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정하신 역사
행5:17~32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는 고난과 고통, 핍박이 끊이지 않습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세상 길에서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감으로 누리고 받는 복과 그날의 유업을 받는 자로 서는 것을 사단 마귀는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함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시험과 환난을 우리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허락하십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 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문제는 시험이나 환난, 고난이나 핍박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홍해가 가로막아도, 바로의 군사들이 칼을 휘두르며 뒤쫓아도, 여리고성이 가로막아도, 풀무불과 사자 굴에 던져질지라도 믿음만 있으면 이기는 것입니다.
요일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길 자도 방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함으로서 구원함을 이룬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야기를 들려 주신 다음 이르시기를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살아계셔서 다 보고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묻고 행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으며,
그 기뻐하시는 제사는
히13:16/ “오직 (다른 것은 없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믿는 자에게는 / 그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서 좇아 행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심으로 믿음, 곧 그 도를 중심으로서 좇아 행함이 아들을 믿음이요, 영생이 있으며, 이로써 세상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영생을 소망 중에 바라고 믿고 좇아가는 한 사단 마귀의 미혹과 유혹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쭈욱~~!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증거를 얻게 되고 더욱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일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거 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보이시고 그 뜻을 이루신 그 도, 곧 중심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신 증거인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교훈하기를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과 복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심판의 날까지 사다 마귀는 우리를 떠나지 않고 틈만 보이면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서 행4:5에서 살판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였습니다. 그때 각종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자가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시기하는 관원들과 장로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그 문중의 사람들이 다 모여서 베드로와 사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이 기적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 많아지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억지를 부리며 핍박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증거 했습니다.
저들은 할 말을 잃었고 병 나은 사람이 저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람들을 다 돌려보낸 후, 민간에 더 이상 퍼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을 불러 위협하기를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 경계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담대히 증거 했습니다.
놓인 제자들이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며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집과 밭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달라 나눠주매 핍절한 사람이 없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핍박, 고난 뒤에는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인함이었습니다.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l를 보고 사람들은 매우 놀랐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무리들은 솔로몬 행각에 모였고 믿지 않는 자들은 더 이상 사도들과 상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이 거룩하고 능력 있는 순수한 초대교회공동체를 보고 감격하며 칭송함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아지고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했습니다.
이때, 다시 두 번째 핍박이 찾아왔습니다.
(17~18)/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과 잘 믿는다는 사두개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분별없이 목사면 다 목사인 줄 알면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대적하고 거스르는 제사장, 사두개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 부활을 부인한 사람들 아닙니까?
부활의 주님, 그 능력으로 이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저들은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면 어찌하든지 이 역사를 막아서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기득권, 돈, 명예, 내 영광 때문에 복음을 대적하는 목사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믿지 않으면서 즉, 좇아 행함으로 부활의 복을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주여, 주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는 종교적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한, 그래서 그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는 목사와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스스로 속은 가짜 믿음이라는 것에 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르기를
약4:4~5/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심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하였고,
사도 바울도 로마교회에 이르기를
롬10:1~4/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새 계명)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 영생 얻는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하신 십자가, 곧 그 도를 중심으로 좇아 행하는 서로 사랑하는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환영받거나 칭찬, 박수갈채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티비 목사들을 잘 분별하고, 가능하면 자기 양들이 아니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는 그들의 메시지를 듣지 않는 것이 유익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보십시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았던 저들은 십자가 지심으로 이루신 약속, 그 결과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신 그 부활의 영광에 나아감을 잃어버린 저들은, 그 복음을 가르치고 증거 하는 제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악행, 즉 하나님과 스스로 원수 되게 행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저들은 실상은 성령의 지배를 받음이 아닌 사단의 지배를 받는 자들입니다.
왜 그런지 좀 더 깊이 들여다볼까요?
지금 (17~18)에서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니까, 핍박은 누구로부터 오는가? 하는 것과 시련은 누구로부터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핍박과 시련과 고난 뒤에는 반드시 사단 마귀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다 하나 같이 사단의 지배를 받지요!
