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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성 요셉 이름을 딴 꽃들, 아마릴리스, 원추리, 한련
아마릴리스, 성 요셉의 백합
아마릴리스는 꽃이 크고 화려하며 그 색도 다양한 다년생 구근 식물이다. 우리가 흔히 아마릴리스라고 부르는 식물에는 각기 다른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멕시코와 남아메리카 페루·칠레의 안데스 산맥이 원산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남부 지역이 원산이다. 두 가지 모두 열대와 아열대 지역, 곧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그리고 둘 다 꽃대의 줄기가 크고 두툼하며 나팔 모양의 꽃을 피운다.
이 식물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녀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아마릴리스라는 양치기 소녀는 알테오라는 양치기 소년을 좋아했다. 그러나 알테오는 화초 가꾸는 것만 좋아했을 뿐, 어떤 소녀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마릴리스는 신전의 여사제를 찾아가서 알테오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여사제는 아마릴리스에게 황금 화살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라고, 그리고 날마다 알테오의 움막을 오가기를 반복하라고 일러주었다. 아마릴리스는 날마다 가슴의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같은 길을 오갔다.
마침내 30일째 되는 날, 아마릴리스는 알테오의 움막으로 가는 길에 일찍이 본 적 없는 꽃을 발견하였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꽃이었다. 아마릴리스는 그 꽃을 꺾어 들고서 알테오의 움막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던 알테오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을 보았다. 알테오는 꽃을 든 소녀의 이름을 물었고, 그 이름을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꽃에 붙여 주었다. 그 순간 아마릴리스의 가슴에 난 상처는 사라졌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한편, 그리스 신화에서 아마릴리스라고 명명된 식물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 남아메리카 원산인 아마릴리스는 그 꽃이 백합을 닮았다는 점에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대표 꽃인 백합과 연관지어 ‘성 요셉의 백합’(St. Joseph’s Lily)이라고 불렀다.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 원산인 아마릴리스는 ‘아름다우신 성모 마리아’(Beautiful Lady)라고 불렀다.
원추리, 성 요셉의 백합
원추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백합과 다년생 식물이다. 서양에서는 이 식물을 포함한 백합과(科) 원추리속(屬)의 식물들을 통틀어서 ‘데이릴리’(Daylily)라고 부른다. 동아시아 원산인 이 식물은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데, 흔히 관상용으로 재배된다.
원추리의 학명은 헤메로칼리스(Hemerocallis)인데, 이는 그리스어로 ‘날[日]’ 또는 ‘하루’를 뜻하는 헤메라(hemera)와 ‘아름다움’을 뜻하는 칼레스(kalles)가 합쳐진 이름이다.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원추리의 꽃이 백합을 닮아서 아름답기는 한데 그 아름다움이 겨우 하루 동안만 지속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원추리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실크 로드를 따라 동양과 서양을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서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추리의 어린 순은 나물로 먹고, 꽃은 요리에 사용하며, 뿌리는 이뇨·지혈·소염제로 이용했다. 로마인들도 이 식물을 약재로 사용했다.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 시대에 이 식물을 정원에 많이 심었다. 이후 원추리는 널리 퍼져 나갔고, 이내 길가 어디에서나 자생할 정도로 흔해졌다.
그런데 위에서도 말했듯이 원추리의 꽃은 아쉽게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다. 다만 품종에 따라 꽃이 피어 있는 주기가 달라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 때 지는 것(주간형), 저녁때 피기 시작하여 아침에 지는 것(야간형), 저녁때 꽃이 피어서 다음날 오후까지 피어 있는 것(주야형)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이 식물을 ‘하루살이 백합’이라는 뜻에서 ‘데이릴리’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식물의 꽃을 한 달 정도는 계속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포기의 꽃대에서 꽃들이 연달아서 피고지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원추리의 일족으로 학명이 헤메로칼리스 플라바(Hemerocallis flava)인 품종을 성모 마리아의 꽃인 백합과 관련지어 ‘성 요셉의 백합’(St. Joseph’s Lily)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한련, 성 요셉의 꽃
한련은 덩굴성 식물로 잎이 연잎과도 비슷하고 방패와도 비슷하게 생겼다. 멕시코와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본래는 다년생 식물이지만, 원예용으로 개량된 품종은 일년생 식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한련은 1500년대에 원산지인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전해졌다. 이후 유럽 넓은 지역으로 소개되며 인기가 높아져서 프랑스 왕실의 정원들에서 흔히 재배되었고, 미국에서는 제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의 퇴임 후 사저에서도 재배되었다.
