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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矛盾)
창과 방패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이 서로 어긋남을 비유한 말이다.
矛 : 창 모(矛/0)
盾 : 방패 순(目/4)
(유의어)
이율배반(二律背反)
자가당착(自家撞著)
자상모순(自相矛盾)
출전 : 한비자(韓非子)
논리학(論理學)에서는,두개의 개념(槪念)이나 명제(命題)사이에 의미 내용이 서로 상반(相反)되는 관계를 말한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초(楚)나라에서, 창(槍)과 방패(防牌)를 파는 상인이 “이 창은 예리하기로 어떤 방패라도 꿰뚫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방패의 견고(堅固)함은 어떤 창이나 칼로도 꿰뚫지 못한다”고 자랑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네의 창으로써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상인은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 난세편(難世篇)에 있는 고사로, 법지상주의자(法至上主義者)인 한비(韓非)가 유가(儒家)의 덕치주의(德治主義)를 비판한 우화(寓話)이다.
유가에서 말하기를, ‘역산(歷山)의 농장에서 농지의 경계때문에 분쟁이 있어 성인인 순(舜)임금이 가서 몸소 일을 하였더니 1년만에 분쟁이 사라지고, 황하지역(黃河地域)에서 어장(漁場) 문제로 분쟁이 있어 순(舜)임금이 가서 낚시질을 하였더니 이도 1년만에 해결되었고, 동방의 이민족이 만드는 도기(陶器)가 조악(粗惡)하여 순(舜)임금이 가서 그릇을 만들었더니 이도 1년만에 품질이 향상되었다. 이 모두가 순(舜)임금의 덕에 의한 감화이다’라고 하였다.
한비(韓非)는 순임금이 유덕(有德)한 성인이라면 농부나 어부가 다투지 않을 것이요, 도기(陶器)도 우량품(優良品)으로 만들었다면 순임금이 덕을 베풀 여지가 있었겠는가.
순임금이 덕을 베풀어 분쟁이 해결되고 도기의 품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요(堯)임금에게 실정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순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요임금의 치세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순임금의 덕화(德化)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마치 ‘창과 방패의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순임금의 치세를 칭송하고 있는 유가의 설을 논란한 것이다.
전통적 논리학(論理學)에서는 같은 주어(主語)에 대하여 서로 부정하는 판단을 내린 것을 연립시킨 명제의 성질이다. 현대 논리학에서는 하나의 명제와 이의 부정이 동시에 성립됨을 주장하는 명제이다.
이 너무나도 유명한 모순(矛盾)의 이야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후담이 있다. 이 후담은 중국의 어느 유적을 발굴하던 중 나온 고서에 담긴 이야기로 이 망신을 당한 상인이 직접 쓴 일종의 일지(日誌) 같은 것이었다.
이 모순(矛盾)의 이야기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은 모순을 어리석은 장사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후담(後談)을 읽은 자로서 나는 그 의견에 결코 찬성할 수가 없다.
일지(日誌)의 하단(下段)에 남겨져 있는 공개금지(公開禁止)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이 상인의 오명(汚名)을 벗기기 위해 이 일지를 공개한다.
그 누가 알았으랴. 이 상인이 저주받은 무가(武家)의 마지막 후손이며, 그 저주를 청산하기 위해 보물 중의 보물, 가보 중의 가보를 시장터에 내다 팔러 온, 그러나 무가(武家) 최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해야 했던, 그리고 모욕과 수치감을 느껴야 했던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상인이 내다팔려 했던 창(槍)은, 단 하루라도 피를 머금지 않으면 스스로 피를 찾아가는 괴물이었다.
그 창을 가져온 그 날부터 당장 한 시종이 죽었고,그 다음 날도,그 다음 날도 무가의 사람들이 하나하나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상인은 창이 사람을 죽일 거라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했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흘러갈 때마다 가슴을 꿰뚫려 죽어있는 시체를 보며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살수(殺手)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상인이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미 무가의 거주(居住)하고 있는 사람들 중 절반이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죽어나간 후였다. 남은 반수도 무가에 저주(咀呪)가 내렸다 하여 모두 도망쳐 버리고, 무가(武家)에 남은 것은 상인의 가족들뿐으로 상인은 자신을 죽이려는 창과 밤새도록 사투한 끝에 간신히 창을 잡을 수 있었다.
상인의 손에 창이 잡히는 순간부터 창은 그 사이한 성질을 버려 천하에 다시없을 창으로 탈바꿈하여, 상인은 한때 그 창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였다.
