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새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함께 하는 무리와 다르기에 당하는 아픔을 이야기합니다.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단지 다른 것입니다. 그 다른 것이 껴있는 무리와 다르기에 차별을 당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통 다수를 따라갑니다. 무리와 다르면 소위 ‘별종’ 취급을 하거나 당합니다.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가 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사실 그 다름 때문에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일단 눈에 띄잖아요. 문제는 눈총이 되는 것입니다. 달리 해를 끼치는 것도 없는데 괜스레 눈총을 받는다면 마음이 상합니다. 자존감이 낮은 경우에는 주눅 들어 무리에서 왕따를 자처합니다.
‘다르다’가 ‘틀리다’는 아니다 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면서도 물리칩니다. 무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하기는 끼리끼리 모이는 습성에 따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르기에 불편하기 때문이지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신경 쓰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즘 성소수자 문제가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비슷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잘못되었다거나 환자처럼 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가치관이나 인식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 또 뭐라고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생각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무튼 이 ‘다름’이 불편을 초래하기에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가족 중 유일하게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 ‘정우’ 모두가 청각장애인입니다. 가족 안에서는 수화로 통합니다. 물론 ‘보리’도 수화로 대화를 합니다. 그러나 집을 벗어나면 입과 귀를 사용합니다. 집에서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을 대표해서 일을 하는 경우입니다. 특히 음식 배달을 주문할 때는 보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혹 전화가 올 때도 보리만 받을 수 있습니다. 밖에 손님이 찾아올 때도 보리가 알아챕니다. 집에서 대외적인 일을 할 때는 보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나마 보리가 있으니 다행이다 싶습니다. 그런데 보리는 달리 생각합니다. 모두 수화로 열심히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때로는 왕따 된 기분입니다.
차라리 소리를 잃고 싶습니다. 등교할 때 꼭 사당 앞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보리는 빠지지 않고 그 앞에 멈춰 서서 잠시 기도합니다. 친구가 묻습니다. 뭘 기도해? 몰라도 돼.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번은 불꽃놀이 구경을 갔습니다. 가장 큰 불꽃이 펴질 때 두 손 모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시장에서 외국인 상점에서 그들의 부적도 샀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나요? 아무튼 보리가 그렇게도 소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느 날 tv에서 해녀 인터뷰하는 장면을 봅니다. 해녀 아줌마가 몇 번이나 되묻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잘 들리지 않는답니다. 물속에 오래 있으면 귀가 잘 안 들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얼굴을 물에 담그면 청각을 잃을 수 있는가보다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세면기에 얼굴을 담가보기도 합니다. 그래봤자 소용없습니다. 사실 수압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갑니다. 물결쳐오는 파도를 보며 무엇을 생각할까요? 일어나보니 병상입니다. 옆에 지키던 가족이 반겨 맞습니다. 간호사가 달려옵니다. 그런데 들리지 않습니다. 어마, 안 들리니? 의사가 말해줍니다. 충격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답니다. 기다려봐야지요. 이제 모두가 듣지 못하고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소원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무리가 된 느낌입니다.
엄마와 시장에 나갑니다. 전에 보던 이웃들이 혀를 찹니다. 불쌍하다고 한 마디씩 합니다. 보리까지 어쩌다 저렇게 됐데? 낯익은 사람들은 가족을 알기에 비슷한 손짓으로 간단한 대화를 나눕니다. 장보기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장애인이라고 무시하거나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보리가 듣고 말할 수 있었을 때는 나오지 않던 언행입니다. 정우가 가장 아쉬워한 것은 짜장면을 주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음식점까지 가야만 하나? 하지 않던 일입니다. 귀찮지요.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누나가 말할 수 없게 된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다르게 산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차별을 받아야 할 일도 아닙니다. 단지 불편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당사자에게는 불편할 일도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일상이 되었으니 남들 보는 것일 뿐입니다. 문제는 세상일이 다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정우는 학교에 가도 공부하지 못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들만의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아니면 수화로 동시통역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소수를 위해 그만한 투자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보리는 억지 흉내를 냈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사정이 어떠하든 가족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가족임을 되새깁니다. 설령 미운 짓을 한다 해도 가족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족은 모든 환경을 함께 짊어지고 갑니다. 영화 ‘나는 보리’(bori)를 보았습니다. 조용하고 화창한 바다 풍경은 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