한련의 속명(屬名) 나스투르티움(Nasturtium)은 라틴어로 ‘경련하는 코’란 뜻의 나수스 토르투스(Nasus tortus)에서 유래한다. 맵거나 톡 쏘는 식품을 먹었을 때 코가 찡해지는 현상과 관련되는 이름이다. 그리고 학명 트로패올룸(Tropaeolum)은 방패 같은 잎과 투구 같은 꽃의 형태를 연상케 하는 그리스어 트로파이온(tropaion)에서 유래한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한련은 맵고 톡 쏘는 맛이 있어서 꽃, 잎, 열매, 씨앗이 샐러드, 식초, 조미료 등에 두루 쓰인다. 이렇듯 맵고 쏘는 맛 때문에 한련은 ‘인디언 갓’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후추를 구하기가 어려워졌을 때는 한련 씨앗을 갈아서 만든 가루를 후추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한련은 비타민 C를 많이 함유해서 천연 항생제로, 또한 작은 상처나 긁힌 곳을 덮어 가리는 습포제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페루의 인디언들은 일찍부터 한련의 잎을 기침, 감기, 생리 불순, 호흡기 질환을 치료하는 차로 사용했다.
이밖에도 한련의 쓰임새는 아주 다양하다. 그리고 번식과 재배는 어렵지 않다. 원예용으로 개량된 품종들은 씨앗으로도 번식시킬 수 있고 덩굴을 잘라서 꺾꽂이를 해도 뿌리가 잘 내린다. 물 빠짐이 좋은 곳에서 잘 자라며 온도가 적당하면 연중 꽃이 피기 때문에 화단이나 화분에 키우기에도 좋다.
한편, 이렇듯 쓰임새는 다양하고 가꾸기는 어렵지 않은 한련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구원의 역사와 교회 안에서 위치와 역할이 마치 한련처럼 두루 요긴하고 의미 있었던 한 성인을 연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한련을 가리켜 ‘성 요셉의 꽃’(St. Joseph’s Flower)이라고 불렀다.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미사의 의미와 중요성
II. 성모 마리아의 마음으로 바라본 미사의 각 단계
1. 미사의 의미와 중요성
일찍이 보나벤투라 성인은 미사의 신비가 하늘의 별이나 바닷가 모래 알갱이만큼 셀 수 없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스러운 희생제사에 참례한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주님의 은총, 강복 그리고 사랑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만치 풍성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미사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이르러서야 미사성제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과 천사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인 미사성제를 우리 인간이 설명하려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거룩한 영감을 받는다 할지라도 –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미사성제를 바치는 것보다 더 거룩하고 더 위대한 일은 하느님께서도 하실 수 없다.” 미사성제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 사업을 종합적으로 요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의 탄생, 수난과 죽으심,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시는 모든 신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미사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팔리시던 그 밤에 최후 만찬에서 당신 몸과 피의 성찬의 희생제사를 제정하셨다. 이는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세세에 영속화하고, 또한 그때까지 사랑하는 신부인 교회에 당신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를 맡기시려는 것이었다. 이 제사는 자비의 성사이고 일치의 표징이고 사랑의 끈이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어, 마음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가 미래 영광의 보증을 받는 파스카 잔치이다.”(전례헌장 47항)
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1-2항은 미사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교계적 질서를 갖춘 하느님 백성의 행위로서, 세계 교회와 각 신자들의 교회 생활의 중심을 이룬다. 미사야말로 하느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시는 행위의 절정이며, 사람들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를 흠숭하는 성부 공경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연중을 통하여 미사로써 구원의 신비가 기념되고 재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전자와 일반 신도는 주님의 만찬인 미사에 각자의 신분대로 참례함으로써, 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성체와 성혈로써 미사성제를 제정하시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도록 사랑하시는 당신 신부인 교회에 맡기실 때 목적하신 그 효과를 충분히 받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주교회의 전례위원회, ‘미사경본 총지침’, 1-2항)
그보다 일찍, 교황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골고타의 제대는 우리 성당의 제대와 다름이 없다. 성당 안의 제대 또한 골고타처럼 하나의 산이고,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계신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미사성제를 바치는 것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이유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사제의 손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제대에 내려오실 때, 인간들은 두려움에 떨고, 세상은 진동하며, 천국 전체가 깊이 감동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미사성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정의로우신 진노를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러기에 성 알베르토는 “하느님의 모든 진노와 분노가 미사의 봉헌 앞에서 풀어진다”라고 했고, 예수의 성녀 데레사도 동료 수녀들에게 가르치기를 “미사성제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미사성제만이 하느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포르토 마우리치오의 성 레오나르도는 “만약 미사가 없다면, 세상은 이미 그 내부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미사는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강한 힘이다”라고 했으며, 그와 같은 맥락에서 비오 신부도 “세계가 태양 없이 존속하는 것은 세상이 미사성제 없이 존속하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미사의 고귀한 은총들
미사성제가 미사에 참례하는 이들의 영혼에 미치는 구원의 효과는 참으로 휼륭합니다. 미사는 그 참례자들이 통회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자극하여 죄의 사함을 얻도록 하고,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을 감해줍니다. 또한 사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육욕의 충동을 다스려줍니다. 미사성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더 굳세게 결합시켜주고 위험과 재난에서 보호해주며, 연옥 형벌의 시간을 짧게 해주고 천국에서 더 높은 영광을 받게 해줍니다.
