정도였는데 독일이1935년,일본이1942년,한국이1974년 개통된것만 봐도 알수있다.중남미는 부라질만이 2차대전에 참전했을뿐 1,2차세계대전이 비켜갔다.大戰의 파장으로 많은 나라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때 중남미국가들은 곡물과 석유 석탄등 수출로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있었다.이렇게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선진국의 대열에 끼어 승승장구했을 나라들이 불과 반세기만에 후진국으로 전락해 버렸는데 왜 이리 됐을까? 북미의 앵글로 색슨은 이성적이고 꼼꼼한 기질이고,남미의 라틴은 감성적이고 여유있는 기질이라고 그 차이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라틴족의 민족성이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무능한 정부가 뿌린 씨앗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마젤란(포르투갈 하급귀족 출신),콜롬버스(신대륙 발견,이탈리아 제노바 평민 출신, 에스파냐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제독,예정 신대륙의 총독 하사)같은 항해탐험가를 배출한 라틴족이다.정치인의 자질은 국민의 문화의식 수준과 상호 연관성이 있긴 하지만, 중남미의 현재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놓고 볼때는<페로니즘의 뿌리깊은 포퓰리즘,애국심의 결여와 집단이기주의>등으로 요약해 볼수있다.중남미 국가들의 공통점은 정치혼란으로 쿠데타가 거듭된다는 것이다.칠레의 군정 피노체트 재임16년간 3천여명이 사망실종되고, 아르헨티나 군부 비델라의 1977년'더러운 전쟁'으로 당국추정8천~1만명,유가족측 주장 2만5천~3만명이 사망 실종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근황

더러운 전쟁  

실종자들의 사진 일부

 

1974년 페론 대통령 사망후 경제위기와 더불어 정파갈등의 내분이 심했다.1976년3월24일 육군사령관 호르헤 비델라장군은 카톨릭교회의 암묵적 지원으로 쿠데타로 우익군사정권으로 집권하였다.비델라아고티스 공군사령관,미세라 해군사령관과 군사평의회를 구성하고 대대적인 좌익숙청에 돌입하여 칠레 비밀경찰과 美중앙정보국과 협조하여 콘도르작전을 수행해 수천명의 반체제 행방불명자가 생겼다.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 정당,노조활동을 정지시켰으며 1977년~1983년 좌익 게릴라단체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소위 더러운 전쟁을 전개하여 페론주의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등 페로니즘세력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당국추정 8천~1만명,유가족측 주장 2만5천~3만명이 사망 실종 되었다.학생,기자,페론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게릴라 혹은 동조자가 그 피해자이다.300여곳의 변두리지역의 학교나 체육관등을 수용소로 개조해 끌려온 자들의 대부분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눈이 가려진채 대화는 금지되고 성고문 물고문 전기봉으로 고문당하고 온몸이 땅에 묻힌채 목만 내어놓고 햇?과 폭우에 시달리기도 했다.전향, 교화,정보수집 목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꺾어버리기위한 목적이었다.고문에서 살아남더라도 대부분은 살해되었다.시체 처리는 처음에는 땅에 묻었지만 나중에는 비행기로 대서양에 뜰어뜨리는 방법을 택했다.1981년 비델라에 이어 비욜라는 야당과의 대화를 약속하는등 민주적 제스쳐를 취했으나 이에 불만을 가진 군부강경파인 갈티에리 장군의쿠데타로 실각하였다.1982년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60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5월광장 어머니회'를 비롯한 국내외 인권단체의 활동으로 군정에대한 반대여론이 비등하자 갈티에리정권은 3월26일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위해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여 두달만에 패하였다.전쟁패배 책임을 지고 갈티에리 대통령이 사임하고 비뇨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더이상 군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비뇨네는 민정이양을 위한 총선(1983년10월30일)에 앞서 두가지 조치를 취하였다.첫째 피 체포자와 실종자 관련 문서를 파기하도록 밀명을 내렸으며,둘째 이른바 더러운 전쟁에 참가한 모든 군인은 사면한다는 자기사면법을 제정하였다.1983년 당선된 변호사출신 라올  알폰신 대통령은 전 정권의 인권유린행위를 대대적으로 수사하여 44대 로베르토  비올라,45대 레오폴드 갈티에리 군정 대통령 3명은 종신형을 선고하고,장성 경찰간부등 370여명의 군정인사들을 내란 인권유린등의 혐의로 수감했다.그러나 군부의 반발이 거세져서 쿠데타 기도가 잇따르자 알폰신정부는 위협을 느껴 사면법을 제정하고 추가수사는 허지 부지됐다.알폰신 집권초기 군정 청산과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힘썼으며 긴축재정으로 국가경제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에게 돌아온것은 노조의 총파업뿐, 결국 포퓰리즘에 빠져 집권말기 3000%의 인플레를 남겨놓고 다음 정권은 페론당의 카르로스 메넴 이어받는다.시골 주지사 출신의 메넴‘신경제정책’을 발표한다.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공무원을 감축하고 정부기구를 축소하였으며 지방정부에 대한 지원을 끊었고 국영기업을 거의 다  민영화하였다. 또 비동맹 노선을 탈피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 외채문제를 해결했다.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껴 해외에 나가있던 전문 두뇌인력을 국내로 끌어오는 정책도 펼쳤다. 이러한 개혁정책으로 3000%에 달하던 인플레를 1%까지 끌어내리고, 장기간의 마이너스 성장을 '92년 9%성장, 매년 5%이상 성장으로 끌어올렸다. 그래서 한때 메넴은 ‘페론당 소속이면서 페론주의를 버린 대통령’,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지도자’로 평가받았으나 사실은 후환을 남기는 깜짝쇼와같은 경제정책에 불과했고,각종 스캔들과 부정부패로 가택구금 되는등 신임을 잃어 1999년 선거에서 야당연합 후보인 중도좌익 페르난도 델 라 루아에게 정권을 내준다.국민의 절반이상이 월500달러미만의 극빈층으로 생활고에 시달린 빈민들은 상점을 약탈하고 수만명의 시위대가 경제장관의 퇴진을 요구했다. 폭동진압과정에서 10여명이 사망하고 시위가 걷잡을수없이 확산되자 델라 루아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양철냄비와 두껑,푸라이팬,국자,포크등 부엌에서 두들길수있는것은 모두 들고나와 시끌벅적 두들기고 떠들어대는 소위 냄비시위앞에 임기를 절반이상 남겨둔 델라 루아 대통령은 2001년12월 매캐한 최루탄 연기속에 헬리곱터를 타고 황급히 대통령궁을 떠나야했다. 떠나가는 대통령의 헬리곱터 飛行을 본 국민들은 '플라자 데 마요(5월 광장)로 모여들어 국기를 흔들고,  냄비를 이번에는 두들기지 않고 흔들며 춤을추고 기뻐했다.그 즉시 2001년12월23일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했다.2001년12월20일부터 2002년1월1일까지 12일동안 마치 이어달리기라도 하듯이 4명의 대통령이 지나갔다.대통령집무실에 책상을 정리할 시간도없이 기자가 일간신문에 새 대통령의 푸로필을 쓸 겨를도 없이 .'실패시리즈의 연속 / 어떻게하면 나라를 빨리 망가뜨릴수있나 / 12일동안 4명의 대통령이 바뀐 역사적 多大統領 세계 신기록'이라는 신판 백과사전과도 같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것이다.2002년 1월2일 좌파성향의 페론주의자인  에두아르도 두알데 대통령은 디폴트(Default: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이렇게 아르헨티나의 현대사는 쿠데타와 쿠데타의 행진으로1930년부터 2002년까지 재임한 역대 대통령 30명 가운데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난 사람은 후스토페론, 메넴 등 3명에 불과하다. 이 기간 중 경제경책을 총괄하는 경제장관은 50여명으로 평균임기가 1년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아르헨티나 사회는 상호 배타적인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되었고(우리의 남남갈등을 반면교사로 삼아야함) 이들은 상반되는 역사 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아르헨티나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있다. 어느 정권도 장기정책 수립에 필요한 일치된 국민 여론의 형성과 정치적인 정통성을 얻는데는 실패하고있다.원인제공은 지나친사회보장제도와  노동자우대정책을 내건 페론의 페로니즘이 했다.

