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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한열사TV / 연예★ 금속활자 인쇄술 Road를 가다
위대한한글 추천 0 조회 10,913 09.03.06 22:31 댓글 2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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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3.07 04:10

    첫댓글 한국은 금속활자 개발후 고위극소수층만 이용. 제자리걸음 독일은 모든 국민이 사용함으로써 급속한 나라발전

  • 09.03.07 08:16

    ㅠㅜ 정말 아쉬운 점이죠ㅠ 우리 나란 너무 양반 위주로 돌아가서.. 양반이란 자체도 무의미한데 쩝..

  • 09.03.07 13:09

    ??? 한국은 고위 극소수만?? 독일은 모든 국민이??? 사용 ?? 상당히 이상하게 알고 있군요.. 모든 국민이라는게 어느시기를??? 세계사에서 국민 전체에게 보통 의무교육을 제대로 실시한 시기는 거의 20세기 초이상에서 가능. 현재도 가난한 나라들은 이게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지요.

  • 09.03.07 12:10

    강력한 종교가 있었어 가능했다고 봐요..만약 성서가 없었다면 급속도로 전파가 되지는 않았을겁니다.

  • 작성자 09.03.07 15:52

    제가 알기론 영어와 한자의 차이가 큰 변수로도 작용햇다고 봅니다. 영어는 알파벳 A~Z까지 금속활자로 만들어서 얼마든지 글자를 조합해서 인쇄할 수가 있었는데. 표음문자가 아닌 한자는 일일히 한글자 한글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인쇄술을 가로막는 하나의 요인 이었다고 하네요. 당시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사용했다면 저렇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 09.03.07 12:10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 09.03.07 12:40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 09.03.07 12:44

    우리나라는 이미 목판 인쇄본에서도 세계 최고의 현존본을 소장할 정도로 삼국시대부터 일찍 인쇄술이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삼국시대 고구려등 일반 서민들까지 교육과 서민 집에서도 책을 찾아 볼수 있을 정도로 교육과 책에 대한 개념에 일찍 눈뜬 나라입니다. - 물론 이것을 현대 개념의 보통 완전 의무교육 수준과 비교해서는 안되지요- 서구에서도 고등 대학 기관의 엘리트 교육에 대한 개념은 있어도 고구려처럼 엘리트를 위한 태학뿐 아니라 서민을 위한 교육기관의 <경당>같은 개념을 생각하고 일찍 시행한 나라는 세계사에서 거의 전무합니다.

  • 09.03.07 13:10

    이런 삼국시대 서민까지 책을 읽고 교육할수 있는 기관은 이후 중세 고려시대에 와서도 물론 존속했었고 조선시대 서당이라는 초등 교육기관으로 이어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럼 서양 유럽은 어떠했는가? 고대 유럽의 도시 규모 자체가 동북방의 우리나라나 중공의 도시 규모와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대부분은 작은 형태들입니다. 일부 로마의 큰 중요 3대 도시정도가 우리나라에 비교될 정도 일뿐이였고. 교육이나 문자라는 자체도 정말 특정 일부 귀족 계층만을 위한 그들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우월적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게 유럽의 수준이었습니다. 중세에 들어오면서 교황의 전권이 더욱 맹렬해지며 교육기관이라는 것

  • 09.03.07 12:44

    이 수도사를 중심으로 수도원에서 일부 죵교인과 귀족들 극소수만이 문자를 읽고 향유하며 우월적 지위로 하나님의 교리를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중들에게 선악의 강력한 개념을 설파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 사고로 지배했던게 중세 암흑기입니다. 로마 이후 중세 암흑기(고려시대)로 오면서 그나마 있던 도시 규모도 더욱 쇠퇴하고 기타 질병으로 인구수도 줄어 들게 되지요. -우리가 아는 소위 상류층 집단인 기사라는 신분들도 솔직히 제대로 글을 아는 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 09.03.07 12:45

