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에는 바야흐로 꽃소식이 한창이다. 충무교를 건너자마자 시작되는 미수동 벚꽃길에는 벚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는 중이다.
봉평동 미륵산 북쪽 기슭의 용화사로 오르는 길가에도 벚꽃이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용화사(龍華寺)를 돌아보고 나서 산양일주도로를 따라서 미륵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미래사(彌來寺)로 향한다.
도남동 파도소리펜션에서 바라본 한려해상국립공원
도남동 해안도로는 전망이 매우 좋아서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파도소리펜션 옥상 전망대는 그중에서도 전망이 가장 뛰어나다.
미륵도 동쪽 바다에는 거제도를 비롯해서 방화도, 화도, 한산도가 떠 있다.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화물선과 여객선들이 한가로와 보인다. 펜션 뜨락에는 노란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산양일주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될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산양읍 영운리에서 신전리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서 미래사로 올라가는 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비탈길을 구비구비 돌아서 올라가면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미래사 소유의 이 편백나무 숲은 전국에서 사찰임야로써는 유일한 것이다.
이 편백나무 숲은 70여 년 전 일본인이 조성했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어 일본인이 돌아가자
미래사에서 이 숲을 사들이고 잘 가꾸어 지금처럼 큰 숲이 된 것이다.
미래사 부도전
미래사 입구에 있는 부도전은 동백과 편백나무 숲에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다.
부도전에는 석두 보택(石頭寶澤, 1882~1954), 효봉 학눌(曉峰學訥, 1888~1966), 구산 수련 선사(九山秀蓮禪師, 1910~1983)
등 고승들의 부도와 탑비, 미래사 중창주인 자항당(慈航堂) 종욱 화상(宗旭和尙)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구산 선사의 스승은 효봉 선사이고, 효봉 선사의 스승은 석두 선사이다.
열반에 들어서도 사제간에 정답게 선정에 드신 모습이 숙연하면서도 아름답다. 반배합장으로 예를 올리고 부도전을 떠난다.
불영담
불영담의 돌부처
자항교
작은 연못 불영담(佛影潭)에 놓인 자항교(慈航橋)를 건넌다.
자항교는 자항당 종욱 화상을 기리는 뜻일 게다. 미래사를 품고 있는 미륵산이 잔잔한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연못가 초막에 안치한 작은 돌부처의 그림자도 물속에 잠겨 있다.
'불영'이란 '부처님의 그림자'이니 불영담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저절로 드러난다.
부처님의 자비심이 그림자로 연못을 늘 비추고 있으니 이곳에 사는 수생 중생들은 얼마나 행복하리오!
미래사 삼회도인문
매화
'미륵불이 오실 도량'인 미래사 삼회도인문(三會度人門)으로 들어선다.
삼회도인문 앞 담장에는 매화가 활짝 피었다. 사천왕문격인 삼회도인문 정면에는 '彌來寺' 편액,
안쪽 정면에는 '三會度人門' 편액이 걸려 있다. 회랑 양쪽 벽면에는 사천왕상 대신 사천왕탱화를 봉안하였다.
'삼회도인'이란 미래에 오실 미륵불이 '삼회에 걸쳐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문은 미륵불 도량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미륵산 용화사와 미래사, 관음사, 도솔암 스님들은 미륵불이 하생한 뒤 삼차에 걸쳐 설법할 자리로
모악산 금산사, 속리산 법주사에 이어 미륵산 용화사나 미래사가 될 것으로 믿고 있다.
미래사는 원래 효봉 선사의 상수제자(上首弟子)였던 구산 선사가 석두, 효봉 두 스승의 안거(安居)를 위해 1954년에 세운 암자였다.
이 절은 주로 효봉 선사의 문도들이 주지를 역임하면서 사세를 중흥시킨 선도량(禪道場)으로 효봉문중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미래사의 주지를 역임한 스님은 구산, 미산(彌山), 보성(菩成), 법흥(法興) 선사, 종욱 화상, 여진 스님 등이다.
일각, 원명 스님도 이 절에 머물렀으며, 법정(法頂) 스님도 이곳에서 출가했다.
동국대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월간 법륜을 발행하는 등 불교운동을 펼쳤던 박완일 교수도 이곳에서 출가했다.
