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모든 것은 시작이었다. 그의 손을 거치면 마술처럼 우승의 축복이 내려졌다. 남녀 한국농구의 명승부사의 탄생이었다. 그는 조흥은행 여자농구단을 시작으로 현대 남자농구단, 기아 남자농구단의 창단 멤버로 매해 대회마다 우승 트로피에 ‘방열’이라는 두 글자를 선명하게 새겼다. 그가 배출한 스타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 그는 스타를 만드는 제조기가 아닌 팀 자체를 스타로 만드는 승부사였다. 그의 테두리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었다. 선수들은 신세계를 경험했고, 그를 상대하는 팀들은 긴장과 당황에 익숙한 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공부하는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준 그는 준비된 지도자였다.
‘방열’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단순히 ‘지도자’라기보다는 ‘학자’라는 개념이 떠오릅니다. 미국 유학의 꿈도 있으셨을 텐데요.
미국 유학을 꿈 꿨지.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 딘 스미스라는 유명한 감독이 있을 때야. 마이클 조던이 입학하기도 전이지. 그 당시엔 생활이 어려워서 국비 장학생으로 가야했거든. 그러려면 문교부 시험을 봐야 돼. 영어와 국사 시험을 봐야 했지. 그래서 코리아헤럴드를 다닌 거야. 시험을 보고 나면 방이 붙어. 영어는 붙었는데, 국사는 떨어졌어. 6개월 뒤에 한 번 더 시험을 볼 수 있었고. 리처드슨 스칼라십(외국인에게만 주는 4년 장학금제도)이라고 있었는데, 아마 지금도 있을 거야. 미국에 편지를 썼더니 선수시절 기록을 달라고 하는 거야. 그 당시 우린 기록도 제대로 없었지. 선수등록증을 협회에서 보냈더니 승인이 났어. 그런데 인원이 꽉 차 있으니까 기다렸다가 가야 했지. 대신 2년 장학금제도인 튜슨 스칼라십이라고 있었는데, 나머지 돈을 다 내야 되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망설였지.
1978년에 현대 남자농구단 코치와 감독을 맡게 됩니다. 역시 창단 멤버였고요.
해외 나가 있으면 어려운데, 쿠웨이트 현대지사에서 연락이 왔어. 조흥은행에 사표를 내기 전이었지. 선배한테 자문을 받았더니 조흥은행 어려우니까 가도 된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현대로 가게 됐지. 그 다음에 삼성 남자농구단이 창단하고. 이때도 이경재씨가 감독, 내가 코치로 시작했지.
그 당시 현대와 삼성 하면 최고의 라이벌이었습니다. 기업 간 경쟁이 치열했는데요.
연고전처럼 삼성과 현대도 선의의 라이벌로 발전하기를 바랬어. 그때도 연고전이 열리면 내가 꼭 가서 벤치를 봤거든. 고대가 아무리 연승가도를 달려도 난 한 번도 안 졌어. 뭐, 운이 좋았던 거지. 삼성과 현대도 우정이 있는 라이벌을 기대한 거지. 서로의 발전을 위한 경쟁 같은 거지.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 실업팀이라 그랬는지 누구 하나가 죽어야 하는 치열하고 처절했던 라이벌이었지.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난 부분도 많았고. 두 기업이 한국남자농구 발전에 한 획을 그은 것은 자명해. 대표팀 12명 중에 고려대 이민현만 빼고 현대가 6명, 삼성이 5명이었던 시절이니까. 그래서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으니까. 김영기씨가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한 것은 미국전지훈련 갔다 와서 가스 폴 등 선진농구 지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었고, 뉴델리에서는 현대와 삼성의 걸출한 선수들로 정상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지. 내 나이 마흔 한 살 때야.
그러다 1986년 드디어 기아산업 남자농구단 창단과 함께 감독을 맡습니다. 현대와 삼성의 아성을 무너뜨리며 기아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기아에서 창단하는데 당신이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지. 현대를 배신했다는 말도 나오고 돈도 많이 받았다는 말이 많았지만, 강팀이 또 하나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맡은 거였어. 그래서 난 지도자 생활을 창단 팀만 했어. 현대와 삼성 양 축이 대표하기에는 너무 리그가 너무 단순했어. 제3, 4의 팀이 나와야 프로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도전한 거야. 두 팀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 기아가 그렇게 잘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어. 금융권이 아닌 팀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으니까.
기아 창단 원년 이후 1987년 우승을 시작으로 1988년 농구대잔치 4차전을 모두 석권하며 국내 최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당시 기아 농구를 압축한다면요?