    조선 시대에 오면서 세종은 더욱 개량한 인쇄술을 바탕으로 현대와 비교해도 엄청난 량의 인쇄물을 생산해 냅니다. 이 당시 조선 왕조 실록을 봐도 왜국이야 이때에는 비교되지 않을 열악한 수준이였고 명에서도 조선의 앞선 인쇄술의 기술을 따라 오지 못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물론 이건 각 지방의 향교나 서당에서도 교육기관이 있었고.. 이후 조선 초기의 서민이면서 전문가적 지식층이 후기에 오면서 중인 계층으로 사회에서 중산층 지위와 재산을 가지고 토목, 지리, 문학, 회화등 다방면에서 맹활약을 하게 됩니다.

  • 09.03.08 15:57

    일반 분들이 잘 모르시는 내용중에 하나가 조선 초기 세종 이후 인쇄술이 정체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조선 후기에 오면서 다시 < 교서관인서체자>와 다시 개량한 <후기교서관인서체자>등 문인서집들이 다양하게 인쇄되고 대한 제국시기에는 교과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예전에 한석규 주연의 <음담 서생>이라는 영화를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건 실제 당시 조선후기의 풍속도를 바탕으로 한 내용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아낙네도 소설책을 즐겨 읽고 뒷장에다 오늘날 넷상의 댓글을 달듯이 감상글을 적어 올리면서 유행하며 문화을 향유했습니다.

  • 09.03.08 15:58

    잘 알겠지만 현재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나 조선왕조 실록 프랑스에 있는 정조 관련 기록 문화등 우리나라 역사속에서의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방대하면서도 정밀한 기록문화 유산속에서는 그런 앞선 인쇄술과 일찍부터 서민까지도 교육할수 있는 교육기관등 군주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앞선 열린 시각과 문화적 향유의 보편성의 개념이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이부분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국 기록유산에 대해 동서양 학자들이 혀를 내두르는 부분입니다.

  • 09.03.07 13:15

    프랑스도 외규장각 도서등의 내용을 보면서 당시 프랑스에서도 그정도의 정밀 기록 유산은 상상할수 없는 수준임에 놀라지요. 우리가 일제를 거치면서 우리의 역사서나 기타 많은 기록 유산물들이 소실된 부분이 현재 못내 아쉽지만 존재하는 기록유산들의 정밀성과 공정성 그리고 방대함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당시 수준에서 따라오기 힘든 수준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록 유산은 단순히 책 하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나라의 행정과 관료 인쇄술 교육인프라등 다방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에 올라와야 가능한 표본들입니다.

  • 09.03.07 16:17

    바다샘님 글은 항상 도움이 됩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09.03.07 18:20

    언제 방송인지요? 보니까 mbc스페셜 같은데 몇회인지 궁금하군요..

  • 09.03.07 18:26

    바다샘님 덕분에 좋은 정보를 습득해 갑니다 ^^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09.03.08 04:58

    222222

  • 09.03.08 01:25

    와...바다샘님 댓글읽고 감탄했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 09.03.08 15:48

    바다샘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근데 위에 다큐는 어디서 방영되었던 건가요? 한 번 찾아서 보고 싶은데...

  • 09.03.08 21:32

    한국의 인쇄술 이런 소재로 제대로 심혈을 다큐하나 만들었으면 함. dvd로 만들어 소장하고 싶은 소망.

  • 09.03.09 03:32

    한국의 활자가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더 인정을 못받는 이유....옛한국의 활자는 그 생산과 소비가 모두 양반에게 귀속되어 있어 대중화가 못됐고, 유럽의 활자는 활자의 권력이 일반 대중에게 전파되어 그 파급력이 비할 바가 안 되었죠. 그래서 구텐의 활자가 더 대우를 받는 것일지도. 우리가 백난 떠들어봐야 그당시 옛 선조들이 얼마나 금속활자의 혜택을 봤습니까. 이 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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