그런데 지금 보시면 제자들을 핍박하고 나선 시기하는 무리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잘 믿는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여전히 세상 적 가치를 좇으며 종교적 열심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과 상관없는 버림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 한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함이 이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알아야 면장도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 곧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 사람들이 핍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놈이 도둑놈” 이라고 아는 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실상은 바로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자들,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가하고 좇은 종교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된 줄로 알고 선 줄로 알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 한 것입니다.
“선무당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제대로 알지 못하는 , 즉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하나님께로서 나지 못한 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열심을 믿음으로 알고 속아 지나다가 사단이 낚아채고 시키면 그대로 좇아 행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날에 “닭 좇던 개 지붕만 쳐다 본다”는 속담처럼 낭패를 당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핍박이 오는 이유는 시기질투 때문임을 보게 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적인 그럴듯한 이유나 교리적인 이유를 들지만, 그래서 합리적인 이유, 체험, 논리 등을 들이대지만, 이는 다 세상 적인 가치들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변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다 세상 적 가치를 좇는 변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변명이 정말 진리와 교회를 위해서일까요?
그래서 공격하고 핍박하고 험담하고 헐뜯고 수군수군하고 돌아다닐까요?
아닙니다. 거짓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를 일으켜 자기는 살고 상대는 죽이려는 사단의 음모에 걸린 사람입니다. 만일 진리와 교회, 성도들과 목사를 위함이고, 정말 그렇다면 험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시기와 미움, 질투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는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교만입니다.
자기가 손해보고 소외 받고 그 이익 집단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놓치기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키려면 상대를 공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 주의 십자가의 도와 정면으로 대적하는 길이요 행동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 논리, 관념, 지식, 체험, 익숙한 종교적 습관, 그 어떤 자기만의 고정되고 강화 된 형식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거룩한 척 점잖게, 느릿느릿하게 겸손한 척, 부드러운 미소로 온유한 척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시기, 질투, 미움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기 의로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속이고 그 앞에서 잘 믿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살핀 자기에게 손해가 가거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자기 경험, 논리, 체험, 자기가 아는 지식에 반하면, 불 같이 이빨을 드러냅니다. 결국 발라당 넘어집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결정적일 때 다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뛰어난 것처럼 느껴지고, 나보다 부자이고, 나보다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대학 나오고, 권세 명예가 나보다 낫다고 느끼는 순간 이 이빨을 드러냅니다.
교묘하게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자기를 합리화,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비교하게 만든 사단에게 속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 못할 수 있습니다. 실수도 합니다.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런데 돌이켜 툴툴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탕자처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 영이 삽니다.
영이 살아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육신의 복, 약속한 세상의 복을 얻습니다.
영혼이 잘 된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체하거나 망설이거나 알량한 자존심 내세워 머뭇거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다리시고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환경, 처지, 형편, 조건, 상황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교하면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그러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판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비교해서 내가 낫다고 생각하면 교만이 들어오고, 남보다 내가 못하다고 생각하면 시기, 질투, 미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을 핍박하고 가두고 괴롭게 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시기 지투 미움으로 달려든 것입니다.
핍박은 이것 때문에 시작됩니다. 저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의 제사장, 장로, 서기관, 사두개인, 관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이로 인해 결국 잘못 된 선택, 판단을 내리고 맙니다,
마음에 시기와 질투, 미움이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사람은 가둘 수 잇을 지 몰라도 하나님은 가둘 수 없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가 잡히게 됨을 모르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감옥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감옥을 기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4)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살다가 당하는 핍박, 그 감옥은 기쁨이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찬송합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사자 굴도, 풀무불도, 보디발의 감옥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는 쉼터요, 하나님의 다음 계획을 위한 준비의 시간임을 알기 때문이며, 결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피할 길을 내시며 살리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요셉도, 다니엘도, 그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다 살리셨고, 이들의 감옥행에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저들로 평안한 마음을 주시고 끝내 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상황은 감옥이든지, 죽음이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딮스들이 인류살상, 인구감축을 통한 세계 독재 단일 정부체제 구축을 위한 광란 앞에 믿음의 사람들은 분연히 대적해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면 저가 너희를 피하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다 타협했습니다. 저들이 길길이 날뛰며 거짓 사기 선동으로 독극물을 찔러대고, 별 것도 아닌 있지도 않은 코로나 플랜데믹으로 가정, 가족, 사회, 직장, 영업, 경제, 나라를 해체시키고, 심지어 교회와 예배를 통제, 제한, 지시, 감독, 관리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침묵하고 짖지 못하는 개들이 되었습니다.