페론정권은 1947~1951년에 5개년계획으로 중앙은행,철도,도시교통,대외무역,대학,공공시설국유화를 단행하였다.2차대전의 폐허위에 유럽식량을 공급하다시피 막대한 농축산물수출로 벌어들인 이윤을 노동자임금인상과 연금혜택우대,대학무상교육,무상의료에 지출했다.이 페로니즘을 막으려는 우파군부와 복지를 계속향유코자하는 민중 대중집단인 페로니즘과의 갈등으로 아르헨티나의 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아르헨티나의 그 옛날 그 화려했던 5대강국의 영광은 아주 먼 옛날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55대 대통령(페론주의자)

임기:2007년12월10일~현직
"오르는 물가를 감당할수 없다. 생활비를 더 달라.”
  대통령궁에서 연방의회 의사당으로 이어지는 6차선 도로를 10대 청소년, 젊은 부녀자, 60대 노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지방에서 모여들어 ‘생활 보조금을 올려달라’고 적힌 현수막을 흔든다. 시위에 참여하고 있던 다니엘 아라곤씨(42)는 “2년 전에 실직한 뒤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 1200페소(약 33만6000원)로 네 자녀를 키우며 살고 있는데 시위를 하지 않으면 보조금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했다.아르헨티나는 요즘도‘복지혜택을 늘려 달라’라는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근로자, 공립학교 교사, 저소득층, 노인, 농민등 다양한 계층이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임금인상, 생계지원금 증액, 연금지급 증액등을 요구한다.아르헨티나에서 만난 복지전문가들은“현금을 뿌리는 무분별한 복지지출로 정권을 유지해온 정치인과 정부 지원금만 바라는 사람들이 나라를 거덜내고 있다”며 혀를 찼다.
 사라지지 않는 포퓰리즘의 그림자
 아르헨티나는 대학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또 전국 7500개 국립의료시설에서는 보험증이 없어도 누구나 무료의료 혜택을 받을수있다. 이 같은 복지제도의 뿌리는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의 인도 아메리카노 공원에서 빈민 1만1천여 명이 생활비 지원을 요구하며 일주일 동안 점거 농성을 벌이다가 이웃 아파트주민들과 충돌했다. 정부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공원을 점거한 사람들에게 쿠폰을 나눠줬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그녀의 남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전 대통령도 페론의 포퓰리즘 정책 이어받았다.연금 이외에 각종 수당과 보조금도 현 대통령의 작품이다. 현재 실업자 가정에는 실업수당 외에도 자녀 수에 따라 최대 1100페소(약 30만8천원)의 자녀양육수당이 지급되고 저소득 가정에는 매월 200∼380페소(약 6만1천∼10만6천원)의 보조금이 나간다. 무주택 가정에는 여기에 더해 매월 700페소(약 19만6천원)의 집세 보조금이 지급된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집세 보조금을 올해부터 1200페소(약 33만6천원)로 올려주기로 했다.
무분별한 복지에 무너진 경제
 아르헨티나는 비옥한 땅과 1등급 친환경 농산물 생산국임에도 불구하고,그 옛날 5대 강국 그 찬란했던 영광이 이제는 슬럼가의 빈민과 실업자들이 넘쳐나는 가난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생활비가 치솟아 중산층도 생활고를 호소한다. 아르헨티나의 2010년도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62위 이다. 그나마 최근 3년간 국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국민소득을 약간 올려줘 더 밀리지는 않았다.분배 우선의 경제정책과 나눠주기식 복지지출은 아르헨티나가 선진국에서 밀려난 가장 큰 원인이다. 복지지출로 재정적자와 외채가 늘자 아르헨티나는 정부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외국에서 빚을 끌어다 썼다. 4억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곡물과 쇠고기를 수출했지만 정부예산은 포퓰리즘 복지정책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 결과 1970년 58억 달러였던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2004년에는 28배인 1623억 달러로 늘었다. 이에 앞서
2001년에는 대외채무를 갚지 못하겠다며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했다.최근에는 국제 농산물 가격상승 덕분에 매년 9% 안팎의 성장률을 보였지만 방만한 재정지출과 고질적인 超인플레이션으로 경제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국민들은 “더 달라” 아우성이다.
보건부 청사 앞에서는 병원의 간호사와 행정직원 100여 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있다.
하나의 혜택이 나오면 둘을 달라’고 한다.
 아르헨티나 사회보장 제도는 선거 때마다 복지 혜택을 늘리겠다는 공약으로 유권자의 표를 끌어 모은 정치인들에 의해 자생력을 잃어가고있다.첫 틀은 1946년 6월 아르헨티나 노동당을 등에 업고 집권한 후안 페론 전 대통령(아래 사진)이 만들었다. 포퓰리즘의 대부격인 페론 대통령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집권하면서 저비용 고지출 구조의 공공연금을 도입했다. 당시 근로자들은 소득의 8%를 연금 보험료로 내고 은퇴 후 소득의 82%를 연금으로 받아갔다. 연금지급 연령은 47세. 선진국도 흉내 내기 힘든 제도였다.페론은 더 나아가 1952년 대선 당시 연금 혜택 확대 공약으로 지지표를 모았다. 그가 “내게 표를 몰아주면 연금을 더 많이 늘려주겠다”는 기치를 내걸자 득표율은 대선 사상 최고치인 63%로 올랐다. 그해 페론의 재집권 기반은 그의 공약을 믿었던 근로자였다.하지만 이 연금제도는 곧 국가재정을 흔들었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집권한 군부정권은 경제붕괴를 우려해 해마다 연금을 깎고 복지지출을 줄였을 정도였다. 그래도 연금과 건강보험은 1994년부터 나라곳간을 거의 비울 정도로 경제를 압박했다.1994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적연금 제도를 부분적 민영화로 돌렸다. 그는 기초연금을 소득의 28%로 낮추는 대신 가입자가 개인계좌를 열게 해 연금을 모아두는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 개혁은 어설펐다. 오히려 연금이 개인계좌에 묶여 세수가 고갈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2001년 6월 국가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55%에 이르자 페르난도 델라 루아 대통령은 연금수령액을 평균13% 삭감했다.정부가 GDP의 3%를 연금에 지원했지만 적자를 메우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001년 1월 에두아르도 두알데 대통령은 재정적자 누적에다 실업률이 20% 이상 치솟자 대외부채 상환 불이행을 선언했다. 그러자 연금제도가 제 기능을 잃었다. 시민들은 연금 계좌에서 돈을 빼가며 가입을 거부했다. 당시 연금가입자는 매년 26%씩 줄었다. 국가도 연금기금을 마지막 보루로 여기고 연금운영회사에 국채 인수를 떠맡기는등 기금 탕진에 앞장섰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전임자이자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임기 2003∼2007년)도 정치적 성장 배경에서는 페론의 분파로 분류된다.現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08년 11월 기간산업 국유화와 함께 민간 연금회사를 국영으로 바꾸고 연금기금도 국고로 환수했다. 모델은 좌파 독재가 득세한 베네수엘라였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당시 의회선거에서 참패할 기미가 보이자 연금 수급액을 50% 올려 유권자의 환심을 샀다. 국유화로 끌어들인 연금 기금은 실업자 일자리 돕기나 국채 발행에 이용되기도 했다. 사회안전망 역할을 해야 하는 연금 기금은 2009년부터 올해까지 대외채무 383억 달러 상환에 이용되는 등 아슬아슬한 곡예를 계속하고 있다.
후안 도밍고 페론
*아르헨티나의 제29대 대통령;임기(1946년6월4일~1955년9월20일)/ 9년3개월16일 재임)
전임:에드미로 파레이;군부(28대)
후임;에두아르도 로나르디;군부(30대)
*아르헨티나의 제41대 대통령;임기(1973년10월12일~1974년6월30일/8개월 18일 재임)
전임:라울 라스트리(제40대)
후임:이사벨 데 페론(제42대)

출생 사망:1895년10월8일~1974년7월1일(79세 사망)

출생지: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배우자: 1.아우렐리아 티손   2.에바 두아르테   3.이사벨 데 페론                               

Juan Domingo Per?n

 