국내에서 고공농구를 가장 먼저 연 팀이라 할 수 있지. 현대 농구단이 수비를 바탕으로 한 조직농구를 했다면 기아 농구는 수비를 바탕으로 한 고공농구를 했다고 보면 돼. 그때 덩크가 나오고 앨리웁이 나왔으니까 대단했지. 수비변화도 헬핑 디펜스나 매치업 디펜스가 전부였는데, 기아는 슬라이딩 존 디펜스, 매치업 존 디펜스, 투 아웃 쓰리 백 콤비네이션, 트라이앵글 투 등을 처음 선보였지. 모르던 수비를 처음 하니까 상대 팀들이 많이 당황했지. 유재학도 그때 다 배웠던 아이였지.
그 당시 선진농구 기술을 일찍 익히셨어요. 비결이 있다면요.
기술에 관한 것은 꾸준히 연구를 했어. ‘아메리칸 바스켓볼 매거진’이라고 있었는데 가끔 농구전술에 대한 것이 나올 때가 있어. 또 ‘FIBA 바스켓볼 매거진’을 보면 농구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많았어. ‘클리닉 위크’라는 스페인 매거진에는 작전 그림이 많았고. 미국코치협회에서 발행하는 1년에 네 번 오는 게 있는데, 그게 진짜야. 내가 그렇게 연구하고 배운 것을 대학 코치들에게 소개하는 게 마지막 작업으로 남았어. 1970년대 말부터 20년 넘게 받았으니까 80권을 넘게 갖고 있지. 거기서 보고 배운 것을 우리농구로 바꾸면 상대팀들이 깜짝 깜짝 놀라게 한 게 많았지.
기아 전성기를 이끄시다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지도자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인데요.
기아에 있으면서 농구를 그만해야겠다고 느낌이 온 게 1989년도였지. 88올림픽 끝나고 나서 89년 농구대잔치 시절에 우리가 우승을 했어. 최우수선수로 유재학이 선정된 거야. 그게 화근이 됐지. 그때 기아는 연세대와 중앙대가 합쳐서 팀을 만들었어. ‘유재학이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것은 방열이 추천한 거다’라고. 그때 최우수선수는 농구협회 이사진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거든. 주장이 한기범이었는데, 중앙대가 뭉친 거야. 중앙대 시절에는 4학년 주장에게 MVP를 주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던 거지. 90년 4월 코리안리그였나? 막강 기아가 첫 게임부터 내리 다섯 경기를 내리 졌어. 거의 전패였지. 선수들이 일부러 골을 넣지 않은 거였어. 최인선 코치나 선수들을 불러놓고 지시를 해도 한 마디 말을 하지 않는 거야. 그때 느꼈지. ‘나를 내보내기 위한 작업을 하는 구나’라고. 회사에서도 내가 창단 감독이니까 내보낼 수는 없어서 총감독 자리로 물러나 앉게 했어. 그때 농구를 그만해야겠다고 느꼈지. 선수들에게 “너희들은 스포츠를 모독했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한 거다”라고 얘기하고 사표를 쓰기로 마음먹었어. 구단도 선수들도 윤리적으로 큰 잘못을 한 거지. 나중에 당시 선수들이 모두 와서 사과를 하고 갔어. 한기범이도 그냥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더라고.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최근 감독 연령이 많이 낮아졌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현대, 기아를 맡았을 때 40대 초반이었어. 그 밑으로 가면 젊을 수도 있겠지. 아직 신선우도 있잖아. NBA나 프로야구에 비하면 나이가 젊은 편이지만, 내가 쉰 살에 기아를 떠났어. 15년 동안 있다가 그만둔 건데, 젊지 않다는 거지.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했으면 하는 거지.
모비스 프로농구단 기술고문을 맡고 계세요. 유재학 감독만 편애한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전창진도 농반 진반으로 얘기하더라고. 난 오히려 반문을 하고 싶어. 너희들이 나를 필요로 해서 “도와주십시오”라든가 “모르는 것을 풀어달라고 질문을 해본 적 있냐?”고. 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유재학만 나한테 부탁을 하고 질문을 했어. “선생님이 꼭 있어 주십시오. 기다렸습니다.”라고 말이야. 지금도 많은 코치들이 단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연구소를 찾아와. 테크니컬적인 부분으로 상의하러 많이 오는 거지. 난 자다가 술 먹으러 나오라 그러면 안 나가도 농구 얘기라면 나가는 그런 사람이야.
지금이라도 프로 감독 제의를 다시 받는다면 맡으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LG 기술고문을 맡으면서 프러포즈를 받았어. 금액도 꽤 컸는데, 고사했지. 난 한 번 떠난 곳은 다시 찾아가지 않아. 다시 가서 이 나이에 감독을 하는 것은 정서에 옳지도 않고. 나이에 따라 직업이 있으니까. 부코치로 가면 차라리 도와주는 일을 할 수 있지. KBL 총재도 전문 경영인 출신이 가야된다고 생각해. 경영 단위가 다르니까. 대한농구협회는 40~50억 정도의 예산을 갖고 운영하니까 한 번 해보려고 했던 거고.
