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의 통공과 행복
묵시 7,2-4.9-14; 1요한 3,1-3; 마태 5,1-12ㄴ
모든 성인 대축일 / 2023.11.1.; 이기우 신부
1. 위령성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9월에 시작해서 10월을 거쳐 11월에 마무리되듯이, 이 위령성월은 순교자 성월과 전교 성월을 마무리 짓는 매듭입니다. 무더웠던 날씨가 선선해지고 하늘이 높아지면 가을이 시작된 것을 아는 때가 9월이고,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는 단풍의 물결이 방방곡곡 온 산을 울긋불긋 물들이면 10월이라면, 전국의 가로수까지 한껏 화려하게 물들였던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때가 11월인데, 이는 세상의 한 때를 풍미하던 이들의 죽음과 그들의 영혼을 기억하는 이 위령성월의 의미와 잘 어울립니다.
사실 위령성월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 기억을 통하여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과 영적으로 교류하는 통공의 신비에서 그 의미가 완성됩니다. 그래서 위령성월의 주제는 통공의 신비입니다. 통공의 신비는 인간의 존재가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소멸되지 않고 영혼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감으로써 완성된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과 영적으로 교류함으로써 그 영원한 생명의 기운이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영적인 현실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통공의 신비는 순교자들의 고귀한 증거에 바탕을 두고 복음화에 헌신한 의인들의 모범을 우리로 하여금 이어가라는 연대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천상에 계신 성인들이 이룩하신 고귀한 순교와 의로운 복음화의 은총은 그분들과의 통공을 거쳐서 내려온 영적인 기운을 이 세상을 책임진 이들이 내려 받아 서로 연대함으로써 알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열매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입니다.
그런 의미를 반영하여 위령성월의 첫 날인 오늘은 모든 성인의 대축일로서, 지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나서 천상에 오르신 모든 성인들 특히 그 중에서도 교회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과 수직적인 통공을 이룰 뿐만 아니라 아직 지상에서 살고 있는 신자들이 수평적으로 연대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⒉ 성도들이 천상의 성인들과 통공을 이루고 서로 연대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많지만 아직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상징하는 숫자가 ‘십사만 사천’(144,000)으로서 12의 제곱을 백 배로 곱해서 나온 숫자입니다. 12진법에 있어서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 12가, 즉 열둘이 최고로 충만해짐을 뜻하지요. 그리스도 이래로 역사상 엄청나게 많은 성도들이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완전히 그리고 충만하게 누리고 있다는 복된 기억을 담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진리는 결코 역사에서 후퇴하지 않는다는 위대한 상징입니다.
이 십사만 사천 명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아 이마에 하느님의 인호가 새겨진 이들이며, 따라서 신약의 열두 사도가 새 이스라엘의 지파로서 세운 가톨릭교회에 속한 이들인가 하면, 더욱이 결정적으로는 이들이 큰 환난을 신앙으로 겪어 낸 사람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각자가 예수님께서 짊어지고 가신 모범대로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너끈히 짊어지고 가는 삶에서 그 온전한 빛을 발합니다. 그 십자가는 모든 인류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림으로써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여 그분이 이룩하시는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을 사람을 뜻하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고정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인류를 향해서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인데,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사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이 진리를 목숨을 바쳐 증거하신 분들입니다. 또한 사회의 각 분야에서 사랑의 진리를 증거하신 복음화의 일꾼들 역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일깨워준 분들입니다. 교회의 공식 결정으로 성인품에 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고 통공을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모든 분들, 사실상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날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헌신으로 혜택을 받은 후손들이므로 이 날을 맞아 그분들을 반드시 기억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입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고 나서 그분의 자녀가 된 도리로 그분의 사랑을 온 세상에 알리고자 진력했던 그분들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그런 노력은 그분들의 육신이 잠들었어도 소멸되지 않고 통공의 영향력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살아서 이룩한 공로는 절대로 무(無)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⒋ 무상으로 혜택을 받은 후손이 된 도리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분들 중에 으뜸은 이벽 요한 세례자입니다. 이분은 5대조 조상대로부터 물려 내려온 천주교 서적을 어려서부터 통달함으로써 실학에 대한 막연한 지적 호기심으로 열렸던 천진암 강학회를 서학이라고도 불렀던 천주학 강학회로 전환시켰고, 이 강학회의 구성원으로서 동료 선비였던 이승훈에게 정식 세례를 받아올 것을 권하고 실제로도 북경 천주당에서 세례를 받아온 그에게서 다시 세례를 받음으로서 이 땅에 천주교회가 자생적으로 세워지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의 영향력은 다산 정약용 요한 사도에게 깊이 미쳐서, 당쟁의 제물로 관직을 떠나 장기간 유배를 가 있는 동안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하여 오백 여권에 이르는 여유당 전서를 저술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다산학으로 발전한 정약용 사도 요한의 저술에는 그가 얼마 되지 않는 여덟 살의 나이 차이(이벽 26세, 정약용 18세)에도 불구하고 지적이고 영적인 감화력 때문에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던 이벽 요한 세례자의 영향력이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는 천주교가 전해준 복음진리의 영향력입니다. 성리학적인 정통노선에서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인도주의적이고 민생적인 학풍이 다산에게 스며들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도 교회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리지 못한 이 두 분, 이벽 요한 세례자와 정약용 요한 사도를 우리는 단지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고귀한 뜻을 이어 받아 계승해야 합니다. 조선의 백성에게 하느님을 알려주고 그 하느님의 뜻까지 펼치셨던 이 두 분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역사를 이루는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⒌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사상으로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겨서 나아가자면 반드시 안중근 토마스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 사랑을 실천한 선각적 신앙인이었습니다. 지난 10월 26일은 그가 조선 침략에 앞장선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으로 가로막은 거사일이었습니다만, 당시 뮈텔 주교가 십계명을 어긴 살인자로 지목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과 중국의 다수 양심세력은 그를 평화주의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토의 극동평화론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호도하는 거짓임을 밝히고 진정으로 한중일 삼국이 평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동양평화론을 외치고자 거사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을 획책하여 아시아를 집어 삼키려던 이토 히로부미와는 반대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침략의 원흉을 대한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응징한 것입니다.