대통령으로 처음 즉위한 후안 도밍고 페론

 후안 도밍고 페론 페론주의 운동을 창시했으며 대중인기 영합주의(포퓰리즘)정책으로 비판을 받는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1883년 페론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로게페레스의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리오 토마스 페론은 이탈리아系 이민자로 의학도였는데, 결핵 치료를 위해 로케 페레스라는 작은 마을로 요양을 갔다.이 곳에서 마리오 토마스 페론은 떼우엘체족 원주민 소녀 후아나 소사 톨레도를 만나 후안 페론을 낳고 동거생활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원주민을 적대시 했기 때문에 마리오 토마스 페론의 본가는 그들의 동거 사실과 후안 페론의 존재를 숨겼다. 페론은 9세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됐다. 페론은 육군사학교를 졸업했다.후안 페론은 1929년1월5일 아우렐리아  티손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9년 후 자궁암으로 사망했다.1938년 후안 페론은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독일,알바니아의 아르헨티나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이 시기 무솔리니파시스트와 히틀러의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전문가들은 당시 페론이 히틀러의 저서를 즐겨 읽고 파시즘의 대중 흡인술에 심취하면서 이것이 훗날 페론주의를 낳게 했다고 이야기한다.

1943년 아르헨티나 군사정부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 '1943년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아르루르  라우손 지휘 아래 일어난 이 쿠데타는 보수성향의 라몬 카스티요 대통령에 반대했다.페론 대령은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공로로 노동부장관으로 승진했다. 노동부장관 재임시절, 아르헨티나 노동조합 내부의 생디칼리즘 세력과 사회주의운동 세력이 연합하도록 했다.

에바 두아르테와의 만남

에바 두아르테와 함께

 1944년 산후안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6천여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페론 노동부장관은 에바를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 모금회에서 처음 만났다.첫 번째 부인을 자궁암으로 잃고 독신으로 살던 후안 페론에바 두아르테 미모에 빠져들었고,곧 두 사람은 동거했다. 기금 마련으로 하층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후안 페론 부통령을 역임하면서 군부와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확보하고 후안 페론에바 두아르테 1945년 24세 나이 차이로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그 다음해 대통령선거를 준비했다.

페론의 첫번째 대통령 집권

1946년 페론오르텐시오 키하노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아르헨티나 대선에 출마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급진시민연합당에 약 11%차이로 승리했다.그는 집권시기동안 사회정의와 자립경제를 동시에 추구했다.이 두가지 목표를 내세우면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냉전참여를 거부했다.페론은 CGT라는 거대한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또한 외채를 갚고 국유화정책을 추진했다.집권하는동안 사회보장제도를 크게확충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난의 원인 제공자인 페로니즘

'페론주의'(페로니즘)라고 하는 민중 대중적 포퓰리즘은 아내 에비타와 함께 이때를 전후해 생겨났으며 나라 경제는 이를 시발점으로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페론은 농축산물 수출 의존에서 공업발전으로 자립할 계획으로 외국인 소유의 철도·전화 회사들을 국유화하고, 1947년 7월에「경제독립을 선언하면서 모든 외채를 청산했다. 노동자 지위향상으로 노동자 소득향상을 통해 내수를 진작해서 공업발전을 도모하려했으나, 그러나 노동자 향상정책 치고는 지나쳤다.1947년  임금을  25%상승시켰다.이듬해에 다시24%를 상승시켰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우유 같은 각종 생필품을 집 앞에 나눠줬다.과도한 분배정책으로 國庫가 바닥나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자 종래의 경제 자립 노선과는 모순되게 광공업에 대한 적극적인 외자유치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外資가 들어올 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해군 항공기가 대통령궁을 폭격하는가 하면, 지방 주둔 군부대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등 군부마저 페론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1955년 9월 페론로나르디장군의 쿠데타로 실각, 국외로 추방되었다. '분배’라기보다는 민심을 얻기 위해 무조건 ‘퍼주는 정책',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남발하는 선심정책은 이후 ‘페론주의’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페론주의의 망령은 페론 축출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복지혜택에 한번 맛을 들인 국민들은 인플레가 수천%에 이른 상태에서 고육지책으로 실시되는 긴축정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미 노동자들의 생산성은 저하되었다. 