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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11월22일 월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체칠리아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이며,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순교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260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성녀에 대한 신심이 널리 전파되었다. ‘체칠리아’라는 말은‘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주는 말이다. 흔히 비올라나 작은 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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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데서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I tell you truly, from their surplus wealth, has offered her whole livelihood.”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루가 21,1-4)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rest;
for those others have all made offerings
but she, from her poverty,
말씀의 초대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시온 산 위에 서 계시는 어린양과 그분을 따르는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단위 가운데 가장 낮은 단위다. 보기에도 하찮은 금액을 봉헌하는 과부를 주님께서는 눈여겨보시며 그녀의 희생과 정성을 칭찬하신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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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개신교의 십일조(1/10) 헌금에 대해서 가끔씩 빈정거릴 때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헌금하는 것을 못마땅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일조 헌금은 구약 시대 때부터 내려온 헌금 방식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신앙심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교회법을 지키는 것을 못마땅해하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십일조를 봉헌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봉헌하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교리를 좀 안다는 신자는 “교무금 1/30, 헌금 1/30, 불우 이웃 돕기 성금 1/30”을 봉헌한다고 대답합니다. 합치면 십일조라는 이야기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실제로는 십일조가 되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수입의 십일조는 굉장히 큰 액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 큰 액수를 개신교 신자들은 두말하지 않고 봉헌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특별 헌금까지 낸다고 하니, 천주교 신자는 적어도 헌금에 관해서는 그들의 믿음을 따라갈 수 없을 듯합니다.
주님께서는 헌금을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과부는 일용할 양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그 양식 이외의 것은 모두 봉헌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주일 헌금은 차치하고라도, 교무금 책정을 가지고 다투기도 하고, 더러는 성당마저 등지는 경우를 봅니다. 이럴 때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봉헌은 정직하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해야 합니다. 설마 주님께 봉헌하는 것은 정직하고 정성스럽지 못하면서, 얻어 누리려는 은총은 누구보다도 더 크게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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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은 정성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헌금함 앞에 섰는지요?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바치는 헌금이어야 합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합니다.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바칩니다. 하루를 ‘기쁨으로’ 희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정성에 감격해하십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가운데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두 닢’의 헌금이라면 주목받을 액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가난한 여인의 ‘마음’을 읽으셨기에 주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그녀의 소박한 믿음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물질이 부족한 것만 가난이 아닙니다. 시간이 부족한 것도 가난이고, 마음이 바쁜 것도 가난입니다. 일상에 떠밀려 허겁지겁 살고 있다면, 물질이 넘쳐도 부자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바치는 시간도 주일 미사가 거의 전부입니다. 그 시간에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요? 한 주간 살아온 삶을 바쳐야 합니다.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다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봉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분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헌금을 보고 계십니다. 한 주간의 ‘아픔’도 헌금 속에 함께 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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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어디를 보고 계셨을까요? 얼굴 표정이나 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몸 전체를 다 보고 계셨을 겁니다. 헌금은 정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정성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정성은 몸가짐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물건 사고 돈 내듯 헌금한 것은 아니었는지, 신자라는 의무감 때문에 헌금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시다.
헌금은 당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좋아서 하는 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성이 됩니다. 액수가 많고 적음은 별문제입니다. 정성이 들어 있어야 참된 헌금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성으로 헌금하는 여인을 보셨습니다. 액수는 적었지만 내용이 그분을 감동시킨 것이지요. 여인은 자신의 생활비를 바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행동입니다. 자신의 생활비를 바치다니, 그럼 무얼 먹고 어떻게 산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인은 바쳤습니다.
물론 가난한 여인이었기에 생활비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생활비를 바친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바친 것이 됩니다. 먹지 않아도 좋다는 희생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정성을 그렇게 희생으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표시를 받은 그리스도인
-경규봉 신부-
요한은 환상 중에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있는 것을 본다. 여기서 시온 산은 지상에서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을 뜻한다. 어린양과 함께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완성된 교회를 뜻한다(로마 2,28-29; 9,6-7). 이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13,16)과는 달리 이마에 아버지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씌어져 있어서 이들이 하느님께 속한 백성임을 보여준다.
‘큰 물소리’는 크고 우렁찬 소리를, ‘요란한 천둥소리’는 위엄과 승리를, ‘거문고 소리’는 아름다운 선포와 조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늘의 찬양은 크고 위엄차고 듣기에 아름다운 소리일 뿐만 아니라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성도들을 환영하는 천사들의 노래이다. 이는 지상에서의 승리와 하늘나라에서의 기쁨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는 죄 가운데 있는 옛 사람들은 배울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마음과 생명이 새로워진 새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2,17; 로마 8,1-6; 12,2).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은 그리스도의 피로서 하느님께 구원된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도장을 받고(7,4-8)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든 사람들이다(7,14).
이들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순교(殉敎)한 이들로서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짐으로써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하느님께 속하게 되었다(출애 23,19; 야고 1,18). 이들은 거짓말을 모르고 흠도 없는 깨끗하고 정결한 이들로서 지상에 사는 동안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순결을 간직한 이들이다(히브 9,14;1베드 1,19).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요한 3,5)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중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느꼈던 것이다. 세례는 그처럼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소중한 의식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고 다시 태어나게 되어 하느님의 유산을 물려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때문에 교회는 일찍부터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었고, 죽을 위험에 처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세례를 베풀도록 가르쳤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환상 중에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마에 주님의 표시가 각인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천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지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표시를 받은 하느님의 사람임을 기억하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굳게 믿고 감사드리자.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며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는 고귀한 하느님의 백성임을 감사드리자.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충실히 살아가자..............◆
바로 이 마음은 인간의 편에 기준을 맞춘 생각이었음을 이렇게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깨닫게 됩니다. 솔직히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12일 동안 제가 없으면 큰 공백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있건 없건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이지만, 제가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상인 것이지요.
이렇게 불안하고 걱정하는 마음들이 인간의 편에 기준을 맞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번 순례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접고 하느님의 마음을 따를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마음에서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유혹 때문에 인간의 마음의 굴레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마음보다는 당신의 마음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여유로워지며, 그래야 진실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를 보십시오. 비록 가난하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걱정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세속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자유로운 마음이며 행복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세속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 역시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한 젊은이들이었지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보다 더 뛰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계속해서 인간의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쌍한 영혼의 소유자로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한 행복한 영혼의 소유자로 살아가야 할까요?