무가의 후손이기는 하나 배운 무예가 없던 상인도 천하를 호령할 정도의 힘을, 그저 창을 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창의 저주가 사라지고 무가가 서서히 다시 그 몸을 일으킬 무렵, 이번엔 웬 거지가 이상한 방패를 들고 와서 상인에게 하룻밤만 자고가자고 애원했다. 그 대가로 방패를 준다는 것이었다. 상인이 보니 방패도 썩 좋은 것이어서,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방패는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었다. 그 거지는 초(楚)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거지들의 왕초로, 이막(李幕)이라는 자였다.
그런 자가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다니던 방패를, 단 하룻밤 자는 것으로 내어주었다는 소문이 밤새 쫙 퍼지고, 이막(李幕)이 가지고 다니던 방패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수많은 무인들이 상인을 찾아왔다.
좋게 말로 타일러 보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창을 사용하여 내쫓아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오십여명의 무인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 난동을 부렸는데, 그때도 상인은 창의 힘을 빌려 무인들을 모두 내쫓았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한 일주일 쯤 지났을까, 이백여명의 무인들이 한밤중에 무가(武家)를 습격한 것이다. 간신히 그들을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상인의 가족들은 모두 처참히 살해당한 후였다.
상인은 창의 힘으로 방패를 바수어 버릴 생각을 하였으나 방패 역시 기물(奇物)이었는지 철판(鐵板)도 종잇장처럼 찢어놓는 창으로도 바수어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인은 창과 방패를 가지고 무가를 떠났다.
가족을 잃은 상인의 마음 한구석에서 지펴진 복수라는 불씨는 곧 상인의 마음은 물론 몸마저 불살라 버렸다. 상인이 가는 길마다 피가 서렸고, 창끝에는 여지없이 피가 묻어나고, 방패에도 피가 점철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피의 행보였다.
오로지 복수라는 일념으로 생애를 보내던 상인이 복수가 끝났을 때에 얼마나 허무했을지 생각해 보라. 불길은 여전히 타오르나 그 불길에 던져줄 장작이 없는 것이다.
상인은 그야말로 도를 깨우쳐, 인생무상을 깨달았다.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창과 방패가 이 모든 저주의 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인은 그것들(실제로 일지에도 이 부분부터는 창과 방패가 아닌 그것들이라고 묘사한다. 아마 혐오감 때문이리라 짐작한다)과 똑같이 생긴 창과 방패를 한 수레 샀다.
그리고 그것들도 수레 속에 넣어 자신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뒤섞었다. 그리고 무작정 시장터에 나가 손에 집히는 대로 팔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들을 팔아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창은 괴물이고 방패는 기물이었다. 어느 순간 상인은 자신이 수레에서 집은 창과 방패가 그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인은 시장터를 거니는 모든 이들에게 그것들이 무엇인지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상인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들도 다른 창과 방패와 마찬가지로 팔아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한때 무인이었던 자로서 최후의 자존심이 그를 붙잡았다. “이 창은 예리하기로 세상의 어떤 방패라도 꿰뚫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방패의 견고함은 어떤 창으로도 꿰뚫지 못한다.”
상인이 이 절규와도 같은 외침을 듣고, 지나가던 행인이 물었다. “그럼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오?”
행인의 말을 들은 상인은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부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순(矛盾)의 이야기이다.
장사를 접은 상인은 그것들을 가지고 산을 올랐다.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은 상인은 하루를 지금 내가 여기 쓰고 있는 일지를 쓰는 일, 그리고 창으로 방패를 깨거나 방패로 창을 뭉그러뜨리는 일로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후자의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성취한 상인은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일지(日誌)에 그 일을 피로 적어 놓았다. 일종의 혈서인 것이다. ‘나는 비로소 그것들을 없애버리는 데 성공하였다. 창은 그 끝이 뭉뚝하니 더 이상 창이 아니요, 방패는 하나가 두개고 두개가 하나이니 더 이상 방패가 아니로다. 내 평생의 숙원을 이르니 지금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구절 역시 피로 쓰여 있었다. ‘이 일지를 발견하거든 부디 세상에 알리지 말아주시오. 내 저주는 내가 가지고 가리다. 그것이 한때 수많은 죄를 지었던 나의 마지막 도리이니라.’
이렇게 일지(日誌)는 마지막을 끝 맺었던 것이다.
모순(矛盾)의 이야기, 대수롭잖던 어리석은 상인의 이야기는 이토록 많은 후담을 숨기고 그 일부만을 우리에게 드러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일지(日誌)의 하단에 상인의 이름은 항방(項邦)이라고 밝혀져 있다.