지도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성준모가 유학을 갔다고 들었어. 후배들에게 상당한 모델이 되는 거야. 자랑스럽게 생각을 해야 돼. 나한테 대학원 학위를 받아간 친구도 많아. 광의의 지도자라고 하면 체육지도자나 대학지도자, 교사가 되겠고, 협의의 지도자라면 농구지도자가 되겠는데, 어떤 것이든 폐쇄적이고 독단적이고 경험적이기만 하면 곤란해.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해. 끊임없이 ‘왜?’라는 의문점을 갖고 연구하는 자세가 돼야 한다는 거지. 농구지도자라면 최소한 미국농구코치협회나 세계농구코치협회에 가입을 해서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으면 해. 서적도 많이 찾아 읽어보고. 더 나아가서 실증적으로 하려면 미국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해야 해. 젊은 나이에 그런데 가서 도전을 해야지. 스포츠 천국 아니겠어? 전공 분야에 한 번쯤은 몸을 담그고 와야지. 농구선수들은 특기생으로 학교를 들어가서 사실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전문적인 분야에 심층공부를 할 수 밖에 없어.
하아... 이게 제가 고3때 봤던 건데 이때 당시 서민교의 올드스쿨 칼럼을 보면서 농구의 역사를 공부했었는데
그때 당시 한국농구의 위인으로 봤던 분이었는데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네요.
이문규에 대한 칼럼도 2010년 점프볼 3월호에서 봤었는데 정말 감명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https://m.sports.naver.com/news.nhn?oid=065&aid=0000037524)
한때는 한국농구의 카멜레온(이문규), 한국농구의 과학자(방열) 소리를 들으면서
시대를 앞서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개척가 이미지였는데
지금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장벽입니다. 발전을 위하 반드시 넘어야하는 그런 존재...
이렇게 현역시절에 크게 명성을 떨쳤던 분들이 삽질하는 것을 보니
언젠가는 우리가 좋아하는 현재 응원하는 선수들도 이렇게 지탄받을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당시에도 이 글을 읽었다면 저는 용비어천가라고 했을 겁니다. 거의 자화자찬과 변명 수준의 자서전이군요! 주위의 말을 듣고 반성하는 게 아니라 변명하며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수준이군요. 명예는 자신이 세운 것이겠지만 타인이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글 속에도 명예욕이 지나치군요. 오히려 회고록 수준의 성찰과 반성이 그때나 지금이나 더 필요해보입니다. 개인의 노욕과 명예욕이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꼰대라는 표현이 어울리네요! '라때'라는 표현도 요즘 많이 하더군요. 이젠 추억에 젖어 더 이상 후배들의 아부 속에 살지 말고 임기 전에 겸허하게 물러나는 것이 나중에 후회를 덜하는 길일 겁니다. 제발!
첫댓글 방 출
방열씨 댁이 말한대로 대한 농구협회의 예산이 4-50억이라면 그돈을 대체 어떻게 쓰길래 A대표팀 선수들이 곰팡이 슨 유니폼을 받고 키내려가며 이코노미타고 마을버스에 꾸겨탑니까?
한국 농구 대표 틀딱
방모지리
꼰대
이런분들의 머리속에서는 유투브나 SNS는 꿈도 못꾸죠. 농구협회 역사 컨텐츠만 재생산해도 하나의 수익구조가 될수 있는데 너무 답답합니다.
당시에도 이 글을 읽었다면 저는 용비어천가라고 했을 겁니다. 거의 자화자찬과 변명 수준의 자서전이군요! 주위의 말을 듣고 반성하는 게 아니라 변명하며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수준이군요. 명예는 자신이 세운 것이겠지만 타인이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글 속에도 명예욕이 지나치군요. 오히려 회고록 수준의 성찰과 반성이 그때나 지금이나 더 필요해보입니다. 개인의 노욕과 명예욕이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꼰대라는 표현이 어울리네요! '라때'라는 표현도 요즘 많이 하더군요. 이젠 추억에 젖어 더 이상 후배들의 아부 속에 살지 말고 임기 전에 겸허하게 물러나는 것이 나중에 후회를 덜하는 길일 겁니다. 제발!
떠오르는 말은 [시대에 뒤떨어진] 또는 [바뀌어야 할]...
이젠 좀 바뀌어야지요...
권력과 감투의 욕심...쉽게 못내려놓죠 조심스럽게 3선도전을 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할것같은 불안한 예감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