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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민특위계승국민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반민특위계승
제4절 제2·3지대의 한·미 군사 합작
1. 군사 합작 경위
1945년 1월, 중국군 제10전구 사령 장관부 전방 지휘소가 있는 안휘성 임천(臨泉)에 파견되어 있었던 제3지대 연락 장교는 임천에서 약 3킬로 떨어진 사만(謝灣)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OSS 파견 대장 버치(John M. Berch)를 만나 상호간 부대의 임무를 소개하는 동시 적군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다. 버치가 지휘하는 OSS 파견대는 적군의 무전을 받아 이를 분석 평가하는 무선 통신 첩보 공작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버치는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중국통이었다. (종전 후 서주(徐州)로 전진하다가 공산 게릴라에게 피살)
김우전과 버치는 여러 차례의 면담 끝에 5명 이내의 광복군에게 무전통신 기술을 가르쳐 주고, 적 점령 지구(한국 또는 중국)에 잠입하여 군사 정보를 무전으로 송신하는 6) ≪백범일지(白凡逸志)≫ 중 기적(寄跡) 장강(長江) 만리풍(萬里風)조 - 503 - 첩보 공작을 하는데 대한 의견이 논의되었는데, 김우전은 이를 즉각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에게 자세히 보고하였으며, 지대장의 승인을 얻어 박상기(朴相基)·문웅명(文雄明)[문수열(文洙烈)]·선우석(鮮于碩)·김경윤(金景澗)등 4명을 선발하고 김우전이 반장이 되어 OSS 파견대에 도착하니 이것이 2월 15일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뜻하지 않게 중국군측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그것은 광복군이 아직도 중국 군사위원회의 구처를 받아야 했던 관계로 연합군간의 합동 작전에 관하여는 하급 부대에서 임의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현지 절충이 실패되니, 김우전 일행은 무거운 걸음으로 귀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김학규 지대장은 쌍방 고위층 인가를 먼저 받은 다음 중국 군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대규모의 무전 훈련 및 광범위한 한·미 공동 작전을 새로이 전개하기로 하고, 곤명(昆明)에 있는 OSS 본부로 갈 것을 결정하였다.
김학규 지대장은 김우전 부관을 대동, 버치와 함께 2월 18일 임천(臨泉)을 출발하여 입황(立煌)을 경유, 오가점(吳家店) 비행장에서 활주로 건설을 10여 일 기다려 미공군 수송기 편으로 노하구(老河口)·서안(西安)을 경유 곤명(昆明)에 도착한 것은 3월 12일 밤이었다.
다음 날 13일 9시에 김학규 지대장 일행은 미 제14 항공단 사령관 첸놀트 장군과 면담하여 한·미 공동 작전에 관한 계획(무전 훈련·첩보 작전·게릴라 작전·한국 본토 상륙 첩보 작전)을 소상히 설명한 결과, 그는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즉각 OSS 본부에 지시하여 구체척인 실천 방안을 세우게 하였다.
이 회담이 끝나자 일행은 다시 OSS본부로 직행하여 중국어에 능통한 스미드 중령과 구체적인 회담을 시작하였으며, 저녁에는 기술 대표 미이트와 실무 회의를 가지고, 14일에는 각 부문 책임 참모들과 각 분야별로 하루 동안 진지한 회담을 하였다. 그리하여, 15일 전체 회의에서는 합동 작전 전반에 관한 한·미 군사 합작 원칙이 아래와 같이 합의를 봄은 물론 세부 계획과 구체적인 실시 방안까지도 합의를 보게 되었다. 1) - 504 -
[한·미 군사 합작 합의 사항]
① 한·미 양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 공동 작전을 전개한다.
② 한국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 기술과 기타 필요한 전술을 훈련 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 작전에 필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한다.
③ 미군은 공동 작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기재 및 군수 물자를 한국광복군에게 공급한다.
④ 미군은 한국광복군에게 육·해·공 교통 통신의 편의를 제공한다.
⑤ 기타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상호 제공한다.
⑥ 합의된 사항을 실천하기 위하여 각기 상부의 재가를 받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는 데 상호 적극 노력한다. 2) - 505 -
상기와 같이 합의를 본 미군측은 그날 밤 성대한 만찬회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는 우리측 일행과 미국측 전원이 참석하였으며, 특이하게 중국 안휘성 군관구(軍管區) 부사령 진감(陳敢) 중장이 초대되었다.