산내에는 효봉 선사가 만년에 주석했던 효봉암과 동암(東庵)이 있어 수도하는 스님들이 항상 머물고 있으며,
효봉암 뒤에는 석조미륵불상을 조성하여 불자들이 참배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미래사 대웅전과 적광탑
대웅전의 석가모니삼존불상
대웅전의 신장상
삼회도인문 안으로 들어서니 안마당(중정)을 중심으로 정면에 대웅전(大雄殿), 동쪽과 서쪽에
요사채인 설매당(雪梅堂)과 선원(禪院)인 자항선원(慈航禪院)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삼층 석탑인 적광탑(寂光塔)이 세워져 있다.
대웅전의 서쪽에는 큰스님들의 진영을 모신 도솔영당(兜率影堂)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도 한다.
대웅전에는 대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봉안 한다.
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관세음보살과 미륵보살(彌勒菩薩)을 협시보살로 모시기도 한다.
석가모니불은 대웅전 외에도 응진전이나 나한전, 영산전, 팔상전에도 주불로 봉안된다.
대웅전보다 격이 높은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신다.
또 삼세불(三世佛-석가모니불, 미륵보살, 갈라보살)과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기도 한다.
삼신불은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보신(報身)인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을 말한다.
한국의 대웅전에는 보통 선종의 삼신설을 따라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盧舍那佛),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석가모니삼존불(釋迦牟尼三尊佛) 전에 반배합장으로 예를 올린다.
석가모니본존불의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보살로 모셔져 있다.
대웅전 동쪽의 불단에는 신장상(神將像)이 모셔져 있고, 그 뒤에는 신장탱화가 걸려 있다.
대웅전 앞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적광탑에는 티베트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미래사 대웅전과 도솔영당
도솔영당의 백하 청민, 용악 혜견, 백운 보홍 선사 진영
도솔영당의 효봉 학눌, 석두 보택, 구산 수련 선사 진영
도솔영당의 화봉 유엽, 향봉 향눌, 계봉 암우 선사의 진영
대웅전을 나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인 도솔영당으로 들어가 큰스님들의 진영 앞에서 반배합장의 예를 올린다.
세의 고승대덕 큰스님들이 여기 다 모여 계신다. 오른쪽부터 차례로 백하 청민(白荷晴旻), 용악 혜견(龍嶽慧堅, 1830~1908),
백운 보홍(白雲寶洪), 효봉 학눌, 석두 보택, 구산 수련, 화봉 유엽(華峰柳葉), 향봉 향눌(香峰香訥, 1901~1983),
계봉 암우(溪峰巖雨) 선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진영을 통해서 용악 선사로부터 석두 선사를 거쳐 계봉 선사로
그 선맥이 이어져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매우 겸손한 성품의 용악 선사는 오랫동안 하루 한끼만 먹는 수행을 하면서 평생 금강경을 독송하다가 입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백하, 백운 두 선사는 용악 선사의 제자들이다. 백하 선사에게 출가하여 보택이란 법명을 받은 석두 선사는 평소 설법을 할
때 달마조사송(達磨祖師頌)을 즐겨 인용하였다.
財色不忘莫聞道 재색불망막문도 貢高自是體參禪 공고자시체참선 煩惱斷盡生死斷 번뇌단진생사단 更無別法與人傳 갱무별법여인전
재물과 색을 버리지 못하면 도를 묻지 말고 내 잘난 생각을 가진 채 참선을 하지 말라 번뇌망상 끊어지면 생사 또한 끊어지는 것 이밖에 또 다른 법은 일러줄 것이 없노라.
석두 선사와 상좌인 효봉 선사의 나이는 불과 6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효봉 선사의 나이가 더 들어 보여서 손님이 찾아와 인사를 할 때 석두 선사보다
효봉 선사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데..... 그래도 석두, 효봉 두 선사는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고 한다.
석두 선사가 71세 되던 해인 1952년에 병이 들어 몸이 불편하게 되자
효봉 선사는 스승을 위해 통영 미래사로 주석처를 옮겨 극진하게 간병했다.
1954년 4월25일 오후 8시30분 석두 선사는 세수 73세, 법납 57세로 열반에 들었다.