성 라우렌시오 유스티니아노는 “인간의 말로는 미사성제로부터 흘러나오는 혜택들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죄인과 하느님이 화해하고, 의인은 더욱 의로워진다. 인간의 죄가 씻기고 악이 뿌리 뽑히며, 덕과 공로는 증가되고, 또한 마귀의 계책들은 좌절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의 현세와 내세를 위하여 은총이 필요하다는 게 사실이라면, 미사성제만큼 은총을 많이 얻어주는 것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아르스의 성 비안네는 “만약 우리가 미사성제의 가치를 안다면, 우리는 미사에 더 잘 참례하고자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겠습니까!”하고 외쳤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미사성제를 다른 어떤 좋은 것들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한 번의 미사가 가지는 무한한 가치에 비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와 성 비안네도 수많은 자선과 성지순례와 심지어 순교마저도 미사 참례 한 번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성모님과 일치하여 성찬례에 참여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님과 일치하여 성찬 전례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미사에서 제관이요, 제물인 그리스도의 모친이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어머니이므로 교회는 성찬의 전례 중에 “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부릅니다. “구원 사업에 있어서 어머니와 아드님의 일치는 갈바리아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하느님께 올리는 흠 없는 제물로 내어 놓으셨고, 성모님은 십자가 곁에 서서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드님의 희생 제사에 모성애로 동참하셨고, 당신 자신이 낳으신 아드님을 제물로 봉헌하는 데 사랑으로 동의하셨으며, 당신 자신마저도 영원하신 아버지께 봉헌하셨던 것이다.”(‘마리아 공경’, 20항)
성모님은 온 인류를 대표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던 것처럼 지금도 미사가 봉헌될 때마다 제대 곁에 서계시면서 기도로써 예수님의 구원 사업을 돕고 계십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미사에 올바르게 참례하기 위해 미사 중에 성모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곁들여야 하며, 미사 중에 하느님의 아들이 제물로 봉헌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을 성자와 일치시켜 하나의 제물로 봉헌해야 합니다.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임과 동시에 단원 자신의 산 제사이어야 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갈바리아의 숭고한 희생 제사가 실제로 다시 펼쳐지는 미사에 성모님의 의향과 일치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무한한 은총을 느끼며 참례해야 합니다.(레지오 마리애 교본해설 8장 4항; 9장 1항; 40장 4항. 참조)
[문화사에 따른 전례] 유다교의 예배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례
제1장 그리스도교의 시작
예수님은 유다인이셨기에 그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유다’라는 문화의 환경에서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인간이시자 신으로서 구세사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분께서 새 계약을 세우셨고,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 계시의 형태로 당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분의 특별한 메시지가 특정한 시간과 장소, 문화 안에서 선포되고 드러났다 하여 그 특정한 시간과 장소, 문화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분의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유다 문화의 맥락 속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가 유다 문화의 환경에서 발원했다 함은 복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은 유다 전통 문화만 아니라 헬레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약 4세기 전 알렉산더 대왕(323년 사망)이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중해 동부 전역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탁월한 군사 전략가 이상의 존재였던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화를 확산시켜 근동을 넘어 서구 문명 전반을 변화시켰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그리스도로 드러나셨고, 그러한 사실을 믿고 따른 사도 공동체도 같은 시대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1. 사도 시대의 기본적 전례 형태
주님의 위탁으로 실제 전례를 확립한 이들은 사도들이다. 물론 전례의 원형은 그들이 예수님과 사는 동안 목격하고 배운 그분의 삶 가운데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곧 ‘기도하는 백성’으로서 풍부한 전례 유산, 곧 잘 조직된 기도 생활과 공적·사적 예배 등을 물려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런 문화를 알고 계셨고, 그것을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실천하셨는데, 그러는 사이 점차 유다인의 예배와는 다른 의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분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탄생 8일 뒤에 할례를 받으셨고
(루카 2,21 참조), 성전에서 정결례를 거행하는 날(22절)에 성전에 봉헌되셨다. 그리고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온 가족이 성전에 해마다 순례하셨다(41절).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시초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회당 예배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셨다(4,17-21 참조). 그분께서는 밤을 지새우며 기도를 드리셨고(6,12),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다(11,1-4). 비록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에 참여하셨다는 말은 없지만, 성전에 자주 가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복음 구절은 충분하다.