빚을 내어 빚을 갚는 악순환도 반복되었다.페론이후 메넴(1989~1999년)은 태환정책으로 페소화와 달러화의 가치를 1:1로 고정시켰다.이는 일시적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5000%의 인플레를 잡고 경제성장률을 플러스로 돌려놓고 실업률을 끌어내리는등 한때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사실은 후환을 남기는 깜짝쇼,경제이벤트에 불과했다.달러화에 자국 화폐를 고정시키게 되면 당연히 자국 화폐의 가치를 상승시켜 수출경쟁력을 약화시킨다. 이는 경상수지 적자폭을 증가시키고 당연히 외환보유고가 감소한다.자국화폐의 가치를 지킬 수도 없으면서 일단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달러에 페소화를 고정시킴으로써 몇 년 후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불러온 것이다. 또한 고정환율제는 통화정책의 주권을 사실상 상실하게 되어 위기가 닥쳤을때 국가가 통화정책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통로를 완전히 봉쇄해 버리게 된다. 전문가들은 현 아르헨티나 사태의 제도적인 요인의 하나로 이러한 고정환율제를 들고 있으나,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역시 페론의 분배정책에 가 닿는다.이 한 다음의 일은 공기업 민영화이다. 메넴정권이후 등장한 델라 루 정권의 가장 큰 고민의 하나는 “더이상 팔 기업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메넴 집권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민영화정책을 밀고 나갔다. 민영화할 수 있는것은 다 민영화한다는 방침아래 전화, 수도, 전기, 항공, 정유회사, 은행은 물론이고 동물원까지 민영화하였다. 심지어 軍소유의 기업을 민영화하고 병영지는 부동산으로 처분했다.그런데 이러한 민영화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공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며 국가경제를 건전화하기 위한 민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일단 당면한 외채를 갚기 위해 국가재산을 ‘처분’하는 것에 불과했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과거 국가가 운영하던 기업의 98%를 민영화해버렸다. 메넴 정권 하에서 팔아먹을 것은 다 팔아먹었으니 덩그레한 빈 집터만 이어 받은 델라  루아 정권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메넴은 법정에 섰고, 결국은 가택 구금되었다. 혐의는 무기밀매.전처와 이혼하여 딸을 퍼스트 레이디로 데리고 다녔고, 퇴임 후에는 자기보다 34살이나 아래인 칠레  미스 유니버스 출신의 스타 세실리아 볼로코와 결혼식을 올렸다. IMF 차관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일단은 IMF의 정책 권고를 따라야했으며, 재정적자 감축을 위한 긴축정책을 추진하였다. 결국 이것이 이번 아르헨티나 사태를 불러온 또 하나의 요인이요 델라 루아가 헬리곱터를 타고 떠나야하는 현상이 벌어진것이다..이러한 아르헨티나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을 수 있다. 철학 없는 민영화, 특히 부패한 정권이 추진하는 민영화는 민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國富를 팔아먹는 것에 불과하다. 혹자는 아르헨티나의 파산을 신자유주의의 실패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은 분석이다. 아르헨티나는 정책에 일관성 없고 신자유주의와 역행하는 정책으로 좌충우돌했으며, ‘부패한 정부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아르헨티나의 민영화 실패 원인은 바로 옆에 칠레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드러난다. 칠레 사람들은 남미의 다른 나라와 자기 나라를 비교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 나라는 동쪽으로는 산맥이 있고 북쪽으로는 사막이 있어 남미에 위치했을 뿐이지 고립되어 있어 풍속과 국민성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제 칠레는 남미 국가 중에서 가장 부패가 없고 투명한 나라로 꼽힌다.칠레 역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와 비슷한 시기에 공기업민영화와 구조조정, 규제완화, 자유무역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칠레는 85년부터 89년까지 3차에 걸쳐 전력, 통신, 보험, 의약, 제당, 석유, 철광, 화학, 항공 부문을 민영화했고 중앙은행을 독립시켰다.또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세계적으로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꼽히게 되었다. 시장개방으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1992년 노사정이 참여하는 ‘민간대외경제관계위원회’를 구성하여 함께 테이블에 앉았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세금을 인상하였다.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유난히 긴 지리적 불리함을 오히려 통신과 IT산업으로 살려 현재는 남미의 IT 강국으로 불리고있다. ‘라틴아메리카의 표범’(Jaguar of Latin America)이라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차이는 부패한 나라와 깨끗한 나라, 정부의 지도력이 부재한 나라와 정당정치구조가 확실한 나라, 백년대계의 전략없이 임기응변하는 나라,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성있게 정책을 밀고 나가는 나라, 인기영합정책 하지 않고,정부는국민설득, 국민은 정부에 호응을 잘하는 나라의 차이이다. 