우리들은 둥근 지구위에 살면서 직선으로 된 집을 짓고 직선으로 된 집 안에 살면서 곡선으로 된 그릇에 음식을 담아 우리의 생명을 키웁니다.
또한 자연을 정복하고 거스르며 개척하여 문명을 만들지만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며 문화를 만듭니다. 그러니 직선의 문명만으로 살 수도 없고 곡선의 문화만으로 살 수도 없겠지요.
또한 우리들은 자신이 현재 처한 입장과 욕구에 따라 필요한 것 좋은 것이 다르게 미련입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오케스트라의 공연 티켓을 준다한 들 아무런 고마움도 못 느낄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한 모금의 물이 더 귀중하고 필요할 터이니까요.
우리네 삶에서는 이처럼 그 무엇이 어떠하다는 절대적인 정의나 불변의 가치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나에게는 처치 곤란의 불필요한 것이라도 남에게는 더 없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내게 좋은 것이 남에게는 나쁜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길고 짧음도, 크고 작음도, 높고 낮음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는 아래 위, 전후 좌우, 옳고 그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러니, 이 세상 그 무엇인들 좋다, 나쁘다, 선(善)이다, 악(惡)이다를 어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옳음과 그름, 좋음(善)과 나쁨(惡), 필요와 불필요 따위의 서로 상반되는 듯한 온갖 모순들을 어떻게 조화시켜 어우러지게 하느냐에 따라 행(幸)의 길과 불행의 길이 갈라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저런 모순(矛盾)들을 조화시켜 행(幸)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직 나만을 주장하는 아집에서 벗어나 남의 처지와 입장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졌을 때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모순(矛盾)
원래 창과 방패라는 뜻으로 앞뒤가 서로 어긋남을 뜻한다.
전국시대 초나라에서 무기를 파는 상인이 시장에서 방패를 흔들며 외쳤다. “이 방패는 아주 단단해 어떤 창이라도 막아냅니다.”
이번에는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이 창은 아주 예리해 어떤 방패도 단번에 뚫어버립니다.”
그러자 상인을 지켜보던 한 구경꾼이 물었다. “그럼 그 예리한 창으로 그 단단한 방패를 찌르면 어찌 되는 거요?” 말문이 막힌 상인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어긋남을 비유하는 모순(矛盾)은 한비자에 나오는 창(矛)과 방패(盾) 파는 상인 얘기가 유래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에 관한 일화 하나. 어느 날 한 청년이 돈이 없어도 논법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물었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했다. “좋네, 공부가 끝난 뒤 치른 첫 재판에서 이기면 그 돈으로 수업료를 내게.”
한데 외상(?)으로 논리 공부를 마친 청년은 수업료를 낼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재판에도 관심이 없고 놀기만 했다.
참다 못한 프로타고라스가 청년을 고소했다. 재판정에서 마주친 청년에게 그가 넌지시 말했다. “어차피 자네는 수업료를 내야 할 걸세. 자네가 재판에서 이기면 나와의 계약대로, 지면 재판장의 판결대로 수업료를 내야 하지 않겠나.”
청년이 바로 응수했다. “어차피 스승님은 수업료를 받지 못합니다. 스승님 말씀처럼 재판장이 수업료를 내라 하면 제가 재판에 진 것이니 안 내도 되고, 내지 마라 하면 재판장의 판결이니 그 또한 낼 이유가 없습니다.”
모순이나 이율배반(二律背反)은 논리적·사실적으로는 근거가 대등하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명제다. 모순과 이율배반이 생기는 건 내 기준으로, 내 이익으로만 세상을 재단하는 탓이다. 내게 이익이 되는 잣대만 쓰기 때문이다. 나의 이익만 쳐다보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면 수시로 모순에 빠진다.
모순(矛盾)
창과 방패,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앞뒤가 안 맞는 것을 뜻하는 모순(矛盾)은 널리 아는 대로 창과 방패를 아울러 말한 것이다.
적을 찌를 수 있도록 손잡이가 있는 긴 창을 본뜬 글자가 모(矛)다. 창을 뜻하는 다른 글자 과(戈)는 창 끝에 낫과 같은 갈고리를 단 병기, 극(戟)은 두 가지를 혼합해 찌르기도 하고 베기도 하는 무기라 한다. 방패를 말하는 순(盾)은 실제 방패 간(干)을 보완하여 눈[目]까지 보호하게 발전시킨 것이다.
글자만을 떼어 이야기했지만 모순은 이것을 모르더라도 창과 방패를 파는 장사치가 턱없이 자랑하다 발목을 잡힌 이야기에서 나온 것임을 모두 안다. 자기가 한 말에 앞뒤가 서로 어긋나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상인의 약은 모습은 자상모순(自相矛盾)이라고도 한다.