여하튼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축제를 지내셨으며, 특히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만찬을 드리셨고, 여기에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몸과 피의 봉헌을 기념하는 새로운 예식을 덧붙이셨다. 그분께서는 당시 경건한 유다인들이 드리던 매일 기도를 당신 가정에서도 드리셨을 것이다. 사실 그분께서는 아침 기도의 ‘쉐마 이스라엘’(신명 6,4 참조)을 알고 계셨고, 유다인의 축복 기도인 베라코트(마르 6,41; 8,7; 14,22-23 참조)를 사용하셨으며, 이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바꾸셨다(마태 11,25-27 참조).
요한 복음은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에 대해 말한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4,23).
그리스도교 예배 고유함의 기원 예수님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명시적으로 다음의 예배를 설립하셨음을 언급한다. 세례를 받으시고(마태 28,19 이하 참조),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라는 말씀으로 만찬의 거행을 명하셨다. 유다교의 예배가 그리스도교 전례로 전환되리라는 표징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의 장막이 찢어졌다는 사실이다(마태 27,51 참조). 이는 유다교의 성전 예배가 끝나리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공동체는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유다교의 성전이나 회당 예배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가 담긴 형태의 예식을 거행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빵 쪼갬 예식 또는 주님 만찬을 거행하였다. 또한 여러 형태의 기도들과, 성령의 부여를 뜻하며 교회 공동체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는 예식인 안수, 병자에 대한 기름 바름 등을 행했다.
초대 교회의 세례
사도행전을 보면 그 당시 후보자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예식이 있었다(사도 10,48; 19,5 참조). 물로 씻는 예식, 세례 집전자가 세례 후보자를 물속에 잠그는 이 예식은,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행했고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형태이다.
세례는 미사 중 복음의 선포와 신앙 고백에 이어 행해졌다(8,35-38). 이 예식에 이어 성령을 받는 안수가 뒤따랐다(29,6).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것을 뜻했다(로마 6,3-11; 콜로 2,12; 3,1-4 참조).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이름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언급한다(28,19).
예수님의 명령과 사도들의 빵 나눔 예식
주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저녁에 제자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셨다. 그분께서는 빵을 나누시면서, 그리고 만찬 뒤에 세 번째 포도주 잔을 드실 때 각각 축복 기도(베라코트)를 드리셨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코린 11,24-25)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당연히 ‘그분을 기억하여’ 이를 계속 반복했다. 이 기억(Anamnesis)은 단순히 주관적으로 기억이나 회상하는 것을 넘어, 기억하는 바를 현재화함을 의미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억의 성찬 모임을 ‘빵 나눔’(Fractio panis)이라고 불렀다(사도 2,42.46; 20,7.11 참조). 이렇게 부름으로써 이 나누어진 유일한 빵, 곧 그리스도를 받아먹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룸(1코린 10,16-17 참조)을 드러냈다.
사도 시대의 안수나 병자에 대한 기름바름 등과 같은 예식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더는 구약의 예배 형태에 의존하지 않았다. 오히려 회당과 유다 백성의 생활 가운데 더욱 영적인 형태로 표현된 말과 행위 안에서,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 사건의 선포를 통하여, 그리고 “영과 진리”(요한 4,24)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느님을 찬미하는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전례 탐구 생활 (8) 제대 초 ① 언제, 몇 개를 놓을 것인가?
