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 이야기
김은복 (수필가)
나는 사경(寫經)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부처님의 경전을
옮기는 의식으로 고승(高僧)이나 학자, 명필가, 궁중과 사대부의 귀부인들
이 불심과 정신력을 연마하는 수행으로 알았기에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연말부터 내가 나가는 N선원에서 사경 열풍이 일기 시작했
다.
북한산 정상엔 폐허가 된 국녕사지(國寧寺祉)가 있다. 이 절은 선조 때의
고승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지휘하여 큰 공을 세우고, 일본으로 건
너가 강화를 맺은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창건한 명찰(名刹)로, "국녕사가 흥
하면 나라가 흥하고, 국녕사가 무너지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말이 전해온다.
N선원의 원장 스님이 나라를 살리는 마음으로 국녕사의 복원 사업을 시
작하여 대웅전을 비롯해 여러 전각을 건립 중이며, 동양 제일의 좌불(坐佛)
을 조성하는데 그 불상 안에, 신도들이 쓴 사경을 복장(腹藏)할 것이니 성
심을 다해 사경하도록 권유하신 것이다.
단순한 나는, 남편이라면 무난할 것 같았다. 까다로운 친정 아버지로 부
터 "요새 젊은이답지 않은 준수한 필체"라는평을 받은 터이니 남편이 선원
에서 특별히 만든 상품 한지 공책에다 사경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
각에 의논도 하지 않고 원장 스님이 편저한 『천수경(千手經)』과 『금강
경(金剛經)』상ㆍ하권, 사경 공책을 사 가지고 갔다.
그러나 내 소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숙제는 들고 온 본인이 할 일이지,
자식 넷을 키우면서 숙제를 대신해 주는 것 보았소?" 하는 남편의 일갈
에….
처음부터 손수 쓰겠다는 형님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더욱이 "참으
로 장한 결심을 했다"는 시아주버님의 지극한 성원 아래 어지간히 진도가
나가고, "사경은 온 식구가 함께 써 나가는 데 더 큰 뜻이 있다"고, 가다 오
다 거들어도 주신다는데….
어른 말씀이면 고분고분 순종하던 내가 시어머님의 사려 깊은 제의에 순
종하지 않은 벌을 돌아가신 지 20년 만에 받는구나 싶었다.
구한말에 태어난 시어머님은 교육에 뜻이 있어 일본 유학을 떠났으나,
3ㆍ1만세 사건에 걸려 뜻이 좌절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소주대학에서 학업
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러나 "교권 정지"에 묶여 강단에 설 수 없게 되자 사
숙(私塾)을 열고 고명한 분들을 초빙해서 개성의 규수들에게 신교육과 서
화를 지도했다.
종이가 귀한 때라, 학생들에게 광목을 나눠 주고 서화를 연습시킨 다음
몇 번이고 빨아서 다시 사용했다고 한다.
명필 한석봉은 종이가 없어 가랑잎에다 붓글씨 연습한 것을 냇물에 띄우
는 바람에 물빛이 먹물처럼 검어졌다 한다. 광목으로 "만년 종이"를 대신했
던 시어머님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새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때 사숙에서 숙식을 하던 가장 나이가 어린 타관 학생이, 지금 우리나
라는 물론 대만과 일본에서 대나무 그림의 일인자로 알려진 조옥봉 스님이
다.
시어머님을 어머니로 모시는 옥봉 스님은 가끔 우리집에도 오셨는데 틈
만 나면 자수를 놓거나 뜨개질만 하는 나에게 이제는 붓글씨를 배워 보라
하셨지만 나는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수놓은 것을 보고 손뿌리가 야물다 하시던 두 분이, 글씨를 보고 낙담하
실 생각에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컴퓨터의 출현은 구원의 여신이었다. 나는 신바람이 나서,
자그마한 수필집을 낼 때도 원고를 직접 쳐서 넘겼다. 하지만 책이 나오고
증정본에 받는 이의 성함과 내 이름을 적을 일이 난감했지만, 그것마저 컴
퓨터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염치 불구하고 그냥 보낸 게 태반이었으니, 그
결례를 어찌할 것인가….
하는 수 없이 남편의 마음을 다시 돌려 보려고 구차하게 시아주버님의 정
감 어린 협조까지 들먹여 보았지만 막무가내, "부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명
필이 아니라, 사경에 임하는 경건한 마음가짐과 끝까지 정진하는 노력을 더
가상히 여기실 것"이란 말에 원망 대신 어쩐지 이것은 남편의 말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무슨 조화인지?
기한이 다가오니 서실(書室)에 다닐 수도 없는 노릇, 궁여지책으로 초보
화공(畵工)처럼 얇은 화선지를 대고 붓펜으로 한문 경전을 사생(寫生)해 나
갔다. 한 달, 두 달….
마음을 가다듬고 사경 공책에다 붓펜으로 사경을 시도했다. 『천수경』
은 불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책으로 무
량 공덕의 원칙이 되기에, 반드시 법회 시작 전에 독송하는 것이다.