진정한 자유를 간직할 수 있는 행복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가난한 과부의 얼굴 -김순중 수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헌금함에 돈을 많이 넣는 부자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면서 감동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오늘날 누가 가난한 과부에게 시선을 얹으며 마음을 쓰는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조명연 신부- 어느 시골 마을에 아주 인색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큰 병에 걸려
얼마 전 어머니께 다녀왔다. 며칠을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이제껏 느끼지 못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어머니는 어머니이시다. 그분을 살게 하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건강이 약해지고,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해 의존적이 될 때마다 그 연약함 안에 드러내시는 주님이 아니신가! 한없이 울었다. 아!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어머니는 젊은 시절 동네에서도 유명한 여걸 같은 분이셨다. 아이를 여덟이나 낳아 키우고 농사짓고 밥하고 자리에 누운 일이 거의 없으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37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계신다. 아직 젊으셨을 때는 손자들을 맡아 키우시더니 지금은 큰아들과 함께 보내신다.
이도 다 빠져 잇몸으로 사시는89세의 나이를 살아내신다.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시편으로 기도하시고, 엄지손가락이 아플 만큼 묵주기도를 많이 드리신다. 기도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든든한 힘을 느끼게 하는지! 모든 것을 당신 손으로 시원하게 하시던 분이 차츰 남의 손에 의탁해야 한다. 당신이 모든 일을 쉽게 처리하시므로 남이 하는 일을 답답해하시던 분이셨다.
이제는 죄도 없으면서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가만히 조용히 들으며 사는 법을 배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아! 예수님이 그 안에 사시는구나!’ 그래서 눈물이 나왔다.
우리는 모두 다 어김없이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서로가 짐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아끼고 존중하고 살아가는 것은 힘들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미사 전에 촛불하나 켜서 성모님께 봉헌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저 가난한 과부의 얼굴을 닮지 않았을까?
본당 신부로부터 병자 성사를 받으면서 말했지요. “신부님, 저는 더 살아야
합니다. 만일 신부님이 하느님께 기도해서 저를 살려주신다면, 성당건립비
삼천만 원을 기부하겠습니다. 신부님, 불쌍한 저를 위해 꼭 기도해주십시오.”
신부님 기도 덕분인지 그는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하지만 병자 성사 때의
약속을 잊은 듯 성당도 가지 않고, 더군다나 본당 신부를 만나려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본당 신부님과 길거리에서 맞부딪치게 되었어요.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합니다. “신부님, 요즘도 저는 큰 병을 앓고 있습니다.
삼천만 원 때문에 잠을 통 못 자고 말라죽을 지경이 되었지요!
새 병이 생겼으니, 그 약속을 아직 못 지키겠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있지요. 아마 그도 그랬나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부는 적은
돈을 봉헌했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돈 많은 부자는
남의 눈치만 보면서 봉헌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봉헌은
언제든지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실 수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봉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봉헌을 하고 있을까요?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하여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부자도 헌금을 하고 가난한 과부도 헌금을 합니다.
부자는 가지고 있는 것의 얼마를 헌금하고
과부는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를 헌금하였습니다.
주님은 과부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부자를 비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정성이 부족하다는 뜻은 담고 있지만
비난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어떤 것이 더 쉬울까.
천 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천 원을 다 헌금하는 것과
가지고 있는 천억 원을 다 헌금하는 것과 어떤 것이 더 쉬울까.
반대로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
천 원이 가진 것의 전부인 사람이 더 쉬울 것입니다.
가진 것 천억 원을 다 헌금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천 원을 가진 사람은 어차피 도 아니면 모입니다.
전혀 안 내던지 낼 바에는 다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천억 원을 가진 사람은 일부인 백억 원을 내어도
많이 내는 것이기에 일부만 내어도 됩니다.
또 천 원을 가진 사람은 그 천 원이란 것이 있으나 없으나
사실 별 차이가 없기에 다 주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천억 원을 가졌던 사람이 다 주고 한 푼 없이 되는 것은
그 전과 후가 천지차이가 되기에 다 주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진 것을 다 헌금한 과부의 행위가 별 거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무엇을 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를 걸고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능력이 없다고 안 할 수도 있지만
하기만 한다면 능력이 없기에 온 힘을 다 해서 할 것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이 선물을 하려고 할 때
돈이 없다고 선물 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지만
선물을 한다면 가진 것 톡 털어서 선물을 할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반성합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능력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와 가까이서 일과 삶을 동반하는 한 형제는
저보다 능력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별로 힘을 안 들이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그 형제는 별 거 아닌 일 하나를 가지고 끙끙 댑니다.
답답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온 힘을 다해 그 형제가 하는 것임을 알기에
어떤 때는 부럽기도 하고 어떤 때는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형제를 보며 저는 정성이 부족한 저 자신에 대해
늘 일종의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의 특전입니다.
하기만 한다면 온 힘을 다 해 하고
주기만 한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수 있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동원하는 것,
이것이 정성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행위에 존재가 다 걸려 있으니
온 정성을 다 할 수밖에 없고
그 정성은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주님께 칭찬 받는 이유이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사람’
-전삼용신부-
제가2000년에 처음 유학을 나올 때, 동료 신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저는 공부보다도‘사람’ 되어서 돌아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되게 하지 않는 공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고, 또 제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느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죄를 지으면서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그 모습인 것입니다. 따라서 참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참 인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참 인간의 모델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오셔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만을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도 동시에 계시하시는 완전한‘아담’이십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모든 것’을 받습니다. 세례 때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것인 사랑의 본성을 성령님을 통하여 아들에게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비로소 참다운‘하느님의 아들’이 됩니다. 아들은 당신이 받은 성령님을 취하고만 있으려하지 않으시고 다시 아버지께 돌려보내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물론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것을 다시 아들에게 보내십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다운 사람의 모습이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 또 모든 것을 돌려 드리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라고 하면서‘관계’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받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참다운 인간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목마르다!’라고 신음하는 한 명의 걸인을 보고 그런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시간과 생명을 그 사람들을 위해 씁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기에 참 하와의 모습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가리옷 유다는 이미 가진 것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더 가지기 위하여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깁니다. 이렇게 자신만 생각하고 더 가지려고만 했기 때문에 참 인간의 모습을 잃고 마귀의 모습이 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잊고 온전히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서로서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가운데 한 몸을 이루어 곧,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이루시는 것처럼 인간도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때 온전한‘사랑’이 되고‘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는 모든 사제들이 모인 가운데 대표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는데 제 마음 깊이 반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표 신부님은 바쁘신 가운데도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제단 대표를2년 연속 하고 계신 분이고 올 해는 총무나 서기도 없이 혼자서 일을 다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좀 도와달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쁜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려고 할 때, 먼저 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도 부족한데...’