지난 주일 주님 봉헌 축일을 기념하며 본당에서는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복했을 것입니다. 내친김에 제대 초에 관한 내용을 2회에 걸쳐 소개하려고 합니다. 특히 전례 담당 수녀님이나 제의실 담당 봉사자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전례에서는 제대 초의 개수뿐만 아니라, 재료와 위치까지 까다롭게 정해져 있었지만, 공의회 이후에는 규정이 대폭 간소화되었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117항 딱 한 곳에서 제대초의 개수에 대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거행에서 제대 위나 곁에 적어도 두 개, 특히 주일이나 의무 축일 미사에서는 네 개나 여섯 개, 또는 교구장 주교가 집전한다면 일곱 개의 촛대에 촛불을 켜 놓는다.”
이 규정을 따르면서 피해야 할 오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전례 거행에 따라 ‘반드시’ 초의 개수를 늘리거나 줄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17항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어느 미사에서든지, 특히 제단이나 제대가 협소한 상황이라면, 2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교구장 주교가 거행하는 순회 미사 때에도 ‘일곱 개 또는 적어도 두 개’(『주교 예절서』 125항 참조)의 제대 초를 사용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17항에 나오는 제대 초의 개수가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촛불은 공경과 축제의 표지”(「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07항)이므로, 제대 초의 수를 늘리는 것은 전례일의 ‘등급’이 아닌 ‘축제’의 성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은 「전례일의 등급과 순위」에서 1등급에 속하지만 단 두 개의 초만 사용합니다. 이날이 가장 중요한 날에 속하기는 하지만 ‘축제의 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제대 초의 개수에 관한 실행 원칙을 준비해 봅시다. 먼저, 현재 한국 본당들에서 일반 적으로 통용되는 ‘2개-4개-6개 시스템’을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1) 재의 수요일과 성주간을 포함한 모든 평일과 기념일에는 가장 기본적인 개수(2개)를 놓는다. 단, 다음의 예외가 있다.
• “부활 시기를 시작하는 팔일은 부활 팔일 축제를 이루며 주님의 대축일로”(「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24항) 지내기 때문에 대축일과 같이 6개의 초를 놓는다.
• 이어지는 부활 시기 평일은 “마치 하루의 축일처럼, 나아가 하나의 ‘위대한 주일’로서 기뻐하고 용약하며 경축”(「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22항)하기 때문에 주일과 같이 4개의 초를 놓는다.
•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는 사제직과 성찬 제정을 특별히 경축하는 날이고 성야 미사 전 마지막 미사 거행이기 때문에 6개의 초를 놓는다.
• 위령의 날은 연중 주일과 겹치더라도 거행이 우선시되고, 죽은 모든 이들의 영원한 행복을 기도하는 날이기에 주일과 같이 4개의 초를 놓는다. [2020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전례 탐구 생활 (9) 제대 초
2) 전례 시기와 상관없이 모든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임을 드러내기 위해 4개를 놓는다. 그러나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특별히 기념하는 날(주님의 성탄과 공현, 세례, 부활, 승천, 성령 강림 등)이 주일에 오면 축제의 성격을 한층 드높이기 위해 6개를 사용할 수 있다.
3) 모든 축일에는 4개를 놓는다.
4) 모든 대축일 미사에는 6개를 놓는다.
5) 보편 전례력에는 대축일로 지정되어 있지 않지만 한국 교회에서 특별히 성대하게 거행할 수 있는 미사(예를 들어 설이나 한가위 미사,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4위 미사)나 예식 미사(세례, 견진, 서품, 혼인 등)에는 6개(또는 경우에 따라 4개)의 초를 사용하여 그날의 성격을 한층 더 강조할 수 있다.
‘2개-4개-6개 시스템’ 대신 6개 놓는 날의 초 개수를 모두 4개로 줄여 ‘2개-4개 시스템’만으로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교구장 주님께서 집전하는 미사에는 앞서 말했듯이 7개의 초를 놓거나, 상황에 따라 그냥 2개나 4개를 사용합니다.
② 제대 초를 놓을 때 유의해야 할 사항
제대 초를 놓을 때 주의할 점에 대해서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07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촛불은 공경과 축제의 표지이기 때문에 모든 전례 행위에 필요하다. 촛대는 제대와 제단의 구조를 고려하여 제대 위나 가까이에 놓아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 하고, 신자들이 제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나 제대 위에 놓인 것들을 쉽게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촛불은 전례 거행의 필수 요소지만, 전례가 진행되는 데 부담이나 방해 요인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했듯이 제단이나 제대 크기를 고려해서 초와 촛대의 크기나 개수를 현명하게 조절해야 합니다. 또한 제대를 향한 신자들의 시선이 ‘촛불 장벽’에 가로막히지 않도록 높이나 위치를 잘 조절해서 배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자들이 제대 위의 예물과 사제의 전례 동작을 잘 볼 수 있도록 제대의 가로 면이 아니라 세로 면에 초를 놓을 수도 있고, 제단 바닥까지 오는 긴 촛대를 사용하여 제대 옆이나 둘레에 놓기도 합니다. 가지가 4개 또는 6개 달린 하나의 촛대를 사용해서 제대 앞이나 옆에 두는 방식도 있습니다.