실상 이토가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략해 오기 전에 안중근 토마스는 황해도 복음화에 앞장선 뛰어난 선교사였습니다. 하얼빈 저격 사건 전에는 뮈텔 주교조차도 조선의 어느 지방보다도 전교 실적이 뛰어났던 그를 칭찬하러 황해도 청계동 본당을 방문했을 정도였습니다. 동양평화사상에 입각하여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을 하나로 일치시킨 안중근 토마스는 민족 화해와 북방 대륙의 복음화 과업을 앞둔 우리에게 분명한 사표가 되어 줄 뿐 아니라, 남북한 모두와 중국과 일본 일각에서조차도 인정하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뮈텔이 한국인의 정서를 도무지 이해못하던 눈먼 이방인 인도자였다면, 안중근은 한겨레의 애국심을 대변한 눈뜬 한국인 예언자였습니다.
⒍ 통공과 연대로 이루는 선의 영향력에 따라서 우리 정치 현실이 복음화되어야 하는 과제를 앞두고서, 우리가 기억해야 분들 가운데에는 장면 사도 요한도 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었던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신생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유엔의 한국 승인을 얻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여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와 위상을 제고하였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는 정치적으로 자유당 일당 독재에 맞서 국민 참정권의 회복에 공헌한 민주투사요, 제2공화국의 내각 수반으로서 다원적 민주사회의 확립을 도모하였으며, 최초로 관료의 공채제도를 시행함으로써 관료의 전문화와 효율화를 꾀한 바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장기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 실천함으로써, 국민 소득의 증대와 국부의 증강을 도모하되, 이를 관 주도형이 아니라 민간 자율 방식으로 실천하려 하였고, 사회적으로도 그는 자유당 독재체제 하에서 위축되어 있던 이익집단들과 사회단체들의 분출하는 이익 추구욕구에 접해 이를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억누르려 하지 않고 대화와 협력을 통한 자율적 해결을 종용하는 사회정책을 구사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장면은 후진적이었던 한국의 정치를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 하에서 선진적으로 민주화시키려 했던 선각적 정치가였습니다만, 그의 이상과 꿈은 박정희와 같은 정치군인이 일으킨 군부 쿠데타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이후 장면과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군사독재세력에 의해 부패 무능한 정치가이자 정권으로 선전되어 왜곡되어 왔습니다. 제3공화국 이래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계획은 이미 장면 정권에서 입안해 놓은 정책이었습니다. 장면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인 정치인으로서 사회 질서 재건에 가톨릭 사회 원리를 흔들림 없이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 하였던”(한홍순) 인물이었기에, 오랜 권위주의적 독재정치의 유산을 탈피하고 다원적 시민 사회, 민간 자율의 경제구조,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통한 국민 통합과 민족 화해를 실현해야 할 시대를 맞이하여 이러한 제도와 가치를 한국 정치 역사상 최초로 실천하려 했던 정치가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잘 알던 교우들은 그가 선종했을 때, 연도를 바치면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하는 청원기도 대신에 그에게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고 기도 바쳤을 정도로, 그는 이미 임종한 순간에 신자들로부터 성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⒎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은 죽음을 넘어서서 영적인 통공과 사회적인 연대로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이끌어주는 힘입니다. 앞선 세대를 살면서 자기가 처한 시대 상황의 한계를 신앙으로 돌파하고, 보편적 진리를 실현시킴과 아울러 후대에 물려주고자 했던 선대 의인들의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희망을 지니고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실천하며 선언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