왜 대적하여 일어서지 못할까요?
(저는 압니다/ 북괴의 꾐에 빠져 어줍잖은 민족복음화 운운하던 이 나라 대형교회 목사들이 북괴 초청 받아 올라가서 거시기 접대 받고 씨를 뿌리고 온 것 때문에 코를 꿰인 것입니다. 거기다가 교회의 의사 결정기관인 당회가 저들에게 다 장악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들이 들통이 나면 망신당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고, 그러면 기득권을 다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며, 이로써 옥에 가야 함을 두려워하여 꼼짝도 못하고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권으로 저들이 사도들을 체포하고 잡아다가 옥에 쳐 넣을 수 있었을까요?
로마 정치권력과 야합하고 타협하고 배도하며 얼마나 복음에서 멀어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이 정국에 이를 아는 다른 목사들이나 언론이 타협한 저들의 실상을 오픈하면 정치권력을 힘입어 도리어 상대를 옥에 쳐 박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여 배도의 길에 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70년대, 종북 세력들이 교회에 재갈을 물리기 위하여 꺼낸 프레임 ‘정교분리’ 라는 말로 면죄 받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고후7:9~10/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했으며,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 했습니다.
감옥이 두려워 하나님의 의를 배도하는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마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 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마5:4. 6/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곁으로 부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들이 핍박하여 사도들을 옥에 잡아다가 가두었지만, 주의 기뻐하심을 좇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근심, 애통함,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저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19~20)/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운동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제한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오십니다.
사도들이 옥에 갇히기 전에 오시든지, 잡으려고 왓을 대 화를 내리시든지 하시면 될 것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우리의 때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고통 받고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가게 하시려는 주권, 그 계획을 따라 이끌어 가십니다.
기도의 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욕심대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 중심을 보시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지 시험하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욕심, 내 시간표대로 응답하시지 않음도 응답인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시고 구원의 길을 확장해 가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정확한 하나님의 때에 오셨고,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불러내시고 구속하사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는 그 은혜에 빚진 자인 것입니다.
40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당하는 고통을 보시고 아시고 지켜보셨습니다. 때가 되매 지도자 모세를 택하시고 때에 부르사 출애굽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침묵하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와 불법 앞에 타협치 말아야 하며, 적들을 진멸하기 위해 십자가의 군사들로 모집 된 자들임을 알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시거나 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하나님의 때에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 형편, 처지, 상황 때문에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해 하지 말고 묵묵히 하나님의 그 기뻐하심, 곧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 좇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에 주목하고 도모하면 됩니다.
끝까지 믿음의 인내로써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라는 말은 “휘포모네/ 타협치 아니하다, 하나님을 거역치 아니하다, 꿋꿋함을 지키다, 지속하다, 견디다” 라는 뜻입니다.
그날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일하실 때까지 믿음의 진을 견고히 하고 흔들리지 말고, 꿋꿋하게 그 길을 도모함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환경, 상황에 기득권에 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길에 임하는 핍박을 기쁨으로 견디며 결코 타협치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하십니다./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철옹성 여리고성도 하나님의 하라는 대로 하루 한 바퀴씩, 엿새를 돌고 이렛날은 일곱 바퀴를 돈 후 하라고 하심대로 크게 소리 질렀을 때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처럼 시간이 필요하고 그 때가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육지처럼 건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방법을 찾지도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했을 뿐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존심 버리고 요단강에 일곱 번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을 대가지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여 준행했을 때 깨끗하게 나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고난, 환난, 핍박받음, 욕먹음, 매 맞음을 다 보고 계십니다. 눈동자처럼 지키고 계십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나래 안에 보호하심 가티 지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그 누구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시간에 주의 사자가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시간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하나님의 때에 일하시는 것입니다.