그러나 그 부족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부족하고 항상 더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온전한‘사람’의 모습을 회복한 인간일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넉넉한 가운데 무엇을 준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 안에서 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줄 것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는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전 두 닢이면 요즘으로는 컵라면이나 하나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과부는 자신의 최소 생계비까지 모두 주님께 봉헌 한 것입니다. 그것조차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인 것입니다.
마치 마더 데레사와 마찬가지로, 혹은‘나도 부족한데...’라고 생각하는 우리 모습과는 다르게, 자신을 잊고 모든 것을 내어줄 줄 알았기에 참 사람인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사람 좀 돼라.’라고 합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참 인간의 모습인 과부의 헌금을 보여주시면서, 그렇게 아담과 하와의 죄로, 또 우리의 죄로 잃어버린 참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잊고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참 사람’이 됩시다.
자기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양승국신부- 어린 시절"친척은 자주 만나야된다"는 어머니의 압력에 못 이겨 제일 만만한 사촌 형님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습니다. 당시 사촌형님 내외는 대부분의 서민들이 그랬듯이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갔었지만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왠만해서는 서로 언성을 높이지 않는 화목한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둘이 큰 목소리로 언쟁을 벌였는데, 바로 외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툼한 외투 하나로 겨울을 거의 나다시피 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촌 형님의"불쌍한 사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약점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당신 외투는 어쩌고 그냥 셔츠차림으로 들어와요?" 우물쭈물하던 사촌형님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아 외투? 공장에 두고 왔나봐." 즉시 상황을 파악한 형수는 매몰차게 몰아 부칩니다. "지난번에도 그래놓고 또 그러내. 자기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그게 얼마 짜리 인줄 알아요? 도대체 누굴 줬어요?" 계속 다그치는 바람에 겨우겨우 사실을 말합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글쎄 적선하는 사람이 이 추운 날 거의 내복차림으로 앉아서 떨고 있잖아? 그래서 빌려줬지." 벌써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사촌형님의 따뜻한 마음은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걸인들을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집까지 데려와서 씻기고 밥 먹여서 보내던 기억들도 생생합니다. 단 한 벌뿐인 자신의 겨울 외투를 형수로부터 혼날 줄 알면서도 서슴없이 벗어 걸인의 어깨에 걸쳐준 사촌형님의 모습에서 가난한 과부의 체취를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극구 칭찬하십니다. 빳빳한 십 만원 짜리 수표를 헌금궤에 넣은 부자들에게는 한마디 칭찬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동전 단 두 개를 헌금궤에 넣은 과부를 극구 칭찬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과부의 헌금은 비록 그 액수는 적었지만 전적인 봉헌, 순수한 봉헌, 사심 없는 봉헌, 목숨까지 건 봉헌이었기에 극구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이리저리 다 빼돌리고 바치는 봉헌, 우려먹을 때까지 다 우려먹고 빈껍대기만 바치는 부자들의 봉헌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여가 활동을 위한 시간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하느님 앞에 잠시 머무르기는 왜 그렇게 힘든지요?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끝없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만 하느님을 위한 투자에는 왜 그리도 인색한지요?
마음 -이승준 신부- 사제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많은 신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음을
그런데 그날 밤 아주 이상한 꿈을 꾼 것입니다.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더니 자기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한 가난한 과부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꿈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꾼 것입니다.
왕은 하도 이상해서 꿈에서 깨어 그 이름의 과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 가난한 과부에게 “성당을 지을 때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 나 몰래 건축헌금을 낸 것이 아니냐?”라고 호통을 치면서 물었지요. 그 과부는 벌벌 떨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임금님, 저는 아무 일도 한 일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헌금을 못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감히 헌금을 했겠습니까? 또한 교회 건축 현장에는 접근도 못하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헌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나 교회건축에 동참하고 싶어서 벽돌을 나르는 말들에게 건초먹이를 조금 주었을 뿐입니다.”
왕은 건축가를 시켜서 그 교회의 머릿돌에서 자기 이름을 긁어내고 이 과부의 이름을 기록하게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께 봉헌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사람을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 역시 주님께 봉헌을 하고 싶어 몸부림치시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던 것이지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과부가 봉헌한 렙톤 두 닢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처럼 돈의 많고 적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을 싣는 정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본당을 지은 신부님의 고백이 문득 떠올려집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본당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돈 많은 사람 덕분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이 내는 많은 돈으로 인해서 아름다운 성전이 지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당을 다 지은 뒤에 결산을 하던 중에 신부님께서는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본당을 지은 사람은 소위 돈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 부자가 낸 헌금의 액수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낸 헌금의 액수가 훨씬 더 많더라는 것입니다.
이 결과를 보고서 신부님께서는 이제까지 착각했었음을 깨달았답니다. 그리고 잘못 판단했던 자기 자신이 밉고 봉헌한 가난한 신자들에게 죄송해서 미사 중에 펑펑 우셨답니다.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 주님께서 좋아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을 봉헌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훨씬 더 좋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자주 체험합니다. 특히 명절이나 무슨 때가 되면 작은 것이라도 챙겨주려고
하는 신자들의 마음에서 그것을 더욱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래도록
기억나는 것은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마음의 선물입니다. 어렵게 사시면서도
본당 신부 생각해서 내어주시는 가난한 할머니의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이나
삐뚤빼뚤한 글씨지만 사랑과 정성이 들어 있는 아이들의 편지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전해줍니다. 이런 선물은 그 자체의 가치를 넘어 세상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싶어 전해주는 이의 마음이
더욱 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도
그 가치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은 액수의 돈이라도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마음만큼은 어떤 금은보화와도 비길 수 없이 크고 소중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그 용기와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혹 다른 이들은 헌금함에서
넣은 돈의 액수로 과부를 평가했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그 돈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께 드리는 마음의 풍성함을 보셨습니다.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려는 마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서 그 가난한 과부를 바라보셨던 마음의 눈으로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작은 것에서도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는 풍요로운 삶으로 초대받을 것입니다.