페론의 망명

 1952년 에바부통령으로 지명하고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가톨릭교회와 군부와 반목했는데 1955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정권을 잃고 망명했다. 에바를 역시 자궁암으로 잃은 페론은 1955년 망명지 파나마에서 이사벨 마르티네스 데 페론 만난다.그는 이사벨을 자신의 개인비서로 채용했다.1960년 페론은 망명지를 스페인으로 바꿨는데, 이사벨도 그와 함께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했다.그는 망명기간동안 여러 전투적인 좌익조직을 지원했고 극좌페론주의 조직인 몬토네로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또한 그는 극우 및 보수세력도 지원했다.

페론의 두 번째 대통령 집권과 사망

 1973년3월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페론 개인비서이자 페론주의 좌익인 엑토르 캄포라(39대)가 승리했다.후안 페론호세 로페스 레가를 아르헨티나로 보내면서 사회복지부장관으로 지명했다. 같은해 6월 호세 로페스 레가 에세이사 학살을 일으켜 좌우익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1973년7월13일 39대 엑토르 캄포라 대통령이 갑작스레 사임하고 라울 라스트리(40대)가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40대 라울 라스트리는 새로운 대통령선거를 치루기위해 구성한 임시정부로서 이 기간에  호세 로페스 레가는 아르헨 반공주의자동맹을 설립해 국가주도로 좌익세력을 탄압했으며 이로인해 페론이 재집권할때 즈음 좌우익간 갈등과 정치폭력으로 사회가 매우 혼란해졌다.같은해10월12일에 40대 라울 라스트리 대통령마저 사임해,아르헨티나의 대통령직위는 공석이 되었다. 페론은 아내 이사벨을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대선결과 페론이 대통령,이사벨이 부통령으로 당선됐고, 1973년10월 12일 취임했다. 후안 페론은 취임직후 페론주의 좌익세력을 국가변란 폭동을 기도하는 세력이라고 지칭하면서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좌익페론주의자와 페론의 갈등은 페론주의 청년단에 속한 의원 8명이 사임하는 사태로 나타났다.고령의 페론은 건강이 악화되어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대행해야 했으며, 결국 페론은 1974년에 사망하고 이사벨이 부통령의 자격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페론의 손목절단 사건

1987년6월10일 누군가 페론 가족의 묘에서 페론의 시신의 손목을 절단하고 달아났다.이 사건의 범인과 동기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다양한 가설이 있으며, 페론주의적 민주화에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더러운전쟁주역에 대한 군부숙청작업을 벌이고있는 라울 알폰신 대통령을 위협하기 위해 저질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페론의 평가

'포퓰리즘'으로 대표되는 '페론주의'가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쳤다. '페론주의'에 따라 이루어진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사회보장정책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파탄시켰다.