석두 선사로부터 효봉, 향봉, 화봉, 계봉 선사를 비롯해서 해봉 석정(海峰石鼎),
석봉 인선(石峰仁善), 은봉 원광(隱峰圓光) 선사 등 뛰어난 제자들이 나왔다.
출가하기 전 효봉 선사는 일제시대 조선인 최초의 판사였다. 1923년 한 피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그가 사형을 당한 후에 진범이 잡혔다. 이에 선사는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이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껴 판사직을 내던지고 엿판 하나만을 든 채 참회와 고행의 방랑길에 올랐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당시 금강산 도인이라 불리던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의 석두 선사에게 출가한
효봉 선사는 한번 앉으면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하여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토굴속에서 용맹정진하였다.
1931년 선사는 마침내 득도하여 토굴벽을 깨고 나와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올리자 석두 선사는 오도를 인가하였고,
1936년에는 한암(漢巖), 만공(滿空) 두 고승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海底燕巢鹿抱卵 해저연소록포란 火中蛛室魚煎茶 화중주실어전차 此家消息誰能識 차가소식수능식 白雲西飛月東走 백운서비월동주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리오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효봉 선사 오도송)
효봉 선사는 1937년부터 10년간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 주석하면서 후학들에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의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확고한 구도관을 열어주었으며, 이때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효봉 선사는 제자들에게 설법할 때 항상 계(戒), 정, 혜, 삼학(三學)을 설했다.
삼학이란 보조국사의 정혜쌍수를 바탕으로 하고 계를 더 보탠 것이다. 이처럼 선사는 보조국사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선사의 법명 학눌(學訥)도 바로 '지눌을 배운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1946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고,
1950년에는 부산 동래의 금어선원(金魚禪院)으로 옮겼으며, 1951년부터는 통영 미륵산 용화사 도솔암(兜率庵)에 머물렀다.
1954년 구산 선사가 미륵산 남쪽 기슭에 창건한 미래사에 주석하던 중 일어난 불교계의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을
지도하기 위해 서울 선학원(禪學院)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미래사로 내려왔다.
1956년 조계종의 의결기구인 종회(宗會) 의장, 1957년 종무원장을 역임한 효봉 선사는 1958년 조계종 종정에 추대된 뒤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 머물렀다. 1962년 4월 11일 조계종과 태고종 통합종단 초대 종정에 추대된 뒤에는 미래사에 주석하였다.
노환으로 건강이 나빠지자 치료차 동화사로 자리를 옮겨 머물면서 수행승들을 지도하였다.
1966년 5월에는 다시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10월 15일 정좌한 채 입적하였다.
다비(茶毘)를 하자 사리 50여 과와 정골이 많이 나와 송광사와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 선사가
머물렀던 사찰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吾說一切法 都是早騈拇 오설일체법 도시조변무 若問今日事 月印於千江 약문금일사 월인어천강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건 모두 군더더기 오늘 일 묻는가 달이 천강에 비치니라.
(효봉 선사 열반송)
효봉 선사는 좌탈입망하는 그 순간까지 '무(無)라..... 무라.....' 하였는데, 이는 선사가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라는
화두를 평생의 수행도구로 삼은 본분납자(本分納子)였음을 말해준다.
평소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제자들을 엄하게 가르치기로 소문난 선사의 문하에서는 조계종의 수행승들을 지도하는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이른바 효봉문중이라는 것이다. 선사의 제자로는 구산 선사를 비롯해서
법정 스님 등이 있고, 환속한 제자에는 고은 시인과 동국대 박완일(일관) 교수가 있다.
일초라는 법명으로 미래사 원주 소임을 맡아보던 시인 고은은 스님이 될 자질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효봉 선사는 이제 갓 들어온 행자를 법정이라 부른 반면에 일초 스님에게는 법치(法痴)라는 별명으로 부르면서
'법치는 중노릇 못하고 곧 환속할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효봉 선사의 예언대로
일초 스님은 결국 환속하여 시인이 되었다.
구산 선사는 1937년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1938년 사월 초파일에 5계를 받았고,
1940년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해담(海曇) 화상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뒤 통도사 백련암(白蓮庵)에서 정진하였다.