고개 숙인 여인
-원영배-
예수님은 성전에서 헌금함에 돈 넣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셨다. 좋은 옷을 입고 온 부자는 보란 듯 과시하며 당당하게 돈을 넣지만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바치는 모습은 주눅 들고 어설퍼 보인다. 죄라도 짓는 양 몰래 넣고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20여 년 전쯤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한밤중에 로스앤젤레스시 인근의 조금 험한 동네의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으려고 잠시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허름한 백인남자가 어둠 속에서 다가오더니 휴지조각을 들고 내 차의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다. 귀찮은 마음에 주머니를 뒤졌더니 링컨 대통령 얼굴이 새겨진1센트 동전 한 닢이 달랑 나왔다. 보통 적선하는 데25센트 동전을 내놓던 시절인데1센트라니. 아무리 돈이 아쉬운 걸인이라도 코웃음 칠 일이었지만“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며 동전을 내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받아 주머니에 넣고는 계속해 더욱 열심히 차창을 닦았다. 나는 갑자기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지갑을 꺼내1달러 지폐를 그에게 주었다. 그러면서“마약하지 마시오.”라고 훈계를 덧붙였다. 그는 돈을 정중히 받으면서“아니, 나 마약 안 해요. 정말 배가 고파서 돈이 필요해요.”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로등에 비친 주름 깊은 남자의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의 앞선 판단과 행동이 더 부끄러워졌다.
가난한 과부가 내놓은 렙톤 두 닢의 액수는 보잘것없지만 그녀가 소유한 전 재산이었다. 그것을 하느님 앞에 드리는 것은 당장의 생존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온 존재로 느끼며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하는 일은 희생이지 대가를 지불하는 거래가 아니다. 그렇게 바치는 희생의 상급으로 돌아오는 선물은 무엇일까? 생활의 안전이나 성공, 윤택한 삶의 보장이 아니라 희생 자체가 상급이라는 것을 깨닫는 은총이 주어진다. 피와 땀, 생명까지 걸고 희생을 바쳐 얻는 유일한 선물은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이기 때문이다. 신뢰가 없으면 진정한 자선도 희생도 없다.
하느님은 보고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느님을 기만하는 오만한 이들의 행동에 안타까운 절망을 느끼신다. 그들이 물러난 다음 마지막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인 과부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그녀가 보잘것없는 재물을 털어놓고 숨죽여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비로소 세상을 구원하러 나갈 힘을 얻었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 자신도 우리보다 넉넉하고 많이 가진 자들의 위상을 눈이 부시게 쳐다볼 때는 스스로 위축될 뿐이다. 오히려 우리보다 못한 어려운 처지의 사람이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에게 살아갈 위안을 준다. 희망과 용기를 얻으려면 낮은 곳을 살펴야 한다.
흠 없는 사람
-장재봉신부-
주님의 뜻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마음이 깨끗해지는 일입니다.
해서
모두가 하느님의 ‘복’을 받는 일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에
당신의 생명을 걸고 나서신 까닭입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가는 이,
혹은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준은 마음입니다.
법의 제약이나
법의 범위를 넘어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것도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
어린이 미사 중에 한 아이가
“하느님은 참 욕심쟁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는 온 세상에서 최고로 사랑받으려 하시니,
그렇지 않으냐고 되묻는 아이의 물음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만 최고로 제일로 사랑하라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정말 욕심쟁이이십니다.
온 세상 모두를
온통 사랑하시는 그 마음이 꽉 차도록
온 세상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런데
찬미와 흠숭을 받기 위해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주님께서 주신 영리한 머리를 교활하게만 사용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건강을 죄에 남용합니다.
때문에 모두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이 속이 상하신 이유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마음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행복해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돕는 일과
희생하는 일과
주고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싶어 하는 일인 까닭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궁핍한 과부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위한 생활비를 모조리 봉헌했습니다.
무얼 먹고 살려고?
어떻게 살아갈아 갈라고?
그런 간 큰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생활비까지 몽땅 봉헌했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독특한 봉헌
온 것을 아끼지 않는 헌신이
주님의 마음에 꼭 들어서
이렇게 오래도록 내내 칭찬을 전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태
교회 일을 위해서 자신의 생활비까지 몽땅 바쳤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
시온 산위에 서 계신 어린 양을 향해,
모두가 불러드릴 ‘새 노래’는
가난도
아픔도
고통일지라도
사랑으로 투신한 사람에게 결코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거짓의 노래를 버리고
그분께 불러드릴 노래를 배웠을 것이니까요.
솔직히
주님께 깡그리 봉헌한 까닭에 굶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교회 일을 위해
버겁게 봉헌을 한 탓으로
살림이 쪼들리고
형편이 없어졌다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흠 없는 사람들이 불러드리는 합창을 익히는
오늘이기를 축원해 드립니다.
거룩하고 고귀한 정성
-김찬선신부-
전철에서나 길을 가다가 종종 도움을 청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도와주어야 하나 망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때의 이유에 따라 드리기도 하고
그냥 못 본 체 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지갑을 열어보니 만 원짜리만 있었습니다.
그것을 드리려다 너무 많이 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운 마음도 들어 그만 두었습니다.
다른 어느 날은 지갑에 몇 천 원밖에 없었습니다.
기꺼이 다 드렸습니다.
그때의 저의 느낌은 돈 몇 천 원을 드렸다는 느낌이 아니라
나를 다 주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돈 몇 푼을 드린 것이 아니라
큰 사랑을 실천하였다는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일련의 이런 경험을 통하여
왜 부자들이 더 남을 돕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왜 남을 더 잘 돕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 앞에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같이 헌금을 합니다.
부자는 틀림없이
자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얼마를 헌금하였을 것이고
과부는 가진 것의 전부를 헌금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부자보다 적은 액수를 봉헌한 것 때문에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그 사랑을 알아주고 높이 평가하십니다.
