찹쌀 쪄서 술담 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박아 제일 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거리 맑은 술로 떠낸다음 청수 붓고 휘휘 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일 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 걸고 소주 내려 묻어두네
피난 나온 권속들이 스무 명은 족하 온데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살림 도맡아서 보리쌀로 절구질해 연기불로 삶아건 져 밥도 짓고 국도 끓여 두 번 세 번 차려내고 늦은 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 풀솜 천근만근 무거웠네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 돌려 실을 뽑아 날줄들을 갈라 늘여 베틀 위에 걸어놓고 눈물한숨 졸음 섞어 씨줄들을 다져 넣어 한치두치 늘어나서 무명한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 내려 삶아내서 햇볕으로 바래기를 열두 번은 족히 되리
하품 한번 마음 놓고 토해보지 못한 신세 졸고 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 꿰어 무거운 눈 올려 뜨고 한뜸도 뜸 꿰매다가 매정스러운 바늘 끝이 손톱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 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내 자식들 해진 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수발 어찌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는데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 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 안 차 맵고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침침해진 눈을 들어 방내 부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 가득 차내 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 녀석 세워 안아 놋쇠요강 들이대고 어르리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 시키면 일할엄두 사라지고 한숨만이 절로 난다
학식 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봉사 제사들은 여나무번 족히 되고 정월한식 단오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 해도 거들사람 하나 없고 여자라곤 상전 같은 시어머니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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