굳게 닫힌 옥문!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고, 죽을 시간만 기다리는 것 같은 그 절망적인 그 순간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해 핍박과 고난을 받는 그들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인하여 애통하는 자, 심령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주의 이름을 인하여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거스르고 악한 말을 할지라도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그들에게 이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시고 옥문을 여시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끝까지 타협치 아니하고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이처럼 옥문을 여시고 자기 백성을 빼내 오시기도 하시지만, 옥에서 죽게도 하십니다.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하신 그 경륜을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절대로 손해 보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날카로운 칼을 자기도 달라고 떼를 쓸지라도 주지 않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역사하시지 않음도,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사자굴과 풀무 불 가운데 던짐으로써 죽이심이 아니라, 그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사심을 증거 하시고 그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요 통로로 사용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리고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심에 주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저들을 끌어내시며 명한 메시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했습니다.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옥문을 여시고 끌어내신 목적이 이것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기적을 베푸시며, 각종 병고를 고치시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십니까?
함께 탄 자동차 교통사고에서, 전쟁터에서, 불가피한 안전사고 가운데서 왜 살 사람은 살고 죽는 사람은 죽습니까?
운이 좋아서 입니까? 내가 무엇인가를 잘 감당하고 의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저와 여러분을 불러 내셨을까요? 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을까요?
왜 죽을 병이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를 다시 살려주셨을까요?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번에 저를 어떻게 해주시면 저의 남은 생애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흥정하고 거래하는 사실상의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에게 사명이 남았다면 고쳐 주시고 살려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의 우리의 신앙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예: 허 집사/ 병든 이유 이해시켜/ 행했더니 고쳐주셔/ 그러면 하나님의 기쁨 위해 살아야 함에도 다시 세상적 가치 좇아 다 잊어버려/ 재발하여 움직이지도 못해!)
다 잊어버립니다. 다시 세상의 것들을 잡으려고 내 주머니와 배를 위해 열심을 다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만일 그러한 약속을 하셨다면 반드시 지키시기 바랍니다. 이를 서원이라고 합니다.
왜 지켜야 합니까? 주의 성산에 거하기 위함입니다. 역으로 갚지 아니하면 거기 거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15:1~5/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 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하였으며,
전5:4~6/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은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망하게 하심) 했으며,
민30:1~2/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두령들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에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사명을 위해서 옥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사명에 주목하고 좇아야 합니다.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했습니다.
보십시오!
명령을 받은 사도들, 곧 사명을 받은 사도들은 그 새벽에 즉각적으로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좇아가 그대로 행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새벽 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즉각적인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벽에 갔기 때문이 아니라 듣고 바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새벽기도를 일평생을 하고 많은 스펙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순종하여 사명을 행함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나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그 새벽에 성전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순종하여 간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새벽신앙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바로 이것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르기를
요일5:1~5. 11~1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하나님사랑은 곧 이웃사랑의 삶이니라)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없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주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사 그 뜻을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심 같이, 우리도 또한 그 십자가의 도를 순종함으로 중심으로써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영생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영생을 얻고 지옥심판의 형벌을 피할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 부르심의 부름에 순종함으로 즉각적으로 좇아 믿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즉 주신 사명을 좇아 이처럼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행하는 사도들과 같은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그 뜻,이를 알지 못하는 종교인들의 무리도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재판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과거를 자꾸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나와 비교할 때 그 사람의 스펙을 지금도 자신이 따를 수 없는 상대적 비교의 열등의식에서 오는 비겁함입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고, 시몬이 변하여 베드로가 되며, 사래가 변하여 사라가 됨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후5:15~19/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이 세상인가? 하나님의 가치 곧, 그 기뻐하심을 좇는 삶인가? 이를 보지 못하고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세상적 가치를 좇는 자기 잣대로 말하고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 기뻐하심의 뜻을 좇는 사람은 이미 옛 사람이 아니요 이 세상을 이긴 사람이라고!