부자의 그 헌금에는 사랑은커녕 마음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별 생각도 준비도 없이
주머니를 뒤지다 그저 나오는 대로 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의 헌금에는
이렇게 조금 헌금해도 되나 염려하는 겸손한 마음,
이것을 다 헌금하고 나면 무얼 먹고 사나 걱정하는 마음,
그래도 다 봉헌하자는 헌신적 사랑의 마음과 더불어
적지만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준비하는
그 준비와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정성(精誠)은 헌금과 존재를 일치시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헌금이 비록 액수는 많아도
주머니 속의 쓰레기를 버리듯
경박하고, 가치 없는 짓인데 비해
가난한 과부의 그 헌금은 거룩하고 고귀합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기품이 있으며
정성을 다 하는 행복합니다.
새벽을 열며
인도의 어떤 왕이 궁전에서 나가다가 거지 한 명을 만났답니다. 그 거지는 손을 내밀고 도와달라고 왕에게 하소연을 했지요. 왕은 거지의 모습에 안타까움과 함께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거지를 향해서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네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면 나 역시 너에게 무엇인가를 주겠다.”
거지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습니다.
“거지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옆집에서 얻은 강냉이가 있는데, 그 강냉이도 다 먹고 지금 주머니에는 다섯 알밖에 없습니다. 이것이라도 받으시겠습니까?”
강냉이 다섯 알을 거지로부터 받은 왕은 “이봐라! 금주머니에서 이 강냉이 알만한 금덩이 다섯 개를 꺼내서 주어라.”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금덩이를 건네면서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대신 너에게 줄 터이니 받아라.”
물론 거지는 감사히 받았지만 속으로 탄식하면서 갔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거지의 주머니 속에는 강냉이가 더 있었거든요. 거지는 자신이 어렵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강냉이 다섯 알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지요. 만약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냉이 주머니를 있는 채로 드렸으면 금주머니를 통째로 다 받을 수 있는 것을 순간적인 욕심에서 적은 금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거지의 모습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소유의 것은 빼놓고 내가 쓰고 남는 것만을 봉헌하겠다는 마음, 그러면서도 가장 좋은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고자 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심가득한 마음인 것이지요.
이제 오늘 복음을 보지요. 부자들이 헌금함에 많은 예물을 넣는데 반해서, 빈곤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을 뿐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값의 64분의 1에 해당되는 액수로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야말로 가장 많은 액수를 헌금했다고 말하지요.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헌금을 받으실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과부의 위치는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보호를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여자의 위치가 지금처럼 보장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벅찬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 너무 봉헌하는 그 마음에 예수님께서는 감동하셨던 것이지요.
이제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욕심을 모두 버렸으면 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것은 다 누린 뒤에 쓰고 남는 것을 그래서 자기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것만을 하느님께 드리겠다는 마음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 역시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과부의 헌금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웁시다.
빠다킹신부
봉헌
-서현승 신부-
예전에 어느 글에서 보았던 이야기입니다.
희귀한 혈액형을 가진 형이 수술 중에 급하게 수혈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의사는 가족 중에 유일하게 같은 혈액형을 가진 어린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형이 지금 무척 아프단다. 지금 수혈하지 않으면 어쩌면 하늘 나라로
갈지도 몰라. 무섭겠지만… 형을 위해서 수혈을 해주겠니?”
어린 동생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동생은 형 옆에 나란히 누워 주사기를 통해 피가 빠져나가 형에게 주사되는 것을 바라보며 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엄마 아빠는 형을 위해 무서운 주사기를
팔에 꼽고 그래도 잘 참아낸 어린 동생이 너무도 대견스러웠습니다.
수혈이 무사히 끝나자 모두들 동생을 대견해하며 칭찬하는데 어린 동생은
웬일인지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어린 동생은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나는 언제 하늘 나라로 가게 되나요?”
오늘 복음을 통해 자신의 전 재산을 봉헌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곧 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시는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만이 자신의 전부를 내맡기게 해주는 힘입니다.
피 같은 돈
-정애경 수녀-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어떤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라고 칭찬하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의 필요성과 가치를 알게 된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밤낮 쉬지 않고 일하며 온갖 궁리를 다한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소모한다. 그래서 ‘피 같은 돈’이라고까지 한다. 돈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고 또 편리한 수단이긴 하지만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돈으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돈 자체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애초에 땅을 판 모든 돈을 헌금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이 아까워 절반은 챙기고 절반만 바쳤다.(사도 5,1-11 참조) 그들은 하느님과 교회에 거액을 헌금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액수를 보시지 않고 그들의 갈라진 마음을 보셨다. 하느님께서는 온전한 봉헌을 원하신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였기에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후손을 약속받았다.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주님의 일을 오래 했다고 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신앙이 바로 사랑받는 조건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인 동시에 신앙고백이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봉헌의 자세와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요구에는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주시는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앙은 하느님을 믿어서 자기 한 몸 성공하고 출세하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자기 삶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배워 실천하는 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루카 12,29-30)
사랑의 방식
-김현영 신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성경 말씀은, 어느 빈곤한 과부가 헌금함에 비록 다른 가진 자들의 눈에는 하찮은 금액이지만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넣어 예수님의 칭찬을 듣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얘기는 아주 어리석게 여길 수 있고 또한 화가 날 수도 있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남편이 없는 과부에다가 가난하다 못해 겨우 수천원이 전 재산인 여인이 신앙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과 아이들이 하루를 견딜 수 있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것은 현대인 특히 종교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좋은 비난꺼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의 내용들이 그 당시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함축적으로 많은 교훈꺼리를 제공하고 있고, 다양한 묵상의 주제가 되고 있기에 오늘 우리는 이 과부의 헌금 얘기를 통해 사랑에 대해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7-80년대 우리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거나 ‘사랑을 쓸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식이었고, 21세기의 출발점인 현대에는 ‘열정’ ‘죽을만큼’ 등으로 자기의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사랑의 방식에 정답이 있을까요?
오늘 성경 말씀에서 출발하여 그 정답에 다가가도록 해 봅시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헌금이 자신보다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여지리라 희망하였고 믿었습니다. 그러하였기에 자신에게도 필요하지만 더 절실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봅니다. 물질에 대한 맹신과 욕심 그것을 얻기 위한 숱한 죄악과 불신으로 가득찬 세상과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의 삶을 통한 체험은 다른 이웃들의 처지에 대한 이해로 이어져, 그들과 공유하고자하는 삶에 대한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해였습니다.
