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출장이나 어느 곳을 방문 할 때 자투리시간을 내어 인근 유적지를 찾아 다닙니다.
일부러 찾아가기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럴만한 여유도 없어서 그렇겠죠?
예전에 전남 장성을 지나다가 말로만 듣던 백비를 찾아갔습니다.
단 한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는 조선 명종이 아곡 박수량의 청백리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내린 비석입니다.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은 전라도관찰사, 한성판윤,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변변한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했고 죽어서는 선산이 있는 장성으로
내려올 장례비가 없을 정도로 청렴하였으며, 죽음에 이르러 두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니 이에 명종이 크게 감동하여
서해바다 암석을 골라 비를 하사하며.
"비문을 새기다 그 청백함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니 비문 없는 비를 세우라"
명 함에 따라 백비가 세워졌답니다.
이수광의 조선의 방외지사(方外志士)에는 청빈관료 김수팽의 얘기가 나옵니다.
조선 영조 때 벼슬은 호조 서리에 불과했지만, ‘전설의 아전(衙前)’이라 불릴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하여 숱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아전(衙前)이란 고위직이 아니라 각 관청에 근무하던 하급관리입니다.
하루는 김수팽이 선혜청 서리인 동생 집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당에 동이들이 줄지어 있기에
“이게 무엇인가?”
김수팽이 눈쌀을 찌푸리면서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아우는 그에게 “녹봉만으로는 형편이 넉넉치 않아 아내가 푸른 빛 염색업(染色業)을 하고 있습니다.”
아우의 대답에 김수팽은 노하여 항아리를 모두 엎어 깨뜨려 버렸습니다.
엎어진 동이에는 푸른 염료가 콸콸 흘러 도랑에 가득 찼습니다.
이윽고 수팽은 동생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명색이 나라에서 녹을 받으면서도 그것으로 만족 못하고 부업을 한단 말인가?
이것을 업으로 하면 저 가난한 백성들은 장차 무엇을 생업으로 한단 말이냐?"
공기업을 포함한 공직사회뿐만 아니라, 은행이나 기업에서도 횡령사건이 잇따르면서
청렴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강조되는 시기입니다.
수천억대 세금을 체납한 재벌들, 연예인 등 고소득자 국민연금 고액 미납,
땅투기를 위한 위장전입 장관후보, 재벌들의 수천억대 해외비자금 역외탈세 등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고위관리들의 청문회를 볼라치면 국회의원이나 공무원의 월급으로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불렸는지 축재의 귀재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너무 많다는 어느 정치인의 말도 괴담으로 흘릴 일이 아닙니다.
국정을 다스리는 위정자들이 경주 최부자집이나 유한양행 유일한 회장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를 애초에 바라지 않습니다만, 이런 훌륭한 조상들의 선례는 배우지 않고 국민의 혈세를
자신의 쌈지돈처럼 마구 쓰고 있습니다.
勢利紛華 不近者 爲潔, 近之而不染者 爲尤潔.
세리분화 불근자 위결, 근지이불염자 위우결.
권세와 부귀의 호화로움에는 가까이 않는 이가 깨끗하다
가까이 할지라도 물들지 않는 이가 더욱 깨끗하다.
- 채근담 전집 제 4 장 -
첫댓글 이런 비석 뒤에 숨겨진 청백함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경주 최부자집 관계되는 집안 입니다.
영남대 재단도 집안의 것이었는데 박통때 빼앗겼다고 지금도 벅근혜 지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사람들 가진거 많으니 행복하겠지요 뭐ㅡ
“부패는 달달하지만 청렴은 당당하다” 는 글을
민원인 출입문에 걸었다는 어느 지자체가 떠 오릅니다.
청백리라 하면 명재상 ''황희정승''이
대표적이라 알고 있는데,
백비를 기릴만큼 청렴한
''아곡 박수량''도 있었군요.
광주에 지인이 있어 1년에 두번정도
여행겸 가보는 곳이지요.
참 매력이는 여행지라 생각합니다.
조경공부할때 광주호수윗쪽에 있는
''소쇄원''이라는 전통정원,
소박하면서도 깊이가있고 품위와
예술을 담고있는 그곳에 반해
또가보고 싶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장성에는 꽃축제때 들려보기도 했지요.
'백비'를보러 일부러 가보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글로접할수 있는것도
좋은 친구가있어 볼수있으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광주 ~ 그곳엔 품격있는 그리움이
있는곳 이지요. ^^
그 외 조선시대 청백리로 알려진 인물로는 맹사성, 이원익 등이 있습니다만,
연산군에게 바른 정치를 촉구하다가 곤장 40대를 맞고
동해안 영덕으로 유배 당했던 정붕을 빼 놓을 수 없겠지요.
정붕(鄭鵬)이 청송부사로 재직할 때 당시 영의정이던 성희안이
"청송은 잣과 꿀의 명산지 아닌가! 나한테 좀 보내주게"라는
전갈을 보내오자 정붕은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柏在高岺頂上) 꿀은 민간의 벌통에 있는데(蜜在民間蜂筒中)
태수가 무슨 재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겠소(爲太守者何由得之)?" 하고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성희안은 부끄러워 부탁을 거두어들였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도
청렴한
사람 있겠지라는
생각하며
감사히
잘보고
갑니다
요즘은 예전보다 더 엄한 잣대가 적용되고 있어서
축적을 해도 금방 드러나게 되어있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