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면 옥에서도 건져내시며, 하룻밤 사이에 인생이 변하는 역사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를, 그리고 남편을, 우리의 이웃을, 목사, 장로를, 권사 집사, 성도들을 과거의 옛 사람의 모습으로 평하거나 판단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불순물이 묻고 찌그러지고 구부러지고 아무 쓸데없는 것 같던 쇠붙이 한조각도, 풀무 불에 달구고 두드려 연장을 만들면 필요에 따라 아주 유용한 도구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그 연장을 유용하게 잘 사용하면서도, 과거 별 볼 일 없던 쇠붙이로 여겨 그렇게 판단함은 잘 못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언제 어떻게 변하게 하실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를 알지 못하는 대제사장들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여기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2~23)/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히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 우리가 세상 적인 논리, 지식, 이론이나 여론으로 다 알 수 있다면 믿음이란 것이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2:8~9/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했으며,
고후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기자는 이르기를
히11:1~2. 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미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세계, 영적인 세계에는 우리의 상식과 이성, 세상의 경험과 논리,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천지창조, 운행하시는 섭리를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성육신, 부활, 노아의 홍수사건, 여리고성의 함락, 홍해를 가르심, 반석에서 물을 내심,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하고, 물이 변하여 극상품의 포도주가 되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오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주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말씀 한마디로 풍랑이 잠잠해지고, 오병이어로 5천명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를 남기고 등등
성경은 기적의 역사입니다.
세상적인 것으로는 그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즉 영생구원도, 곧 그 십자가의 도를 주목하고 중심으로써 순종하여 행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추었던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비밀인 것입니다.
이를 세상은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비밀이며, 종교인들도 알지 못하는 비밀인 것입니다.
롬16:25~27/ “나의 복음과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했으며,
고전2:4~8/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도/고전1:18) ~~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 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였고,
골1:25~27/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했습니다.
또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 것은
엡3:9~12/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 라고 함은, 주를 믿음으로 주께서 담당하신 그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써 순종하여 좇아야 함을 알지 못하느냐 하는 말인 것입니다.
곧 믿음의 삶을 강조함이지,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의인인 채 죄인, 죄인인 채 의인으로서 가진 연약을 인하여 술, 담배 하는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 불신자들 중에도 술, 담배 하지 않는 분들 많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영생을 얻습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사사로이 자의적으로 풀면 안 되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24~25)/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했습니다.
사도들은 도망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명하신 대로 서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옥에서 성전으로 위치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처럼 현상이나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변화시키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알지 못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26~28)/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왓으나 강제로 못 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로다” 했습니다.
종교인들의 모습이 이것입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복음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감취었던 비밀을 알지 못하는 가짜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체포하여 왔지만 이미 주를 믿는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저들에게 돌로 침을 당할까봐 강제로 어찌 하지 못하고, 결국 사도들을 심문하기로 결정하고 예수를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죽음이 자기들의 연고인 것을 말하는 것을 따졌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기를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법을 따라 살지만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의 법, 곧 하나님의 법을 좇아 사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최고한 법이 무엇입니까?
중심으로서의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의 삶입니다.
즉 그 가치가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며 그 소망이 이 땅에 있지 않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상의 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다~~ 주님의 기쁨, 그 뜻과 요구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영광을 소망 중에 바라고 준비하는 삶의 재료들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름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처럼 선포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30~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심문하는 자들 앞에서 그들을 향해 복음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믿지 아니하고 종교인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구주요 왕으로 삼으시고 지금도 그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증합니다.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들은, 믿음의 사람들로서의 삶의 원리를 먼저 증거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자기들은 이 모든 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증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곧 주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날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믿음을 인하여, 성령 하나님의 기적을 삶 가운데 체험하고, 그 도를 순종하여 중심으로써 도모하여 좇아가는 믿음의 승리자, 그 복의 주인공들이 저와 여러분 모두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