세 번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불행과 이웃들의 무관심에 대한 용서였습니다. 유독 자신에게만 연이어 닥쳐온 불행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삶의 무게에 대한 용서, 또한 남편을 먼저 보내고 숱한 몰이해와 손가락질, 그리고 함께 남겨진 자식들과의 쉽지 않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 이웃들의 무관심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이웃 모두를 용서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방식은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오늘 우리는 Believing(믿음), Understanding(이해), 그리고 Forgiving(용서)의 세가지로 정립하였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먼저 신뢰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행동에 대해 용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고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저 오늘 한 번, 손 잡아주고, 미소지어 주며, 따뜻하게 안아주십시오. 사랑의 실천은, 나의 눈길을 원하는 이를 보아주고, 손길을 원하는 이의 손을 잡아주고, 따스한 말 한마디를 원하는 이를 불러주고, 가슴을 원하는 이에게 따뜻함을 전해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또 완성할 수 있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기도하며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오 마리아 수녀-
우리는 계속해서 루가복음을 읽고 있다. 루가가 보는 관점에서 병약자의 치유, 이방인에 대한 배려가 큰 대목 중 오늘 과부의 헌금을 기도하며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얼마 전 전철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낮이라 전철은 비교적 한산했고 서 있는 사람도 없는 시간이었다. 통로 문이 열리며 가냘프게 성가를 부르는 시각장애 부부가 지나갔다. 그들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을 우연히 바라보게 되었다. 한가한데다 서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의 시선은 적선을 하는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내가 탄 칸에서 적선을 한 사람은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둘과 20대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넉넉한 사람들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스럽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 장애우에게 주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그 장면이 떠오른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지 않은 것에서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우리의 자연스런 태도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베풂에 주님의 풍성한 은총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적선을 한 그분들의 매일 기도는 주님의 기도를 철저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라고 기도하며 그 응답을 매일 받고 또 그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렇게 부요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나도 그분들께 더 많은 행복이 주어지길 기도한다.
오늘은 또한 성모 자헌 축일이기도 하다. 한 여인의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봉헌이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의 시작이었듯이 오늘 한 어머니의 손길로 가정과 자녀, 그리고 사회가 평화로워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작은 곳에 손길을 돌리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십니까?
-이재화 신부-
예수께서 보고 계셨다
-이회진신부-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기의 성능도 매우 좋아져서 사진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갖고 공부해도
보통 사람들도 전문가만큼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특히나 풍경 사진을 찍는 데 열성인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다 보면
저로서는 재미난 현상을 하나 발견하곤 합니다.
그것은 사진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여러 모습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저는 흔히 두 부류로 나누어 구분해 봅니다.
한 부류는 사진 촬영을 하려다가 촬영 대상과 사진기 사이에
어떤 물건이나 대상이 있으면 치워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그 방해물이 나뭇가지이거나 작은 나무이라면 부러뜨리거나 잘라 버리고,
잡목이거나 어지럽게 난 풀밭이라면 발로 다 찢이기며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서
사진 촬영을 합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빨리 이동합니다.
얼른 원하는 사진을 만들어 찍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다시 좋은 구도를 잡아 원하는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죠.
다른 한 부류는 자신이 찍고 싶은 대상과 사진기 사이에 장애물이 있으면
옆으로 돌아가며 다른 각도를 잡아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러다 좋은 구도가 나오지 않으면 사진 촬영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아주 천천히 이동합니다.
마음에 드는 한 장의 사진을 담기 위해서 대상을 오래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과 함께 헌금함에 예물을 넣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 앞에 앉아 계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헌금함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눈에 어떤 이는 부자로 보였을 것이고,
어떤 이는 가난한 이로 보였을 것이고,
어떤 이는 풍족한 이로, 어떤 이는 평범한 일꾼으로, 어떤 이는 과부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은 사람들의 옷 모양새, 얼굴 모양새
또는 헌금함에 넣는 동전의 빛깔(금색, 은색, 동색 같은)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그들의 옷 모양새, 얼굴 모양새, 헌금하는 모양새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칭찬하는 말씀에는 얼굴이 예뻤다던가, 옷 빛깔이 좋았다던가
혹은 헌금을 많이 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아닌 (과부는) “다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과부의 주머니 사정을 보았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집안 사정을 보았다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그 과부의 전부,
다시 말해 “사람의 존재 전부”를 보셨다는 말일 것입니다.
옷이나 얼굴이나 헌금이 아닌 그 사람이 지닌 “인격 전체”를 보았다는 것이죠.
신앙이 어떤 사물이나 외적 모습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달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 사물이나 모습이라는 대상(對象)에 집착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혹은 좋아하는 것만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가 찍고자 하는 사진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중간의 장애물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풀밭도 아닌 방해물이 될 뿐이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뿐이죠.
그러기에 부러뜨려도 찢이겨 뭉개버려도 오히려 필요한 일을 한 것이라서 기쁠 뿐입니다.
신앙이 우리의 인격 전체에 달려 있는 것처럼
신앙을 사는 이들에게 소중한 것은 보여지고 만져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헬렌켈러가 말하듯 진정 소중한 것은
“보여지는 것도 아니고, 만져지는 것도 아니라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의 삶의 작은 사건들마저 주의 깊게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과부가 가져온 마음을 섬세하게 가슴으로 느끼며 기뻐하십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오래 머물며 사물과 자신이 하나 되는 순간까지 기다리는
사람을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은 저만의 느낌은 아니겠죠?
왜냐하면 제가 알기에 예수님도 분명 이 순간에
우리 인생의 섬세한 순간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계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내 호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든, 지갑에서 무엇을 꺼내든,
아니면 마음이나 영혼에서 무엇을 꺼내든
보여지는 것, 만져지는 것이 아닌 자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꺼낼 수 있다면
하느님 역시 그것을 느끼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저를 가만히 바라보시듯 저 역시 당신 앞에 가만히 나와 앉습니다. 아멘.”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
-윤경재-
이제는 다 커버린 두 아들 녀석들을 바라보며 문득 둘 째 녀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생각이 납니다. 무뚝뚝한 첫 째 아이와는 달리 잔정이 많은 아이입니다. 제 엄마 생일이라고 동네 백화점에서 양말 두 켤레를 사서 곱게 싸들고 겸연쩍은 듯이 내놓는 손이 얼마나 예쁘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 때는 나이가 어린 저학년 시절이라 용돈도 따로 주지 않았을 적입니다. 아마 친척 어른들이 만날 때 마다 학용품 사서 쓰라고 준 돈을 아껴 모아 두었나 봅니다. 집사람은 뜻밖에 막내가 보인 예쁜 짓이 하도 기특해서 내가 사다준 장미 꽃다발은 안중에도 없더군요.