다음 날 3월 16일, 김학규 지대장과 김우전 부관은 첸놀트 장군 전용기로 중경으로 가서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 고위층에 이 교섭 경위를 보고하여 정식으로 재가를 받게 되었다.
한편 총사령부는 한·미 군사 합작에 대한 중국 군사위원회 장개석(蔣介石) 위원장의 동의를 얻게 되었으며, 서안(西安)과 부양(阜陽)에 한·미 군사 합작을 위한 광복군 OSS훈련소 설치 승인이 나온 것은 6월경이었다.3)
이 동안 3월 25일에는 인도(印度) OSS 본부에서 복무하던 한국통(韓國通) 장교 클래어린스윔스(Clarence·Weems, 대위 한국 태생)가 중국 OSS 본부에 전속되었는데, 3월 30일에 윔스는 버치와 함께 우리임시정부의 김구(金九) 주석과 이청천(李靑天) 총사령을 방문하고 유창한 한국말로 합의 사항 결정에 대한 재가와 중국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재확인하였다.
이로부터 중국내 OSS 본부에는 새로이 한국 담당 부서가 신설되고 윔스 대위가 그 책임자로 되었으며, 5월에는 한국계 미국인 정운수(鄭雲樹)와 이순용(李淳鎔)이 인도에서 전속되어 왔다.
이 때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한·미 군사 합동 작전 특히 무전 훈련을 제3 지대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제2지대에도 같이 실시하는 것이 좋으며, 훈련 대원 부족 문제는 임천(臨泉)에서 한광반(韓光班)을 나온 학도병 출신 중 중경에 와서 토교(土橋)에 집결해 있는 인원으로 충당하는 총사령부의 계획이 세워져, 4월 5일 이범석(李範奭) 제2지대장이 중경에 비래하여 확정을 지었다.4)
한·미 군사 합작 교섭에 성과를 올린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은 OSS 훈련 지도를 위한 요원으로 부지대장 이복원(李復源)·구대장 박영준(朴英俊)과 그리고 엄도해(嚴道海)·3) 추헌수 펴낸 ≪자료한국독립운동≫ 3. p.232 4) 당시 OSS 중국 본부 정운수(鄭雲樹) 및 훈련 반원 노능서(魯能瑞) 증언 - 506 - 문덕홍(文德洪)·조병걸(趙炳杰)·김영실(金永實) 등을 대동하고 부양으로 돌아오고 김우전(金祐銓)은 광복군 연락 장교로 곤명(昆明) OSS 본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한·미 공동 작전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접한 전방 공작 활동은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기민하고 조직적인 대적 첩보 활동으로 한층 더 전과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 OSS 훈련
광복군에 대한 OSS 훈련 실시 문제가 결정됨과 함께 부양(阜陽) 본부에 도착한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은 곧 OSS 훈련생 선발에 착수했다. 훈련을 지원하는 많은 신입 대 원 중에서 20세를 전후한 중학 이상의 학력과 건강한 체력, 혁명과 불굴의 투지를 소요하고, 또 기초 교육이 끝난 인원을 선발 대상으로 하여 여러 가지 방법의 심사를 거쳐 다음의 인원을 OSS 훈련생 적격자로 선발하였다.
[OSS 훈련 대원]
총책임자 : 엄도해(嚴道海)
훈련대장 : 윤영무(尹永茂)
대원 :
김영일(金永逸)·김용관(金容寬)·한이윤(韓伊尹)·이영순(李英淳)·이철민(李鐵民)·차성훈(車聖勳)·이창도(李昌道)·김하진(金夏鎭)·오성규(吳成奎)·조승희(趙昇熙)·이신성(李信成)·조대균(趙大均)·정길주(鄭吉胄)·전형운(田瀅雲)·변수정(邊守靜)·이창배(李昌培)·김용인(金龍吝)·김성환(金成煥)·이아청(李雅靑)[이한기(李漢基)]·김성철(金成哲)[김성관(金成觀)] (계 22명)5)
그리고, 상기 22명 외에 훈련소와 지대 본부와의 연락 및 보급 지원 등 관계로 연락 장교 김군남(金君南)과 조병팔(趙炳八) 등이 동행하게 되었다. 5) 광복군 활동사 제3 지대 편찬위원회 제공 - 507 -
1945년 6월초, 부양을 출발한 일행은 임천(臨泉)을 거쳐 남으로 약 6백 리 길을 도보로 강행군하여 6일만에 목적지인 입황(立煌)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다시 50여 리 떨어져 있는 비행장 부근에 설치 중인 훈련소 막사(천막)에 행장을 풀고 며칠간 휴식을 가졌다.