잘 알려졌지만 다시 한 번 보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초(楚)나라에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자기 물건이 최고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먼저 ‘이 방패는 굳고 단단해서 어떤 것으로도 뚫을 수가 없습니다(譽其楯之堅 物莫能陷也)’라며 떠벌렸다.
다음에는 창을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 창은 날카롭기가 그지없어서 어떤 방패든지 못 뚫을 것이 없습니다(吾矛之利 物無不陷也).’
구경하고 있던 한 사람이 짓궂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의 창으로 뚫리지 않는다는 방패를 찔러보면 어떻게 되겠소(以子之矛 陷子之盾 何如)?’
말문이 막힌 상인은 주섬주섬 물건을 싸들고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뚫리지 않는 방패와 못 뚫는 것이 없는 창이 함께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한다.
법가(法家)의 대표 한비(韓非)가 쓴 ‘한비자(韓非子)’의 난세(難勢)편과 난일(難一)편에 비슷하게 실려 있다.
사물에 맞는 비유를 기막히게 하는 한비는 여기서 성군인 요순(堯舜)을 서로 비교하기 어렵고, 동일한 관점에서 칭찬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라 한다.
‘절에 가서 젓국 달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있을 수 없는 데에 가서 엉뚱하게 찾아봐야 헛일이다. 자기 한 몸 바쳐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큰 소리치고 정치 지도자가 된 사람들이 약속을 잘 지킨다는 믿음을 얼마나 줄까. 자기편의 욕심만 앞세우고 협치는 없어 분란이 끊이지 않는 정치판의 말은 이제 거꾸로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
▶️ 矛(창 모)는 상형문자로 戊(모)는 고자(古字)이다. 장식(裝飾)이 달린 긴 창을 본뜬 글자로 '모'란 음은 칼끝이 뾰족하다는 뜻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矛(모)는 끝이 꼬부라진 긴 창(槍). 2장(丈) 정도의 나무 자루 끝에 갈고리처럼 옆으로 굽어진 칼날이 달림. 옛날, 주로 병거(兵車)에 세우고 다녔음. 구리. 쇠 따위로 만들었음. 추모(酋矛)의 뜻으로 ①창(槍: 무기의 하나) ②세모창(세모진 창) ③별의 이름 ④모순(矛盾)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창 과(戈), 창 창(槍),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방패 간(干), 방패 순(盾)이다. 용례로는 창과 방패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일치되지 아니함을 모순(矛盾), 창을 만드는 데 쓰는 대를 모죽(矛竹), 희고 빛나는 날카로운 창을 상모(霜矛), 끝이 꼬부라진 긴 창을 추모(酋矛), 서로 배척하여 함께 설 수 없는 성질을 모순성(矛盾性), 서로 모순된 것을 이르는 말을 모순적(矛盾的), 창을 가지고 추는 춤을 지모무(持矛舞), 같은 사람의 문장이나 언행이 앞뒤가 서로 어그러져서 모순됨을 이르는 말을 모순당착(矛盾撞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모순이라는 말을 자기모순(自己矛盾), 물건을 얻거나 잃거나 함에 있어 그 이해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을 망극득모(亡戟得矛), 앞서 한 말과 뒤에 한말이나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전후모순(前後矛盾) 등에 쓰인다.
▶️ 盾(방패 순, 사람 이름 돈, 벼슬 이름 윤)은 상형문자로 투구의 차양이 目(목; 눈)을 가려 보호하고 있는 모양을 본떴다. 눈을 보호하는 것이 전(轉)하여, 몸을 보호하는 방패의 뜻으로 되었다. 그래서 盾(순, 돈, 윤)은 ①방패(防牌) ②화폐(貨幣)의 이름 ③피하다, 숨다, 그리고 ⓐ사람의 이름(돈) ⓑ별의 이름(돈) 그리고 ㉠벼슬의 이름(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방패 간(干),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창 과(戈), 창 극(戟), 창 모(矛)이다. 용례로는 방패와 창을 순과(盾戈), 방패의 손잡이를 순비(盾鼻), 창과 방패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일치되지 아니함을 모순(矛盾), 창과 방패를 극순(戟盾), 창과 방패를 과순(戈盾), 원형의 방패를 원순(圓盾), 자기 스스로에 대한 모순이라는 말을 자기모순(自己矛盾), 같은 사람의 문장이나 언행이 앞뒤가 서로 어그러져서 모순된다는 말을 모순당착(矛盾撞着), 앞서 한 말과 뒤에 한말이나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전후모순(前後矛盾)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