그 꽃다발은 벽에다 걸어 놓고 말려두어, 그 후 몇 달인가 계속 그 꽃다발을 사다준 것을 제가 생색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집사람은 십년도 지난 지금도 그 양말을 선물 받은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아이 듣는데서 더 말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 어버이 날이라고 엄마, 아빠 얼굴 그린 그림과 카네이션을 만들어 달아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첫 선물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제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았다가 사다준 그 행동이 갸륵해서입니다. 그 나이 또래 사내 녀석들 유난히 쑥스러움 많이 탑니다. 제 아이들도 그런 편인데 용기를 내어 선물을 골랐다는 것이 더 대견해서입니다. 아마 집사람이나 저는 이 기억을 자주 떠올릴 것입니다. 혹시라도 아들에게서 섭섭한 마음이 들 때면 그 기억을 떠올리며 삭이겠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성전 봉헌함을 지켜보신 것입니다. 누가 얼마를 봉헌하는지 지켜본 것이 아닙니다. 이 과부가 자기의 전부를 봉헌하는 갸륵한 마음씨를 칭찬하고, 그 모습을 보시고 당신이 느끼셨을 기쁨과 희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봉헌이라도 자신의 사랑을 담고 있는 행동이라면 그것을 더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오래 기억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서 받은 작은 선물을 더 오래 기억에 새겨두는 것이 다 주님 모상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피천득님께서 쓰신 장미라는 제목의 수필을 같이 읽고 싶어 여기에 올려 봅니다.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이 내 꽃을 보고 간다. 여학생들도 내 꽃을 보고 간다.
전차를 기다리고 섰다가 Y를 만났다. 언제나 그는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부인이 달포 째 앓는데, 약 지으러 갈 돈도 떨어졌다고 한다.
나에게도 가진 돈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부인께 갖다 드리라고 장미 두 송이를 주었다. Y와 헤어져서 동대문 행 전차를 탔다. 팔에 안긴 아기가 자나 하고 들여다보는 엄마같이 종이에 싸인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C의 화병에 시든 꽃이 그냥 꽂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전차가 벌써 종로를 지났으나 그 화병을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사직동에 있는 C의 하숙을 찾아갔다. C는 아직 들어오질 않았다. 나는 그의 꽃병에 물을 갈아준 뒤에. 가지고 갔던 꽃 중에서 두 송이를 꽂아놓았다. 그리고 딸을 두고 오는 어머니같이 뒤를 돌아보며 그 집을 나왔다.
숭삼동에서 전차를 내려서 남은 세 송이의 장미가 시들세라 빨리 걸어가노라니 누군지 뒤에서 나를 찾는다. K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K가 내 꽃을 탐내는 듯이 보았다. 나는 남은 꽃송이를 다 주고 말았다. 그는 미안해하지도 않고 받아가지고는 달아난다.
집에 와서 꽃 사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는 꽃병을 보니 미안하다. 그리고 그 꽃 일곱 송이는 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었지만, 장미 한 송이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같아서 서운했다.
이 수필을 읽으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갖는 속 깊은 정이 얼마나 잔잔하게 담겨 있는지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피어오릅니다. 빈 화병을 보면서 느끼는 서운한 마음은 아마도 주님께서 메워주시겠죠. 그 빈 화병의 모습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음(空)”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비워내려고 노력하기보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비움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봉헌
-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 중의 한 부분입니다. 부자들이 와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헌금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칭찬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21,3-4)
가진 것을 모두 바친다는 것은 정성과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봉헌이 그것이시지요.
그 당시 과부가 넣은 렙톤 두 닢의 가치는 노동자 하루 품삯의 1/72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루 노동자의 일당이 5만원이라면 약 700원 정도에 해당되는 액수였던 것이지요. 별 것 아닌 작은 금액일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나 당장 살아가기에도 벅찬 과부에게는 렙톤 한 닢이 아쉬웠을 것입니다. 과부는 정성을 다해서 봉헌했고, 하느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받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성당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도움을 주고, 또 나라에서도 기초 생활자에게 한 달에 얼마씩 구청을 통해 지원을 해 주고 있지요. 그런데 간혹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고, 남한테 도움을 받는 제가 무슨 돈으로 교무금을 냅니까? 이 처지에 제가 어떻게 남을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또 그런 처지에서도 놀랄 만한 금액으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보다도 배려와 나눔이 필요한 처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정성을 모으고 이웃과 나누려는 따뜻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때 그에게 찾아온 축복이 지속됨을 사목자로서 자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눌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콩 반쪽도 나누어 먹는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마음만 있으면 나눌 것은 얼마든지 있지요.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가난한 과부와 같은 불우한 이웃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이혼한 가정도 많고 여러 가지 이유로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요. 지하철역에 노숙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가족들이 어머니의 생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정성이 깃든 나눔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서 중에서도 특히 루카 복음서에는 약자들의 대표격인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시 구세주를 기다리던 과부 ??한나?‘이야기가 2장에 나오고, 심한 기근에서 구원받은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가 4장에 나옵니다. 또 7장에는 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시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사회적인 경멸 속에서도 재판관을 찾아가 집요하게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던 한 과부의 이야기가 18장에 나오는가 하면 오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루카 복음서에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 여러번 표현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이들 사건 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히브리 말로 ??과부?‘라는 단어는 ??냉가슴 앓는 벙어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경멸의 뜻도 담겨 있지만 과부가 사회적인 약자이고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는 우선적으로 가난하고 억눌린 약자를 보호하시며 그들의 정성에 축복을 내리신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헌금에는 마음을 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지요.