교육 훈련에 들어가기 전, 대원 일동은 새군복(미군복)으로 갈아 입고, 일상의 필수품도 미군용 보급품으로 지급받았다.
OSS 훈련은 5월 중순부터 실시하였는데 훈련 기간은 3개월이었고, 교관은 윔스 대위를 중심으로 상사 마아틴·트르먼, 등 수명의 특전단 요원이었다.
그리고 OSS 교육 훈련의 주요 내용은,
① 정보에 관하여는 정보학(情報學)을 중심으로 독도법(讀圖法)·첩보의 수집·분석·평가로부터 지형·기상의 판단 방법과 선전 비라 작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고,
② 파괴·폭파에 관하여는 각종 폭발물 취급에 대한 기술을 터득함에 있었다.
③ 무전 통신에 대하여는 실제의 송·수신 방법을 비롯하여 무전기 조작법(操作法) 및 암호문(韻號文) 해독(解讀) 등에 있었고,
④ 유격 전술에 대하여는 개별 또는 집단적인 행동을 취하는 경우에 적응하는 권총 사격, 수류탄 투척, 암살용 무기 사용, 도피 훈련, 야간 습격, 요인 납치, 민중 선동, 파업, 쿠데타 등에 대한 기능을 실습으로 터득하는 데 있었다.
당시 우리 광복군의 목표는 OSS 교육 훈련이 끝나는 즉시 연합군과 공동 작전으로 잠수함 또는 비행기의 공수 낙하 방법으로 국내에 정진(挺進)하여 국내 진입에 성공하면, 전술 및 전략 폭격 목표를 미군 공작 기지에 타전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현지 주민을 포섭하여 거점을 구축하며, 반전사상을 고취시켜 애국 동지를 규합하면서 피요에 따라 왜적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궁극적으로 미군의 한반도 상륙과 때를 같이하여 내부의 호응 봉기를 일으켜 우리의 힘으로 왜적을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수행하는 데 책임과 명예와 자부심을 걸머진 대원 일동은 처음부터 - 508 - 비상한 각오와 비장한 결의 밑에서 엄격하고 치밀한 교육 훈련을 받아야 했다. 교육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8월초에는 1개 조(組) 4명을 단위로 한 5개조의 공작조가 편성되었다. 조편성의 기준은 출생지 및 지연(地綠) 등을 고려해서 짜여졌으며, 이 5개조는 주로 서해안의 평북·황해·경기·충남 등 지역에 정진하는 상륙 또는 투하 지점까지도 계획이 수립되었다. 더욱이 국내 정진 공작금으로 매인당 5천 불(弗)의 미화(美貨)가 배당되어 일화(日貨) 또는 금괴(金塊)로 바꾸어 휴대하도록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교육 훈련 기간 중에는 전혀 외출이 있을 수 없으며, 휴일이라 할지라도 일어·영어의 복습, 일기장 정리 등에 신경을 썼다. 어느 대원은 유언장과 유품까지 마련하여 후일 공작이 실패됐을 경우 자기 부모나 친지에게 보내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눈물겨운 광경도 벌어졌다. OSS 수훈생 일동은 명령만 있으면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 이 때는 이미 미군 OSS 일부 요원이 미 해군 잠수함으로 인천 해안 부근에 접근하여 어민들에게 밀가루 등 식료품과 일용품을 듬뿍 주어 상륙 거점을 만들어 놓는 등의 공작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왜적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군의 숙원이던‘우리의 힘에 의한 조국 해방’이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제2 차 훈련생 50명은 입황으로 출발 직전 중지해야 했으며, 엄도해(嚴道海) 총책임자는 윤영무(尹永茂) 훈련 대장을 비롯한 제1차 수훈생(受訓生) 20명과 함께 8월 22일 서운한 마음으로 허전한 발걸음을 옮겨 전원 부양 지대 본부로 귀대하였다.