1946년 해인사에 효봉 선사를 방장으로 한 가야총림이 개설되자 도감(都監)의 소임을 맡았다.
6.25 전쟁으로 가야총림이 흩어진 뒤 진주 응석사에서 정진하던 중 1951년 정월 효봉 선사에게 오도송을 지어 보내고
스승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았다.
深入普賢毛孔裡 심입보현모공리 促敗文殊大地閑 착패문수대지한 冬至陽生松自綠 동지양생송자록 石人駕鶴過靑山 석인가학과청산
보현의 털구멍 속으로 깊이 들어가 문수를 붙잡으니 대지가 한가롭구나 동짓날에 소나무가 저절로 푸르르니 돌사람이 학을 타고 청산을 지나가네
(구산 선사 오도송)
구산 선사는 한결같이 '이 뭐꼬?(是甚麽)' 화두로써 법문을 삼았고, 많은 필적을 남겨 대중들의 불연을 깊게 하였다.
또한 45년동안 '일수좌'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항상 정진하면서 가는 곳마다 절을 짓고 고치는 등 가람수호에도 힘썼다.
선사는 특히 해외포교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1972년에는 운허(耘虛) 화상과 함께 미국 카멜(Camel)의 삼보사(三寶寺) 개원식에 참석하고,
이듬해 미국인 제자 현조(玄照)와 귀국하여 송광사에 국제선원(國際禪院)을 개원하였다.
1976년에는 외국인을 위한 법문을 모아 영역본 '나인 마운틴즈(Nine Mountains)'를 출간하여 해외에 널리 소개하였다.
1979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고려사(高麗寺), 1982년에는 제네바에 불승사(佛乘寺),
10월에는 카멜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원하였다.
1983년 병이 들자 구산 선사는 '내 몸에 주사하지 말 것, 좌선의 자세로 열반할 것이니 좌관을 사용하고 좌장을 해줄 것,
화합 단결하여 선풍(禪風)에 누를 끼치지 말 것, 자신을 속이는 중노릇을 하지 말고 실답게 수행에 임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12월 16일 입적하였다. 다비를 한 뒤 나온 53과의 사리는 삼일암에 탑을 세워 안치하였다.
滿山霜葉紅於二月花 만산홍엽홍어2월화 物物頭頭大機全彰 물물두두대기전창 生也空兮死也空 생야공혜사야공 能仁海印三昧中微笑而逝 능인해인삼매중미소이서
온 산의 단풍이 봄꽃보다 더 붉으니 삼라만상 큰 기틀 모두 드러났도다 삶도 空이요 죽음 또한 空하니 부처님 海印三昧 속에 미소 띠며 가노라.
(구산 선사 열반송)
효봉 선사의 사제(師弟)로 평생을 좌선정진(坐禪精進)으로 일관한 향봉 선사는 재가 불자 시절
덕숭산 금선대에서 주석하던 당대의 고승 만공(滿空) 선사와 인연을 맺었다.
그 몇 년 뒤 선사는 1940년 송광사에서 석두 선사를 은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았다.
향눌, 향봉이란 법명과 법호도 은사인 석두 선사로부터 받은 것이다.
1942년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東山) 선사를 계사로 보살계와 구족계를 받은 선사는 금강산으로
떠나 효봉 선사가 거쳐간 마하연선원(摩訶衍禪院)에서 세차례 하안거를 지내며 일심으로 정진했다.
선사는 정진하는 틈틈이 만행(卍行)을 떠나 북한의 명승고적을 순례했다. 시화에도 능했던 선사는 만행을
통해 부처님을 모신 도량을 참배하고 중생들을 만나면서 금강산의 만폭등과 비로봉, 구룡폭포, 삼선암,
총석정 등 북한의 명승지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이후 선사는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 선사 회상(會上), 오대산 상원사 선원에서 한암(漢岩) 선사 회상에서 정진한 뒤,
금정산 금어선원(金魚禪院)을 비롯해 도봉산 망월사와 미륵산 용화사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었다.