제대 초에 관해서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은 그대로 따라야 하는 규정이 아니라 하나의 제안입니다. 실제 본당에서 합리적인 이유에 따라 잘 실행되고 있는 것을 억지로 바꿀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전례 준비를 담당하는 봉사자들이 분명한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어떤 근거와 이유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할지 그 과정을 제안한 것으로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정결을 상징하는 식물들
동백나무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난 추운 계절에 꽃을 피워 사랑을 받는 동백나무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자생하는 차나뭇과의 상록 활엽 교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의 섬들과 동으로는 울릉도, 서쪽으로는 대청도에서 자라며, 육지에서는 충남 서천군 춘장대와 전북 고창 선운사 이남 지역에서 자란다. 수분을 도와줄 곤충이 없는 계절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향기보다는 강한 색상으로 동박새를 불러들여 꽃가루받이를 한다. 동백꽃은 모양이 아름다워 유럽에서는 ‘겨울의 장미’라고도 불리고, 일본에서는 종종 ‘일본 장미’라고도 불린다.
동백나무는 라틴어로 카멜리아(Camelia)라고 불리는데, 이 이름은 17세기 후반의 예수회 사제요 식물학자인 게오르그 조셉 카멜(Georg Joseph Kamel)의 이름을 딴 것이다. 카멜 신부는 필리핀에서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현지의 식물 자원들에서 약성과 약효를 발견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헌신했다. 그래서 동백나무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18세기 스웨덴의 식물분류학자 카를 폰 린네(Carl von Linnaeus)는 의약 식물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카멜을 기려서 동백나무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그는 또한 한·중·일 세 나라에 모두 자생하는 종류의 동백나무 속(屬)을 카멜리아 야포니카(Camellia Japonica)라는 명명했는데, 이는 17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일본에서 근무하면서 동백나무에 대해 처음으로 기술한 엥겔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의 공로를 기린 것이다.
동백꽃은 일반적으로 사랑, 호감, 존경을 상징한다. 또한 꽃의 색깔에 따라 각기 고유한 상징성을 지닌다. 빨간색 동백꽃은 사랑, 정열, 간절한 소망을 상징하고, 분홍색 동백꽃은 누군가를 그리워함을 상징하며, 흰색 동백꽃은 흠모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일찍부터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분홍색 동백꽃을 바쳤고 인기가 많은 사람에게는 흰색 동백꽃을 바치곤 했다.
중국에서는 동백꽃이 두 연인 사이의 결합(결혼)을 상징한다. 섬세하게 겹쳐진 꽃잎들은 여성을 나타내고, 그 꽃잎들을 받쳐 주는 꽃받침은 여성을 보호하는 남성을 나타낸다. 특이하게도 동백꽃은 진 뒤에도 꽃잎과 꽃받침이 분리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꽃들이 지면 꽃잎은 땅으로 떨어지고 꽃받침은 줄기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반해, 동백꽃의 꽃잎과 꽃받침은 함께 땅으로 떨어진다. 그런 점에서 영원한 사랑과 오래 지속되는 헌신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동백꽃을 보면서 정결 또는 순수함이라는 상징성을 읽어냈다.
브램블(가시나무)
성경에 ‘가시나무’로 등장하는 식물은 가시로 뒤덮인 덩굴들이 뒤엉켜서 덤불을 이루는 장미과 산딸기 속의 관목들, 이를테면 서양의 블랙베리(blackberry), 라즈베리(raspberry), 듀베리(dewberry), 우리나라의 산딸기, 복분자 같은 식물들을 아울러서 말하는 브램블(Bramble)로 추정된다.