우리 광복군의 숙원이던 우리 힘에 의한 조국 해방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은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제5절 한·미 군사 특수 공작
1. 미국 대사관 한국인 공작반
1943년 9월 하순, 한·영 군사 합작에 의하여 인·면 지구에 광복군 공작대가 출진 - 509 - 한 때를 전후하여 영국 대사관 부관처의 요청으로 한국에 관계된 일체의 첩보를 수집·분석·평가하는 정보 업무를 담당 요원으로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영어 중국어에 능통한 권일중(權一重)·안원생(安原生)·안미생(安美生) 등 수명을 영국 대사관 정보처에 파견하여 소기의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 때는 이미 카이로 선언이 공표된 후인지라, 영·미 연합군측의 한국에 대한 관심의 도가 높아졌으며, 영국 대사관 무관처에서 한국광복군 파견원들의 활동 성과가 큰 것을 알게 된 미군측에서도, 주 중국 미군 총사령부 심리 작전 부문에 광복군 공작원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여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1944년 말, 엄도해(嚴道海)·안원생(安原生)·안병무(安炳武)·진춘호(陳春浩)·안우생(安偶生)·송면수(宋冕秀) 등이 파견되어 주중 미국 대사관 내에 ‘한국인 공작반’이 설치되어 본격적인 정보 공작 활동이 전개하게 되었다. 이 때 한국인 공작반의 임무는 일본 및 한국 본토에서 발간하는 신문·잡지 등 출판물과 전파를 통하여 오는 방송, 그리고 광복군 진영으로 들어 온 신입 대원들로부터의 첩보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 평가하여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특히 공작반의 안우생(安偶生)·송면수(宋冕秀)는 서안 제2지대 본부 현지에 출장하여 전방 공작원 및 새로 들어 온 대원들을 직접 면담하여 많은 첩보를 수집하는데 힘썼으며, 제2지대에서는 이원범(李元範)·박영만(朴英晩) 등이 이 공작에 적극 협력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박 영만도 총사령부 명령으로 한국인 공작반에 전속되었다.
공작반에서 분석·평가된 가치 있는 정보는 곧 OSS(전략 정보처)로 보내지며, 작전상 필요한 정보는 다시 미 공군 부대에 전달되어 작전 행동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미군측은 광복군의 존재 가치를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으며, 우리측은 그들에게 인·면 공작대와 같은 성격의 한·미 공동 작전의 필요성을 부단히 강조하기도 하였다.
즉, 왜적을 때려 눕히기 위해선 한국 사람의 협력이 절대 필요하며, ‘한국 민족은 왜적을 공격할 3천만 개의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표제의 팜플렛을 - 510 - 마련하여 연합국측에 뿌리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왜구가 우리 민족에 가한 가지가지의 죄악상과 이에 항거한 우리 독립 투쟁사를 소개하고 한국의 위치는 중국 대륙과 왜구의 섬을 잇는 교량이다. 이 다리를 끊으면 중국 대륙에 있는 왜적 군졸이 고립될 것이며 왜구 본토도 고립된다. 이 다리를 끊어라! 그러기 위해서는 광복군을 이용하라는 내용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작반 활동에 앞장서서 전면적으로 지지해 준 미국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국 평북 선천(宣川)에서 출생한 미국 선교사 윤산온(尹山溫) 목사의 아들 매큔 소령이었다. 그는 우리의 한·미 합작 관계를 미국에 직접 교섭하려는 열의까지 보여 주었다. 따라서, 한·미 군사 합작 성공의 배후에는 공작반과 함께 매큔 소령의 역할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또, 워싱턴에 주재한 우리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회(歐美外交委員會)에서도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미 국무성 또는 OSS 사령관 도노반(Donovan)장군에게 건의서를 제출하여 광복군과의 공동 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도 있었다.