1954년부터 선사는 상좌인 청월(淸月) 스님이 강릉의 만월산 백운동 옛절터에
세운 백운사(白雲寺)에서 20여 년간 주석하였다. 1977년 선사는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구산 선사의 권유로
출가본사인 송광사로 돌아와 임경당(臨鏡堂)에 머물렀다.
'선(禪)은 내 생애의 전부였다.'고 할 정도로 선사는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인 간화선(看話禪)을 참구하였다.
그러면서도 '계행(戒行)이 없으면 스님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 계를 지켜야 함도 중요시했다.
선사는 부처님 법문 중의 '거문고를 탈 땐 줄이 너무 늘어져서도 안 되고 너무 조여서도 소리가 고르지 않는 법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선 중도(中道)가 제일이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수행에 있어서 중도를 강조하였다.
만년에 선사는 서울 법련사로 올라와 머물다가 1983년 5월31일 세수 83세, 법랍 4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산골(散骨)은 선사가 주석했던 만월산 백운사에서 했다. 선사의 제자로는 성호(性浩) 스님을 비롯해서 청현(淸賢),
청우(淸宇), 청욱(淸旭), 청은(淸恩), 철형(哲亨), 철우(哲牛), 청전(淸典), 청학(淸鶴) 스님 등이 있다.
명호에 두 번이나 들어 있는 '향'자처럼 선사는 대중들에게 깨달음의 향기를 전해주는 스님이었으며,
한평생 단 세 벌의 옷과 한 벌의 발우만 가지고 수도에 정진한 본분납자였다. 한 마디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삶이었다.
송광사 경내에 있는 선사의 비석에 새겨진 게송에서도 그러한 풍모가 잘 나타나 있다.
白雲洞口淸溪響 백운동구청계향
滿月山頭晏日遲 만월산두안일지
萬有從容眞理說 만유종용진리설
云何贅論更加之 운하췌론경가지
백운동구에 물소리 맑게 울리고
만월산 산마루에 걸린 해 한가하도다.
삼라만상 소리 없이 진리를 설하는데
군더더기 더해서 무엇하리오.
화봉 선사는 신계사의 석두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석두 하 삼봉(효봉, 화봉, 금봉 선사)'이라
불릴 정도로 법력이 높은 스님이었다. 양주동 박사는 화봉 선사를 일컬어 '색계를 거닐며
공을 외치던 당대의 걸승'이라고 말한 바 있다.
효봉 선사의 사제이자 법정 스님의 사숙인 계봉 선사는 효심이 깊은 스님으로 유명하다.
석두 선사가 노환이 들어 효봉 선사의 주선으로 미륵산 미래사로 거처를 옮겨 머물고 있을 때,
상좌인 계봉 선사는 스승의 대변을 맛보고 병세의 차도를 살폈을 만큼 효심이 깊었다.
선사는 죽을 때 다른 사람에게 신세지는 것이 싫어서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법정 스님은 전한다.
그리하여 선사는 자신의 육신조차 수생 중생들에게 보시하였던 것이다. 입적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져
불고기 밥이 되게 했던 선사의 뜻이 거룩하다.
한쪽 벽에는 미래사 중창주 자항당 종욱 화상의 사진이 따로 모셔져 있다.
종욱 스님은 1985년 낡은 대웅전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웅장한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이어 조사전(祖師殿, 1987), 삼층석탑인 적광탑(1988), 요사 2채와 삼회도인문(1989), 범종각(1994) 등을 차례로 세웠다.
그리하여 미래사는 구산 선사가 창건한 당시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중창되었다.
또한 종욱 스님은 사찰 인근에 차밭(茶園)을 조성하여 다도(茶道) 보급에도 앞장섰으며,
1986년에는 통영시 당동에 포교원인 여여원(如如院)을 설치하여 청소년과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통영의 불교
발전에 이바지하다가 1996년에 입적하였다.
일세를 풍미했던 대선사들의 진영을 뵙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깨달음이다.
대선사들이 남기신 오도송이나 열반송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죽비가 되어 날아든다.
자항선원과 도솔영당
설매당과 황매실
범종루
범종루 편액
동안거가 끝난 자항선원 섬돌에는 스님들의 신발도 보이지 않고 고요만이 감돈다.