어지간히 써 가는데 오불관언(吾不關焉)인 줄 알았던 남편이 이따금 공
책을 펼쳐보고 처음보다 뒤로 갈수록 한결 나아진 것을 보니, 열심히 연습
하면 여자로서 제법 잘 쓰겠다는 말에 발끈해서 "아니, 글씨에도 여자 남자
가 따로 있나!" 했지만 입 속의 말이었다. 특히 나 아(我) 자와 마음 심(心)
자만 나오면 이건 누가 썼느냐고 물었다. 앵돌아진 나는 "당신 말고 써 줄
사람이 또 있던가요" 하고 톡 쏘아붙여도 화도 안 내고 "이 글자는 제대로
쓰기 어려운 잔데 제법 번듯하다" 를 되풀이하면, 기고만장해진 나는 냉큼
"그래도 내 마음[我心]만은 단정하단 말인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다음은 『금강경』상·하 권 차례다.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
剛般若波羅蜜經)이라 하는데, 그 뜻은 금강같이 견고한 지혜로 즐거운 저
언덕에 도달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문은 그럭저럭 되었지만 토를 달아야 하는 한글이 또 문제였다. 얼른
『한글 붓펜 글씨본』을 구입해서 화선지 사생을 반복했다.
다음은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법을 설하신 끝에 모든 가르침의 총정리를
도모한 내용인『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차례였다.
붓펜이 손에 익어 좀더 정제(整齊)된 한자가 될 성싶었는데 사태가 돌변
한 것이다. 복잡한 한문은 도저히 쓸 수가 없다는 젊은층의 여론에 밀려, 국
문(國文)『묘법연화경』660쪽을 공책 대여섯 권에 사생하게 되었다.
붓펜으로 한 줄에 23자씩을 넣을 재간이 없어 고민하는 나에게 남편은 볼
펜으로 써도 된다면서 경문 중에 "아무 데나 손톱자국으로라도 경전 문구를
옮기면 그 공덕이 크다 "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차선을 택해 죄송한 마음으
로 볼펜 사경을 했다.
한문을 우리 글로 번역하려면 여섯 배의 분량이 된다는 말이 옳았다. 써
도 써도 한이 없고 문자의 기복이 없으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큰댁에 갔던 남편이 형수님도 열심히 쓰는 중인데, 형님이 당신 형편을
궁금해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 했어요?" "처음엔 그려놓더니 이제
는 좀 나아졌다 했지…."
나는 그 수모에 도전이라도 하듯이『천수경』을 세 번,『금강경』상ㆍ
하 권을 두 번씩 다시 사경하는 도중에, 좌불 공사가 늦어진다는 소식을 듣
고 마음에 걸렸던 볼펜『묘법연화경』을 다시 붓펜으로 완성시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또 그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내 마음은 오로지
사경에만 있었다. 모임에 나갔다가도 중도에 달려오고, 그토록 바라던 중국
태산(泰山) 여행도 마다한 끝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말에야 끝을 맺
을 수 있었다.
한 번으로 끝이 날 줄 알았던 가족들은 혀를 찼다.
처음엔 제대로 안 되는 글씨에 짓눌려 경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
으나, 반복하는 과정에서 은연중에 경전이야말로 우리 생애에 다시 없는 귀
감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부처, 중생도 부처"라는 교리처럼, 차등 없는
자비심으로 인해 불교만은 종교 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것과, 무량 겁을
지양하는 불경에 등장하는 무한대한 숫자 단위에 감탄사를 연발했고, 망연
한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아니라 지극히 과학적이며 용맹 정진하는 실천
종교일 뿐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해 고전(古典)임을 깨닫게 되어 이제껏 무
지몽매했던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남들은 2,3개월 만에 8권을 다 마쳤건만, 나는 8개월여 만에야, 총 16권을
써 나갔다.
8권을 다 쓴 사람은 정해진 날 원장 스님에게 보여 주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면서 책에 세 가지 도장을 손수 찍어 주었다.
특별히 노부부가 각각 사경한 경우 도장을 받고 만면에 희색을 띄고 나란
히 나오는 광경은, 배필(配匹)이란 한 쪽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관
계의 표본으로, 최선을 다하고 동고동락한 만년 동지를 보는 것 같아 아름
답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불기(佛紀) 2545년 음력 9월13일 을축일(乙丑日), 서기 2001년 10
월 29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사명대사의 얼이 살아 숨쉬는 국녕사의 사
경봉안식이 북한산 현장에서 거행되는 날이 왔다.
국립공원 입구를 꽉 메운 인파를 셔틀버스가 쉴새없이 왕복해서 산자락
까지 운반했으나 다음부터는 험준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허위단심 오르
는 끝없는 행렬은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때는 만추, 하늘은 더없이 명징하고 바람은 삽상한데 북한산 공기는 어찌
그리도 달던지….
잠시 숨을 돌리며 흘러가는 흰 구름을 보니 돌아가신 두 분의 어머님이
회상되었다.
호수돈고등여학교 1회 졸업생으로 나의 선배님이며, 집에서 가장 넓은
방에다 불상을 모셔 놓고 보살들에게 스님의 강을 듣도록 주선하시다, 둘째
아들이 학병으로 나간 날부터 겨울에도 불끼를 마다하고 밤낮으로 기도하
시던 시어머님의 의연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 둘째아들의 아내가 된 나는 지금도 듣는다. "해방 후 다른 자들은 다
내보낸 제주도 헌병대에 한 달이 넘도록 혼자 남겨졌던 내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어머님의 기도 덕분이라고…. "
학식은 없어도 만사에 감사하면서 항상 "사람은 원형이정(元亨利貞) 대
로 살아야 한다" 는 말을 하며 지성으로 부처님을 섬기며, 겨울이면 빙판에
고운 재를 뿌려가며 산사(山寺)를 찾던 자애로운 친정어머니의 모습도 떠
오른다.
내 생애에 이 두 분을 어머니로 모실 수 있었던 인연을 부여받았다는 생
각에 한없는 감격이 밀려왔다.
첫댓글 윤거사님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