이렇듯 곤명·중경·미국 등지에서 여러 가지의 계통과 교섭을 거쳐 광복군은 드디어 훈련소를 설치하여 특수 교육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훈련이 끝나면 곧 한국 본토에 투입되어 무전 연락 및 군사 시설의 파괴·쿠데타 감행, 게릴라 작전 등 특수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 공작반은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다가 8.15 해방과 더불어 공작 임무를 마치게 되었다.1)
2. 만주 지구 공작반
1944년 6월, 주화(駐華) 미국 대사관 무관 버드 대령은‘만주에 있는 왜군의 정보를 얻고 싶으니 만주에 갈 공작원을 추천해 달라’는 통고를 미 대사관 한국인 공작반에게 요청해 왔다. 공작반은 마침 노하구 제1 지대 제1 구대에서 중경에 도착한 김근수(金根洙)를 추천하여 만주 지구 공작에 관한 의견서를 작성 미 대사관에 제출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미국 대사관의 초청으로 김근수(金根洙)·유원해(柳原海)·윤원장(尹元章)이 안원생(安原生)·안우생(安偶生) 등의 통역으로 버드 대령과 면담을 통하여 1) 박영만(朴英晩) 지은 ≪광복군≫ 제1부 고난편 p.540~555 - 511 -
만주 파견 첩보 공작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이 때 미국측은 공작비로 약간의 금괴를 주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김근수 등 3명은 만주 파견 공작원의 임명을 받고 임시정부 요원 및 광복군 고급 간부들로부터 20일에 걸쳐 특수 교육을 받았으며, 중국 군사위원회의 각종 증명서를 휴대하고 1944년 8월초 중경을 출발, 파동(巴東)·노하구(老河口)를 경유 남양(南陽)에 도착 후, 금괴 덩어리를 다시 적은 규모로 만들어 각각 분담하였다. 김근수는 허창(許昌)·정주(鄭州)·석가장(石家莊)·북평·심양(瀋陽)으로 유원해·윤원장은 허창·개봉·서주·제남·심양으로 각각 경로를 달리하여 출발, 약속한 9월 어느날 심양 역앞 지정된 장소에서 집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집합한 대원들은 임정 요인들이 소개해 준 인사들을 찾았으나, 거의가 작고한 후였기 때문에 부득이 심양을 거점으로 하여 제1 단계로 애국 동지 포섭에 노력하였으며, 김세원(金世元)·김언수(金彦洙)·고윤원(高允源)·안흥기(安興基)등 수명의 동지를 포섭하고 조직망 구축과 첩보 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다시 김세원을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유하(柳河)를 보내는 한편 김인수·고윤원·안흥기 등을 국내로 침투시켜 국내에도 조직망을 연결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1945년초, 종합된 첩보를 광복군 및 미군 측에 제보하기 위하여 유 원해를 중경에 후송하는 동시 새로운 사명을 받게 하였다. 광복군에 OSS 훈련이 시작된 6월에는 장차 국내 정진대와의 연결과 작전의 새로운 전개를 계획하기 위하여 미국측의 요구에 따라 김근수 등이 중경으로 돌아 왔으며, 미국측과의 새로운 임무를 받은 후 다시 만주로 진출하려다가 8·15 해방으로 인하여 만주 및 국내에 대한 한·미 합작 첩보 공작 활동은 중단되었다.2)
3. 곤명 지구 특파원 공작반
1944년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에 있는 미 제5 공군 사령부 특파원으로 김유철(金裕哲)·조중철(趙重哲) 등을 파견하여 대적 선전 공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중국 공군 부대에서 복무 중인 장성철(張聖哲)·김좌경(金佐卿) 등과
2) 김근수(金根洙) (당시 만주특파공작원) 및 김세원(金世元) 증언
- 512 - 운남(雲南) 비행장에 복무 중인 염온동(廉溫東), 중국 중앙군에 복무하는 김철군(金鐵軍)·유재원(柳在元) 등이 합류 협조하여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대적 선전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주로 적 점령 지구에 살포할 반전(反戰) 비라를 작성하여 미 공군 비행기를 이용하여 중국 각 전선 적진에 투하 살포하였는데, 김유철(金裕哲)이 직접 그린 그림(왜군 시체를 44열차에 실어 가는 그림)에 한국어와 왜말로된 반전 투항을 권유하는 내용의 선전문을 제1차 50만 매를 작성하여 뿌렸으며, 제2차 역시 50만 매를 한·월남·버어마·왜군 등 4개 국어로 된 반전사상 고취와 투항을 권고하는 내용의 전단을 작성하여 중국 전선은 물론 한국 및 월남·버어마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적 점령 지역에 살포하여 심리 작전에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이 무렵 유재원(柳在元)은 제5 공군 사령부에서 비행장으로 연락차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가 교통 사고로 애석하게 순직하였다.
또한 김유철(金裕哲)·김철군(金鐵軍)등은 운남성 변경(邊境)인 버어마 전선에까지 나아가 대적 방송 및 비라 살포 작전 등에 참전하여 그들의 용맹성을 중국군 및 영미 연합군에 보여 주었으며, 광복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해발 2천 5백 미터 산정(山頂)에 설치한 미군 방송국을 이용하여 한국어·버어마어·대만어·왜어 등 각국어로 된 반전사상 고취의 방송을 담당 실시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3)
3) 김승학(金承學) 펴낸 ≪한국독립사≫ 제6부 ≪한국광복군≫ p.305. - 513 -
첫댓글 반특위에서 가져오신 글이군요.
좋은글 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유게시판엔 하루 글 7개 이상 올리면 도배가 되어버립니다.
이 글은 뒤틀린참역사 방으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양해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