'페론주의(페로니즘)’라고하는 민중 대중적 포퓰리즘은 아내 에비타와 함께 이때를 전후해 생겨났으며 나라 경제는 이때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후안 도밍고 페론은 ‘민중주의자’ 혹은 ‘대중영합(大衆迎合)주의자’라고 부른다.‘포퓰리즘(Populism),포퓰리스트(Populist)’라는 말에 페론은 그 창시자라고 할 만큼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에바 페론(애칭:에비타)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두번째 부인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애칭인 에비타(Evita)로 불린다.
출생 사망: 1919년5월7일~1952년7월26일(33세 사망)남편과 나이차이 24세
출생지: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로스톨도스
  
  

1941년때의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

출생

 부에노스 아이레스주의 작은마을 로스톨도스의 농장에서 부유한 농장주인 후안 두아르테와 그의 정부 후아나 이바르구엔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후안 두아르테는 정식부인이 따로 있었고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에바와 다른 딸들을 법적인 딸로 인정하지않았다. 생부에게서 버림받은 에바는 어머니와 함께 후닌으로 가 그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그들은 후닌에서 한동안 방 한칸짜리 아파트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나 생모의 가족의 도움으로 더 큰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에바는 학창시절, 학교 연극과 연주회에서 재능을 발휘하여 주목을 받으며 영화배우가 될 꿈을 키웠다. 에바는 15살인 1935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와서 연예계 진출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모델로 활동하다가 연극영화배우 라디오성우등으로 차츰 이름을 알려 1940년경부터 유명 연예인이 되었고 라디오방송국을 소유하는등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에바 페론 재단에서의 활동
 
 연설하는 에바 페론
 활동
 에바는 남편의 선거 유세 자리에 동행하며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린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후안 페론은1946년6월 대통령에 취임했다.에바는 정부 내에서 공식적인 직책에 오른 적은 없으나 노동자와 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을 펼칠수있게 하는것을 가능하게 해주며 사실상의 보건부장관 자리에 있었다. 1947년에는 유럽여러 나라를 방문하였으며,대통령인 남편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스페인에서는 가난한 아동들에게 구호활동을 펼쳤고,프랑스에서는 샤를 드골을 만나 식량지원을 약속했다.한편 정의당의 분파인 여성페론당을 결성하여 그 대표로 있었으며,이를 통하여 여성 참정권 도입등의 여성운동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노동단체 기업등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에바페론재단을 설립하여 그 대표를 겸했다. 에바 페론재단의 기금은 학교 병원 양로원등을 건립하고 각종 자선사업을 하는데 쓰여지면서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상류층과 군부와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사망

차츰 그녀의 개혁에 대한 모순이 드러나는 가운데, 그녀는 1950년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건강이 차츰 악화되어가는 가운데 1951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군부는 부통령 지명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여 10월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다.11월 대선에서 남편은 재선에 성공했으나, 에바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 다음해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기 전에 남편은 그를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 올렸다. 그러면서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위해 자신의 병마를 이를 악물고 숨겨왔다. 그러나 그의 암은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1952년7월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에바 페론의 장례식
 사망 이후

국민의 애도 속에 국장이 치러졌고, 이후로도 국민들은 그녀를 여원히 아름다운 미녀로 기억했다. 아르헨티나는 그녀에 대한 평가로 이후 큰 혼란을 겪게 되며 노동자와 민중에서는 그녀를 성녀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한 반면 정적들은 국민들에게서 그녀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런 가운데 개혁의 모순으로 인하여 남편은 정치적 궁지에 몰렸으며 결국 1955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새 정부에서 먼저 할 일은 페론주의의 상징인 그녀를 아르헨티나 정계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있던 그녀의 시신을 은닉하여 이탈리아로 빼돌렸다. 1971년시신은 스페인에 망명중이던 후안 페론측에 인도되었고,1975년 후안 페론의 다음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아르헨티나로 송환하여 대통령궁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다시 쿠데타가 일어난 후 군사정권은 유해를 제거했으며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구역의 공동묘지의 두아르테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에바 페론의 묘

 세상을 떠난지 5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추모 열기는 계속되고 있다. 약자를 위한 복지 정책을 내놓아 대중의 칭송을 받았으나,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가뜨린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여러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고, 여러 차례 영화화 되었으며 뮤지컬(에비타)로도 제작되었다.