유럽이 원산지인 브램블은 이름 자체가 ‘가시로 뒤덮이다’라는 뜻이 있는 브람벨(brambel) 또는 브림빌(brymbyl)에서 유래한다. 인류는 일찍부터 브램블의 열매를 좋은 식품으로 이용했다. 그래서 한때는 브램블을 거룩한 식물로 받아들였고, 나아가 ‘축복받은 가시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브램블이 비록 달콤한 열매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거칠고 날카로운 가시로 덮인 덩굴들이 아무데서나 뿌리 내리고 번식하여 덤불을 이루기 때문에 잡초로 여기거나 불길하고 해악을 가져오는 식물로 간주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브램블 열매의 색이 검은 까닭은 악마가 열매에다 침을 뱉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에서는 10월11일(예전의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 자나서 브램블 열매를 따는 것은 불행을 부르는 짓이라고 여겼다. 미카엘 대천사에 의해 브램불 덤불에 떨어진 악마가 자기를 찔러서 상처 나게 만든 가시들에게 저주를 내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유럽에서는 죽은 이들이 유령이 되어 나타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무덤 주변에 브램블을 심어 덤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구약성경 판관기에는 아비멜렉의 학살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요탐이 들려주는 우화가 실려 있다. 나무들의 왕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는 달리 가시나무는 왕의 자리를 차지하겠노라고 나섰다는 비유로 왕의 자격이 없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스켐 사람들을 비난하는 내용이다(판관 9,7-21 참조).
이처럼 좀처럼 환영받지도 못하는 가시덤불 브램블이지만, 저 옛날 주님의 천사가 모세에게 나타났던 불타오르는 덤불(탈출기 3장 참조) 또한 브램블이었다고 여겨져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가시로 뒤덮인 덤불인 브램블에서 욕망에 물드는 일 없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불꽃들을 감당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정결이라는 상징성을 보았다.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는 유럽의 알프스가 원산지인 국화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은 산의 건조한 암석 지대에서 자라는 고산 식물이다. 학자들은 이 식물이 빙하기에 아시아에서 알프스로 이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고산 지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솜다리, 산솜다리, 한라솜다리 등이 자란다.
독일어로 ‘고귀하다’라는 뜻의 에델(edel)과 ‘희다’라는 뜻의 바이스(weiß)가 합쳐진 에델바이스(Edelweiss)는 그야말로 ‘고귀한 흰 빛’이다. 한편, 에델바이스의 학명 레온토포디움(Leontopodium)은 ‘사자의 발’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를 라틴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에델바이스의 꽃은 한 송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송이가 아니다. 2~12개의 머리모양꽃차례에 50~500송이의 작은 꽃들이 무리지어 별 모양을 이루며 벨벳 같은 흰색 포엽(苞葉) 5~15개에 둘러싸여 있다. 에델바이스는 생김새가 섬세하고 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바람에 강한 땅속줄기에서부터 수분의 증발과 발산을 막는 잎들이며 자외선을 차단하는 털로 덮인 포엽에 이르기까지 극한의 기상 조건들을 견딜 수 있도록 준비된 식물이다.
알프스 지역에서는 ‘알프스의 별’이라고도 불리는 에델바이스는 ‘고귀한 흰 빛’이란 이름의 뜻에 걸맞게 순수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에델바이스를 정결, 순결, 순수함을 상징하는 꽃으로 이해했다.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전례헌장이 가르치는 능동적 참여
I. 전례란 무엇인가?
2. 전례헌장이 가르치는 능동적 참여(Participatio actuosa)
1) 잘 알고(scienter) 참여(11항)
현재 진행되는 전례를 이해하고 전례에 참여한다. 전례 개념, 성사들, 준성사, 시간전례, 전례주년, 신심행위에 대한 역사와 의미, 그리고 표징들을 이해할 때 능동적 참여가 더욱 쉬워진다.
2) 의식적(conscie) 참여(14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이해하고 거룩한 행위에 ‘의식적으로’ 경건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깊은 관심과 배려를 기울인다. 따라서 전례에서 전개되는 예식과 기도에 관심을 기울여서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정성을 다하여 참여해야 한다.
3) 경건한(pia) 참여(48항)
전례에 건성으로가 아니라 공경심을 지니고 깊이 삼가고 조심스럽게 참여해야 한다. 전례에서 주례자와 공동체가 드리는 기도에 마음을 다하여 경건하게 동참하여, 전례봉사하는 신자들은 봉사 전과 후에도 기도를 통해서 경건함을 더한다.
4) 내적(internam)·외적(externam)으로 참여(19항)
전례에 참여하는 모두가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어 외적으로 목소리와 노래, 자세와 태도, 침묵과 행렬 등으로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성이 잘 드러나게 해야 한다.