스님들의 요사채인 설매당 마루에는 따뜻한 봄볕이 가득하다. 설매당 한쪽 방에는
황매실(黃梅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설매당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황매실 앞 마루에 내놓은 여러 개의 화분에는 예쁜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慈航禪院'과 '雪梅堂' 편액 글씨는 구산 선사의 필적이다.
석사자(石獅子)와 타우자(打牛子)는 구산 선사의 관지(款識)다.
석사자는 바늘로 살을 찔러도 도리어 바늘이 부러질 정도로 굳건하면서도
사자처럼 용맹스런 선승의 기개를 나타낸 이름이고, 타우자는 보조국사의 별호인 '
목우자(牧牛子)'를 본받은 것이다.
이름을 통해서도 효봉 문중이 보조국사의 선풍을 이어받고 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자항선원의 남쪽에 있는 범종각(梵鐘閣)으로 발길을 돌린다.
범종각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십자팔작누각(十字八作樓閣)으로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갑자기 이 종각을 누가 설계하고 건축했는지 궁금해진다.
설매당의 남쪽에 있는 우물인 불유정(佛乳井)의 물을 떠서 목을 축인다. '부처님의 젖'이라서 그런지 달고도 시원하다.
효봉암 석조미륵불상
빽빽하게 들어찬 편백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서 내려가면 효봉암 미륵불상을 만난다.
석조미륵불상은 효봉암 바로 뒤 전망이 탁 트인 곳에서 남해 바다를 지긋이 내려다 보는 자세로 서 있다.
미륵부처님 전에 반배합장으로 예를 올리고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메시아로 강림하시기를 발원한다.
미륵불상의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시무외인은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위로 뻗치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손의 형태로,
부처가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포외(怖畏)에서 떠나게 하고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대자대비의 덕을 보이는 수인이다.
여원인은 손가락을 펴서 밑으로 향하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손 전체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손의 형태로,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하는 대자대비한 부처의 덕을 표시한 수인이다.
여원인과 시무외인을 동시에 취하는 손모양을 통인(通印)이라고 하는데, 통상 미륵불의 수인이라고 한다.
미륵불상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불상들은 불상의 종류에 관계없이 거의 다 통인을 취하고 있다.
석가모니불 입상(立像)의 경우에도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이다.
달아공원에서 바라본 한려해상국립공원
미래사를 떠나 동백나무 가로수로 인해 동백로라고도 부르는 산양일주도로를 따라가면서
아름다운 다도해의 경치를 감상한다.
바다를 끼고 가다가 산 하나를 넘어서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서 내려가면 아담한 작은 항구인 달아항이 나온다.
달아항은 미륵도 해안을 일주하는 23km의 산양일주도로 중간쯤에 있다. 달아항에서 언덕길을 올라서면 달아공원이다.
미륵도 남단에 자리잡은 달아공원 전망대에서 남해 바다를 바라본다. 잔잔한 바다에는 쑥섬과 곤리도, 소장두도,
대장두도, 가마섬, 추도, 두미도, 저도, 송도, 학림도, 연대도 등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달아'라는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코끼리 어금니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이곳이 달구경하기 좋은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공원의 언덕 정상에 있는 관해정(觀海亭)에 오르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남해 바다의 일몰이 장관이다.
해는 어느덧 서녘 하늘에 저만치 기울어져 있다. 바다에 비친 햇빛이 마치 금비단을 깔아놓은 듯 하다.
월인어천강이로다!
_()_ 南無觀世音菩薩 / Y-Club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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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집니다.....미래사에서 며칠 묵으며 기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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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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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드디어 빛을 발하는 울 솔방장님... 감사합니다. 젤 밑에 시계.. 저 들고 가고 시포요
참,,,, 저 원조 혜심경임돠~ 법명을 새로 받읐쓰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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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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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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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처럼 상세하네요.. 가 본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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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상 하게도 설명 해 놓으셨네요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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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한 설명과겯들여 좋은 노래 까지...법정스님 고은시인 박완일교수님 효봉스님... 많이 배우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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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가면 가끔 묵는곳이 파도소리펜션인데...전망도 산책길도 아주 좋은 그 곳...미래사의 정보...달아공원...반갑습니다...편히 쉬러 자주가는 곳이라 더 정감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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