33세의 짧은 인생을 살다간 미모의 여성 에비타는 모성애적이고 온화한 품성을 한몸에 지닌 아름다운 여성으로 아르헨티나 빈민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 에비타의 한달동안의 국장은 조문행렬이 3km에 달했다.빈민출신 에비타는 온갖 역경을 딛고 국모가 된후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해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아 인기를 한몸에 받았으나 선심성 정책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페로니즘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보수층으로부터 받고있다.애절한 음의 ‘Don’t cry for me Argentina’로 기억에 남는 뮤지컬 ‘에비타’를 통해 지금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여러 공원에선 에비타와 페론의 흉상이 여기저기 세워져있고 그 흉상 앞에는 꽃과 양초가 즐비하다.경제가 어려울수록 그의 묘소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하니 그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심어놓은 인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실감이 난다.그녀는 페론의 출세를 위해 무엇이든 가리지않고 최선을 다했다.그러자 페론 헌신적인 그녀에게 신뢰와 사랑를 느껴 첫번째 부인을 자궁암으로 잃고 독신으로 있는 페론은 그녀를 받아드렸다. 에바 페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아르헨티나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그는 ‘聖女’이다.에바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빈민촌을 찾아가 가난한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 집과 먹을 것을 제공해주었다. 땟국물에 절고 씻지 않아 쉰내가 나는 그들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힘껏 껴안으며 격려해 주었고, 심지어 매독이 심해 입술이 두개로 갈라진 여자의 입술에 입 맞추며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자선사업에 드는 많은기금은 어쩔수없이 국고로 충당되어 쓰여졌다.남편을 설득하여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그대로 본뜬 페론주의를 내걸었다.페론주의하에서 외국자본의 추방,기간산업의 국유화,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한 노동입법추진, 노동자 생활수준향상, 여성노동자의 임금인상및 여성지위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평등의 헌법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등을 이뤄내 노동자와 여성 빈민들이 그녀를 후원하고 지지하였다.이렇듯 폭넓은 민중 대중적 지지및 정치적 권력기반이 서자 그녀는 남편과 자신의 우상화작업에 착수했다.초등학생들로 하여금 매주 페론부부를 찬양하고 기리는 글짓기숙제를 하도록하였으며 스페인어 수업시간에는 에바의 자서전<내 인생의 사명>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했다.그녀는 정부의 요직에 깊이 간여하며 그녀에게 대적하려는 정치가들을 핍박하였다.무엇보다도 군대를 비대하게 증강시켰으며 무리하게 중화학공업계획을 추진하였고 이 중화학공업은 국가산업에 유익한사업으로 잘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외국자본이 이익을 너무많이 챙겨서 추방함으로써 유럽자본력의 힘이 컸던 아르헨은 갑자기 자금에 큰 타격을 입었고,이미 시작한 화려한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자보호정책으로 국고가 비어졌으며,기간산업의 국유화 와중에 기업인들과의 큰 불화로 많은 기업들이 외국으로 떠나버린것이 경제난의 시작이었다. 노동자 휴가는 한해 157日(年 作業日의 40%休日)이나 되었다.그나마 남아있던 기업들은 연쇄도산으로 실직자들이 크게 늘어났으며 경제상황은 눈에띄게 악화되어 국민들은 높은 물가고에 시달려야했다.그러던중 그녀는 척수백혈병에 자궁암까지 겹쳐 33세의 젊은나이로 세상을 떠났다.페론은 아내를 미이라로 만들고 장례식은 한달간의 국장으로 조문행렬이 3Km에 달했다.에바의 미이라는 전노련 건물에 전시되었다.그러나

1955년 카톨릭교회를 업은 우파 군부에 의해 10년간의 페론 정권이 종식되었다.페론이 망명길에 오름에따라 에바의 시신도 수난을 당했다.군부는 에바의 시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왼쪽귀 일부와 손끝을 잘라 조사했다.에바의 시신으로 확인되자 시신을 없애려 했지만 페로니즘의 반발과 상징적의미 때문에 쉽지않았다.그리고 페론주의의 부활을 염려한 군부지도자들이 시신을  훔쳐 멀리 이탈리아로 옮겨 숨겨버렸다.그러자 노동자들과 여성들로 이루어진 페론주의자들이 반발에 의해 그녀 시신은 마드리드에 망명중에 있던 페론에게 넘겨졌다.페론을 무너뜨린 군사정권은 초기에는 노동,경제 문제에 직접 관여하기를 꺼려했다.이것은 그동안 강력한 노조기반과 투쟁 경험을 축적한 노조와의 전면적인 충돌이 내전으로 확대되어 아르헨티나 사회가 불안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상황은 달라져서 군사정권의 초기정책에 반발한 노조가 일으킨 파업과 잦은 폭동에 군부는 단호히 대대적인 노동 탄압정책으로 전환했다.그리고 농촌 사회를 활성화 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화폐의 평가절화와 가격 현실화를 추진했다.이런 상황속에서 군사정권은 전노련을 직접 장악했고 많은 노조의 법적 지위를 박탈했으며 수백명에 이르는 페론주의 노동자를 구속했다.이와같은 탄압은 자유주의 진영의 최우선 과제인 경제 안정을 이룩하는데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페론주의의 강화를 역설적으로 가져왔다.1955년에 집권한 군사정권이 융합보다는 배제에 치중하고 노동계급의 물질적 기반과 조직에 전례없는 타격을 줌으로써 이에 반발한 페론주의 노동자들은 탄압과 배제에서 오히려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자유주의 우파정권들은 그 지도부가 민간 정치인이든 군부이든간에 '페론주의 노동자에게 억압정책'을 취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반항적으로 더욱 일어났다.페론주의자들은 정치에선 계속 배척당했지만 어떤 민정이나 군정도 그들의 지지 없이는 아르헨티나를 효과적으로 통치할수가 없었다.거듭되는 쿠데타와 반란 폭동 물가폭등등 경제난으로 아르헨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겨났던 페론이 에바시절을 그리워하는 노동자들과 여성들과 빈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1973년 다시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망명지에서 결혼한 이사벨 페론 부통령직에 앉히고 페론주의를 부활시키고자했으나 10개월도 못되어 갑작스레 병으로 사망하였다.후안 페론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세번째 아내 이사벨 페론에바(에비타)의 미이라를 대통령관저로 옮겨와 자신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대 하고자했으나 21개월만에 일단의 군장교들에 의해 대통령궁에서 헬리곱터로 납치되어 감금된다.

