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젊은 불교를 위하여
2. 가장 행복한 공부
- 부처님께 가까이
우리는 본래로 무한의 지혜공덕과
행복을 갖추고 있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느껴야 바른 신앙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분명히 느끼고
나도 최선을 다해서 부처가 되고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 남편한테나 자기 아들한테나
자기 친구한테나 누구한테나
가장 큰 선물이고 가장 큰 공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닦으면서
그 사람도 부처님이 되게끔 인도하는 것입니다.
늙으신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서
옷이고 음식을 잘 대접하는 것도 효도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유한한,
때 묻은 효성밖에는 못 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하해 같고 태산 같은 부모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부모님한테 최상의 음식을 대접하고
최상의 화려한 옷을 입혀 드리고
그렇게 해도 부족해서
부모님을 양쪽 어깨에 태워서
천하를 몇 바퀴를 돌면서
천하의 명승지를 구경시켜 드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갚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법문이 있습니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지극한 효도지만,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 역시 때 묻은 유루(有漏) 효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효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모님을
생사가 없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으로
이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의 효도입니다.
그것은 유루 효도에 비교할 수 없는
몇 천 배 수승한 효도인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화엄경》에도 있고
《부모은중경》에도 있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
또는 학문이 깊고 얕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얼마만큼 부처님한테 가까이 나가고 있는가,
또는 모든 사람을
얼마만큼 부처님한테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부처님의 반야사상을 마음에 새겨서
무아, 무소유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 몸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본래 비어 있다는 겁니다.
죽은 뒤에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색즉공(色卽空)이라,
지금 이대로 비어 있단 말입니다.
내 몸도 비었거니
하물며 내 소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정치가든 누구든
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의 도리,
우주의 진리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못 따르면
항시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든 부처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인류 사회에 전쟁이나 불안한 요인이
항시 끊이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기에 플라톤도 그의 저서《공화국》에서
"성자가 정치가가 되고
정치가가 성자의 길을 닦기 전에는
인류의 해악이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이데거나 키에르케고르 등 실존철학자들은
순수한 불교인들은 아니지만,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무철학(無哲學)은
근본적으로 모든 존재의 허망무상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을 바탕으로
참다운 실존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여불성이
참다운 실존이고 실상입니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하고 다 비어 있고
참다운 실상은 오직 진여불성뿐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그 모진 습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습관은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들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정념상속(正念相續) 오욕적중(五欲敵中)
불위소해(不爲所害)'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정념이 상속되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공부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체가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다,
일체가 하나의 불성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견(正見)입니다.
이러한 바른 견해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일상성에 매몰돼서 그런 정념을 상속시키지 않으면
공부가 참다운 참선으로 못 이어집니다.
이와 같이 정념을 상속시키면,
오욕적중이라, 잠이나 식욕이나
이성욕(異性慾)이나 명예욕이나 재물욕 등
오욕의 원수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원수가 우리를 해롭게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보는 마음,
즉 무명심(無明心)에 있습니다.
무명심으로 내가 있으면
당연히 탐욕심이 있고 진심(瞋心)이 있겠지요.
오욕심은 모두가 다 무명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즉 도둑 마음입니다.
이러한 도둑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우리 마음을 침범합니다.
과거 무수생(無數生) 동안의 도둑 마음이
우리 잠재의식의 소(沼)에는 꽉 차 있습니다.
금생에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대체로 '있다, 없다' 그런 것만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비었다는 반야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알아서 그렇게 살기는 살아야겠는데,
그 순간뿐이지 자꾸만 '있다, 없다'에 걸려 버립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려면
정념이 지속적으로 상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삼독오욕(三毒五欲)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삼독오욕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간적인 상(相)을 놓고 복을 비는 것은
상의 범위 안에 구속되어 큰 복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을 떠나버린 참다운 공부를 한다면,
우리가 굳이 부르지 않아도
진여불성 가운데는 무한의 공덕이 있기 때문에
저절로 공덕이 다 오는 것입니다.
우리 불성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압니다.
우리 진여불성은
나보다도 나를 훨씬 더 잘 압니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내가
"부처님이시여, 나한테 무슨 재산을 주십시오"
이렇게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은 다 미리 아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불행은
진여불성 자리에서 본다면 불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천지우주는 모두가 그 자체로 불성이기 때문에
우주는 바로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진여불성 덩어리가
바로 우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불행이라는 것은
다만 상(相)에서 봐서 불행인 것이지
진여불성에서 본다면 불행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나 염불 공부나 무슨 공부나
다 하나의 공부입니다.
다만 우리의 본체 본성품을 안 떠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내 법(法)은 본성품을 안 여읜다"고 하는 말씀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본성품을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참다운 공부이고
그래야 참선이 됩니다.
공부하실 때는 그와 같은 마음 자세를 가지고서
꼭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되어야 합니다.
정과 혜를 아울러서 공부를 해야 공부가 빠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진여불성 가운데는
선정(禪定)과 지혜와 자비가 온전히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공부 역시 진여불성에 걸맞는 공부를 해야
이른바 계합(契合)이 빠르단 말입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혜는 혜대로 또는 선정은 선정대로 닦으면
공부의 계합이 더딘 것입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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