5) 온전하고 완전한(plena) 참여(14항)
습관적으로 미사에 늦게 오거나 다른 일에 바쁘다고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을 지양하고, 미사 전에 여유 있게 와서 차분히 준비하며 영성체도 하며 미사가 끝날 때까지 공동체와 함께 참여해야 한다.
6) 효과적인 (fructuose) 참여
전례 예식과 본문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참여해야 하며, 독서 본문에 대해 이해하고 강론으로 도움을 받으며, 성체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합당한 준비로 영성체에 참여해야 한다.
3. 전례의 본질적 특성
1) 전례는 교회 공동체의 행위로서, 그 공적 특성대로 가급적 공동체를 이루어 거행해야 한다. 혹 사제 혼자서 전례를 거행해야 할 경우라도 그 역시 교회 공동체의 행위로서 봉헌하는 것이다.
2) 전례는 봉사이다.
‘전례’의 라틴어 liturgia(리뚜르지아)의 어원을 보면 희랍어 λαος(라오스:백성)와 ερϒον(에르곤:일)의 두 단어의 합성어인 λειτυρϒια(레이뚜르기아:백성을 위한 봉사)에서 유래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전례는 ‘봉사’(service)이다. 전례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봉사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찬미와 흠숭을 잘 바쳐 올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충만히 받아 성화되도록 도와주는 봉사이다.
따라서 전례 봉사자들은 – 누구보다도 주례 사제는 – 자신의 성향이나 신심을 주장하기보다 전례 지침에 따라 통일되게 성실히 전례를 거행함으로써 전례에 참여하는 모든 회중들이 혼돈하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열정적으로 임하게 해주어야 한다. 미사 전례의 봉사자들 중에 누구보다도 사제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미사 전례를 거행하여 신자들이 더욱 감명 깊고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더 연구하고 섬세하게 잘 준비하며, 겸손하고 성덕 깊은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3) 전례는 ‘축제’이다.
미사 전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상 희생제사를 통하여 영광스런 부활에로 나아가는 파스카의 성스러운 축제이다. 미사 전례로 기념되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희생제사와 부활로 우리가 얻게 된 죄 사함의 은총, 구원의 은총, 성화의 은총을 생각할 때 미사 전례를 ‘축제’(festa)로 거행해야 마땅하다. 진정 기쁘게, 활기차게 화답하고 성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미사 전례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미사 전례 안에서 주님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하게 되며 감사와 찬미, 흠숭과 찬양의 환호성을 터뜨리게 될 것이며, 기쁨과 행복 속에 성화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미사 전례 분위기는 대개가 염불 외듯 너무 가라앉아 활력 없이 거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비해 개신교 예배는 미사 성제가 아님에도 그렇게 힘차고 역동성 있게 거행되고 있다. 우리 미사 전례의 이 처진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4) 전례는 ‘삶의 전례’를 촉구한다.
미사 전례는 십자가를 통해 부활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의 거행이며, 그로써 삶 속에서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십자가의 길을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충실히 걸어가도록 재촉한다. 말하자면 ‘예식 전례’(Rex orandi)은 ‘신앙 내용’(Rex credendi)을 예식으로 거행하고 ‘삶의 전례’(Rex vivendi)를 촉구한다.
전례는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례헌장 서론에서 그 정신이 드러난다. 전례는 신자들의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나날이 증진시킨다. 전례는 신앙을,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정 짓는 행위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례라는 말마디를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벗어나는 시간으로 여겨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전례는 삶과 별개가 아니다. 전례는 삶으로 구현되어야할 살아있는 신비이지 화석탐사나 연극이 아니다. 삶을 재촉하지 못하는 전례는 분명 잘못된 전례이다. 전례는 삶과 연결될 때 비로소 그 중요한 의미를 실현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바른 전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회개와 복음 선포의 삶이 전제되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전례 개혁과 전례의 육성책을 강구하면서 교회 자체와 인류의 쇄신을 지향했듯이 전례는 항상 세상 자체를 성화시켜 하느님께 인도하고 그분을 합당하게 공경하는 것과 관계되는 모든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전례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과 관련을 맺으며 세상을 하느님께 인도할 때 비로소 전례의 목적인 하느님에 대한 공경과 인간의 성화가 삶 속에서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전례는 공의회의 천명대로 “교회의 모든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으로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이고 “가장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에서 교회의 다른 어떠한 행위도 이 이름과 같은 높이를 차지할 수 없다.”(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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