이사벨 마르티네스 데 페론

이사벨 마르티네스 데 페론

임기:42대;1974년6월30일~1976년3월24일(1년9개월 재임)

        전임:후안 페론(41대)

        후임: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군부(43대)

출생:1931년2월4일~2011년        (80세사망,남편 후안 페론과의 나이차이:36세)

출생지:아르헨티나 라리오하주 라리오하

 

아르헨의 무용수 출신여성 정치인이다. 후안 페론 대통령의 세 번째 부인으로 남편의 러닝메이트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부통령이 되었다. 후안 페론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경제파탄과 정치혼란으로국민들의 반감을 사다가 1976년 쿠데타로 실각했다.

라리오하주 라리오하의 넉넉치 못한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 무용수로 일했고 이 때부터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했다.

1956년경 파나마로 망명을 간 후안 페론은 두번째 부인 에바 페론(에비타)을 잃고 독신으로 지내던중 이사벨을 만나게 되었다.후안 페론이사벨을 자신의 개인 비서로 채용했다.1960년 후안 페론은 망명지를 스페인으로 바꿨고, 이사벨은 그를 따라 스페인으로 건너갔으며, 두 사람은 36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함께 살다가 그 이듬해 정식으로 결혼했다.이사벨은 1960년대와 1970년대초 여러 차례 아르헨티나로 가서 후안 페론시대의 국민의 추억을 상기시키며 후안 페론의 정계 복귀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그런 가운데 1973년 대통령선거에서 페론주의를 내건 정의당의 토르 호세 캄포라 당선되었다.이는 곧 후안 페론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캄포라는 곧 스스로 사임했으며 페론 부부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서 다음 선거를 준비했다.국민들의 반대 움직임이 있었지만 호세 로페스 레가의 제안으로  페론의 러닝 메이트로 이사벨이 지명됐다.선거 결과 페론이 대통령,이사벨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어 1973년10월12일 취임했다. 그러나 고령의 페론은 건강이 악화되어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대행해야 했다.결국 페론은 1974년에 사망했고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로써 이사벨은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됐다. 부통령으로 있다가 대통령의 궐위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이므로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었지만 국민의 반감이 심했으며 이전 정권의 인플레이션 사회갈등 정치폭력등의 문제를 그대로 물려받았다.재임도중 국외로 추방당해 1975년9월13일~1975년10월16일까지 이탈리아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재임하고 그녀는 낮은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해 국민의 인기가 높았던 에바 페론의 계승자를 자처하고  에바의 향수를 달래기위해 외국에 있던 에바의 미이라를 아르헨티나로 송환하는등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했으나 반감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경제는 파탄상태에 이르렀고 물가를 잡기 위해 화폐 발행을 늘렸지만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해졌고 이에 항의하는 폭동이 이어져 국가는 거의 무정부상태에 이르러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됐고 군부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집권 내내 좌파 게릴라의 준동과 우파 암살단의 보복테러등으로 인한 정국 혼란에 시달렸으며 결국 1976년3월 비델라의 군부쿠데타가 일어나 축출되고 말았다.비델라 군부는 이른바 잔혹한 더러운 전쟁을 치르게된다.군부의 군사반란으로 5년간 가택연금을 당한 이사벨은 1981년 재임 중의 부패혐의로 기소됐다가 가석방된 후 외국 망명이 허용돼 스페인으로 떠났다.1983년사면되었으나 아르헨티나로 돌아오지 않았고,1985년 정의당의 당수직도 사임해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 후 몇 차례 아르헨티나로 돌아가 정계 복귀 시도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계속 스페인에 머물렀다.2007년 아르헨티나 법원이 그녀의 대통령 임기 중 일어난 반체제 인사의 의문사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해 일단 스페인 법정에 출두했다. 하지만 2008년4월 스페인 사법부는 그녀의 아르헨티나 송환을 거부하는 결정을 했다.당시 아르헨티나 법원에서 적용한 혐의는 1976년2월 좌파인사 엑토르 알도 파게티 가예고의 실종및 미성년자인 호르헤 발렌틴 베론 체포사건과 집권기간 극우 비밀조직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 트리플A(AAA)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살인사건에 연루된 혐의이다. 트리플A는 1973년~1976년 사이 최소한 1500명의 정치적 반대자를 살해한것으로 알려져 있다.더러운 전쟁의 과거 청산작업은 2003년 5월 현 55대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남편인 54대 키르치네르 좌파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다시 불씨가 살아났다.<국가기억자료보관소>가 설치되어 지금까지 5,400여건의 인권유린 사례를 추가로 접수하고, 재판 녹취록,영상 자료, 언론 자료, 수만명의 실종자와 가족들에 대한 DNA 뱅크에 이르기까지 150만 건의 자료를 모으고 디지털화했다.그간 묻혀왔던 군대의 모든 비밀자료들을 공개하겠다는 국방장관의 발표도 있었다. 2005년 6월 대법원은 1986년의 기소종결법을 무효화하고 국가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2005년 10월 연방검찰이 인권유린 가해자 295명을 한꺼번에 체포하는등 약 460여명 이상이 구속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리고있고,추가로 762명에 대한 체포영장이 신청된 상황이라고한다.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됐던 라플라타 강변에는 기억의 공원이 조성되었고, 피의 신음소리로 가득찼던 해군공병학교에 군정 역사박물관을 건립 중이다.더러운 전쟁이 시작된지 35년이 지난 오늘 아르헨티나 현 55대 페론주의자 크리스티나 정부와 민중들의 이러한 과거 청산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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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02.04 11:05

    첫댓글 생명이 있는곳에 경쟁이 있다. 경쟁으로서만이 차원높은 발전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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