그런데 정성을 담는 마음은 비단 하느님께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마음을 담은 선물?‘하면 지금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목자로 있으면 신자들의 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데 서품을 받고 처음 부임한 잠실 성당에서 보좌신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인사를 마치고 막 떠나려고 하는데 저의 차 창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무엇인가를 담은 까만 비닐 봉투를 차안으로 넣어주며 ?’신부님, 잘 가세요!?“하고 연신 인사를 하셨습니다. 무심코 받은 봉투는 뜨거웠는데 신자들 사이에 묻혀서 정신 없이 떠나오고 또 새 부임지에 도착해서는 그 곳 신자들과 또 다른 분위기에서 첫 만남을 가지면서 그 선물을 그만 까맣게 잊어버렸지요. 며칠 지나서 열어보니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만두였고 시간이 지난 터라 이미 상해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만두 장사를 하던 할머니가 성당을 떠나는 저에게 뜨끈뜨끈한 만두를 먹게 해 주려고 막 쪄낸 만두를 가지고 뛰어오셨던 것입니다. 차라리 그 때 그 자리에서 먹었더라면 기억에 그렇게 깊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뒤에 상한 만두를 열어보고 느낀 감사함과 죄송함이 지금도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 입니다.
정성과 마음을 담은 선물은 이렇게 큰 감동을 줍니다. 사람도 이럴지언정 하느님께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하느님께, 또 사람들에게 마음을 표현할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것, 귀하게 여기는 것을 봉헌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자칫 선물을 하고도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정성이 담기지 않은 성의 없는 선물은 불순함을 유발하고 불쾌함을 줄 뿐입니다. 더더군다나 헌금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오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서 우리는 초라하지만 정성을 다한 헌금을 하느님께서 아주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 특히 루카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담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나누려고 하기보다는 나눔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모시는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대로 하느님과 사람에게 정성을 다할 수 있는, 그리고 나보다도 어려운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나눔
-백광현 신부-
제가 살던 고향 마을에 열심인 초로의 신자 한 분이 계십니다. 평생을 동정으로 가난하게 사시면서 교회를 일해서 일하신 분입니다. 넓은 본당의 공소를 걸어 다니며 하느님을 전하는 그분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사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분을 뵐 때마다 하느님을 전하는 그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노랫말이 바로 이분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본래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저희 가족들도 이분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분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제가 수도원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두툼한 봉투 하나를 제게 내밀며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써 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본다면 너무 큰 돈이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당신의 회갑을 맞이해서 동생이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준 것인데 좋은 곳에 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참된 행복이 소유에 있지 않고, 나눔을 통해서 체험되는 사랑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의 나눔으로 비워진 가슴은 항상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가진 바를 나눌 때 우리의 가슴은 사랑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과부의 동전 두 닢
-강영구 신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그대에게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동전 두 닢은 돈이 아닙니다.
그녀의 사랑이 담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헌금함에 넣은 뭉칫돈은 돈일뿐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느님을 사랑하는 과부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라면 목숨까지도 내어놓고 싶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지 돈에 있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동전 두 닢은
부자들의 뭉칫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 정의와 평화, 기쁨과 행복은 천만금(千萬金)을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믿음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정의와 평화, 기쁨과 행복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돈으로는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보석보다 찬란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사랑을 하느님께 바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헌금의 가치는 마음이 결정한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헌금으로 바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전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부활에 관한 토론으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고(20,27-40),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경계하라(20,45-47)고 가르치신 예수께서 그곳을 나오셔서 성전밖에 설치된 헌금 궤를 보고 계셨다. 예루살렘 성전 밖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명목의 헌금 궤가 13개나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넉넉함에서 얼마씩을 헌금하였지만, 어떤 가난한 과부는 작은 동전 두 닢을 헌금하였다. 그 두 닢이 곧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액수로 따지자면 보잘것없는 돈이지만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 과부의 헌금이 컸다고 하셨다.
가진 것을 몽땅 바쳐버린 과부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우리의 머리를 스친다. 실제로 그랬을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오늘 과부의 헌금이 어떤 헌금보다 큰 헌금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부헌금의 사실유무를 떠나서 헌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헌금이나 헌물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치는 사람의 마음자세이다. 헌금의 액수에 관계없이 헌금에는 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 마음은 제각기 다르다. 헌금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마음이 담겨있는 경우가 있으니, 달갑지 않고 억지로 내는 마음, 자기의 위신이나 남의 이목 때문에 내는 마음, 넉넉하면서도 인색한 마음, 자기를 선전하고 광고하려는 마음, 마음조차 담지 않고 그냥 내는 마음 등이 그런 것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다고 헌금이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친다면 정성껏 바쳐야 하고,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골라 바쳐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다. 이 생명을 차마 바칠 수 없기에 우리는 생명을 대신할만한 것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을 바친다면 그것은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도 바울로는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하느님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지고의 존재인 하느님이 인간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것을 버려야 하며, 또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한계를 감수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이런 포기와 감수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엄청난 일이 실제로 예수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가난하게 되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더욱 가난하게 되셨으며, 죽으심으로써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참다운 사랑이 그분 안에서 밝히 드러났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이토록 크신 사랑이 드러났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은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확실한 것은 부자들의 ‘가벼운’ 헌금보다는 과부의 ‘온전한’ 헌금 속에 그 모습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나의 시간과 돈의 한 부분을 하느님의 몫으로 떼어 놓읍시다.'
- 홍성만신부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고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십니다. 어느 정도나 봉헌을 하는지 궁금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비교하기 좋은 빈곤한 과부 한 사람이 동전 두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21,2-4)
당시 동전 두 닢은 궁핍한 과부에게 있어서 아주 큰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가난한 과부는 미리미리 계산해서 떼 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몫으로 말입니다. 그야말로 성스러운 돈입니다.
생활비 전체를 차지할 수도 있는, 적지 않은 성스러운 돈은 그녀의 생활 전반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돈이 쓰여질 수 있는 상황 속에는 늘 하느님이 자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으로 떼어놓은 성스러운 돈, 하느님의 몫으로 떼어놓은 성스러운 시간들은, 그 사람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 줍니다. 알차고도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나 돈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나는 나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몫으로 떼어 놓은 시간과 돈은 어느 정도인가?
떼어놓은 만큼 나의 생활은 질서가 있고 아름다워질 것이며 거룩한 사람으로 서 있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오늘도 나의 시간과 돈의 한 부분을 하느님의 몫으로 떼어 놓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