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공구/ 이면우
열일곱, 처음으로 손공구를 틀어쥐었다. 차고 묵직하고 세상처럼 낯설었다 스물일곱, 서른 일곱, 속맘으로 수없이 내팽개치며 따뜻한 밥을 찾아 손공구와 함께 떠돌았다 나는…… 천품음 못되었다. 삶과 일이 모두 서툴렀다 그렇다 그렇다 삶과 일과 그리고 유희가 한몸뚱이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나는 머리칼이 잔뜩 센 나이 마흔 일곱에야 겨우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주 오래 움켜주고 있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듯
초등학교 이학년 아이에게 공구세트를 선물했다 지퍼를 당기는 손이 가볍게 떨고 바로 그때 아이의 탄성처럼 은백의 광채가 그곳에 떠도는 것을 나는 처음이듯 보았다.
<시 읽기 > 손공구/ 이면우
이면우 시인은 보일러공입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요? 그냥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는 시인이자 보일러공입니다.
보일러공도 시인이 될 수 있습니까? 그건 역시 좀 어리석은 질문이지요. 이 양자 사이엔 아무런 간극도 놓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들의 편견이 국경처럼 견고하게 가로놓여 있을 뿐입니다.
보일러공으로 인하여 우리의 혹독한 겨울이 아랫목부터 따스해집니다. 시인으로 인하여 우리의 냉랭한 마음이 밑바닥부터 뜨겁게 달구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보일러공과 시인은 모두 세계를 따스하게 데워 살려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면우 시인은 보일러공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는 세상의 겨울과 우리의 마음을 넘나들며 바쁘게 데워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여기까지 오기엔 무수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중졸의 학력이 전부인 이면우 시인은 열일곱 살에 손공구를 손에 틀어쥐고 낯선 세상 속으로 생활인이 되어 들어갔습니다. 그에겐 그러므로 무상無償의 철없고, 유쾌하고, 가볍고 천진난만하던 어린 시절이 매우 짧습니다. 너무 일찍 그는 어른이 되기를 강요받았던 것이지요.
어른이란 자신의 밥을 자신이 벌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런 어른의 두 손엔 ‘손공구’가 들려 있습니다. 여기서 ‘손공구’란 밥을 벌 수 있게 하는 일체의 도구를 표상하지요. 도구는 우리가 그것과 화해하기 전까지 매우 낯섭니다. 도구는 우리의 몸이 아니기에 언제나 그만의 질서를 고집합니다. 도구의 자율성이자 방향성이지요. 그 도구는 차갑게 저항하고 격하게 반항합니다. 도구를 길들이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야기가 잘못됐는지 모릅니다. 사라들이 먼저 도구에 저항하고 반항합니다. 도구적 삶을 가능한 한 지연시키고 무상의 어린 시절을 연장시키고 싶기 때문이지요. 누가 밥벌이하는 어른이 빨리 되고 싶겠습니까? 누가 도구를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몸에 달고 다니려 하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우리는 영원히 도구 없는 맨몸으로 어린이처럼 가볍게 뛰어다니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어른의 시간은 다가옵니다. 이면우 시인이 손공구를 틀어쥐었듯 그 도구를 틀어쥐고 생활현장으로 나서야 할 시간이 숙제처럼 주어집니다. 도구를 다루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든 없든 우리는 도구를 들고 발을 벌어야 합니다. 다만 그 시간이 너무 일찍 다가와 우리의 철없고, 유쾌하고, 가볍고,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을 도둑처럼 앗아가는 걸 경계할 뿐이지요.
위의 시에서 이면우 시인은 마흔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 그 도구와 화해할 수 없었던 긴 여정을 고백합니다. 그는 보일러공의 삶 앞에서 늘 지난밤의 꿈처럼 시달렸던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며 그는 도리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에게 손공구는 차고, 낯설고, 이물질 같아서 기회가 찾아오기만 하면 조용히 내려놓고 싶은 도구였습니다.
도구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도구에 진다는 뜻입니다. 도구에 진다는 것은 밥을 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싫다하더라도 그 인간 조건을 우리는 떨쳐버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생존해야 하니까요.
이런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약해야 합니다. 이면우 시인이 위 시에서 보여주었듯이 존재의 저 깊은 아래쪽부터 생의 도구를 수용하고 그것과 따스한 화해를 해야 합니다. 그 도구를 내 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조금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 슬픈 화해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그 슬픈 화해도 잘 다독이다보면 놀라운 환희로 전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시를 보면 이면우 시인은 “삶과 일과 그리고 유희”가 한몸뚱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삶과 두고와 놀이가 틈없이 전일성全一性의 세계를 형성한 것입니다. 그는 “아주 오래 움켜쥐고 있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생과 도구의 비밀을 체득한 것입니다. ‘따스한 쇠’와 ‘쇠의 따스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그는 터득한 것입니다.
이때 낯설고 차가웠던 도구는 애인처럼 품속으로 안기며 빛을 냅니다. 이미 그때 도구는 도구가 아니라 한 존재의 안쪽에 용해된 따스한 흐름이 됩니다. 이명우 시인은 이런 경지에서 손공구가 지닌 “은백의 광채”를 봅니다. 위 시에서 보이듯이 초등학교 아이에게 선물한 손공구를 아이와 함께 열면서 그는 그 손공구가 발하는 “은백의 광채” 앞에서 “탄성”을 내지르는 아이와 같이 된 것입니다.
아이처럼 탄성을 내지르게 된 그에게, 그리고 현자처럼 손공구에 깃든 “은백의 광채”를 보게 된 그에게, 손공구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도, 차갑지도, 거추장스럽지도 않습니다. 그의 깨달음 속에서 손공구는 우화등선한 존재처럼 날개를 달고 시인과 동행하는 생의 도반道伴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시인의 노력에 의한 것입니다.
직업이라는 도구와 겉돌며 불화하는 우리들에게 남모르는 긴 여정 속에서 불화를 화해로 전변시킨 이면우의 위 시가 전해주는 진솔한 내용은 감동적입니다. 인생의 최대 과제 가운데 하나가 직업이라는 도구와의 화해하면, 위 시는 그것의 가능성과 그것으로 가는 길이 시사해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